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박정희/보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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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문서를 통해 독자 연구를 전개하는 행위

토론 문서를 통해 독자 연구를 전개하는 행위가 빈번하게 있는 것 같습니다. 토론 문서는 문서에 대해 토론하는 공간이지 근거없는 내용을 함부로 적는 곳은 아닙니다. 또 다른 곳의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그대로 붙여 놓는 행위도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토론에 참여하시는 모든 분들의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이전 토론 문서의 역사를 참고하여 특정판 삭제를 해야 하는것은 아닌지 우려도 됩니다. --이니그마7 (토론하기) 2009년 7월 5일 (일) 00:11 (KST)답변

박정희 종교가? 개신교?

박정희 종교가 어떻게 개신교인겁니까? 불교죠.. 황당하네요.. 엔샷 (토론) 2009년 7월 23일 (목) 14:53 (KST)답변

저도 불교로 보입니다.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58 참고로 기독교 신문입니다... --yhpdoit (토론) 2009년 10월 10일 (토) 03:38 (KST)답변

좀 더 검색결과 박정희 공식 종교는 불교입니다. 직접링크는 불가능하고요,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http://www.pa.go.kr/index.jsp) 역대대통령에 가보시면 나와있습니다. 개신교 수정은 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yhpdoit (토론) 2009년 10월 10일 (토) 04:09 (KST)답변

서거 혹은 급서

노무현때 토론과 마찬가지로 '서거'는 비중립적인 높임 표현이므로 적지 않았으면 합니다. adidas (토론) 2009년 8월 5일 (수) 20:03 (KST)답변

긴급 의견 요청

현재 문서에 문제점이 상당히 많습니다. 하나의 출처를 가지고 수십개의 주석을 달아놓는가 하면,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이 상당히 많이 분포하고 있는 듯합니다. 또 거의 일주일에 수십 번씩 충돌이 발생하니, 이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의견을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RedMosQ (토론) 2009년 8월 10일 (월) 14:53 (KST)답변

출처를 중요시 한다면서

비방하는 내용은 출처가 없어도 막 올라 올 수 있다는 것은 이중잣대가 아닌가요? 조선, 동아, 한겨레 등은 상당히 한쪽으로 치우쳐졌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내용이 많기 때문에(특히 한겨레측의 내용은 더욱 신뢰할 수 없음.) 예를 들면 조선일보에서 박정희를 개신교라고 왜곡하고, 한겨레에서 전두환을 불교라고 왜곡하는 부분 등 큰 신문사라 해도 잘못 된 내용이 매우 많음.(실제 전두환은 개신교 신자임.)

그리고 개신교 신자들이 자꾸 박정희 대통령의 종교를 근거도 없이 개신교로 자꾸 고치는데 그건 근거도 없는데 관리자가 왜 방조합니까? 이런다고 내가 인신공격한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근거 없는 낭설들을 그대로 실으며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중립성과 사실성이 0에 가까운 글들이 그대로 실려 중립성을 완전히 훼손하고 있음에도 불과하고 관리자는 의도적으로 방치하며 관리자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이 달리면 무조건적으로 트집을 잡아 삭제시킴. 박정희 대통령이 개신교라는 근거도 기독 민주당빠들에게는 제시되지 않고, 박정희 대통령이 민주화를 탄압했다는 근거도 전혀 없으며, 증거가 불충분한 몇몇 만화에서 나온 얘기들을 사실인척 그대로 위키에 게시하여 노골적으로 한 인물을 매도, 비하하는 장으로 변질시킴. 술잔을 집어던졌다는 얘기 등은 대표적인 매도, 폄하용 만화 스토리.

인신공격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육두문자가 들어있나?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211.117.177.161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2009년 8월 10일 (월) 15:59 (KST)답변

조중동이건 한겨레건 명백히 잘못된 사실이 아니라면 문제 없습니다. 해당 언론사가 명백한 잘못을 실었다면 그 역시 '출처'에 입각해서 반박하시면 됩니다. 박정희가 개신교인지는 모르겠으나 민주화를 탄압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김영삼, 김대중이 박정희 때 어떤 일들을 당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adidas (토론) 2009년 8월 10일 (월) 22:19 (KST)답변


사상

박정희는 소학교 당시 기독교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동급생이었던 한성도에 따르면 "박정희와 저는 처음에 유년 주일학교에 나왔다. 구미 보통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교회에도 나가게 되었다. 일요일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 하는 주일학교에 열심이었다. 소년들이 막 코흘리 개의 때를 벗을 무렵 성경책과 찬송가를 들고 한복차림으로 교회에 모여들던 시절이다. 우리가 제일 먼저 배운 것이 기도하는 법이었지요" 라고 하였다. 박정희는 사회주의 활동도 하였다. 1962년 6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최고위원들과 함께 김포로 가서 모심기를 할때, 논두렁에 앉아 쉬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말했다. 한 기자가 기독교에 귀의할 것을 권유하였으나[1] 나는 원래가 유신론자입니다. 하늘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내려주시고 게으르게 앉아서 놀기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안주시는 것이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한 일도 있었다.[1] [1]


1972년 지폐 도안을 놓고 기독교 등 종교계와 갈등하기도 했다. 만원권 지폐가 처음 도안됐는데 한국은행에서는 만원의 주인공으로 석굴암의 불상(앞면), 뒷면이 불국사로 정하였고, 박정희의 친필 서명까지 하였다. 새로 발행된 만원은 그의 재가를 얻어 발행공고까지 냈다. 그러나 기독교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여론에서도 특정 종교를 두둔할 수 없다며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자 만원권의 주인공은 세종대왕으로 교체되었다.[2][3][4]

공산주의 활동

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쿠데타 직후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이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한다.[5] 당시 5·16 쿠데타가 일어날 무렵 북한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4·19 혁명 이후 북한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들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보았다.[6]

한국의 군사 정권에 좌익과 공산주의 성향을 내포한 자들이 많은 것은 일제 말기의 농촌 상황과 도시 영향력에 기인한다. 당시 한국에는 지주제도가 확산되었고 지주제도는 통상 총독부와 관련이 깊었다. 대도시, 특히 대구와 서울에서는 교사 등의 지식인들이 정부를 비난하거나 내심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일본인과 한국인 교수들 사이에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은 컸다. 박정희와 그의 형제들은 대구 근방의 기차 정거장인 구미 근처에 사는 소작농의 아들이었다. 김종필과 여섯형제는 대전 인근의 부여 근처에 사는 중간 규모 지주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김종필의 부모는 김종필이 어릴 때 재산의 대부분을 탕진했다. 두 사람은 총명했으며, 그들은 개인적인 상황이나 국가적인 상황을 절망적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개인과 국가의 진로를 폭력적인 견지에서 보았을 것이다. [7]

박정희는 일찌기 대구에 있는 사범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 박정희를 가르쳤던 교사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은 현재 북한에 살고 있는 전 북한 외교 통상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에 그와의 접촉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일본과 사회적 질서에 대한 학생들의 분위기는 적대적이었다. 한국에서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시절에 가장 절친한 교우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왕학수와 황용주 같은 박정희의 급우나 김종필의 친구들이 지금 박-김 정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7]

박정희는 1937년에 대구 보통 학교를 졸업했지만, 만주 군관학교에 들어간 것은 1940년의 일이었다. 그가 3년 동안의 공백기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는지, 좌익 책자를 읽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 군관학교의 동기 세 명이 나중에 쿠데타에 동참했다. 박정희는 5백명의 동기 가운데 성적 최상위자로 선발되어 자마에 있는 일본 사관학교 제57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박정희가 사관학교를 다니던 2년 동안 좌익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좌익분자나 공산주의자들이 되었다. 이들 가운데 9명은 박정희의 후배로, 동양적인 제도에서는 특히 그의 영향을 받게끔 되어 있었다. 이들 후배들 가운데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훗날 박정희가 지휘한 공산주의 음모에 개입하게 되었다. 한국 사관학교 교관들로 그와 공모했던 사람들 가운데 7명은 그 결과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와 그의 동기생들 사이에 좌익 영향의 징후는 생도 시절에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도쿄에서 2년제, 혹은 4년제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 가운데 소수의 엘리트가 박정희와 더불어 좌익으로 돌아섰다. [7]

광복 후에는 사회주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형 박상희의 죽음이라는 견해와 박상희의 죽음 이전에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감행했던 것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사건(1947~48년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지도했으며.[7], 광복 직후 남조선노동당에서 활동하다 여수-순천 반란을 꾸미다가 적발되어 일시적으로 직급박탈을 당하였다가 복귀하기도 하였고 그 뒤 전향을 하였다고 하나 정부로부터 진실된 전향인지 의심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은 박정희의 남로당 행적에 관해여 그의 사상을 의심하기도 하였으며 제5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에게 사상공세를 당하기도 했다.[5]

한국 군사 정부의 핵심 세력이 과거 좌익분자나 공산주의자였고 혹은 대규모 정부전복 기도에 참가했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박 의장 본인은 공산주의자들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감행했던 것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1947~48년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의 핵심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김종필은 대학 재학시절 좌익분자였으며, 그 후 공산주의 동조자들을 옹호하고 그들과 어울려 지냈다. 박 의장과 김종필의 가족 중에는 공산주의자나 공산주의에 협력한 사람들이 있다. 중앙정보부 내의 김종필 측근들은 좌익이나 공산주의 배경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이며, 그들은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박의장의 고문진과 동료들 중에도 과거의 공산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박정희의 정당인 공화당에는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7]

