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나리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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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나리아키라

시마즈 나리아키라(일본어: 島津斉彬)는 에도 시대 후기부터 에도 막부 말기까지 사쓰마 번 (가고시마 현)의 제11대 번주 (재임:1851년 ~ 1858년))이자 시마즈 가문의 제28대 당주로 있었던 인물이다.

약력[편집]

사쓰마 번의 제10대 번주인 나리오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쓰마 번의 부국 강병을 성공시킨 막부말의 명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막부말의 인재를 길러낸 인물이기도 하다.

성장과정 및 유라 소동[편집]

1809년 3월 14일, 시마즈 나리오키의 장남으로 사쓰마 번주의 에도 저택에서 태어났다. 당시 현명한 부인으로 유명했던 어머니 가네코(周子)는 당시로는 드물게 나리아키라를 비롯한 3명의 아이를 유모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양육하였다. 또, 증조부이자 제8대 번주인 시마즈 시게히데의 영향을 받아 난학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주위의 눈에는 서양문물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여 얄궂게도 사쓰마번의 내분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나리아키라가 영주가 되면 시게히데처럼 사치를 하여 번재정이 더욱 곤궁하게 될 것이 염려된 나리오키는 나리아키라가 40살이 넘도록 후계자로 삼지 않았다. 그리하여, 가신(家臣)의 우두머리였던 즈쇼 히로사토(소사에몬)나 나리오키의 측실인 오유라 등은 오유라가 낳은 나리아키라의 이복동생 시마즈 히사미쓰의 옹립을 획책했다. 나리아키라의 측근들은 히사미쓰와 유라의 암살계획을 세웟지만, 정보가 사전에 누설되어 주모자 13명은 할복 자살, 그들과 연좌된 약 50명이 낙향 및 근신에 처해졌고, 그 중 4사람이 필사적으로 탈출하며 시게히데의 아들이자 후쿠오카 번 번주로 있던 구로다 나가히로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나가히로의 중재로 나리아키라와 친분이 있던 막부의 로주(老中) 아베 마사히로, 우와지마번주인 다테 소우죠우, 후쿠이 번마쓰다이라 요시나가 등이 사태수습에 노력했다. 이렇게 하여 1851년 2월에 나리오키가 물러나고, 나리아키라가 제11대 지방 번주로 취임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마즈 가문의 내분을 오유라 소동으로 부르고 있다.

번주 취임 이후[편집]

영주로 취임하자마자, 번의 부국강병을 위해 서양식 조선(造船), 반사로 및 용광로의 건설, 지뢰,수뢰,유리,가스등의 제조를 비롯한 서양식 공업을 일으켰다. 도사 번 출신으로 미국으로 표류했다가 귀국한 나카하마 만지로(존 만지로)를 불러들여 인세이 원년(1854년)에 서양식 군함인 쇼헤이마루(昇平丸)를 건조해 도쿠가와 막부에 헌상하였다. 그때 일장기를 일본배에 걸어야 한다고 막부에 제안하여 그 해에 막부에서 이를 정식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일장기는 일본의 국기가 된다. 범선용 범포를 자급하기 위해 면포 방직 사업을 일으켰다. 또, 하급무사 출신의 의사인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를 등용하여 그들을 통해 막부의 정치에 관여하기도 한다.

나리아키라는 마쓰다이라 요시나가(후쿠이 번주), 다테 소우죠우(우와지마 번주), 야마노우치 요도(토사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미토 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쓰(오와리 번주)등과 함께 영주가 되기전부터 교류를 하고 있었다. 나리아키라는 그들과 함께 막부의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로주아베 마사히로에게 막부에 의한 정치개혁을 호소했다. 특히 미국의 페리 함대가 나타난 이후의 난국을 타개하려면 공무합체의 길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 1853년 11월에 양녀인 덴쇼인과 함께, 현재의 일련정종파 총본산인 다이세키지에 귀의했다.

1857년아베 마사히로의 사망 이후 1858년다이로가 된 이이 나오스케와 쇼군의 후계자 문제로 정면대립하였다. 제1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병약하고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소우죠우 외 4명의 영주와 前 미토번주인 도쿠가와 나리아키 등은 차기 쇼군에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옹립하기 위해 덴쇼인을 고노에(近衛)가문의 양녀로 보낸 후 이에사다의 정실부인으로 시집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이 나오스케는 이에 대항하여 기슈번주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내세웠고 다이로의 지위를 이용해 강권을 발동해 반대파를 탄압한 안세이 대옥 사건을 일으킨다. 그 결과, 도쿠가와 요시토미가 제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로 등극하여 나리아키라 등은 후계자 다툼에서 패배하게 된다.

최후[편집]

나리아키라는 이에모치의 승계에 항의하기 위해 병사 5000와 함께 상경할 예정이었으나 1858년 7월 8일, 가고시마 성에서 출병을 위한 연병 관람 중 발병하여, 7월 16일에 사망했다. 향년 50세.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적자가 모두 요절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아버지인 나리오키나 동생 히사미쓰 , 또는 그들의 지지자들의 음모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나리아키라가 죽은 후 그의 유언에 따라 히사미쓰의 장남인 시마즈 다다요시가 뒤를 이었다.

인물·일화[편집]

  • 나리아키라가 도입한 서양문물의 일부는 현재 상고 집성관(가고시마 현)에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유리공예가 특히 유명하여 사쓰마의 다홍색 유리는 다이묘 사이에서 선물로 주고받을 정도로 진귀하게 여겨졌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그 기술은 단절되어 그 당시의 작품은 희소가치를 지닌 골동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에 기술을 복원하는 데 성공하여 현재 사쓰마 키리코(薩摩切子)라는 이름으로 생산되고 있다.
  • 당시의 다이묘 중에서 가장 먼저 사진을 찍은 인물이라고 한다. 또 촬영 기술 자체에도 관심을 갖고 성의 사진을 직접 찍어보는 등 왕성한 호기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가 촬영한 사진은 당시 기술을 감안한다면 양호한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 마쓰다이라 요시나가(후쿠이 번주), 야마노우치 요도(도사 번주), 다테 소죠(우와지마 번주) 등과 함께 에도막부 말기의 4현후라고 칭해졌다.
  • 일본 국기인 일장기의 게양을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이라고 한다.
  •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유신 지사들에게 존경을 받아 그의 뒤를 따라 죽으려는 이가 있었을 정도이다. 메이지 시대를 이끌 인재를 길러낸 것도 그의 공적이라 할 수 있다.
  • 딸인 덴쇼인과 함께 시즈오카현의 다이세키지(일련정종총본산)에 시주를 하기도 했지만, 그 교리를 진심으로 따랐는지는 연구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전 임
시마즈 나리오키
제11대 사쓰마 번 번주
1851년 ~ 1858년
후 임
시마즈 다다요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