대양함대 자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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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양함대 자침
제1차 세계 대전 후처리의 일부
SMS Bayern sinking.jpg
교전국
Naval Ensign of the United Kingdom.svg
영국 왕립해군
War Ensign of Germany (1903-1918).svg
독일 제국해군
지휘관
시드니 프레멘틀 루트비히 폰 로이터
병력
제1전투전대 대양함대
피해 규모
없음 함대 완파, 9명 사망, 16명 부상
Internment at Scapa Flow.svg

독일 대양함대 자침(-大洋艦隊自沈, 독일어: Selbstversenkung der Kaiserlichen Hochseeflotte)은 1919년 6월 21일 영국 해군의 정박지인 스캐퍼플로에서 독일 대양함대가 집단으로 자침한 사건이다.

독일 함대의 스캐퍼플로 집결[편집]

제1차 세계 대전 휴전 후 독일은 휘하의 모든 잠수함과 약 74척에 달하는 수상함정들의 운명은 연합국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 하게 되었다. 독일은 자신들이 개발한 기술이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모든 어뢰정과 잠수함들은 기뢰를 이용해 침몰시킨 후 남은 전함들을 1918년 11월 19일 영국이 지시한 무장해제를 위해 영국의 군항으로 이동시켰다.

74척의 독일 함대는 포스(Forth)만에서 11월 21일 영국의 데이비드 비티 제독이 이끄는 250척에 달하는 연합군 함대를 만나게 되고 영국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검사받은 후 영국해군의 정박지인 스캐퍼플로로 인도한다. 그들은 11월 27일에 스캐퍼플로에 모두 입항하게 된다.

12월 중순까지 스캐퍼플로의 독일함정의 독일 해군의 수는 2만명에 달하였으나. 영국은 독일의 돌발적 행동을 우려하여 4800명만을 함정 관리를 위해 남기고 모두 상륙시켜 수용소로 보냈고 1919년 6월에는 독일함정 탐승인원을 1700명까지 줄였다.

이 기간 동안 베르사유에서 진행 중이던 평화 회담은 각국의 함정 분배 문제로 질질끌고 있었다. 연합국들(특히 미국과 프랑스)은 독일의 이 최신 함정들을 한척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애썼는데 이들은 앞으로 라이벌이 될 영국의 해군력을 따라잡기 위해 독일의 최신 함정을 자국으로 유치하려 한 것이었다.

독일 대양함대, 자침하다[편집]

이 동안 독일 함대 사령관 루드비히 폰 로이테(Ludwig von Reute)제독은 영국이 언제 경고없이 포격을 가해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모든 함선들에 대해 자침을 준비해 놓으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6월 21일 영국의 전함들은 훈련을 위해 스캐퍼플로항을 떠났고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로이테 제독은 휘하의 모든 함정들에 대해 자침을 결정한다.

낮 10시 30분 그는 "제11호 작전 허가"라는 무선을 보낸다. 이 신호는 사전에 약속된 자침을 의미하는 암호였고, 독일 대양함대 소속 군함들은 차례로 폭파되었다.

영국 함대들이 이 소식을 듣고 전속력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은 단지 전함 바덴호와 3척의 순양함만을 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9명의 독일 선원들이 영국군의 사격에 전사한다. 이 전사자들은 제 1차 세계 대전 중 가장 마지막 전사자들로 기록된다.

그 이후[편집]

40만톤 이상의 함정들이 침몰했다. 영국은 공식적으로는 분개했으나, 사실 이 일로 인해 복잡했던 독일 함선 분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영국의 라이벌들(프랑스,미국)은 분배할 함정이 없어졌기 때문에, 독일의 함정들을 충분히 분배 받지 못하게 되었다.

영국 정보부는 이 자침결정이 베를린 정부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수사를 벌였지만 어떠한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독일 해군의 기억 속에 치욕과 수치로 남아 있게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 사건에 대한 복수로 칼 되니츠 제독의 지시로 독일군 잠수함 U-47스캐퍼플로 기습공격을 감행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