박-김 정권의 운영 방식은 어느 정도 이런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 속임수, 증거 없는 기습 체포, 공갈, 정치 뇌물, 테러 전술이 자주 동원된다. 또한 의심스러운 것은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는 중앙정보부의 지배적인 권력이다. 일부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고문진들에 의해 지도되고 있는 이 조직은 공화당, 국가재건최고회의 등 주요 기관을 만들어 내고 있는 주역이며 겉으로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면서 신원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중앙정보부와 관련된 지도부 내의 핵심 세력에 의해 빈틈없이 조직되고 통제된다.[7]

1960년 12월에 ‘16인 장교사건’에 개입되어 군복을 벗을 때까지 김종필은 상대적으로 무명의 장교로, 일부 연수 기간을 제외하고는 군 생활의 전부를 G-2에서 보냈기 때문에 군인으로서 출세할 가망은 별로 없었다. 그러므로 전기(傳記) 기록도 드물다. 박정희가 대구 사범학교 시절을 조용히 보냈던 것에 비해, 김종필의 서울 사범대학 시절은 그렇지 않았다.[8]

1946년에 미군정은 서울대 사범 대학을 비롯해 몇 개의 대학을 통합하려고 했다. 그 결과 일부 대학, 특히 좌익 교수단과 학생들 사이에서 격렬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미군정의 명령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독립 지위를 상실하면 미국의 감시가 강화될 것을 우려했다. 사범 대학은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이 싸움에서 좌익의 입장을 견지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김종필과 중앙정보부에 있는 그의 측근 김용태, Korean Republic의 발행인인 김동성, 동양 통신(Orient Press)의 김규환, 전 공보부 장관 이원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8]

여기에 개입된 사람들을 철저히 조사해 보면, 분명히 공화당 총무인 김동환을 비롯해 더 많은 사람들이 드러날 것이다. 박정희가 사관학교에서 조직을 형성했던 것과 거의 같은 때에 그의 조직과 비슷한 또 다른 조직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질 수 있다. 일부 소식통에 따르면, 김종필과 김용태는 불온한 사건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사범 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받고 대전 근처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로당으로 지역 청년들을 전향시키는 일을 했다고 한다.[8]

김용태는 1948년에서 1950년까지 장항 여자 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김종필과 김용태는 그 지역의 좌익분자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 지역에서 강한 세력을 누리고 있던 이범석의 우익단체와 충돌을 일으켰다. 이 사실은 쿠데타의 지도부들이 처음부터 이범석 장군과 그를 따르는 청년단에 강한 적개심을 보였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좌익분자들에 대한 단속이 진행되자, 일부 좌익분자들은 체포되는 것이 두려워 당시 조직 확대를 위해 청년들을 필요로 하던 장교 양성소와 군방첩대(CIC)에 들어가는 길을 모색했다.[8]

김종필은 여수 순천 사건을 계기로 장교 후보 선발에 보다 엄격한 안보 규정을 적용하기 직전인 1948년 8월에 장교 양성소의 예비학교인 지도자 양성소에 입학했다. 그는 동기생들에게 지도력을 발휘해 자신의 조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곳을 졸업하였고, 곧 G-2에 들어가서 박정희를 만나고 알게 되었다. 그는 절친한 친구인 김용태를 G-2의 문관으로 데리고 오기도 했다.[8]

박정희와 김종필, 김용태의 가족들에게 좌익과 공산주의 영향이 퍼져 있다는 사실은 조기 환경 요소의 효과를 여실히 입증해준다.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별로 없지만, 공산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이며, 1946년 10월 2일 시위와 그로부터 1년 뒤에 다시 대구를 휩쓴 격렬한 좌익 시위를 지도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상희는 북한의 전 외교통상부 부위원장을 지낸 황태성과 절친한 관계였음이 분명하며, 황태성은 1946년의 시위 후 대구를 떠났다가 1961년 9월 1일에 간첩 임무를 띠고 박의장과 접촉하기 위해서 서울로 돌아왔다.[8]

박상희의 또 다른 동료는 한국 중앙정보부의 정책 자문으로 있는 윤장혁으로, 그는 1948년의 대전 폭동을 지도했으며, 1955년 11월 7일 북한을 위한 간첩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박상희가 정확하게 언제 어떤 상황에서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공산주의 지도자로서 1946년에 시위를 주동한 죄로 미군정에 의해 사형된 것으로 보인다. 김종필의 장인이 바로 박상희이며, 김종필의 처는 아버지가 죽은 뒤 거의 박정희의 딸처럼 키워졌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뿐만 아니라 김용태를 비롯한 남편 측근들의 지위 유지에 적극적이라고 한다.[8]

김종필의 6형제 가운데 전부는 아니나 몇 명은 1950년에 북한이 남침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6형제 가운데 김종식은 그의 걸출한 형제 김종락이 인정하듯이 북한에 있다. 김종필의 또 한 형제는 충청남도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한 죄로 동네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고 현재 고향 마을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한 형제는 남로당원으로 한국 전쟁에 참여했지만 그 후 김종필이 그의 체포를 막았다고 한다. 김종필 형제가 남로당에 협력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살던 동네에서는 매우 잘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모든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온 원인중 하나였다.[8]

김종필과 절친한 사이인 김용태의 가족도 그 지역에서는 김종필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악명이 높았다. 1945년 이후에도 좌익분자였으며 남로당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김용태는 공산주의자들이 대전을 점령했을 때 고위직에 임명되었으며, 그의 3형제 역시 공산주의에 협력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소련에서 전쟁 포로 생활을 한 뒤 모스크바 대학을 다니다가, 현재는 한국에 돌아와 공산주의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1945년에서 1951년까지 좌익분자나 공산주의자로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현재 한국 중앙정보부와 박-김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으로는 중앙정보부의 장태화, 조칠기, 반미적이고 중립적인 부산일보의 발행인인 황용주, 서울대학교 교수이자 전(前) 고문인 김성희, 재무 고문이자 운영요원인 김성곤 등이 있다.[8]


대한민국 공산화 음모

남로당 공산주의자들 중 이주하, 김삼룡과 긴밀한 관계에 있으면서 동일한 서열의 최고위간부로 이중업(李重業)이 있었다. 그는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이던 1933년에 공산주의 활동으로 제적되었다. 그 후 이중업은 박헌영, 이주하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활동했고 해당 기간(47년말-48년초) 동안에는 남로당의 조직부장(Chief of the Organization Departement) 직을 맡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작전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한국 국방경비대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던 1945년에서 1948년 9월 사이 이 조직에 침투한 것이었다. [7]

이때 이중업은 박정희를 비롯해 많은 장교들과 접촉한 듯하다. 이중업이 접촉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비중있고, 가장 성공적으로 접촉한 장교는 박정희였다. 이중업과 박정희의 접촉은 박정희가 중국 광복군에서 김홍일과 근무하다가 1946년 5월에 귀국한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박정희는 1946년 12월에서 1947년 2월까지 제1연대의 중대장으로서 사관생도들 중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모집하는 데 열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7]

제1연대는 당시 태릉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제1연대 건물에 새로 생긴 장교 양성소(사관학교)가 있었다. 당시 연대 장교들은 새로 생긴 장교 양성소의 교관 역을 겸했다. 당연히 이 장교 양성 과정은 생도 시절의 젊은 장교들에게 사상을 주입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기회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사관학교에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참모를 많이 포함시키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고, 박정희는 이런 노력에 앞장 선 듯 하다. 1947년 3월과 4월에 졸업한 제3기생들이 교육을 받은 건 박정희가 이 연대에 있을 때였다. 제3기는 주로 전직 사병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며, 한국의 한 고위 장성은 공산주의 성향을 지닌 어떤 장교가 자신의 사병들을 장교 연수 과정에 강력하게 추천했다고 말했다. 현재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한국군의 G-3(작전국)는 300명의 생도들 가운데 절반이 노골적인 불충분자들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7]

948년 10월 19일에서 27일에 여수-순천 반란을 일으킨 건 이들이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1948년 4월에 제주도 제9연대에서 처음 발생한 소규모의 전복기도를 비롯해, 1948년 11월 2일에 발생한 대구 제6연대 사건, 1948년 10월 20일에 발생한 제4연대 사건, 1948년 11월에 발생한 대전 제2연대 사건에도 개입했다. 이 사건들의 결과, 많은 장교들이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처형당했으며, 많은 장교들이 여수 순천 반란에서 목숨을 잃고, 또 일부는 순천과 대구에서 달아나 게릴라가 되어 1949년 4월부터 한국 전쟁이 날 때까지 한국을 유린한 게릴라전을 지도했다.[7]

박정희가 이 심각한 사건들과 전체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확실하다. 그가 정체를 드러내고 1950년(1948년의 잘못인 듯) 11월에 체포된 것은 이들 사건들, 특히 여수 순천 사건 때문이었다. 박정희 혼자 사관생도들에게 불온사상을 주입하는 주역을 맡은 건지, 이정업과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이들과 접촉하는 데 적극적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박정희와 이중업은 이 기간 동안 친분을 유지했다. 이들은 워싱턴 주재 현 한국 대사인 김정열 중장에게 각각 친분 사실을 증언했고, 최경록 중장(퇴역)은 이들이 이중업이 즐겨 찾던 명월관에서 몇 차례 함께 술을 마시는 걸 목격한 바 있다고 증언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작성한 한국 정부 전복 도표를 본 어느 한국군 장교는 거기에 박정희의 이름이 주요 군 장교로 나타나 있더라고 회상했다. [7]

