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광개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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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으로 리다이렉트 시키지 마십시오[편집]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을 광개토대왕으로 리다이렉트 시키셨는데, 대체 어떤 이유에서인지 근거 설명 부탁드립니다. 호태왕비에 적혀있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묘호는 광개토왕이 묻힌 지명과 그의 업적, 당시의 왕호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입니다. 게다가 키워드 설명에 제가 서술했듯이, 신라 호우총의 호우와 중국 길림성 집안 압록강변에 있는 모두루 묘지석에 적혀있는 묘호와도 일부 차이를 보여 학자들간에 많은 대조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광개토왕이란 인물과 상관없이 이 묘호의 12글자만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단 말입니다. 이 묘호에 대한 일련의 지식도 없으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주관에 의한 판단으로 마음대로 삭제하고 리다이렉트 시키는것은 부당한 처사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삭제하기 전, 집필자의 의사를 토론을 통해 물어보는것이 기본 예의 아닙니까? 기본은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Kfaction 2005년 12월 26일 (월) 20:04 (KST)[답변]

우선, "역사학에 대한 어느정도의 지식도 없으면서, 혹은 이 묘호에 대한 일련의 지식도 없으면서" 라니, Kfaction님이 어디서 얼마나 역사를 잘 배워오셨는지는 모를 일입니다만 시비성 발언은 삼가주시길 바랍니다. 묘호의 12글자가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하지만 이 페이지의 내용은 "광개토대왕"페이지 아래의 하부 섹션으로 들어가도 충분한 내용입니다. 만약 이 시호에 대해 한 20k쯤 되는 자세한 글을 써서 광개토대왕 페이지가 너무 길어져 분할해야 한다면 이해하겠습니다만, 이정도 짧은 글을 굳이 독립된 아티클로 다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답변이 없다면 이 내용을 광개토대왕 페이지에 추가하고 리다이렉트하겠습니다. Caffelice 2005년 12월 27일 (화) 05:56 (KST)[답변]
만약 이 묘호를 합쳐야 할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광개토왕이 아니라 고구려역대왕묘호 쯤 되어야 할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은 그 인물에 대해서만 서술하는것이 옳습니다. 광개토왕의 묘호로서 발생되는 여러가지 학술적 문제를 광개토대왕에 추가할 필요성은 없습니다. 그리고 역사지식 운운은 비전문분야에 대한 얕은 판단으로 함부로 일처리를 하기에 해드린 충고입니다. Caffelice님께도 절실히 해드리고 싶은 말이군요. 광개토왕과 고구려 역대왕의 묘호자료는 전혀 상관이 없는 개념이라고 누차 강조합니다. 광개토왕에 대한 저술 초기에 이미 광개토왕의 묘호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고 적어 놓았고, 광개토대왕의 내용에 포함될것은 이미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고구려 역대왕 묘호에 대한 독립된 자료에 대한 설명을 광개토대왕의 하위 섹션으로 넣는것은, 장군총이 적석총이라는 무덤양식으로 만들어졌다 해서 장군총 아래에 적석총에 대한 하부섹션을 개설한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의가 있다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광개토대왕이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Kfaction 2005년 12월 27일 (화) 22:55 (KST)[답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묘호는 광개토대왕의 묘호가 아닌가요? 독립된 문서를 합치는 것에 관해 칼로 자를 수 있는 명백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광개토대왕에 관련된 자료와 학술적 토론에 관한 내용이 광개토대왕과 분리되어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군요. 굳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관한 내용을 독립시켜야 한다면 광개토대왕이라는 표제어와는 '독립된' 또다른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거나, 아니면 표제어인 광개토대왕 문서의 분량에 비해 다뤄야 할 내용이 많아서 문서의 일관성을 위해 독립시키는 것이 좋을 때 분리시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에 대한 어느정도의 지식도 없으면서' 라는 식으로 비전문가를 논의에서 배척하는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Kanie 2005년 12월 27일 (화) 23:06 (KST)[답변]
Kanie님께서는 다시한번 제 글을 읽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광개토왕과 독립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재차 누차 수차 강조합니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광개토대왕의 묘호라는것에 대한 서술은 이미 광개토대왕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전문가를 배척하는 태도가 아니라 비전문분야를 관련지식 없이 마음대로 주무르는 분들에게 드리는 경고입니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본문 내용을 읽어 보았습니다만, 표제어가 문서의 내용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주제문이라면 이 묘호 하나에 관해서 논하는 것이지 신라 호우총과 모두루 묘지석에 적혀 있는 다른 두 묘호에 관해서 논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셋 중에 특정한 하나의 묘호에 관해 논하는 것은 문서를 전체적으로 포괄할 수 있는 표제어로 보이지 않는군요.
그리고 "역대 고구려 왕의 묘호중 가장 완벽한 형태이기 때문에 이 묘호가 고구려를 연구하는데 있어 의미하는 바는 크다." 이 문장을 근거로 이 표제어를 따로 독립시키셨는데, 물론 하나의 작지만 중요한 역사적 증거가 전체 역사 연구에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한 명의 왕의 묘호인 이 표제어가 고구려 역대 왕의 묘호에 관한 연구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표제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구려 역대 왕의 묘호 정도의 표제어로 따로 독립시켜서 문서를 만드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백과사전의 표제어는 자료를 찾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정조라는 표제어로 조선 17대 국왕 정조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정조 라는 묘호를 통해 알 수 있는 조선 역대 왕들의 묘호에 관한 분석이 등장한다면 독자들을 당황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Kanie 2005년 12월 27일 (화) 23:43 (KST)[답변]

GDFL인지 뭐지 저작권이 뭔지는 몰라도 위키페이아에 글을 쓰면서 내용을 채워 공헌한 공헌자의 의도는 충분히 존중 해야한다고 봅니다. kfaction이라는 분이 저런 글을 쓸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면 왜 저 페이지를 나눠야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는 것 일겁니다. -- kenchanayo 2005년 12월 27일 (화) 23:18 (KST)[답변]

