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모토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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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Motonari Mouri.jpg
시대 센고쿠 시대
출생 메이오 6년 3월 14일 (1497년 4월 16일)
사망 겐키 2년 6월 14일(양력 1571년 7월 6일)
개명 쇼주마루(松寿丸, 유년기 이름)→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별명

통칭:쇼유지로(少輔次郎)

휘명:거지 젊은 주군(乞食若殿), 모신(謀神)
계명 大聖寺殿東陽宗岱大居士
묘소 다이쓰인 (大通院, 히로시마 현 아키타카타 시)
관위 종사위상 우마노카미 지부쇼유 무쓰노카미, 증정일위 (従四位上 右馬頭 治部少輔 陸奥守、贈正一位)
주군 아마고 쓰네히사오우치 요시타카→독립
씨족 모리 씨(毛利氏)
부모 아버지:모리 히로모토(毛利弘元),
어머니:후쿠하라 히로토시(福原広俊)의 딸
형제 모리 오키모토(毛利興元),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기타 나리카쓰(北就勝), 아이오 모토쓰나(相合元網), 미쓰케 모토우지(見付元氏), 여동생(다케다(武田)씨의 부인)
아내

정실:묘큐(妙玖) (깃카와 구니쓰네(吉川国経)의 딸)

측실:노미노오카타(乃美大方), 미요시 히로타카(三吉広隆)의 딸, 나카노마루(中の丸)
자녀

모리 다카모토(毛利隆元),
고류쓰보네(五龍局, 시시도 다카이에 부인),
깃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니노미야 나리토키(二宮就辰),
호이다 모토키요(穂井田元清),
모리 모토아키(毛利元秋),
이즈하 모토토모(出羽元倶),
아마노 모토마사(天野元政),
스에쓰구 모토야스(末次元康),

고바야카와 히데카네(小早川秀包)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모리 모토나리[*] 1497년 4월 16일 ~ 1571년 7월 6일)는 전국 시대 후기에 활약한 센고쿠 다이묘이다. 아키(安芸)의 일개 호족에서 시작해 주고쿠 지방 대부분을 손에 넣은 전국 시대 최고의 명장 중 하나다. 용의주도한 책모를 거듭해 전략, 전술 양면의 승리를 이끌어낸 희대의 책략가로 명성이 높다.

본래 성(姓)은 오오에(大江) 씨로 가마쿠라 막부의 창업 공신인 오오에노 히로모토(大江広元)의 4남 모리 시게미쓰(毛利季光)를 조상으로 한다. 시게미쓰는 효죠슈를 지냈다. 데와 지방의 사가와(寒河江) 가문, 미카와(三河)의 사카이(酒井), 이나바의 모리(毛利), 에치고의 호조(北條)[1] 씨 등도 같은 오오에 가문의 일족이라고 한다.

아키국(安芸国) 요시다고리야마성(吉田郡山城)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왔으며, 모리 히로모토(毛利弘元)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쇼주마루(松寿丸)이며 통칭 쇼노지로(少輔次郎). 본처 생전에 첩을 두지않은 애처가였고, 깃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등 기량이 자기 못지않은 아들들까지 두었으며, 비록 실화는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세 화살의 교훈(三矢の訓)[2]' 이야기의 주인공으로도 일본인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다.

생애[편집]

가독상속[편집]

1497년(메이오 6년) 음력 3월 14일, 아키(安芸)의 호족 모리 히로모토(毛利広元)와 후쿠바라(福原) 가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쇼주마루(松寿丸)였다. 태어난 곳은 외가인 스즈오 성(鈴尾城)이다. 현재 이곳에 모리 모토나리 탄생비가 세워져 있다.

1500년(메이오 9년) 무로마치 막부오우치 가문 간의 권력다툼에 말려 아버지 히로모토가 정계은퇴를 해야했다. 일본어로 은거(隱居, 訓:인쿄우)라 하는 가권 세습 절차를 거쳐 적장자이자 모토나리의 친형인 모리 오키모토(毛利興元)에게 가권이 양도됐다. 아비 히로모토는 차남인 모토나리와 함께 본성인 요시다고리야마 성을 떠나 다지히사루가케 성(多治比猿掛城)으로 옮겨갔다.