박정희와 장교 양성소와의 관계는 이렇게 짧은 기간으로 끝나지 않았다. 박정희는 1947년 9월에서 1948년 9월까지 육군 사관학교에 있는 학생 파견대의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중요한 직책에서 그는 공산주의 영향을 받은 교관들로 참모진을 구성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지도자로 생도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7] 여수 순천 사건과 그 뒤를 이은 수사 결과 박정희 조직은 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박정희는 1948년 11월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1949년 2월에 열린 군법회의에서 박정희는 죄의 심각성에 근거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7]

이런 극한 상황에서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사관학교의 동창생들이 육군 고위직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박정희는 자신이 참회했으며 사면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증거로 자신이 맡고 있던 조직망을 폭로하겠다고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박정희는 그 뒤 김창룡 수사대의 수사에 합류했으며, 공모자들의 집으로 수사대를 직접 이끌고 가기도 했다. 그가 직접 폭로한 사람의 숫자와 신원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지만, 10여명이 넘을 것으로 보이며, 그 중에는 그의 부하 장교들도 있었다. 자신의 체포가 바로 조직 지도자의 배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다른 사람을 폭로했고, 그들은 또 다른 사람을 폭로했다. 당시 이런 상황을 지켜보았던 관측통은 아마도 수 백 명의 좌익분자들, 주로 군 장교들이 이 사건으로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제거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7]

이중업도 여기에 포함되어 1949년 4월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중업은 그해 7월에 딸이 간수를 유혹하여 대한민국 헌병복을 입혀 북한으로 인도함으로써 탈출에 성공했다. 이중업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소식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현재 북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해서 한국 군내의 정부 전복 기도는 제거되었으며, 이 음모가 진행되었다면 한국 전쟁 초기의 혼란 이상의 혼란상이 야기되었을 것이다. [7]

이에 대한 보상으로 채병덕 참모총장과 정일권 부참모총장, 특히 G-2(정보국)의 백선엽 장군은 박정희 구명을 탄원했고, 그 결과 박정희는 징역 10년으로 감형을 받고 군복을 벗었다. 박정희는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됐으며, 그 후 백선엽 장군은 박정희를 G-2 분야의 문관으로 고용했다. 이런 위치에서 박정희는 1949년 봄에 졸업하는 제 8기생들 가운데 똑똑한 젊은 장교들을 G-2 분야에 추천할 수 있었다. 따라서 김종필을 비롯해 젊은 시절에 좌익 성향을 지녔던 일부 장교들이 박정희의 후원으로 G-2에 들어갈 수 있었거나, 적어도 그곳에 근무하는 동안 분명히 박정희의 영향을 받았다는 추측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김종필은 1949년 5월 이후 계속 G-2에 있었다. [7]

백선엽 장군은 박정희의 성실한 근무에 만족했고 한국 전쟁이 시작되자 즉각 그의 한국군 재입대를 추천했다. 과거 엄청난 공산당 음모를 꾸미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부하에게 고문과 죽음을 안겨준 그의 성격도 드러났다. 음모에 깊이 관여한 사람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박정희 한 사람 뿐이었지만, 박정희는 그 음모를 주도한 실질적인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7]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자 이종찬 장군은 국무총리 장면을 찾아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였다.[9] 그러나 총리 장면은 이 문제를 바로 답변하지 않고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 사령관을 찾아 논의하였다.[9] 며칠 뒤 매그루더는 한국 육군본부로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 육군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고 답변하였다. 매그루더는 다시 장면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며 항의를 했습니다.[9]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이었다가 이 일이 있은 후 12월 15일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10]

미국의 감시도 감시였지만 당시 박정희에 대한 사상문제는 한국군 내부에서도 완전히 정리가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매그루더에게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하였던 김형일은 이 일로 박정희와 등을 지게 되었는데, 김형일은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에 반대하다가 참모차장에서 예편하였다.[9] [9]


[10]

박정희 정부

군사 정부가 만든 국가 구조는 박정희와 김종필, 그리고 그들의 고문들이 군사독재적인 형태를 창출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8]

그 첫 번째로는 한국의 중앙정보부로 그것은 사실상 국가 내의 국가 역할을 한다. 중앙정보부에서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고문들이 정책, 안보 체제, 대부분의 중요한 외무와 경제문제, 사법, 언론, 라디오, 심지어는 문화행사의 중요한 부분까지 통제하고 있다. 민주적인 통제는 말할 것도 없고 사소한 예산 문제에까지 결정권을 허락하지 않는 중앙정보부는 군사독재적인 통제기관 이다.[8]

국가 재건 운동은 대규모 조직으로, 겉으로는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인사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지만, 사실상 이들은 대부분 육군 준장 출신의 부의장과 그의 참모들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국가 재건 운동’은 농촌 지역의 젊은이들을 선동해서 ‘공중 도덕 회복’과 각종 주택개량 사업에 참여하게 만든다. 이 조직의 매력은 한국 생활의 전통적인 봉건주의적인 형태를 반대한다는 데 있다. 이 조직은 필요할 경우에 폭력적인 정치 행위에 쉽게 전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공산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농촌 청년 조직과 유사하다.[8]

정부의 주요 정치기구인 공화당의 구성을 보면 대외적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들은 대개 중앙정보부에서 임명된 정체를 알 수 없는 직원들로 구성된 내부 사무 조직의 하수인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 조직이 구성되는 방법은 매우 의심스럽다. 신원을 알 수 없는 대령 한 명과 소령 두 명이 대학 교수나 직장이 없는 무명 정치인, 혹은 지식인에게 주로 밤에 접근해, 조국의 이익을 위한 막연한 계획에 동참하라고 돈이나 협박으로 그들을 유인한다. 그 계획에 동참을 거부하는 사람은 통금 시간 후에 조사에서 풀려나게 되며, 그렇게 되면 그들은 통금 위반으로 체포되거나 그들이 속한 단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8]

한국인들은 일제시대 때부터 스파이와 앞잡이에게 통제 받는 데 익숙해 있다. 군사 정권은 이 제도를 확대 정비해 이승만 대통령 시절보다 더 큰 규모로 만들었다. 돈을 받고 야당 내에서 분쟁을 조장할 책임을 맡은 ‘사쿠라’ 정치인들이 최근 군사 정권의 한 특징이 되고 있다.[8]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에는 혼란에 대한 절망감과 전(前) 지도자와 정당(정치정화법과 ‘사쿠라’), 은행과 통화(환율과 인플레이션), 금융 기관(주식 거래 불시 단속), 기업과 기업가(폭리 기업인 단속과 민간 기업의 경영권 인수), 군(정화와 정치적 임명을 통해), 미국(공적, 사적 언어 공격을 통해) 등에 대한 신뢰가 체계적으로 붕괴하고 있다. 이것이 단순히 무능한 통치력의 징후인지, 남한 사회의 제도와 자신감을 파괴하려는 치밀한 계획의 징후가 아닌지 점점 의심을 키워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8]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이유

김재규는 1심 최후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인요, 두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했다. 이에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위해서 했다고 한다.[11]

여성 편력 의혹

한 중정부 직원은 박정희의 시중을 들기 위한 '마담'이 200명 가량 있었다고 증언했다. 안가에서 술자리 모임이 생기면 이 중에서 면접을 통해 접대 여성을 선발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중정 의전과장이었던 박선호의 증언에 따르면 '대통령의 여인' 중 수십 명이 1980년대에도 일류 연예인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12]

김재규 중정부장의 변호사였던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접대하기 위한 여성의 수가 200명을 넘었으며, 그 중 가수 심수봉 등 연예계 종사자가 가장 많았다."고 했다. 육영수는 주색에 빠져 항락에 젖은 박정희와 부부싸움을 하다가 얼굴에 심한 멍이 들었다고 한다. [13] [14][15]

박선호는 박정희의 술자리 여인으로는 이미 유명해진 기성 배우보다는 20대 초반의 연예계 지망생이 더 선호하였다고 한다. 그중에는 유수한 대학의 연예 관련학과 재학생도 있었고 주장했다. 박선호가 구해 온 여자들은 먼저 경호실장 차지철이 심사했다. 차지철은 박손호에게 『돈은 얼마든지 주더라도 좋은 여자를 구해 오라』고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래서 대통령의 채홍사란 중정 의전과장보다도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붙여져야 할 이름이었다고 평했다.