따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시니 그런 줄 알겠습니다마는, 그렇게까지 전문분야에 속하는 내용이라면 오히려 '백과사전'에 들어갈 항목이 아닐 뿐더러, 그렇게 특정 국왕의 시호만 따로 떼어서 표제어로 만든 백과사전이 또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광개토왕과 광개토왕의 묘호를 따로 연구하는 건 Kfaction님 마음이지만, 보통 백과사전에 들어갈 만한 내용에는 광개토대왕에 대한 소개에 '시호는 이러이러하다' 정도면 충분하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이곳은 논문도, 학술서적도 아닙니다. 광개토왕에 대한 모든 자료가 다 들어와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에 대한 세부적인 연구들 역시 '소개'정도로 충분한 경우가 많습니다.
정 그렇게 전문성을 강조하고 싶으시다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페이지를 더 길게 발전시켜서, 광개토왕의 섹션으로 끼워넣기에 너무 길다고 생각될 정도로 한번 써보십시오. 제 말이 너무 공격적으로 들린다면, "역사학에 대한 어느정도의 지식도 없으면서"라는 Kfaction님 자신의 말 때문에 신경질적이 되어 그렇게 된 것이니 이해해주시길 바라며, 저 본인도 한국사 관련 페이지를 상당히 편집한 사람 중 하나로서 제대로 된 전공자가 나타나 기여해주시겠다니 아마추어의 짧은 소견에 의해 작성되었던 수많은 기사들이 보다 프로페셔널해질 것으로 기대되어 반갑습니다. Caffelice 2005년 12월 28일 (수) 02:03 (KST)[답변]
역사학 운운에 대한것은 조금 빗나가 오해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것은 애초 Caffelice님께 한말이 아니라는건 아시겠지요. 일단 하나만 짚고 넘어가지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이라는 묘호를 광개토왕을 서술하는 내용에 추가시켜야 한다면, 광개토왕의 무덤에서 나온 토기라든가, 광개토왕릉으로 추정되는 태왕릉에 대한 고분학적 지식까지 전부 추가시켜야겠군요? 광개토 아래에 고구려 왕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서술해야할테고, 만약 지금까지 남아있다면 광개토왕이 사용했던 칼의 철중 탄소비율이 얼마나 되며 어떤 열처리과정을 거쳤는지까지 다 써야합니까? 장수왕의 연호에 대한 내용이 나온 금동광배도 장수왕 아래에 넣어야 하는군요.
이런것입니다. 저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광개토왕이란 인물과 아예 애초에 일절의 상관없이도 따로 의미를 갖는다 누차 강조했는데 이부분의 이해가 틀리는 모양입니다. 초반부 제가 처음 키워드를 만들었을 때, 아무런 말없이 광개토왕으로 리다이렉트되어 그에대한 토론과 함께 다시 복구시켰습니다. 하지만 다시 마땅한 근거없이 리다이렉트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왔다갔다 그에대한 공방이 지속된것입니다. 저는 전문지식이 갖춰지지 않은 위키의 모든 분야에 일정한 몇몇분들이 섣불리 손대는것에 대해 굉장한 불만을 갖고있습니다. 그때문에 전문성에 대한 의문이 튀어나온것이며 후반에 뛰어드신 Caffelice님께 불쾌감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반대된다면, 고구려의 모든 유물과 명문자료들을 그 편년시대의 왕 서술 아래에 집어넣겠습니다. 저는 위키가 카테고리별로 전문성을 띄길 원합니다. 초등학생들을 위한것이 아닌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모두를 위한 백과사전이니까요. 일본어 위키가 부럽군요.Kfaction 2005년 12월 28일 (수) 09:07 (KST)[답변]
이 글을 보고서야 Kfaction님의 뜻을 이해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위키백과는 백과사전이지 학술용어사전은 아닙니다. 일반인에게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광개토대왕의 동의어일 뿐이며, 광개토대왕과 연관된 짧은 페이지들을 늘리기보다는 한 페이지에 정리하는 것이 일반인들이 쓰기에 편하겠지요. 저도 그렇고, 다른 분들도 아마 그런 이유로 리다이렉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을 만들면, 다른 모든 왕들의 시호나 다른 명칭들도 따로 독립된 페이지로 만들어 장문의 설명을 써야 할까요?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영해군사상주국신라왕"과 문성왕을 따로 만들어야 할까요? 광개토대왕이 사용했던 칼의 철중 탄소비율에 대해 쓰기 위해 여러 유물들에 대한 페이지를 하나하나 만드실 겁니까? 그쯤되면 지나치게 전문화된 게 아닐까요. 백과사전의 기사는 일반인들이 보고 그 주제에 대한 대략적인 개관 정도를 줄 수 있으면 되는 것이 보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물이나 명문자료들과 같이 디테일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광개토대왕 내지 장수왕릉같이 보다 큰 범위 아래에서 다루되, 한 쪽에서 다루기가 힘들 정도로 길어지면 분리하는 게 '위키백과사전'의 standard가 아닐까 다시 한번 건의해 봅니다. 결정은 Kfaction님이 하실 일입니다. 정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을 그대로 두시고 싶으신다면 더 이상 손대지 않겠습니다. 리다이렉트와 되돌리기를 계속 반복하는 edit war가 될 뿐일테니까요. 기분 상하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Caffelice 2005년 12월 28일 (수) 15:45 (KST)[답변]

사용자토론:PuzzletChung/2005년#이의제기에서 갖고옵니다. --Puzzlet Chung 2006년 1월 6일 (금) 17:12 (KST)[답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을 광개토대왕으로 리다이렉트 시키셨는데, 대체 어떤 이유에서인지 근거 설명 부탁드립니다. 호태왕비에 적혀있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묘호는 광개토왕이 묻힌 지명과 그의 업적, 당시의 왕호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입니다. 게다가 키워드 설명에 제가 서술했듯이, 신라 호우총의 호우와 중국 길림성 집안 압록강변에 있는 모두루 묘지석에 적혀있는 묘호와도 일부 차이를 보여 학자들간에 많은 대조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광개토왕이란 인물과 상관없이 이 묘호의 12글자만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단 말입니다. 역사학에 대한 어느정도의 지식도 없으면서, 혹은 이 묘호에 대한 일련의 지식도 없으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주관에 의한 판단으로 마음대로 삭제하고 리다이렉트 시키는것은 부당한 처사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삭제하기 전, 집필자의 의사를 토론을 통해 물어보는것이 기본 예의 아닙니까? 기본은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Kfaction 2005년 12월 26일 (월) 20:01 (KST)[답변]

글의 역사가 빤히 보이기 때문에 고친 글을 되돌리는 것도 쉽고, 글을 고치는 데에도 부담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키백과를 비롯해서 많은 위키에서 말 없이 고치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만약 이게 기분 나쁘시다면 다음부터는 좀더 신경을 써 드리겠습니다. 지금 글의 내용을 보니까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광개토왕의 여러 이름 가운데 신라 호우총의 청동제기 바닥면에 쓰여진 한 이름이네요. 이름에 대한 해석이 쓰여 있고,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으로도 기록되어 있다는 설명이 있는데, 그밖에 더 채울 내용이 없다면 광개토대왕에 합치는 것은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Puzzlet Chung 2005년 12월 26일 (월) 20:19 (KST)[답변]
글 내용의 편집과 리다이렉션은 다른경우라 생각됩니다. 또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호우총의 호우 바닥에 쓰인것이 아니라 광개토비에 적힌 묘호이며 호우 바닥에 적힌것은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입니다. 또한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은 모두루 묘지에 적힌 이름이구요. 이 묘호는 반드시 광개토왕이란 인물에 대한 내용과 따로 집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묘호가 광개토대의 고구려 역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Kfaction 2005년 12월 26일 (월) 20:34 (KST)[답변]
이게 광개토대왕비와 다른 비석을 일컫는 것입니까? 만약에 같은 비석을 가르키는 것이라면 저는 리다이렉션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에 대하여 3가지 방법이 있는데
  1. 광개토대왕비로 리다이렉션 - 긴 이름을 설명에 명기
  2. 따로 따로 - 긴 이름에는 짧게 이것은 광개토대왕비의 원래 이름이라고 쓰고, 자세한 설명은 광개토대왕비에
  3. 광개토대왕비를 긴 이름으로 리다이렉션 - 가장 최악의 선택입니다. 사람들을 혼란 속으로 몰아 넣는 방법이죠.
전 첫 번째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Ryuch 2005년 12월 26일 (월) 20:24 (KST)[답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광개토왕의 묘호지 광개토비를 이르는 말이 아닙니다.Kfaction 2005년 12월 26일 (월) 20:34 (KST)[답변]

