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종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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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종(眞宗, 1719년 ~ 1728년)은 영조의 큰 아들로, 이름은 이행(李緈), 자는 성경(聖敬)이며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조선의 왕세자이며 추존왕이다. 효장세자(孝章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양자 정조가 즉위하면서 진종온량예명철문효장대왕(眞宗溫良睿明哲文孝章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각민왕(恪愍王)이며 대한제국 때 황제로 추존되어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가 되었다.

1724년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지고 부왕 즉위 후 1725년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0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숙종의 첫 손자이자, 그의 생전에 태어난 유일한 손자이기도 하다.

생애

1719년 2월 15일 영조정빈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사후에 태어나는 사도세자는 그의 이복 동생이었다.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상 중에 잉태되어 태어난 탓인지 영조의 장남이자 숙종의 첫 손자임에도 불구하고 숙종실록과 경종실록에 존재가 기록되지 않았다. 영조 즉위년인 1724년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으며 다음 해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726년 조문명의 딸 효순왕후와 가례를 올렸다. 1728년 11월 16일 창경궁 진수당에서 훙서하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날 당시 그의 아버지 영조의 보령은 35세였다. 영조는 친히 그의 임종을 지켰다 하는데, 그는 병석에 누워서도 마지막까지 효를 다하고 가지 못함을 애통해하였다 한다.

1729년 3월 9일, 순정 등 궁녀 여럿이 세자와 옹주들에게 독을 쓰고 저주했던 사실이 발각되어 영조의 친국을 받고 처참되었다.[1]

사후

1728년 12월 2일, 당상관들이 회의하여 시호(諡號)로 장효(莊孝), 효장(孝章), 장헌(章獻) 셋을 추천했고[2], 영조는 모든 행동 중에서 효가 으뜸이라는 점을 들어 '효장'을 골랐다. 이후 효장세자로 불리다가, 훗날 영조에 의해 이복동생 사도세자가 폐서인되면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양자로 입적된 후 정조가 즉위하면서 영조의 유지에 따르는 방식으로 진종(眞宗)에 추존되었다.

청나라에서는 각민왕(恪愍王)의 시호를 내렸으며, '온량예명철문'(眞宗溫良睿明哲文)의 시호가 추가되어 진종온량예명철문효장대왕(眞宗溫良睿明哲文孝章大王)이 되었다. 1908년, 대한제국 순종에 의해 소황제(昭皇帝)로 추존되었다.

능묘

1728년 11월 16일 효장세자가 10살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자, 영조는 그해 1728년 12월 2일 효장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조 5년 1729년 1월 26일 현재의 위치인 순릉 왼쪽 산언덕 영릉(永陵)에 예장했다.

세자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던 효순왕후는 세자의 사후 현빈으로 봉해졌다가 영조 27년 1751년 11월 14일 창덕궁 건극당에서 소생없이 3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으며, 이듬해인 1752년 1월 22일 효장세자의 묘 왼쪽에 안장되었다.

가족관계

같이 보기

주석

  1. 영조실록 6년(1730 경술 / 청 옹정(雍正) 8년) 3월 9일(정축) 2번째기사
  2. 저마다 정치(政治)의 실리(實利)를 저군(儲君)의 덕행(德行)을 유자(儒者)의 흠모(欽慕)를 나타내었다고 추정되는데 이는 사헌부 홍문관 사간원에 해당한다

틀:조선의 군주와 대한제국의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