차지철의 심사에 이어 여인들은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경호실의 규칙에 따라 보안서약과 함께 그날의 접대법을 엄격하게 교육받았다고 하는데 우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된다', '술자리에 들어가면 대통령을 비롯해서 고위 인사들의 대화 내용에 관심을 표하지 말아야 한다' 등이며, 특히 '대통령이 말을 걸어오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응석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등등이라고 하며 박선호와 한 중앙정보부 직원 등 이 같이 증언하였다. [16] [17][18]

이것에 대해서 다른 사용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팔산천개청명오약신도 (토론) 2009년 8월 16일 (일) 12:53 (KST)답변

신동아와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는 신뢰할 만한 출처라고 생각합니다. 단 문서내에서 전체적인 균형을 생각해서 기술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문단의 제목도 중립성을 담아냈으면 좋겠습니다. '편력증'이라고 하니 무슨 병에 걸린 것 같은데, 당시 사회적으로 볼 때에도 그렇게 판단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케골 (토론) 2009년 8월 31일 (월) 19:36 (KST)답변

김재규나 박선호는 박정희를 암살한 암살자들입니다. 반대편도 아니며 암살자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허위진술을 하였을 가능성도 있읍니다. 당사자가 사망하여 보복도 불가능한데, 그 피해를 당했다는 여성들이 누구이며 피해여성들의 신원을 알수 없는것도 신빙성이 떨어지는 부분이라 하겠읍니다. --100범 (토론) 2009년 9월 25일 (금) 15:59 (KST)답변
한 중정부 직원과 수사관 직원이랑 숭실대학교 교수 등 얼마든지 많은데 또 토론내용을 이런 식으로 왜곡하네요. --팔산천개청명오약신도 (토론) 2009년 9월 25일 (금) 19:51 (KST)답변
상대를 향한 비난은 위키백과 생산적 문서편집에 도움이 안됩니다. 많은 다른 편집자들이 토론을 지켜보고 있으며 누구의 주장이 더 타당한지 판단하고 있으며 그들의 의견을 개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김재규나 박선호의 진술도 법정에서 실제로 행해여 졌다면 백과사전에 그들이 그렇게 주장했다고 기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그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이 있으면 함께 기술하면 좋겠습니다. --케골 (토론) 2009년 9월 26일 (토) 00:02 (KST)답변
여느 사건처럼 피해자의 신원을 공개를 안한 것 뿐입니다. 피해여성들의 신원을 알 수 없으니 신빙성이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정의로운 세계 (토론) 2009년 9월 27일 (일) 02:21 (KST)답변

보호조치알림

보호정책에 의거, 편집 분쟁의 지속을 이유로 해당 문서를 보호합니다. 보호된 버전에 관하여 그 내용이 정확하거나 중립적임은 보장하지 않습니다. 보호기간은 1주일입니다. 일주일간 성실한 토론을 통해 편집의 타협점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hun99 (토론) 2009년 8월 18일 (화) 13:28 (KST)답변

Kbr0706 사용자의 박정희,김대중 문서훼손에 관한 토론

사용자:Kbr0706박정희 문서에 정확한 출처가 있는 사생활 관련부분을 완전히 삭제하였습니다. 하지만 김대중 문서에서는 사실확인이 제대로 들어나지 않은 의혹에 관해서 끊임없이 문서등록하는 이중적인 행동을 보이며 중립성과 형평성을 너무 무시하는거 같습니다. 또한 박정희 문서에서 객관적이고 출처가 있는 비판적인 내용은 삭제해 버리는 성향이 있습니다.다른 인물을 깍아내리거나 폄하한다고 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이 돋보이지 않습니다.유치하고 편협한 생각은 자제해주세요. 중립성과 형평성을 지켜주세요.--To to (토론) 2009년 8월 26일 (수) 02:21 (KST)답변

여성편력에 대한 부분이 편집 논쟁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우선 해당 출처가 신뢰할 만한 출처인지 검토를 해 보는 것이 필요하며, 또한 문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중립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지 검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주관적인 판단이 필요하므로 여러 사람들이 총의를 모아서 판단을 해야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삭제와 삽입을 반복하지 마시고 토론문서에서 토론해주세요. --케골 (토론) 2009년 8월 28일 (금) 11:18 (KST)답변

편집 분쟁 우려

되돌리기 싸움을 중지하시고 토론을 하십시요. 몇 일전에 본 문서에서 편집분쟁을 일으키셨던 두 분이 동시에 편집금지를 당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케골 2009년 10월 1일 (목) 22:26 (KST)답변

좀 심하네요. Saga288님, 쥐박멸전담반님이 편집한 판과 전판을 비교하면 곳곳에 편파적인 서술과 긍정적인 부분의 삭제가 두드러지게 보입니다. 일단, 여성편력과 공산주의 음모 부분만 빼더라도 훈장 서훈한 것을 삭제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고, 출처를 보면 지지율이 70% 넘게 나왔다고 나오는데 '학력이 낮은 사람은 박정희를 지지하고, 학력이 높은 사람은 증오한다' 라는 것을 넣은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또한, 긍정적인 평가 부분은 삭제하고 부정적인 평가는 삭제하던데 '정권별 선진화 기여 평가와 이명박 정부의 과제' 라는 보고서를 삭제한 이유가 뭔지,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평가,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의 평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평가가 삭제된 이유도 궁금합니다.(거의 부정적 평가만 남았습니다.) 이전판을 고수하시는 분들은 최소한 부정적인 평가는 삭제 안하시던데, 그렇게 못 참겠는지 참 궁금하군요. 참고로 여성편력과 공산주의 음모 부분은 특정 기사를 완전히 긁어오는데, 저작권 위반이 아닌지... 토론 하자고 하셔서 토론하는 것입니다. 121.124.4.51 (토론) 2009년 10월 4일 (일) 19:34 (KST)답변
완전히 긁어오지 않았습니다. 직접 대조하시기 바랍니다. --Saga288 (토론) 2009년 10월 4일 (일) 23:00 (KST)답변
해당 부분은 님이 아니라, 다른 분이 편집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국가수호인가 하는 분) 혹시 다중계중이십니까? 그리고 원론적인 내용은 그 부분이 아니라, 긍정적인 평가 부분도 왜 이유없이 삭제하시는 가 입니다. 121.124.4.51 (토론) 2009년 10월 4일 (일) 23:10 (KST)답변
말꼬리 잡기 수준이네요. 그리고 제일 처음 편집한 사람은 사용자:쥐박멸전담반님이라고 알고있는데요? 혹시 다중계중이십니까? --Saga288 (토론) 2009년 10월 5일 (월) 10:10 (KST)답변

편집에 대해서

해당판에 편집한 부분에 대해서 몇가지 지적할 점이 있어서 쓰게 되었습니다.

저작권 위반

  •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이유 - 위클리 경향을 통채로 복사한 수준
  • 정인숙 살해 사건 - 제대로 된 원문 제시가 안되어 있음. 그나마 있는 신동아 기사는 정인숙을 검색해도 전혀 안나옴.
  • 10월 26일 궁정동부분 - 앞부분 약간 제외하고는 신동아를 완전히 베낀 수준 -> 저작권 위반

긍정적인 부분 삭제

  • 그 해, 3월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훈장 추서가 미뤄지던 김구, 안중근, 이승훈, 안창호, 김좌진, 한용운, 최익현, 조만식, 윤봉길, 신익희, 이시영, 강우규, 민영환 등 독립운동가 285명에게 건국훈장을 비롯한 독립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를 삭제한 이유가 무엇인지
  • 부가가치세제 시행 논란을 삭제한 이유. 부정적인 내용과 긍정적인 내용이 조화를 이루는데 삭제한 이유가 무엇인지
  •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박정희를 저격했다고 주장했다. 고 하는데, 정확한 출처가 없음
  • 소설이 나오기도 했지만, 아무런 근거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근거 없다는 근거가 전무
근거없는 소설에 대해 근거없는 근거를 대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지. UFO가 있다고 해놓고 UFO가 없다는 근거를 대라고 하면 제가 뭐라고 해 줘야 되나요? Kjskjs0504 (토론) 2009년 10월 6일 (화) 01:12 (KST)답변
지적하신 분은 어투 자체가 백과사전에 맞지 않는 것을 지적하시는 듯 합니다..-- 사용자:pba3321 2009년 10월 4일 (일) 11:21 (KST)답변
해당 부분을 삽입하신 분 같은데, 'UFO가 있다는 것은 아무런 근거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라고 썼으면, 그에 대한 출처를 제시하거나, 야예 그 부분을 삭제해야죠. 근거 없다는 이유로 그런 부분을 삽입이 가능하다면, 모두 '~~라는 말이 있으나 근거없다.' 라는 것만 반복해도 상관없다는 소리죠. 121.124.4.51 (토론) 2009년 10월 11일 (일) 00:54 (KST)답변
  1. 박정희와 그의 측근들 그리고 역시 박정희의 지지 정당인 공화당은 공산주의로 얼룩졌다. 비난에 가까운 표현인데, 아무런 출처가 없음 개인감정으로 파악됨
  • 조갑제의 긍정적 평가 부분을 1/2이상 삭제한 이유가 무엇이고,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의 긍정적 내용 또한 부분 삭제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을 삭제한 이유가 무엇인지
  • 경제 정책과 민주주의 탄압에서 현대 경제연구원에서는 ‘정권별 선진화 기여 평가와 이명박 정부의 과제’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삭제한 이유가 무엇인지,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긍정적 평가를 통채로 삭제한 이유가 무엇인지,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의 긍정적 평가를 삭제한 이유가 무엇인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긍정적 평가를 삭제한 이유가 무엇인지
  • 낮을수록, 연령이 높을수록, 학력이 낮을수록 박정희를 업적이 많은 대통령으로 응답하고 소득이 높을수록, 연령이 낮을수록, 학력이 높을수록 박정희를 증오한다는 평가를 한다 라고 했는데, 정작 출처를 보면 70%가 박정희를 지지했고 81.3%가 직무수행을 잘했다고 하는데, 마치 학력이 낮아야 박정희를 지지한다는 식으로 적시한 이유가 무엇인지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것 뿐 대체적으로 전 집단에서 높음)