이름이 길어서 헷갈렸네요. 만약 저 글대로라면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도 같은 지위로서 글을 따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Puzzlet Chung 2005년 12월 26일 (월) 20:39 (KST)[답변]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으로 리다이렉트 시켜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Kfaction 2005년 12월 26일 (월) 20:44 (KST)[답변]

광개토대왕 쪽에 합쳐놓는게 더 낫지 않나요? 묘호 역시 광개토대왕을 설명하는 여러 이름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이 문서를 광개토대왕에 합쳐놓는다고 내용에 혼란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되고요. -- ChongDae 2005년 12월 27일 (화) 01:33 (KST)[답변]

사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판단하시기때문에 생기는 오류입니다. 광개토왕과 관계없이 중요한 학술자료적 가치를 띈다고 누차 강조합니다.Kfaction 2005년 12월 27일 (화) 03:11 (KST)[답변]

광개토대왕 제목의 문제[편집]

현존하는 사료 어디에도 광개토대왕이라는 명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보아도 대왕이라는 명칭은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의 경우처럼 공식적인 호칭으로 사용하였으며, 광개토왕에는 '대'자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외 어떤 사료에도 광개토대왕이라 부른 예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광개토대왕이라는 호칭은 지극히 주관적인 호칭이며, 백과사전의 표제어로 사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공식 시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명칭에서 '광개토대왕'이라는 호칭을 유추해내는 것 역시 '주관적'인 해석일 뿐, 객관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장 객관적인 명칭인 광개토왕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또한 위키백과의 각 국가 군주의 기본 표제는 국가명 왕명이므로, 고구려 광개토왕으로 이동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Xakyntos (토론) 2008년 12월 3일 (수) 11:51 (KST)[답변]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곳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배경이야 어찌되었든 광개토왕이라는 표현보다 광개토대왕이라는 표현은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이 잘못된 명칭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학계의 논문이나 저서 같은 것을 일러주시는 것이 논의에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다. :) --정안영민 (토론) 2008년 12월 7일 (일) 22:49 (KST)[답변]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미 사료 상으로도 'Alexandros The Great'라고 표기하여 '대왕'이라는 의미를 명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광개토왕은 현존하는 어떠한 사료에도 '대왕'이라 쓰인 예가 없습니다.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현존하는 당시 사료 어디에도 '대왕'이라 표기되어 있지 않죠. 삼국사기만 기준으로 보아도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의 예처럼 공식 칭호로 '대왕'을 사용한 예가 명백하게 존재함에도 광개토왕은 '대왕'이라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위에서 설명했듯이 광개토왕릉비를 비롯한 다른 '공식 시호'에서 '광개토대왕'을 유추해 내는 것 역시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현존하는 여러 백과사전을 살펴봐도, 광개토대왕으로 쓰인 예는 '두산동아대배과사전' 뿐이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 등은 모두 광개토왕으로 되어 있습니다. 학술 논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하는 '한국사연구휘보'에서 검색해보면, '광개토왕'은 263건, '광개토대왕'은 73건으로 명확하게 차이가 납니다. 이미 학계에서는 '광개토왕'이 기본적인 표현으로 정착되어 있으며, '광개토대왕'이라는 칭호는 교과서를 비롯한 대중 서적에서나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백과사전의 표제어는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분명한 사실'이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널리 쓰인 것을 백과사전의 표제어로 삼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백과사전일까요.--Xakyntos (토론) 2008년 12월 8일 (월) 10:01 (KST)[답변]
내용 추가합니다. 위키백과 상에서 각 국가 군주의 기본 표제는 국가명 왕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광개토대왕인지 광개토왕인지를 결정하기에 앞서 일단 고구려 광개토(대)왕으로 함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Xakyntos (토론) 2008년 12월 8일 (월) 12:02 (KST)[답변]
저는 역사 전공이라 그런지 자킨님의 의견에 좀더 동의가 됩니다. 다만 표제어에 괄호를 쓰는 것은 부적합하므로 대왕으로 쓸지 그냥 왕으로 쓸지는 토론을 통해 정해야 하겠습니다. 근데 사실 '일반적인 명칭'과 '맞는 명칭'과 항상 다툼이 되어온 바가 있는지라, 정확히 어떤 의견을 지지할지는 좀 힘드네요. 리즈 위더스푼도 한국어 표기법으로는 리스 위더스푼이라고 합니다만. 이 경우에는 제가 '일반적인 명칭'을 지지했습니다. adidas (토론) 2008년 12월 8일 (월) 18:14 (KST)[답변]
안녕하세요.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리즈 위더스푼의 경우처럼 발음에 대한 표기법 문제와는 달리, 광개토왕/대왕의 문제는 일종의 '가치판단'이 포함되는 문제인만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Xakyntos (토론) 2008년 12월 9일 (화) 10:09 (KST)[답변]

네, ‘광개토왕’이 맞는 표기라는 점에 있어서 잘 이해를 하겠습니다. 남은 문제인, ‘고구려’를 앞에 붙일 것인지에 대해서는 위키백과:사랑방/2008년 제49주#군주 명칭에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네요. :) --정안영민 (토론) 2008년 12월 9일 (화) 10:14 (KST)[답변]

왜 삼국사기 기준일까요[편집]

왜 광개토태왕의 생몰년과 재위 기간을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적어놓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광개토태왕비문과 삼국사기는 1년의 오차가 있는데,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따라야 할 것은 응당 광개토태왕비문이 돼야 하는데 말입니다. 당대의 기록과 후대의 기록 둘 중의 어느 것이 신빙성이 있고 권위가 있는지는 상식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생각됩니다. 그리고 삼국사기 기준으로 하려면 제대로나 하시지 출생 연도(374년)는 광개토태왕비문, 사망 연도(413년)는 삼국사기에 따라 하신 것이 또 이해가 안갑니다. 광개토태왕이 18살에 391년에 즉위했으니 그의 탄생 연도는 374년이 되고, 그가 39세에 사망했다고 또한 광개토태왕비문에 기록돼 있으니 그의 사망 연도는 412년이 맞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3년상이 끝난 후 광개토태왕비가 세워진 연도(414년)와 3년이 차이가 설득력이 있습니다.--고구려인 (토론) 2009년 2월 21일 (토) 21:39 (KST)[답변]

고구려인 님의 독자적인 의견으로 이와 같이 고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광개토왕릉비의 내용과 《삼국사기》의 내용은 현재까지 학계에서 확실하게 결론을 내지 못하고 양립하고 있는 내용이며, 그렇기 때문에 광개토대왕 문서에서는 두가지 기년을 모두 표기하고 있습니다. 생년에 대해서는 그렇다 치고, 몰년이나 즉위년도에 대해서는 두가지 기록이 양립하고 있기 때문에 두가지 내용을 모두 표기하는 것이 올바릅니다. 그러므로 해당 내용은 되돌리겠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삼는 이유는, 광개토왕릉비를 기준으로 할 경우, 이전과 이후 왕의 기년과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광개토왕릉비의 기년을 기준으로 하게 되면, 고국양왕, 장수왕의 기년이 모두 어긋나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광개토왕릉비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학계의 확실한 결론이 나거나, 더 신빙성있는 근거가 없다면 해당 편집은 인정될 수 없습니다. 몰년에 대해서는 해당 지적이 합당하므로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의 기년을 모두 병기하겠습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2월 21일 (토) 22:28 (KST)[답변]
어이가 없군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광개토왕릉비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이 참으로 힘이 빠지게 하는군요. 여기 위키백과는 이런 곳이군요. 극단적인 실증주의로 정신이 무장되지 않는 한 정신 건강에는 좋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내 독자적인 의견이라구요? 말끝마다 출처를 달아야 내 의견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까? 단지 삼국사기의 연도와 비문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비문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말은 넌센스요, 몰상식입니다. 당대의 기록이 후대의 기록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제가 위에서 언급을 했을 텐데요? 도대체 님이 말하는 학계의 정확한 범위는 어느 정도입니까? 서울대 교수들의 주장입니까? 국편위의 주장입니까? 내 독자적인 의견으로 고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하면서 왜 몰년에 대한 지적은 받아들였는지 모르겠군요? 참으로 답답할 뿐입니다. --고구려인 (토론) 2009년 2월 22일 (일) 01:35 (KST)[답변]