1501년(분키 원년) 의가 좋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3년 후 아버지 히로모토도 과음으로 세상을 떴다. 부친 사망 때도 아직 8살에 불과했던 모토나리는 별일없이 형의 보호하에 성에서 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부모없이 영지와 성의 유지 운영이 쉽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가신인 이노우에 모토모리(井上元盛)가 어린 주군을 얕보고 영지를 횡령해, 가뜩이나 넉넉치 못한 처지에 뒷수습까지 남의 손에 맡겨야 했다. 이 궁핍한 생활을 지탱해 준 것은 오로지 양어머니 스기노 오카타(杉大方)였다.

1511년(에이쇼 9년) 15세가 되던 해에 성인식을 치르고 이름을 모토나리(元就)로 개명하였다. 1516년 형이자 영주인 오키모토가 급사하여 조카 고마쓰마루(幸松丸)가 뒤를 잇게 됐는데 아직 영주가 되기엔 너무 어렸기 때문에 20살의 삼촌 모토나리가 대리청정을 하게 됐다. 아직 새파랬던 약관의 모토나리는 고마쓰마루의 외척인 다카하시 가문과 알력이 있었으나, 자신의 큰 딸을 다카하시 가문으로 시집보내 협력을 구했다. 어린 딸은 며느리로 보내졌으나 실상은 인질이나 마찬가지였다. 얼마지나지 않아 빈고(備後)에서 미요시(三好) 가문과의 전투 중 다카하시 일족이 대거 사망하자 정치적 주도권은 모토나리에게 넘어왔다.

당주도 너무 어렸고 아직 검증되지 않은 모토나리의 존재 자체가 문중의 동요를 불렀다. 이틈을 노려, 아키(安芸)의 헤게모니를 두고 모리 집안과 다투던 가나야마(銀山城) 성주 다케다 모토시게(武田元繁)가 모리 씨 휘하 호족인 깃카와(吉田) 가문의 아리타 성(有田城)을 포위했다. 모토나리는 어린 조카 고마쓰마루를 대신해 원군으로 출진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처녀출전이었다. 아키 다케다 가문의 맹장(猛將) 구마가이 모토나오(熊谷元直)가 예비대를 이끌고 영격을 나왔는데 모리 군이 매복 등 작전을 적절히 구사하여 이를 격파하고 구마가이의 수급을 베었다. 다케다 모토시게는 격노하여 아리타 성 포위 병력의 대부분을 모리·깃카와 연합 원군 쪽으로 돌렸다. 병력상으로 다케다 군이 우위였으나, 도강하는 다케다 군을 노리고 궁병들이 쏜 화살에 다케다 모토시게가 전사하자 다케다 군은 곧 혼란에 빠져 흩어졌다. 이 전투로 이후 다케다 가문은 재기 불능의 상태에 빠졌고 모리 집안은 아키에서 최대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 전투는 아리타나카데 전투(有田中井手の戦い)라 하여 오다 노부나가의 《오케하자마 전투》와 곧잘 비교된다.

모토나리는 아키(安芸)를 통일하기 위해 이즈모(出雲)이와미(石見)의 태수인 대영주 아마고(尼子) 가문 밑으로 종속을 결정했다. 아마고 씨는 원래 아키 다케다 씨와 손을 잡고 있었는데, 오우치 씨라는 강대한 적을 앞에 두고 쓸만한 실력의 모리씨를 밑에 두고자 했다. 모리는 아마고의 묵인 아래 아키 다케다 씨의 잔여 세력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모토나리는 다케다 씨의 본성인 가나야마 성 공략 때에도 크게 무공을 세워 가문내에서의 자신의 입지 역시 확고히 다져갔다. 이 무렵 모토나리는 깃카와 구니츠네(吉川国経)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이 결혼은 휘하 호족 깃카와를 붙들어두기 위한 정략 결혼이었지만 둘 사이에 금슬이 좋아 부인의 살아 생전에는 따로 측실을 두지 않았다.