해당 부분을 편집한 분들은 제대로된 의도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특정판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121.124.4.51 (토론) 2009년 10월 5일 (월) 00:46 (KST)답변

대부분 제3,4공화국에서 서술되어야 합니다. 이는 김영삼, 김대중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박정희가 공산주의자 라는 건 상식아닌가요?? 인정할건 인정하셔야죠. --Saga288 (토론) 2009년 10월 5일 (월) 10:20 (KST)답변

토론으로 해결하시자면서 정작 위에 나와있는 대부분의 사안에 대해서는 제대로 답변조차 못하시네요. 한때 남로당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로 몬다면 황장엽이나 무솔리니도 얼마든지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많은 이들이 한때 공산주의의 몸담았지만 지금 그들을 공산주의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 않나요? 또한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은 엄연히 제2공화국에 속해있는 시기라 제가 수정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다시 되돌려놓기를 하시네요..무슨 이유가 있으신가요?-- 사용자:pba3321 2009년 10월 4일 (일) 11:21 (KST)답변
동의합니다. 이후의 기회주의적 행적은 그가 공산주의 사상을 인생의 전기간 동안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힘들게 합니다. 단 한때 공산주의 사상을 갖았다고 기술하는 것에는 찬성합니다. --케골 2009년 10월 6일 (화) 09:28 (KST)답변
조봉암 문서에서도 공산주의자라고 되어있습니다.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에도 사회주의적 관치경제체제가 행해졌습니다. 박정희는 공산주의자 맞습니다. --Saga288 (토론) 2009년 10월 6일 (화) 10:28 (KST)답변
단순히 관치경제체제를 행했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로 취급해야한다는 토론자님의 견해에 따르면 루즈벨트, 히틀러 모두 공산주의자가 되어야 하지 않나요.. -- 사용자:pba3321 2009년 10월 6일 (화) 21:28 (KST)답변
그냥 관치경제체제가 아닙니다. 박정희 정부 자체가 사회주의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출처에 있는 미국외교문서에도 나와있습니다.
제n공화국에서 제n+1공화국으로 바뀔려면 체제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미 그 때 체제도 바뀌었으니 그 때부터 제3공화국 입니다. --Saga288 (토론) 2009년 10월 6일 (화) 10:19 (KST)답변
그리고 제2공화국 시절은 제2공화국에서 서술하면 됩니다. --Saga288 (토론) 2009년 10월 6일 (화) 10:22 (KST)답변
제3공화국은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이후 정식출범한 체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밑에서도 여러번 밝혀두었으니 다시 설명치 않겠습니다.-- 사용자:pba3321 2009년 10월 6일 (화) 21:28 (KST)답변
제3공화국은 5.16쿠데타이후 5차개헌 이후를 말합니다. 제3공화국, 대한민국 헌법의 역사 참조 --Saga288 (토론) 2009년 10월 7일 (수) 01:47 (KST)답변

오류

1.독립군 대부분이 충칭으로 갔다고 하는데 만주,화북지역에서도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기타 일본과 친일파 유치환이 비적떼라고 칭했던 사람들 모두 독립군들 입니다. 2. 박정희는 반공주의가 아니라 반공주의를 가면 삼아서 민주운동가를 고문한 것 뿐입니다. 3. 제3공화국은 1962년 12월 19일 이후입니다. 4. 새마을 운동은 미국 4H운동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새마을 운동에 대한 평가가 곧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아닙니다. 5. 한겨레신문이랑 경향신문이랑 오마이뉴스랑 신동아도 엄연한 출처입니다.--Saga288 (토론) 2009년 10월 6일 (화) 11:28 (KST)답변

1.독립군 대부분이 내륙인 충칭으로 이동하였다는 내용은 엄연히 개정 7차교육과정 국민공통과정 중3~고1 국사교육과정에서 기술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충칭에 있는 독립군은 광복군과 1942년 이후에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입니다. 동북항일연군 ,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간도특설대, 만주국

2. 그것은 토론자님의 견해로 밖에 보이질 않네요..

국사책에도 있는 내용입니다. 1962년 민족일보 조용수 사형(당시 법관이 이회창) 현재는 무죄, 그 외 인민혁명당, 민청학련 사건 등등

3. 엄연히 현행 국사 및 근 현대사 교과서에서 제3공화국을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정부 출범 이후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5차개헌 이후입니다.

4. ‘대통령 박정희는 수재민 복구대책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하여 자조·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마을가꾸기 사업을 제창하고 이것을 새마을가꾸기운동이라 부르기 시작한 데서 시작되었다.’- 두산백과 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4H운동에서 유래되었다는 정확한 근거가 있으셔야죠..또한 새마을운동중앙회에서는 새마을 운동의 시작을 1970년 04월22일 "새마을가꾸기운동 제창 (전국지방장관회의,부산) 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마을운동 전에도 미국의 4h운동, 일본의 소득배가운동 그 외 유럽이나 북한의 천리마 운동 등등 있었습니다. --Saga288 (토론) 2009년 10월 7일 (수) 01:58 (KST)답변

5. 백과사전에 밝혀지지도 않는 개인의 신상까지 게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이는 타 문서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켜지고 있구요. 또한 위에 121.124.4.51님이 지적한 문제에 대해서도 답변부탁드립니다. -- 사용자:pba3321 2009년 10월 6일 (화) 21:24 (KST)답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는건 이미 밝혀진 내용입니다. --Saga288 (토론) 2009년 10월 7일 (수) 01:58 (KST)답변

공산주의와 관련된 내용이 너무 길고 정리가 안되어 있습니다.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핵심적인 문장들로 추렸으면 좋겠습니다. 여성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할 내용이 많다면 박정희의 사상 혹은 박정희의 사생활 등으로 문서를 분리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케골 2009년 10월 8일 (목) 13:09 (KST)답변

"부마사태"아니고 "부마항쟁"입니다. Unobedient54 (토론) 2009년 10월 11일 (일) 21:19 (KST)답변

두 분의 편집 분쟁에 개입할 생각도 없고, 관심도 없지만,

멀쩡한 분류는 왜 자꾸 되돌리기를 해서 똑같은 작업을 이중 삼중으로 하게 하십니까? 두 분의 사용자 토론에도 분명히 주의해달라고 글을 남겨놓았는데, 분류:제2차 세계 대전의 일본 군인분류: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으로 전체 분류를 변경하면서 이 문서의 해당 분류를 수정했던 것이고, 박정희가 한국전쟁 당시 보병부대 지휘관으로, 그리고 포병학교 교육을 거쳐 포병으로 전과하면서 한국전쟁에도 참전했기 때문에 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으로 변경했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두 분의 편집 분쟁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인데, 이걸 자꾸 아무 생각없이 예전으로 되돌립니까? 분류에 붉은 색 링크를 남겨두고 싶으신 겁니까? 마지막으로 이 분류를 삭제한 분은 사용자:Saga288님이시더군요. 전쟁 중인 상대방이 편집한 문서를 예전으로 되돌리고 싶으면 되돌리십시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는 내용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막 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WaffenSS (토론) 2009년 10월 6일 (화) 20:55 (KST)답변

Saga288님 답변부탁드립니다.

토론자님께서 그 근거를 가지고 있으시다면 출처를 밝혀 공론화 하실 일이지 '~~이러한게 있다'라는 식으로만 답변하시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토론자님의 답변은 거의 위와 같은 식이라 토론이 진전이 없네요.. -- 사용자:pba3321 2009년 10월 7일 (수) 19:32 (KST)답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식아닌가요. 당연한 사실 아닌가요. 이런식으로 답변하시면 토론이 진행이 안됩니다. 일단 큰 문제를 살펴보자면

1. 저작권 문제 : ip님이 제시한 대로 외부 기사를 일부도 아니고 통째로 복사&붙여넣기하면 저작권 위반입니다.

원본이랑 아주 다른데요. --Saga288 (토론) 2009년 10월 10일 (토) 01:21 (KST)답변

2. 공산주의자문제 : 공산주의적 부분적경향을 가지고 전체로 판단해 공산주의자 반열에 놓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국가가 공산주의적으로 흘러간거까지는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히틀러는 공산주의자가 됩니다. 제가 알기로 3공화국 시절 사유재산에 대한 제제는 없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아니라면 증거를 제시해 주세요.

외교문서에도 일생 전체가 공산주의에 물들어 있었지요. 출처에 있는 기사 참고하세요--Saga288 (토론) 2009년 10월 10일 (토) 01:21 (KST)답변

3. 3공화국 문제 : 공화국 순서 구분은 정권순서로 나옵니다. 이승만 정권 이전 미군정 시절을 1공화국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대통령 정권 이전의 정변-선거 기간은 2공화국 으로 분류해야 합니다.