너무 과민반응은 안하셨으면 합니다. xakyn님의 말은 광개토대왕비를 기준으로 하면 이후 왕들의 기년과 어긋나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절대적 기준'으로 하기 힘들다는 말이었습니다. 이건 '극단적 실증주의'가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보입니다. 광개토대왕비와 삼국사기를 비교하면 당연히 광개토대왕비가 당시에 직접 만들어진 자료니까 높게 평가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후 왕들과의 연대가 어긋나는 문제가 있는 이상 광개토대왕비가 무조건 맞다고 보기는 어렵겠습니다. xakyn님은 주로 전문가들의 논문과 논의를 예시로 드시는데, 고구려인님 께서도 그에 합당한 연구자료(예를 들어 삼국사기 년도가 틀렸고 광개토대왕비 년도가 맞다는 연구)를 첨부해 주시면 더 좋은 논의가 진행되지 않을까 합니다 adidas (토론) 2009년 2월 22일 (일) 01:39 (KST)[답변]

이건 이성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도대체 이해가 안갑니다. "높게 평가될 수 있겠습니다." 있겠습니다가 아니라 "높이 평가되어야만 합니다." 입니다. 삼국사기 연도가 틀렸고 광개토태왕비 연도가 맞다는 연구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없을까요? 연구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연구자들 대부분이 광개토태왕비문에 의거하여 고국양왕의 재위 기간을 1년 줄이고 장수왕의 재위 기간을 1년 늘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삼국사기의 연도를 쓰지요. 학계(국사 교과서, 일반 백과사전, 국편위)에는 합리적인 연구 결과가 반영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대다수가 그렇게 알고 있다고 해서 그 대다수의 지식이 맞는 것인지요? --고구려인 (토론) 2009년 2월 22일 (일) 01:49 (KST)[답변]
xakyn님의 의견이 틀릴 수도 있고 고구려인 님의 의견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가 사회의 상식에 앞서서 편집을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광개토대왕만 해도 사실 옳게 말하자면 '광개토왕'이겠지요. 하지만 국사 교과서를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의 백과사전에서 '광개토대왕'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만약 국사 교과서를 비롯해 대부분의 백과사전이나 역사 논문 등에서 해당 내용이 반영된다면 위키백과도 수정되어야 겠지만 그 반대는 곤란합니다. 아울러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의 연도가 서로 차이나는데 이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있으리라 생각되네요 adidas (토론) 2009년 2월 22일 (일) 01:57 (KST)[답변]

브리태니커 사전의 경우 광개토대왕의 표제어가 '광개토왕'으로 되어 있고, 년도에 관해서는 광개토대왕비를 따르고 있습니다. '영락태왕'대신 '영락대왕'이라는 명칭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음에서 제공하는 문화원형 백과사전이라는 곳은 광개토대왕을 표제어로, 재위기간은 391~413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412년까지라고 나와 있네요. 브리태니커와 마찬가지로 '영락대왕'이라는 명칭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산 엔싸이버에는 표제어는 '광개토대왕', 재위기간은 391~413, '영락대왕'이라는 칭호가 '생존 시 칭호'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백과사전만 대략 둘러봤는데 고구려인 님이 완전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xakyn님의 의견에 대해서도 명확히 알아봐야 겠습니다. 참고로 교육인적자원부에서 만든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2008년 판)에는 광개토대왕의 재위 기간이 정확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50페이지에 영락 9년을 399년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락 22년은 412년이라고 할 수 있겠죠. 고구려님의 말이 더 맞는 것도 같습니다 adidas (토론) 2009년 2월 22일 (일) 02:07 (KST)[답변]

근거 자료 고맙습니다. 한가지 덧붙이겠습니다. 다수의 상식이 틀린 것이어도 그것이 다수의 상식이기 때문에 옳다고 말해야 하는지요? 한국 금석문 종합 시스템 얘기가 나와서 아까도 언급을 했지만 아디다스님이 참고하신 백과사전들은 단지 지식을 종합하는 데에 그칠 뿐입니다. 종합하는 것은 그만큼 깊이와 질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위키백과가 왜 시작이 됐을까요. 기존의 백과사전은 잘못된 내용이 있어도 쉽게 고쳐지지 않은 반면 위키백과는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이기 때문에 잘못된 내용을 쉽게 고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고구려인 (토론) 2009년 2월 22일 (일) 02:16 (KST)[답변]
제가 판단하기로는 연도 문제에 있어서는 고구려인 님의 말이 설득력이 있지만 영락태왕 문제에 있어서는 설득력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위키백과의 장점은 고구려인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백과사전에 넣는 내용도 '맞는 말'을 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맞는 말' 역시 전문가의 검증이 필수적이고요. 여기에서 편집하는 사람들의 99% 이상은 '비전문가'일테니까요. 저만 해도 한국사도 아니고 서양사 학부생에 불과합니다. 고구려님께서 애초에 이런이런 학자의 이런이런 자료에 의거하여 이러이러하게 편집하겠다고 하신다면 편집하는 다른 사람 입장에서도 편하겠습니다. adidas (토론) 2009년 2월 22일 (일) 02:21 (KST)[답변]
이래저래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군요. 가만 놔두자니 틀린 내용이 버젓이 적혀 있어 답답할 뿐이고 고치자니 출처가 없다고들 해서 또 답답할 뿐이군요. --고구려인 (토론) 2009년 2월 22일 (일) 02:26 (KST)[답변]
블로그의 '가벼운 글'이 아니라 '백과사전'이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adidas (토론) 2009년 2월 22일 (일) 02:28 (KST)[답변]
토론 내용을 살펴보니 고구려인 님의 말씀에도 많은 근거도 있고 일리도 있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전의 편집처럼 《삼국사기》의 기년을 아예 삭제해 버리는 편집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직까지 《삼국사기》가 틀렸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2월 22일 (일) 03:07 (KST)[답변]

