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옹주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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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옹주
貞淑翁主
조선 선조의 옹주
신상정보
출생일 1587년 3월 19일(1587-03-19) (음력)
출생지 조선 한성부 창경궁
사망일 1627년 11월 5일(1627-11-05)(40세) (음력)
부친 선조
모친 인빈 김씨
배우자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자녀 5남 4녀
신면 · 신변 · 신경 · 신최 · 신향
신혜순 · 신경강 · 신순강 · 신지강

정숙옹주(貞淑翁主, 1587년 4월 26일(음력 3월 19일) ~ 1627년 12월 12일(음력 11월 5일))는 조선의 왕족이며, 선조의 3녀이자 서3녀로 인빈 김씨 소생이다.

생애[편집]

1587년(선조 20년) 3월 19일, 선조(宣祖)와 당시 종2품 숙의(淑儀)였던 인빈 김씨(仁嬪 金氏)의 셋째 딸로 창경궁에서 태어났다.[1]

1595년(선조 28년),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봉호를 받았다. 1599년(선조 32년) 신흠의 아들인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과 혼인하였고, 2년후에 출궁하여 사저에서 생활하였다.[2] 신익성과의 사이에서 13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 중 5남 4녀만이 성장하였다.

1613년(광해군 5년), 시아버지인 신흠계축옥사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자, 정숙옹주는 시어머니의 뒤를 따라 거적을 깔고 단식하기도 하였다. 이후 신흠이 유형에 처해지면서 가계가 곤궁해지자 옹주는 정성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봉양하고, 남편 신익성의 누나가 아버지의 유배지에 문안을 가던 도중 병에 걸려 죽자,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해 주었으며, 신익성의 여동생 또한 돈독하게 보살펴 주었다.[1]

근검하고, 자녀교육에 엄했으며 인목대비가 유폐되자 궁중에 발길을 끊었다.[1]

1627년(인조 5년) 11월 5일,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3] 광주(廣州) 사부촌(沙阜村)에 장사를 지냈고, 이후 남편 신익성과 합장되었다.

정숙옹주 제문[편집]

동양위 신익성 (1588-1644)
정숙옹주의 남편이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를 주장하였다.

남편 신익성은 정숙옹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직접 제문을 작성하였다.

옹주가 나에게 이르기를,
“길흉은 번갈아 생기는 법인데 우리가 오랫동안 곤궁했으니 이제부터는 마땅히 형통할 것입니다.
 십수 년을 더 산다면 우리 자녀들이 모두 시집장가를 갈 것이니, 이 또한 인간 세상에서의 복입니다.”

라고 하였소.

그런데 조물주는 가득 찬 것을 시기하는지라 천리의 어긋남이 이에 이르고 말았다오.
막중한 제사를 나는 누구와 함께 지내겠으며, 자녀들의 혼사를 나는 누구와 함께하겠소?
슬픔과 기쁨을 나는 누구와 함께 나누겠으며, 문안 여쭈는 일을 나는 누구와 함께하겠소?
지금 이후로 삶이 즐거울지 아닐지 상상할 수 있다오.
옹주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나는 실의하여 살 마음이 없어졌소.
그러나 위로는 노모를 걱정하고 아래로는 아이들이 염려되며
또 옹주의 장례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억지로 밥을 먹고 스스로 슬픔을 억눌러가며 뭇 일들을 처리하고 있소.
(중략)
 
— 죽은 아내 정숙옹주에 대한 제문〔祭亡室貞淑翁主文〕 중 일부

《낙전당집》, 신익성 지음

가족 관계[편집]

각주[편집]

  1. 〈정숙옹주묘지명〉
  2. 선조실록》 119권, 선조 32년(1599년 명 만력(萬曆) 27년) 11월 26일 (신미)
  3. 인조실록》 17권, 인조 5년(1627년 명 천계(天啓) 7년) 11월 6일 (기사)
    정숙옹주가 졸서하여 친제를 정지하다
    정숙옹주(貞淑翁主)가 졸서(卒逝)하였으므로 친제(親祭)를 정지할 것을 명하였다.
  4. 정묘호란의 패전의 책임을 묻고 처형됨
  5. 숙종 국구(國舅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민유중(閔維重))]의 형
  6. 구사맹의 외손자이자 인조의 이종 사촌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