선거기간에 제3공화국 헌법의 적용을 받았습니다. --Saga288 (토론) 2009년 10월 10일 (토) 01:21 (KST)답변


다른건 모르겟고 1번 저작권 문제로 되돌리고 갑니다. 다른건 논란의 여지가 있고 토론해서 바뀔수도있는데 1번 저작권 문제는 일단 돌리고 편집 후 추가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yhpdoit (토론) 2009년 10월 9일 (금) 16:00 (KST)답변

아니 다른건 다 둘째 치고 원본이랑 다르다고요?????? 한글을 글자 하나 빼놓지 않고 똑같이 썻는데 이게 원본이랑 다르다는 말은 대체 어서 나오는지 모르겟네요. 프레시안 기사와 좀 비교해 보시죠? 프레시안 기사를 아주 복붙햇는데 원본이랑 다르다니요?

한국의 군사 정권에 좌익과 공산주의 성향을 내포한 자들이 많은 것은 일제 말기의 농촌 상황과 도시 영향력에 기인한다.

(이후 생략 : 프레시안 기사중 일부분)

한국의 군사 정권에 좌익과 공산주의 성향을 내포한 자들이 많은 것은 일제 말기의 농촌 상황과 도시 영향력에 기인한다.

(이후 생략 : 위키백과 내용 )

글자 하나, 뛰어쓰기 하나까지 같습니다. 이걸 아니라고 주장하시면 귀막고 토론하시는 거네요. 반달행위로밖에 볼수 없습니다. --yhpdoit (토론) 2009년 10월 10일 (토) 03:15 (KST)답변

일단 명백한 복붙인 프레시안 기사부터 삭제했습니다. 덤으로 박정희의 종교도 자꾸 개신교로 고치시는데, 위에 종교 토론 언급에 명백한 박정희 종교 개신교 출처를 남기시기 바랍니다.--yhpdoit (토론) 2009년 10월 10일 (토) 03:32 (KST)답변

아. 여기도 고쳐야 겟군요. 박정희 종교는 명백히 불교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찾았습니다. --yhpdoit (토론) 2009년 10월 10일 (토) 04:10 (KST)답변

그럼 이건 어떤가요??

중앙일보 내용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은 40여 분간 카터에게 주한미군 철수의 부당성을 ‘강의’했다. 화가 난 카터는 배석했던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에게 “이 자가 2분 이내에 입을 닥치지 않으면 나가 버리겠다”는 메모를 건넸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한·미 정부와 민간이 모두 말린 결과 카터는 3000명가량 감축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2]


위키백과 내용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은 40여 분간 카터에게 주한미군 철수의 부당성을 ‘강의’했다. 화가 난 카터는 배석했던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에게 “이 자가 2분 이내에 입을 닥치지 않으면 나가 버리겠다”는 메모를 건넸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한·미 정부와 민간이 모두 말린 결과 카터는 3000명가량 감축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73]

글자 하나, 띄어쓰기 하나까지 같습니다. 이것도 저작권 위반 아닌가요?? --Saga288 (토론) 2009년 10월 11일 (일) 00:46 (KST)답변

말씀하신 저작권 위반 내용 삭제했습니다. 편집 취소나 특정판 유지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이미 많은 분들의 편집이 이루어진 문서인데, 혼자서만 특정판을 고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21.124.4.51 (토론) 2009년 10월 11일 (일) 01:04 (KST)답변
위키백과 저작권 정책을 모르시나 보네요. 만약 저게 저작권 위반이면 관련 특정판 죄다 삭제해야 합니다. --Saga288 (토론) 2009년 10월 11일 (일) 01:21 (KST)답변
위키백과 저작권 정책을 모르시는건 Saga288님입니다. 뉴스 내용이나 이런 걸 정리해서 올리면 자신의 저작물이 됩니다. 당연히 이건 저작권에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복붙은 엄연한 현행법으로도 처벌받는 저작권 침해입니다. 물론 프레시안 기사는 엄격한 Copyright 저작권에 포함되어 있으며,이를 허가없이 CCL라이센스인 위키백과 저작권으로 바꾼다는건 저작권법 위반입니다. 관련 특정판 죄다 삭제해야 한다고요? 뉴스 복붙이면 원래 죄다 삭제해야 합니다.편집하면서 아래글 한번 읽어보세요. 하지만 시간과 인력이 모자라서 말끔하게 제거를 못하는 중일 뿐입니다.--yhpdoit (토론) 2009년 10월 11일 (일) 06:28 (KST)답변
"현재 기여한 내용은 자신이 직접 작성했거나, 다음 글로벌 세계대백과에서 가져왔거나, 혹은 저작권이 없어야(퍼블릭 도메인) 합니다. 저작권을 침해하는 자료는 바로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이 셋중 하나가 아니면 저작자의 허락이없으면 무조건 저작권 침해입니다. --yhpdoit (토론) 2009년 10월 11일 (일) 06:28 (KST)답변
어떻게 저 내용이 정리해서 올렸다는 거죠??? 글자 하나, 띄어쓰기 모두 똑같은데??? --Saga288 (토론) 2009년 10월 11일 (일) 18:05 (KST)답변
"위키백과 저작권 정책을 모르시나 보네요. 만약 저게 저작권 위반이면 관련 특정판 죄다 삭제해야 합니다. --Saga288 (토론) 2009년 10월 11일 (일) 01:21 (KST)" 저작권 위반이 아니시래서 저작권 위반이라고 글을 올렷더니 저작권 위반이 맞다는 주장을 하면서 반문하시니 제가 대체 무슨 답변을 드려야 할지 감이 전혀 안옵니다. --yhpdoit (토론) 2009년 10월 11일 (일) 23:18 (KST)답변

문서 구조 제안

문서의 구조가 균형을 잡아야 할 것 같아서

  1. 시간순서의 생애
    1. 유년기
    2. 청년기
    3. ..
    4. 암살
  2. 약력
  3. 사상
    1. 종교
    2. 정치사상
  4. 사생활
  5. 가족관계
  6. 영향
  7. 평가

이런 구조로 서술을 해 볼 것을 제안해 봅니다. --케골 2009년 10월 8일 (목) 13:07 (KST)답변

약력을 없애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adidas (토론) 2009년 10월 9일 (금) 02:12 (KST)답변

현재 문서에 연보가 들어 있습니다. 연보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뒤 쪽으로 위치하는 것도 좋아 보입니다.--케골 2009년 10월 9일 (금) 06:33 (KST)답변

제3공화국 기간에 대해

계속해서 근거도 내놓지 않으시면서 박정희의 대통령권한대행 기간을 3공화국 범주에 넣으시는데요.. 저는 대학에서 우인수 교수님께 분명히 제3공화국의 출범을 1963년 12월 17일로 배웠습니다.. -- 사용자:pba3321 2009년 10월 5일 (월) 19:55 (KST)답변

제3공화국의 정권이 출범했다는 말과 다르죠. 제3공화국의 헌법은 이미 5차개헌때 부터 시작되었습니다.대한민국의 정치에서도 1962년 시기를 제3공화국으로 보네요. --Saga288 (토론) 2009년 10월 9일 (금) 02:04 (KST)답변

틀립니다. 제2공화국은 분명 516 쿠데타로 끝난 것은 당연하지만 대통령이 취임해야 공화국이 탄생합니다. 박정희가 국재최고회의 의장 겸 대통령 권한대행일 때는 단지 군정 시기일 뿐입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09년 10월 9일 (금) 06:37 (KST)답변

교사를 하다 만주로 떠날 당시의 행적에 대해

박정희가 일제시대 조선인 중에서는 최고의 출세길인 대구사범을 졸업했음에도 갑자기 교사를 버리고 만주로 떠날 당시의 행적에 대해 이 문서에는 기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설에는 일본인 교장과 싸워서 홧김에 사표를 던지고 만주로 떠났다는 설도 있고, 정말 군인이 되고 싶어서 떠나면서 문경보통학교 학생들이 울었을 때, 박정희가 "너희들은 모른다. 긴 칼 차고 대장되면 군수보다 너의 선생님이 더 높다."라고 말했답니다.

또한 박정희는 만주 신경군관학교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나이제한에 걸리자 특단의 아이디어를 냅니다.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란 한자 문구를 혈서로 써서 신경군관학교에 보내지요. 박정희의 이러한 행적은 당시 만주일보에 실렸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전부 사실이지만, 저는 출처를 제시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박정희 관련 문서에 이 내용도 출처를 찾아 실어주셨으면 좋겠군요.--崔元義 (토론) 2009년 10월 28일 (수) 22:11 (KST)답변

황태성 사건에 대해

박정희의 레드 컴플렉스를 거론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바로 '황태성 사건'입니다. 북한은 5.16 쿠데타 직후 과거 좌익이었던 박정희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황태성(대구폭동 때 우익의 총을 맞아 죽은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의 친구)을 남파하였습니다.