왜 꼭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하는지 모르겠군요. 광개토왕비의 기년이 완전히 맞다고 장담할 수 없다니요? 장수왕이 아버지의 비에 오기를 했다? 그럼 그 뒤의 영락 5년 을미, 6년 병신, … 등의 기년들은 다 어찌 설명하지요? 이 기년들만 보아도 광개토왕이 391년 집권하고 412년 붕어한 사실이 완벽히 증명되는 겁니다. 결코 비문의 오류가 아닙니다. 1차 사료가 2차 사료를 비판하는 것이 보편적 법칙인데, 2차 사료가 1차 사료를 비판하는 괴상한 시추에이션이 생기고 있습니다. 기년에 문제가 발생하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틀린 것입니다. 여기서 1차 사료가 2차 사료보다 더욱 신빙성이 높다는 것은 주지의 상식 아닌가요? 예를 듭시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본기와 백제 본기에서는 장수왕의 백제 정벌을 475년으로 기록해 놓고, 신라 본기에서는 474년으로 기록하고 475년을 ‘따로’ 기재해 놓습니다.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광개토왕 기년과 견줄 때 상당히 심각한 오류입니다. 또, 백제 본기에서 동성왕 붕어와 무령왕 집권 사이의 기년도 모순입니다. 동성왕 말년(501) 11월에 좌평 백가가 왕을 시해했다고 기록해 놓고는, 무령왕 집권도 501년이라고 하며 그해 501년 정월에 난을 일으킨 백가를 죽였다 하고 11월에 고구려를 쳤다고 기록했습니다. 아니, 501년 정월에 참살된 백가가 어떻게 같은 해 501년 11월에 다시 등장해 왕을 시해할 수 있죠? 백가가 부활이라도 한 걸까요? 게다가 왕이 시해당했다는 11월에 뜬금없이 고구려 공략이 나오네요. 둘 중 하나는 틀립니다. 반드시 한쪽의 기년을 삭제하고 다른 한쪽의 기년을 올리거나 내려야 하는 겁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이것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상당히 심각한 오류임을 알 수 있습니다. 500년과 501년의 기록은 매우 자세하니까요. 이 정도까지 왔으면 삼국사기의 오류는 심각한 겁니다. 삼국사기 ‘자체 내’에서도 이런 모순을 해결 못 하는 판에 하물며 광개토왕 기년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오류’는 ‘오류’이고, 그렇게 인정해야 하는 겁니다. 더구나 광개토왕 기년 오류는 그것을 바로잡아 주는 1차 사료까지 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삼국사기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 ‘광개토왕비의 기년이 맞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굉장히 몰상식한 발언이 나올 수 있으며 더구나 이를 ‘이성적 판단’으로 단정할 수 있습니까? 자체 내의 모순은 인정하면서, 오히려 1차 사료가 친절하게 해결해 주는 오류는 소위 ‘단정 불가능’ 운운하는 괴상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습니까? 참 친절하게도 광개토왕비는 연도와 함께 간지까지 기록해 주는군요. 삼국사기는 그런 게 전혀 없이 그저 연도만 기록할 뿐이지요. 이쯤 되면 어느 것이 오류가 나기 쉬운지, 더 정확한지는 결론이 난 겁니다.--고려태왕 (토론) 2014년 1월 07일 (화) 00:41 (KST)[답변]

몇 마디 덧붙입니다. 삼국사기는 1차 사료가 아닌 후대에 재편집된 사서들을 모아 쓰느라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왕들의 계보에서도 납득 못 할 기록이 있고 모순된 기술이 많으며 기년 오류도 종종 있습니다. 특히 연도를 적을 때 간지를 안 적어서 종종 엇갈리거나 모순된 기년이 한두 번쯤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오류들을 볼 때 ‘광개토왕비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건 100% 틀린 말입니다. 오히려 ‘삼국사기가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게 백 번 옳은 말이지요. 광개토왕 기년 문제는 친절하게도 1차 사료가 직접 나서서 해결해 주고 있습니다. 헌데 이런 판에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채 1차 사료의 신뢰성마저 깎아내리는 것은 역사를 하는 기본 자세가 아니라고 여기는 바입니다. 저는 ‘1차 사료를 2차 사료로 재단하는 해괴한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을 숙고하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려태왕 (토론) 2014년 1월 07일 (화) 01:54 (KST)[답변]

영락 태왕은 없습니다[편집]

광개토태왕은 영락 태왕으로 불린 적이 없습니다. 이는 영락과 태왕이 있는 문장을 잘못 끊어 읽었기 때문에 발생한 오해입니다. 二九登祚爲永樂太王恩澤△于皇天 이 문장은 열여덟 살에 왕위에 올라 시호를 영락태왕이라 했다. 은택은 하늘에 두루 미쳤으며.. 라고 해석된 적이 있으나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이는 끊어 읽기를 잘못한 것입니다. 제대로 된 해석은 열여덟 살에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이라 했다. 태왕의 은택은 하늘에 두루 미쳤으며..입니다. 연호에 제(帝)나 왕을 붙이는 것은 명나라 이후부터입니다. 명나라 태조 홍무제가 황제 한 명 재위 기간 동안에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도록 법을 만들었고, 그 뒤로 연호가 왕 이름처럼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비문의 건립 연도는 414년이니 명나라 때 만들어진 법칙을 여기에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고구려인 (토론) 2009년 2월 21일 (토) 21:50 (KST)[답변]

근거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광개토왕릉비 해석에 대해서 가장 공신력있는 소스를 제공하고 있는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서비스 중)의 내용은 영락태왕을 칭호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공신력 있는 근거가 아닌 이상, 해당 내용은 이설의 하나로 소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고구려인님은 믿을만한 출처조차도 대고 있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지적은 독자연구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원래 형태로 돌려 놓겠습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2월 21일 (토) 22:47 (KST)[답변]
고구려발해 학회의 번역본이 더 공신력이 있습니다만? 왜 님의 독자적인 의견으로 한국 금석문 종합 영상 정보 시스템의 내용이 공신력이 있다 하시는지요? 님이 말씀하시는 한국 금석문 종합 영상 정보 시스템은 말 그대로 종합적으로 한국의 금석문에 대해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발해 학회는 고구려와 발해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회이지요. 종합적으로 죄다 한국의 금석문에 대해 올리는 것과 고구려 발해의 금석문을 중심으로 하는 것 어느 것이 깊이 있는 연구일까요? 그리고 명나라 때부터 연호를 시호처럼 사용했다는 건 상식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이거까지 출처를 달아드려야 하는 것인지. --고구려인 (토론) 2009년 2월 22일 (일) 01:26 (KST)[답변]
너무 비꼬듯 말씀은 안하셨으면 좋겠고요, 한국금석문정보시스템과 고구려발해 학회 중 어느 것이 더 '신뢰할 만한 자료'에 가까운지 검증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만약 고구려인님 말대로 고구려발해학회가 광개토대왕 비문 연구에 있어서 금석문시스템보다 더 우월하다면 해당 내용을 고칠 수 있겠습니다. 일단은 이설을 병기하는 것으로 했으면 좋겠는데요 adidas (토론) 2009년 2월 22일 (일) 01:41 (KST)[답변]
:::: 명나라 때부터 연호가 시호처럼 쓰였다는 것을 증명하면 되는 건가요? 한 예를 들자면, 당 태종의 연호는 정관입니다. 그래서 그의 치적을 정관의 치라 하여 후대 황제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물론 정관의 치는 과장된 것이 많습니다만). 하지만 당 태종을 정관제 라고 부르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명 태조 홍무제의 시호는 홍무가 아니라 고황제 입니다만 그를 홍무제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 보세요. 그 이전 원나라 황제도, 송나라 황제도 어느 하나 연호가 시호처럼 사용된 예가 있으면 저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고구려인 (토론) 2009년 2월 22일 (일) 02:02 (KST)[답변]
제가 고구려발해학회 사이트에서 해당 내용을 찾아 주석으로 달아놨습니다 adidas (토론) 2009년 2월 22일 (일) 01:58 (KST)[답변]