하지만 박정희는 어찌된 영문인지 황태성을 그냥 사형시켜버립니다. 아마도 그의 과거 좌익 경력이 탄로날 것을 우려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문서에는 박정희와 대구폭동, 그리고 황태성에 대해서는 내용이 없군요. 이 부분도 좀 보완되었으면 합니다.--崔元義 (토론) 2009년 10월 28일 (수) 22:11 (KST)답변

보호 알림

편집 분쟁을 이유로 1주 보호합니다. 참여자들께서는 1주 동안 적절한 토론과 타협을 통해 반영할 내용을 상의해주세요. 되돌리기를 그냥 하는 편집 분쟁의 형태는 지양해주시고, 위키백과의 정책과 지침에 알맞게 상호 타협점을 찾아주세요. 보호 이후에도 되돌리기를 반복하시는 분은, 극심한 편집 분쟁의 태양으로 인해 위키백과의 협업 정신에 위반되는 행태로 간주, 차단하겠습니다. --hun99 (토론) 2009년 11월 19일 (목) 23:43 (KST)답변

10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한 대통령 박정희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아프리카 소말리아보다 못 살던 대한민국을 가난에서 구한 민족의 영웅입니다. 1960년대 초반 당시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나라를 한번 잘 살아보자고 하면서 이끄신 분이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박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과 나라 사랑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아직도 소말리아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5.16 군사혁명과 데모를 일삼던 대학생들을 때려잡은 것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은 사상이 빨갛게 물든 사람들이거나 먹고 살만 했던 사람들 입니다. 좌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민족을 구한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아이러브 위키백과 (토론) 2009년 11월 26일 (목) 19:40 (KST)답변

죄송합니다만 위키백과는 '백과사전'입니다. '아이러브 위키백과'님의 의견은 물론 존중받아야 하겠으나, 이 공간은 '박정희 문서의 편집'에 관한 토론을 하는 곳이지, '박정희'에 관한 토론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 점 참고해주셨으면 합니다. 히맑 (토론/기여) 2009년 12월 3일 (목) 15:36 (KST)답변
박대통령이 대단한 대통령이라고 하시는 님의 의견이 잘못된 것은 아니나 문서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09년 12월 4일 (금) 11:05 (KST)답변

독재자에게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

이거 너무 억지 주장 아닌가요? 아무리 언론에서 그렇게 보도하고, 일부 세력들이 그렇게 평가한다고는 하지만 독재자가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는 말은 출처가 분명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이네요. 박정희가 반민주주의, 독재, 탄압으로 대변되는 것은 학자들은 물론 역사, 언론에 관심 없는 일반 국민들도 전부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브리태니커를 비롯한 기타 포털싸이트 백과사전에서도 그런 해석은 있는곳이 전혀 없습니다. 일단 '반민주주의'라는 내용이 있는 지금 상태에서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는 말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를 없애야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토론해봅시다.--Park6354 (토론) 2009년 11월 30일 (월) 14:26 (KST)답변

일단 출처언론이 공신력이 부족한 곳 입니다.%Les Templiers% et %Templiers Noirs Discussion Histoire 2009년 11월 30일 (월) 14:34 (KST)답변

잘 됐네요. 님께서 추가하신 박정희가 반민주주의라는 출처 속에 유신체제는 명백하게 반민주주의적 체제였다고만 했지, 박정희가 반민주주의라는 부분은 없으니 이 논란은 별개로 그 부분은 빼야 맞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면 님께서 자꾸 특정판을 주장하시면서 상단 축약 부분에 부정적인 내용이 긍정적인 내용보다 3배 이상 많아 중립성을 위해 일부분 추가했는데 (그래도 중립적이지 못해보입니다) 그것마저 삭제해야 한다고 보시면 부정적인 내용을 엄청나게 많이 추가하신 님께서 중립성을 위해 긍정적인 부분을 직접 추가하시기 바랍니다. 님께서 박정희를 부정적으로 보시는것도 알고, 부정적인 부분만 추가한걸로 알고 있지만 그래도 편집은 중립적으로 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별개로 님께서 추가하신 출처없는 편집에 대해 문제제기는 차후에 하고자 합니다. 출처가 공신력없다고 하시는데 CNB뉴스, 시민일보 심지어는 네이버 카페까지 출처로 두면서 프리존뉴스가 공신력이 없다? 설득력이 떨여져 보입니다. 121.124.4.51 (토론) 2009년 11월 30일 (월) 14:46 (KST)답변
님 말씀에 대한 반박입니다. '박정희가 반민주주의, 독재, 탄압으로 대변되는 것은 학자들은 물론 역사, 언론에 관심 없는 일반 국민들도 전부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라고 하셨는데 그건 님만의 생각일 수도 있으니 객관적인 근거 자료나 데이터를 가져 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반대로 브리태니커를 비롯한 기타 포털싸이트 백과사전에서는 이런식으로 중립적이지 못하고 부정적인 부분만 일색이지는 않습니다. 다음 백과사전에 있는 브리태니커 박정희 본문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말은 양립할 수 없다'고 하는데 한 개인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만? 121.124.4.51 (토론) 2009년 11월 30일 (월) 14:58 (KST)답변
유신체제를 박정희와 따로 보신다는게 어처구니가 없군요. 그리고 부정적인 평가가 많으면 중립에 어긋나 보일수도 있지만 없다는걸 있다고 거짓으로 써 넣은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정확한 출처가 있는 긍정적인 평가를 퍼와야겠지요. 저도 긍정적인 평가가 있으면 추가할 수 있습니다만, 이미 다 써져있어서 편집 안했습니다. 그리고 기계적인(양적인) 중립을 논하셨는데 그렇다면 강호순문서에도 비판과 긍정적인 평가를 5:5로 맞춰볼까요? 이상한 논리 내세우지 마시죠. 그리고 CNB, 시민일보, 네이버 카페는 제가 편집한 적 없습니다만 다른 곳에서 혼동해와서 비방하지 마시죠. 그리고 제가 부정적인 부분만 추가했다고 하셨는데 요약부분에서 저는 부정적인 부분을 추가한적 없습니다. 다른 사용자들의 반달 삭제 행위에 대해서 되돌림을 했던 것 뿐이고, 논란이 있던 출처 없는 부분에 출처만 추가한겁니다. 자꾸 없는것 지어내서 말씀하지 마시죠. 그리고 한 사람에 대해서 다양한 평가가 있으면 각론으로 들어가야지, 요약 부분에서 혼란스럽게, 정반대의 내용을 양립시키는건 당연히 잘못됐다는거 아실텐데요. 일단 반민주주의라는 평가가 대체로 지배적이니 요약부분에는 이것만 남기는게 옳다고 봅니다. 주장하신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는 각론으로 들어가서 편집하시죠.--Park6354 (토론) 2009년 11월 30일 (월) 15:07 (KST)답변
유신체제를 박정희와 따로 보신다는게 어처구니가 없군요.라고 하셨는데, 유신체제가 반민주적이다는 말과 박정희 자체가 반민주적이다는 건 분명 다른말입니다. 유신체제는 박정희의 단면이고,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비롯한 여러가지를 포함한 사람입니다. 유신체제가 반민주적이다는 평가가 있으니까, 박정희가 반민주주의자다? 그거야 말로 말에 엄청난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정확한 출처가 있는 긍정적인 평가를 퍼와야겠지요라고 했는데, 그럼 왜 카이스트 부분은 삭제하셨는지? 분명히 출처도 있는데 그 부분을 삭제하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 앞뒤가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호순은 명백한 범죄자입니다. 범죄자에게 균형을 맞춰야 한다? 박정희는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혼재되어 있고, 사람마다, 매체마다, 집단마다 서로 다른 평가를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강호순이 사람마다 매체마다 집단마다 서로 다른 평가를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까? 님께서 이상한 논리를 대시는 겁니다. (지금보니 강호순 문서에는 객관적 사실만 포함되어 있지, 강호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부분은 없어 보입니다. 제 생각에는 박정희가 강호순보다 더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약 부분 삭제에 대해 반달 행위라고 몰아가시는데 출처가 없으니 삭제하는 건 정상이지 반달이 아니고, 님께서 부정적인 부분이 긍정적인 부분의 세배가 넘는 부분을 유지하셨던 건 틀린말이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한 사람에 대해서 다양한 평가가 있으면 다양한 평가를 담아내야지 일부의 주장만 내세우는 게 더 이상해보입니다. 일단 반민주주의자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라는 건 님만의 주장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박정희가 반민주주의자라는 일반 국민이 가진 정확한 근거 자료와 데이터를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121.124.4.51 (토론) 2009년 11월 30일 (월) 15:20 (KST)답변
점점 억지를 쓰신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이후엔 독재를 했다는 출처도 가져오라고 할 기세군요. 어쨌든 요약 부분엔 정 반대의 평가가 양립할 수 없습니다. 둘중하나는 삭제되거나 둘다 삭제되야 합니다.(하지만 거의 모든 백과사전엔 반민주주의라고 써져있지요) 그리고 기계적인 중립을 자꾸 강조하시는데, 사실상 박정희의 업적은 경제 하나로 요약되고, 긍정적인 평가를 길게 쓸 말이 얼마 안됩니다. 긍정적인 부분이 얼마 안된다면 조금만 쓰는 것이고, 많다면 많이 쓰는 것이지요. 반민주주의에 출처를 대라는 어이없는 주장은 못들은걸로 하고요.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기계적인 중립을 맞추기 위해 극소수의 억지 부린 주장을 요약 부분에 모순되도록 쓴다는건 용납될 수 없습니다. 각론으로 가시죠. --Park6354 (토론) 2009년 11월 30일 (월) 15:31 (KST)답변
독재를 했다는 출처도 물론 필요합니다. 님 사상에는 하나하나가 상식일 지는 몰라도 위키백과에는 근거라는 룰이 있고, 그것에 맞춰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만약 가치평가가 아니라 사실관계만 나열한다면 필요없을지 모르겠지만(저는 당연히 그것 또한 출처가 필요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치 평가가 포함되는 글은 당연히 출처가 필요합니다. 거의 모든 백과사전에 반민주주의자라고 나온다고 하는데 그 근거 또한 제시하시기 바랍니다.(한번 그 백과사전의 본문을 전체 다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위키백과와 비교해서 어떻게 다른지 확인해 보세요.) 못들은 것으로 하신다면 원칙대로 출처 틀을 달겠습니다. 121.124.4.51 (토론) 2009년 11월 30일 (월) 15:42 (KST)답변
요약본문에서 모순되는 주장이 양립할 수 없다니까요. <-- 이 말 4번째 강조하고 있습니다. 답답해지는군요. 점점 백:먹이가 생각나는 느낌입니다. 다음 브리태니커 한 번 읽어보세요. 민주주의 토대가 나오나 --Park6354 (토론) 2009년 11월 30일 (월) 15:46 (KST)답변
그리고 요약틀에 추가하신 여론조사는 인정합니다. 그런거 진작에 추가하셨으면 좋았잖아요. --Park6354 (토론) 2009년 11월 30일 (월) 15:48 (KST)답변
백:먹이에 나오는 내용처럼 전 토론이 순환되고 흐지부지 하길 원치 않습니다. 전 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충실히 답변하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님께서는 양립 할 수 없다 라는 말만 계속 반복하십니다. 토론이 좀 더 알차게 진행될 수 있도록 비아냥과 감정적인 발언은 삼가주시길 바라고, 제가 드리는 의문들(대다수가 박정희가 반민주주의자라고 인정하느냐 등)에 대해 답변해주시길 바랍니다. 121.124.4.51 (토론) 2009년 11월 30일 (월) 15:52 (KST)답변
브리태니커랑 포털백과사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도 몇 번째 말하는건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제가 비아냥을 했다면 근거를 제시해주세요. 또 근거없는 비방 하지 마시고요. --Park6354 (토론) 2009년 11월 30일 (월) 15:59 (KST)답변
전 박정희 문서가 박정희의 공만 내세우면서 찬양 일색인 문서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건 이 문서를 학습용도로 사용하시는 학생분들이 왜곡된 인식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문서를 봄으로서 자신 만의 가치평가를 내릴 수 있는 문서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독재가 했다는 부분이나 반민주주의자라는 부분도 만약 근거가 명확하다면 삽입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반민주주의자라는 부분을 못 찾으시겠다면 제가 찾아서 넣겠습니다.(제 주장은 반민주주의자가 아니라는 근거가 없다는 게 아니라, 박정희가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근거가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온갖 진보 매체에 박정희가 반민주주의자라는 주장이 올라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만큼 중립적인 문서가 되도록 님께서도 노력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님의 사상에 따라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서에까지 본인의 사상이 담겨있다면 문제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앞으로 편집하실 때 이 부분을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121.124.4.51 (토론) 2009년 11월 30일 (월) 16:05 (KST)답변
브리태니커와 포털 백과사전에는 박정희가 반민주주의자라고 나와 있지 않습니다. 만약 님께서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본문을 링크하시기 바랍니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이상한 논리 내세우지 마시죠, 자꾸 없는것 지어내서 말씀하지 마시죠가 다 비아냥이고 감정적인 발언입니다. 121.124.4.51 (토론) 2009년 11월 30일 (월) 16:05 (KST)답변
제 사용자 문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사용자들의 편집을 좋은 의도로 봅니다. 님께서도 좋은 의도로 하셨으리라 믿습니다만, 다소 이해할 수 없는 주장들과 너무 일반론적인 부분에서 근거를 대라고 하시니 그렇게 생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아냥이라고 주장하신 문장들은 느낀대로 솔직하게 말한 것이고 의도적으로 비아냥대려고 한 것은 아닌데 기분나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일부러 그렇게 집요하게 묻고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인정하실 부분은 인정하셔야 한다고 봅니다. 명백하게 병행기재가 불가능한 부분에 대해서 자꾸 병행기재를 주장하신다면 백:먹이가 생각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Park6354 (토론) 2009년 11월 30일 (월) 16:20 (KST)답변