개인적인 생각인데, 중국에서 1인 1연호제가 명나라 때 성립되었다고 그것을 한국사에 바로 적용하는 것도 적절할지는 의문입니다. adidas (토론) 2009년 2월 22일 (일) 02:28 (KST)[답변]

그럼 연호는 순수 한국의 것입니까? --고구려인 (토론) 2009년 2월 22일 (일) 02:29 (KST)[답변]
제 말은 중국사에서 이러이러하다고 해서 한국사에 일괄적으로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전류에서도 '영락대왕'(영락태왕은 또 아니네요)이라는 표현을 소개하고 있는 것은 물론, 고구려발해학회에서도 해당 부분에 주석을 통해 '기존의 영락태왕이라는 표현을 잘못이다'는 내용을 수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울러 영락태왕이라는 호칭이 잘못되었다는 연구도 해당 학회에서 검색하지 못하였습니다. 고구려인님께서 좀더 근거를 가지고 오신다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신뢰할 만한 근거 부족이 고구려인님의 편집이 되돌려지는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adidas (토론) 2009년 2월 22일 (일) 02:50 (KST)[답변]

태왕 호칭 관련[편집]

태왕의 호칭을 제외한다면 중국의 황제 호칭도 제외해야 되는거 아닌지요? 형평성이 안 맞다고 보여지는데요. --125.182.230.199 (토론) 2009년 2월 25일 (수) 18:41 (KST)[답변]

어떤 형평성이 안 맞는다는 것인지요? 가장 기본이 되는 《삼국사기》에 광개토왕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태왕이라는 용례로 사용된 금석문 또한 극히 드물기 때문에 태왕 호칭은 현재까지 정식 호칭으로 인정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 중국의 황제 호칭은 기본이 되는 사료에도 모두 적혀 있고, 금석문에서도 수없이 반증되고 있습니다만. --Xakyntos (토론) 2009년 2월 25일 (수) 18:54 (KST)[답변]

광개토왕의 후연 공격 기사의 문제[편집]

편집에 출처로 제공된 기사는 광개토대왕 북경까지 공격했다입니다. 그러나 해당 기사는 아직 학계에서 확정적으로 발표된 논문도 아니고, 이제 곧 논문을 쓰겠다는 인터뷰 기사로서 학계에서 검토가 되지 않은 내용입니다. 참고자료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백과사전의 본문을 바꿀 수 있는 근거는 아닙니다. 게다가 해당 기사는 기본적인 사실도 틀리고 있어서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당시 후연의 수도는 용성으로, 지금의 랴오닝 성 조양시입니다. 연군은 후연의 수도가 아니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편집을 취소합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4월 8일 (수) 09:59 (KST)[답변]

광개토태왕이 병사했나요?[편집]

분류에 광개토태왕이 병사한 사람으로 돼 있네요. 이상하군요. 의문입니다. 그 어떤 기록에도 광개토태왕이 병사했는지, 사고사했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는데 떳떳하게 병사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군요. 편집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구려인 (토론) 2011년 2월 14일 (월) 19:42 (KST)[답변]

고구려연구가 김용만의 주장은 정설이 아닙니다.[편집]

고구려인 님께서 하신 편집은 일개 학자일 뿐인 김용만의 주장에 지나치게 편중된 것으로, 명백하게 비중립적인 편집입니다. 어떻게 비중립적이고, 이를 어떻게 바꿔 서술하였는지를 이 토론 주제를 통해 밝힙니다. --Xakyntos (토론) 2012년 2월 16일 (목) 22:52 (KST)[답변]

* 광개토왕이 즉위 직후 제일 먼저 정벌한 것은 거란이었다. 391년 9월... (후략)

→거란 정벌에 대한 정보는 오로지 《삼국사기》에만 등장합니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명백하게 392년에 벌어진 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같은 해에 백제와의 전쟁 기록은 백제측 사료와 교차검증이 되므로 392년에 벌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거란 정벌을 391년으로 옮겨놓는 주장은 김용만 개인의 견해일 뿐, 사료로 증명되지도 않고 학계 일반의 의견과도 전혀 다릅니다. 대표적으로 일반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백과사전들이라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모두 거란 정벌을 392년의 일로 적고 있습니다.

  •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백신을 신라, 혹은 강원도 내륙 교통로에 자리 잡은 세력이라고 본다. 그러나 백신을 신라라고 볼 근거는 부족하다. 신라라는 표현 대신 백신이라는 낯선 표현을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백신을 특정 지역으로 볼 근거도 부족하다. 특정 지역이 아닌 특정 부족, 특정 국가의 정벌에 대해 다룬 비문의 다른 기록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강조한 부분을 보다시피,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는 여러 학설에 대해서 김용만 개인이 비판한 것을 그대로 적고 있습니다. 이는 김용만 개인의 견해일 뿐 학계 공식 의견이 아니며, 백과사전에 이런 식의 문체를 적는 경우는 없습니다. 설사 김용만의 견해가 해당 학설을 완벽하게 대체하고 학계의 공식 견해가 되었다고 해도 이러 이러한 견해도 있으나 학계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수준에서 서술될 일이지 그것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식으로 서술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이런 것이 가장 심각하게 중립성을 해치는 편집입니다. 해당 사용자께서는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많은 학자들은 64개성, 1,400촌이 광개토왕이 일평생 빼앗은 성과 촌의 수라고 본다. 그러나 광개토왕은 백제 정벌 때 58개 성을 빼앗았으며, 영락 8년 조에는 1개의 성을, 영락 17년 조에는 5개의 성을 빼앗았다(영락 17년까지 64개성). 영락 10년조에는 4개의 성을 격파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영락 20년 조에 보이는 여성(餘城)까지 합친다면 64개 성이 넘는다. 따라서 64개 성, 1,400촌은 광개토왕 총 업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동부여 정벌에서 얻은 전과라고 이해해야 한다.

→ 역시 김용만 개인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학계의 일반적인 해석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을 일일이 싣고 있습니다. 명백한 비중립적 편집이며, 김용만의 이러한 주장도 있다는 식의 편집 이상은 불가합니다.

소소한 편집을 했습니다.[편집]

토론을 열어보니 열띤 논의가 오간 항목이라 소소한 편집이지만 그 이유를 밝혀둡니다.


1. 인용 규칙에 맞게 수정

- 출판사, 출판연도 등을 덧붙이고

- 동일한 책을 계속 인용하고 있으므로 '위의 책' '앞의 책' 등의 용어로 다듬었습니다.


2. 특정 연구자의 주장이 지나치게 강조된 부분을 중립적으로 수정

- 내용을 고친 부분은 없고 본문을 각주로 옮기거나 불필요한 각주를 삭제했습니다.


숙신 관련 부분

  • 한편 398년에는 숙신을 정벌하여 동북 국경 지대를 안정시켰다. 각주: 김용만,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199쪽 : 이 진술이 통설로 제시되어 있으므로 불필요한 각주를 삭제.
  • 다만 이 기록은 해석하는 이에 따라 강원도 방면의 군소세력, 또는 신라를 정벌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각주: 김용만은 이러한 해석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김용만,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194~195쪽 : 이 진술은 소수설로 제시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해 비판적인 특정 연구자의 입장을 각주로 강조할 필요가 없음. 각주 삭제.


염수 관련 부분

  • 염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으며, 시라무렌강 상류의 염호인 광제호 일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각주: 김용만,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146~147쪽 : 통설을 소개하고 있으므로 불필요한 출처를 삭제.


동부여 관련 부분

  •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공격하여 굴복시켰다. : 이 서술 외의 나머지 진술은 소수설이므로 각주로 옮겼음.


--Aevum (토론) 2012년 2월 27일 (월) 04:19 (KST)[답변]

왕 칭호 문제[편집]

의견 우선 위의 분들의 의견에 따라 광개토왕으로 하였지만 언제까지 대왕이나 태왕이 아닌 왕으로만 칭호는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저는 태왕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KBS에서 하던 드라마 광개토태왕은 시작 전에 원래 광개토대왕으로 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태왕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여 바꾸었지요. 실제 광개토태왕비에도 광개토호태황이라고 명시되어 있다고 하네요 그리고 대왕이라는 칭호는 제후국의 임금에게 쓰는 표현인데 고구려는 한번도 중국에게 굴복한 적이 없었으므로 광개토 태왕이 맞는 표현입니다.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1.237.218.191(토론 | IP 정보)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나중에 추가하였습니다.

반대 여러모로 잘못 알고 계십니다. 드라마 제작진 본인들조차도 광개토대왕에서 태왕으로 이름을 변경한 것에 대해 단지 이렇게만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출처1, 출처2
이에 대해 ‘광개토태왕’ 관계자는 뉴스엔에 “대중들에게 익숙한 표현인 ‘광개토대왕’으로 제목을 확정지었지만 추후 논의결과 ‘광개토태왕’이 더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돼 제목을 변경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1일 서울 마포구 서울가든호텔에서 진행된 '광개토태왕' 기자간담회에서 김종선 PD는 "태왕은 수많은 종족들을 총괄하는 '왕중의 왕'이라는 의미"
어디에도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했다는 말은 없군요. 실제 학계에서의 견해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학계에서 일부 학자들이 고구려의 고유 칭호로 태왕이 존재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그 주장이 주류 학설로 인정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죠. 또한 광개토왕릉비에서도 태왕과 왕은 아무런 구분 없이 혼용되고 있습니다. 한 번 링크를 따라가 보시면 광개토왕릉비문을 직접 보실 수 있으니 살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대왕이라는 칭호가 제후국의 임금에게 쓴다는 것 역시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물론 고구려가 한 번도 중국에게 굴복한 적이 없다는 것도 잘못된 주장이십니다. 단적인 예로 광개토왕의 조부이신 고국원왕은 중국의 통일 제국도 아니고 혼란기에 세워진 변방 정권 중 하나인 전연에게 철저하게 굴복한 역사가 있습니다. 광개토왕 이후의 역사 역시 중국에 굴복하지 않았다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장수왕 시기에 가장 많은 기록이 바로 중국에 조공을 보낸 기록이거든요. 물론 이 조공이 일방적으로 굴복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제후국임을 자처했음은 역사학자들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광개토왕의 명칭을 태왕이라 하길 원하신다면, 적어도 역사학계에서 주류 학설로 인정되기까지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반박을 마치겠습니다.--Xakyntos (토론) 2013년 1월 6일 (일) 20:20 (KST)[답변]

다른걸 다 떠나서 위키백과의 '중립성'만 고려해보면 답이 나올 것 같네요. '태왕'이라는 호칭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구려의 관점, 아울러 고구려의 후손국가의 관점에 불과합니다. 세종대왕의 표제어가 조선 세종이듯, 광개토왕을 유지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adidas (토론) 2013년 1월 23일 (수) 12:11 (KST)[답변]

--183.100.195.87 (토론) 2013년 1월 27일 (일) 12:52 (KST)[답변]

완료 알겠습니다. 그대로 두는게 좋겠습니다. 그게 옳은 것 같네요. 그런데 역사 연구하시는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다고 직접 들어서요. 거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어쨌든 반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1.237.218.191(토론 | IP 정보)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나중에 추가하였습니다.

토론없이 편집 취소는 하지마십시오[편집]

광개토대왕은 동호족 거란족 말갈족등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한민족을 이주시키는 식민 정책을 펴서 (마치 알렉산더대왕처럼) 주변 부족들을 고구려인으로 동화시켰습니다.그리하여 대조영이 발해를 세울때도 말갈족과 여러 부족들은 피지배민족으로서 존재했습니다.Koryozaidan (토론) 2017년 6월 13일 (화) 04:55 (KST)[답변]

1. 동호족 거란족 말갈족등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한민족을 이주시키는 식민 정책을 폈다는 근거를 제시하십시오. 주변 부족들을 고구려인으로 동화시켰다는 근거도 제시하십시오. 현존하는 어떤 기록, 연구에도 그런 내용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시지 않으면 당연히 취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논문, 저서 아니면 적어도 신문기사 수준의 근거를 제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근거가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에게 검토를 받고 학계에서 어느 만큼 지지되고 있는지를 보여주십시오. 백과사전에 본문으로 표시될 내용이라면 적어도 정설이라는 근거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소수설은 소수설로서 따로 표기해야 하는 것이 위키백과의 원칙입니다. 위키백과:비주류 이론을 참조하십시오.
2. 그리고 위키백과는 백과사전입니다. 광개토왕 문서는 백과사전 다운 문체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최소한 문맥은 맞춰서 내용을 서술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냥 중간에 마음대로 글을 써 놓으면 백과사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주의하십시오.--Xakyntos (토론) 2017년 6월 13일 (화) 09:34 (KST)[답변]

편집을 취소하려면 광개토대왕이 만주를 정복하지않았고 그 지역의 여러 부족들을 정복하지않았으며 동화 정책을 피지않았다는 근거나 자료를 제시하고 취소하시오.Koryozaidan (토론) 2017년 6월 13일 (화) 13:36 (KST) 광개토대왕이 여러 부족들을 정복하고 동화 정책을 핀건 보편적으로 학교 교과서에 나와있는 사실입니다.그래서 발해 대조영때 말갈족과 여러부족이 피지배민족이였으며 대조영도 말갈이라는 설도 있습니다.그럼 광개토대왕이 중국 지역을 정복하지 않았고 주변 부족들도 정복하지않았다고 말하고 싶은겁니까?그쪽은 보면 많은 위키백과의 활동이 항상 중국쪽의 옹호적인 편집취소만 계속하는걸로 의심되는데 위키백과는 백과사전인 동시에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편집할수있는 곳입니다.마치 사적 재산처럼 사용하지마세요.조심하십시오 Koryozaidan (토론) 2017년 6월 13일 (화) 13:23 (KST)[답변]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계십니다. 저는 광개토왕이 말갈, 거란 등을 정복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귀하께서 식민정책, 동화 같은 근거 없는 말을 써서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을 근대 식민제국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기에 되돌리는 것입니다. 현존하는 어떤 기록, 연구에도 광개토왕이 한민족을 이주시키는 식민정책을 펼쳤다거나 주변부족을 고구려인으로 동화시켰다는 주장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위험한 제국주의적 주장에 대한 출처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화시켰다는 귀하의 말에 대한 가장 완벽한 반박은 바로 귀하께서 다음 줄에 제시하고 계십니다. 말갈은 고구려가 망할 때까지도 동화되어서 고구려인이 되지 않았고 대조영 때에도 피지배층으로 고구려인과 구분되고 있습니다. 이걸 동화시켰다고 표현한다면 일제강점기 조선인도 동화된 겁니다.--Xakyntos (토론) 2017년 6월 13일 (화) 14:50 (KST)[답변]