딴건 몰라도 유신독재를 했던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는 말은 어불성설인 듯 하군요. 121.124님께 되묻습니다. 박정희가 독재자가 아니라는 출처는 어디에 있나요?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만들었지만 독재자가 아니었다는 출처? 163.152.102.254 (토론) 2009년 11월 30일 (월) 18:33 (KST)답변

제가 만약 본문에 '유신헌법은 만들었지만, 박정희는 독재자가 아니다'라고 했으면 그에 따라서 저는 근거를 대야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편집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원론적으로 모든 편집에는 그에 맞는 출처가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박정희는 독재자'라는 편집에도 출처를 대야 한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박정희는 독재자가 아니라고 말씀드린적 없습니다. 물론 맞다고도 말씀드린적도 없습니다. 121.124.4.51 (토론) 2009년 11월 30일 (월) 18:39 (KST)답변
민주주의자였다면 왜 한번만 재임하고 물러나지 않앗을까요? 3공, 4공, 5공이 다 그렇죠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내걸고 속으로는 독재와 야합으로 얼룩진 것을 말입니다. 박정희는 누가 뭐라고 해도 18년간 정권을 휘어잡은 독재자이며 유신헌법을 만들어 직선제를 폐지했습니다. 설사 유신헌법을 만든 사람들은 헌법학자나 이후락이라 쳐도 결국엔 최고 책임자는 당시 대통령 아닐가요?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살앗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나마 10. 26 이후 잠시동안 서울의 봄이 왔지만 또 투스타가 와서 정권을 휘어잡지 않습니까. 그게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보시나요?
민족중흥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박정희가 단군 이래 가장 위대하다고 보십니까?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등은 다 내평겨치고 박정희만 미화하기 위한 전략입니다. (출처가 어딘진 모르지만 공신력이 없다면 당장 빼야합니다.) 민족중흥이란 것은 단지 3, 4공 정부가 정통성을 위해 국민들에게 호도하기 위한 것 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박정희의 공이 과보단 조금 크지만 민주주의와 민족중흥은 전혀 상관없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09년 12월 1일 (화) 05:20 (KST)답변
혹여라도 민족중흥이란 말이 다시 나온다면 삭제하겠습니다. 특히 민주주의는 박정희가 추구하던 것과는 틀립니다. 단지 그만의 '민족적 민주주의'지 국민이 열망하던 국민이 직접 참가하는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09년 12월 1일 (화) 09:21 (KST)답변
분명히 이곳은 위키백과의 박정희 문서를 위한 토론 문서입니다. 이곳은 박정희에 대한 일반적인 토론을 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저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박정희가 민주주의자라고 한적도 없고, 민족중흥을 일으켰다고 한적도 없고, 박정희가 단군이래 가장 위대하다고 한적도 없습니다. 전부 님의 추측이고 색깔론 못지 않은 특정인 광신도로 몰아가기라고 보고 있습니다. (뜬금없이 저를 이상한 쪽으로 몰아가시지 말고 제발 토론을 위에서 부터 차근 차근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저 부분을 넣은 이유에 대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맨 위 요약 부분에서 부정적인 부분이 긍정적인 부분보다 3배 이상 많아 동등하게도 아니고, 최소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보는 조중동을 출처로 두었습니다. 민족중흥에 대해 따지고 싶다면 조선일보 해당 기사를 쓴 기자에게 따지고 정정요청을 하십시오. 조선일보가 님 생각에는 공신력이 없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나름대로 메이저급 언론으로 공신력이 있다고 봅니다. 추가로 말씀드리면 민주주의 부분은 논의 중입니다. 전 출처가 있다고 넣으려고 하는 거고, park님께서는 병행기재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121.124.4.51 (토론) 2009년 12월 1일 (화) 12:02 (KST)답변
그렇다면 박정희가 민주주의의 발전에 전혀 기여치 않았다는 걸 아시겠군요. 이건 역사적으로도 명백한 오류입니다. 민주주의의 발전에 공헌한 부분은 공과와는 상관없는 단순한 미화나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09년 12월 1일 (화) 12:12 (KST)답변
위키백과 마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상을 유포하는 도구의 장으로 활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다시한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기는 박정희에 대해 왈과왈부하는 곳이 아닌 박정희 문서에 대해 왈과왈부하는 곳입니다.) 저는 박정희가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거나 기여하지 않았다고 말할 의무가 없습니다. 공신력있는 출처에서 그런 목소리가 나왔으면 편집할 수 있는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물론 공신력인 출처와 함께 반박하면 됩니다. 121.124.4.51 (토론) 2009년 12월 1일 (화) 12:35 (KST)답변
네. 저는 문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입니다. 다른 공신력있는 출처와 함께 넣어주십시오. 과거 방일영이가 경영하던 조선일보가 보도하는 박정희에 관한 내용은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내용이 쓰여 있는데 왜 지우지 않겠습니까. 저는 분명 인물이 아닌 이 문서의 문제점에 대해 얘기하는 겁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09년 12월 1일 (화) 14:05 (KST)답변
성현님...... 백:먹이요(규칙은 아니지만, 왠만하면......). 히맑 (토론/기여) 2009년 12월 3일 (목) 15:38 (KST)답변

박정희는 군부 독재자 아닌가요? 그런 사람이 무슨 민주주의 발달에 기여했다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