고구려는 제국이였습니다.고대국가역사가 제국주의아니라는소린첨듣네요.고대국가역사에 제국주의 운운하는게 말이안되는거죠.제가 사학자교수입니다.재단이사도맡고있습니다.대한민국과 중국역사글에 관련된 집요한중국측옹호편집에대한 이유를 설명하시오.개인적으로 직접보고 이야기하고싶을정도로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안되네요.Koryozaidan (토론)

충분한 토론을 거치고 시간을 주고 편집을 취소하십시오.일방적인 편집취소는 그만두십시오.개인적으로 고대국가역사에서 갑자기 제국주의적 발언 운운하는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꼭 제국주의냐 아니냐를 따지고 고구려같은 고대 국가를 판단할수밖에 없다면 고구려는 제국주의적 성향을 가진 고대 국가가 맞습니다.광개토대왕이 만주 지역을 정복하지 않았고 주변 부족들을 정복하지 않았다고 말하려한다면 그 근거를 제시했으면 합니다.Koryozaidan (토론) 2017년 6월 13일 (화) 15:41 (KST)[답변]

1. 고구려가 제국이라 평가되는 것과 식민정책, 동화 같은 근대 제국주의적인 요소를 아무런 근거 없이 서술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고대국가에 제국주의 운운하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하셨는데, 저야말로 고대사에 한민족으로의 동화 정책 같은 말씀을 하시는 귀하께 그대로 돌려드려야 겠네요. 고대사에 한민족이 어디에 있습니까? 민족주의는 근대의 산물입니다. 일종의 원(原) 한민족인 예맥, 을 말하는 경우는 있어도 고대사에서 한민족으로의 동화 운운하는 것은 제가 아는 어떤 역사학자도 하지 않는 위험한 발언입니다.
2. 재차 출처를 요구합니다. 한민족을 이주시키는 식민정책, 피정복민을 동화시켰다는 발언의 출처를 제시하십시오. 벌써 몇 번째 출처 제시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묵살할 시에는 확실한 징계를 요청하겠습니다.
3. 대한민국과 중국역사글에 관련된 집요한중국측옹호편집이라는 말씀은 명백한 인신공격이며, 자기 혼자만의 생각을 근거로 상대의 공인된 출처에 따른 편집을 매도하는 발언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역사학자라면 제가 하는 편집이 역사학계의 공인된 정설 및 통설에 따른 것임을 아실텐데요. 하다못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나 두산백과, 브리태니커라도 찾아보십시오. 저는 적어도 이런 백과사전에서 설명되는 수준에서 벗어나는 편집을 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귀하가 지금 하고 계신 식민 정책, 동화 같은 말은 저 백과사전들은 물론이고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귀하가 정말 사학과 교수인지는 알 바 아니지만 정말 역사학자시라면 학계의 연구 성과를 먼저 살펴보심이 옳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의하십시오.--Xakyntos (토론) 2017년 6월 13일 (화) 16:54 (KST)[답변]

인신공격이라면 고소를 하십시오.무고죄로 대응을 하겠습니다.본인이 생각하기론 중국측의 옹호적인 편집이 보였습니다. 낙랑군의 글도 그러하였습니다.자꾸 일방적으로 근거를 제시하라고만 하지말고 이의를 제기한 쪽인 그쪽이 편집 취소를하는 근거와 증거를 그쪽이 먼저 제시하십시오.그럼 그에 맞는 근거와 증거를 제시합니다.Koryozaidan (토론) 2017년 6월 13일 (화) 17:05 (KST)[답변]

저는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한민족을 이주시키는 식민정책 피정복민을 동화시킴이라는 내용이 어떤 사료에도 연구에도 없다고 분명 말씀드렸을텐데요. 이러이러한 것이 근거가 없다고 말씀 드렸으면 적어도 어떤 책에 나온다거나 어떤 기록에 있다고 답변이라도 하셔야 하는 겁니다 교수님. 역사학자라면 이 정도 토론 원칙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왜 근거가 없다는 말에 대해서 아무런 답변도 없으신가요?--Xakyntos (토론) 2017년 6월 13일 (화) 17:36 (KST)[답변]
피지배자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한민족을 이주시키는 식민정책을 통한게 맞습니다.비슷한 예로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이 있습니다.아니라는 사료가 있습니까? 본인이 한말이 잘못됬다는 근거를 제시하십시오.그래서 발해 건국시 피지배민족에 다수의 말갈인이 포함되어있었습니다.지금 문제가 아다르고 어다른게 아니고 그쪽이 주장하는건 광개토대왕이 만주 지역 정벌을 안했다고 하는 말로 보이는데요?Koryozaidan (토론) 2017년 6월 13일 (화) 19:16 (KST)[답변]
역사에서 근거 없이 당연히 인정되는 사실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근거를 보여달라늘 건 저인데 갑자기 적반하장 격으로 아니라는 기록을 가져오라는 건 무슨 경우인가요? 역사학자 맞으세요? 토론의 기본도 모르시나요?--Xakyntos (토론) 2017년 6월 13일 (화) 19:25 (KST)[답변]
근데이분은 사학자라는데 님은아마추어아닌감하루죙일 편집만하는거같은데정체가궁금한데요 글고자세히보니까뭐 틀린말도아닌데 나같으면 대학교수가고소한다그러면똥줄탈꺼같네 대학교수분한테토론의기본묻는거보면 뭐대단한사람인가본디내가성균관대학사학과16학번김현준인데전화번호알려줄께요 전화해봐요토론의기본알려주게Germanconqueror (토론) 2017년 6월 14일 (수) 03:06 (KST)[답변]
이의를 먼저 말해놓고 증거 자료없이 본인의 생각을 제시하면 이해할수없습니다.악의적인 편집 취소를 반복하는것에 대해 이유를 설명하시오.위키백과는 문서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편집이 가능합니다.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설명하는것은 이 문서에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옵니다.Koryozaidan (토론) 2017년 6월 13일 (화) 20:02 (KST)[답변]
백과사전 내에서는 백:신뢰백:독자 연구 금지 등을 준수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규칙이 잘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되돌려지는 겁니다. —Jerrykim306 토론기여 2017년 6월 13일 (화) 20:06 (KST)[답변]

광개토대왕의 위키백과 이름[편집]

2019년 1월 24일의 삭제 신청 이의[편집]

--122.46.104.84 (토론) 2019년 1월 24일 (목) 13:37 (KST)[답변]

대체 왜 이 문서가 삭제되어야 하는지 의문. 정당한 이유를 제시하시오.

외부 링크 수정됨 (2020년 4월)[편집]

안녕하세요 편집자 여러분,

광개토왕에서 1개의 링크를 수정했습니다. 제 편집을 검토해 주세요. 질문이 있거나, 봇이 이 문서나 링크를 무시하기를 바라신다면 간단한 자주 묻는 질문에서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세요. 다음 변경사항을 적용했습니다:

봇의 문제를 수정하는 것에 관해서는 자주 묻는 질문을 참조해 주세요.

감사합니다.—InternetArchiveBot (버그를 제보하기) 2020년 4월 4일 (토) 12:25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