1523년(다이에이 3년) 조카 고마쓰마루가 9살로 요절하자 모리 가문의 중신들은 모토나리를 당주로 천거해 27세에 가권을 상속받았다. 하지만 적자 승계가 아닌 점을 문제삼아 사카(坂) 가문과 와타나베(渡辺) 가문 등 유력 휘하 호족들이 아마고 쓰네히사(尼子経久)가 보낸 가메이 히데쓰나(亀井秀綱)들과 함께 모반하고, 모토나리의 동생 아이오 모토쓰나(相合元綱)를 영주로 추대했다. 모든 것은 모리 씨의 세력확대를 경계하던 주인 가문 아마고 쓰네히사의 책략이었다(당시 모리씨는 아마고씨에게 종속된 상태). 하지만 모토나리는 필두 가신 시지 히로요시(志道広良) 등의 지지를 얻어 반대파를 신속하게 제거하고 모리 씨의 당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세력확대[편집]

상속 소동의 배후에 아마고 씨가 있었음이 드러나면서 모토나리와 아마고 쓰네히사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아마고 씨에게 종속된 동안 아키 통일을 거의 완수 했으므로, 1525년(다이에이 5년) 아마고와 손을 끊고 오우치 가문으로 말을 갈아탔다. 1529년(교로쿠 2년) 아마고 씨와 내통 혐의를 씌워, 죽은 조카 고마쓰마루의 외척이자 자신의 사돈인 다카하시 오키미쓰(高橋興光) 일족을 토벌하였다. 목적은 다카하시 가문의 아키, 이와미의 영지였지만, 이 때문에 사실상 인질 상태의 자신의 딸은 죽었다. 이 일로 그는 냉혹한 성격의 이미지가 덧씌워져 주변 호족들 사이에 신용이 많이 내려갔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아키 지방에서 늘 대결해온 시시도(宍戶) 가문과의 관계 개선 목적으로, 또다른 딸을 시시도 다카이에(宍戸隆家)와 정략 결혼 시켜 거듭 혈연 관계를 구축해 나갔다. 모토나리는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펼쳐, 오우치 가문 내부의 모순 때문에 오우치 씨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주변 세력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두었다. 오우치 씨가 주인 가문이었음에도 거침없었다. 특히 오우치 가문의 난에 휘말려 곤란한 상황에 빠진 아마노 가문과, 과거 원수 지간이었던 구마가이 가문[3]과도 맹약을 맺어 아키의 완전 제패를 완수했다.

1534년(덴분 2년) 음력 9월 23일 자 궁중기록에서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가 고나라 천황(後奈良天皇)를 알현한 내용을 보면 모리 씨에 관한 구절이 등장한다. 모리 모토나리의 조상으로 오오에노 히로모토의 4남인 모리 미쓰후사(毛利光房)가 그 옛날 쇼코 천황(称光天皇)으로부터 종오위하 우마노카미(右馬頭)에 임명된 일을 되새겨 후손 모리 모토나리에게도 같은 벼슬을 내려 달라는 취지였다. 모리 모토나리는 오우치 요시타카를 통해 은(銀) 4,000냥을 조정에 헌상하여 우마노카미 벼슬에 올랐다. 이로써 오우치 가문과의 관계도 강화되었고 조정과의 관계도 생겨, 아키 국에서의 모리씨의 위치는 반석에 오르게 됐다.

1540년(덴분 9년) 아마고 쓰네히사의 후계자 아마고 하루히사(尼子詮久)가 이끄는 3만의 아마고 군이 본거지인 요시다 고리야마 산성으로 공격해오자 모리 모토나리는 겨우 3천의 병력으로 성에서 농성을 한다. 하지만, 가신 후쿠하라(福原) 가문과 우호관계에 있던 시시도 가문이 협력을 하였고, 늦게나마 도착한 오우치 요시타카의 원군 스에 다카후사(陶隆房)의 활약으로 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요시다 고리야마 성 전투).

같은 해, 오우치 가문과 함께 아키 가나야마 산성을 공격해 아키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킨다. 이때, 다케다 가문의 당주 다케다 노부자네(武田信実)는 도주하였다.

덴분 11년 (1542년)부터 덴분 12년 (1543년)에 걸쳐 오우치 요시타카를 총대장으로 한 이즈모 원정에서 모리 모토나리도 참전하였지만, 깃카와 오키쓰네의 배신과 적진에 깊이 침투한 관계로 보급선이 끊겨 대패를 하게 되었다. (제1차 갓산토다 성 전투). 이후, 오우치 가문과 아마고 가문의 아키 국내의 영향력이 저하되었고, 항상 대 다이묘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소영주의 입장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덴분 13년 (1544년) 모리 모토나리는 강력한 수군을 보유한 다케하라 고바야카와(竹原小早川) 가문으로 3남 도쿠주마루(徳寿丸)를 입적시킨다. 그리고, 덴분 16년 (1547년) 부인의 친정인 깃카와 가문을 장악하기 위해 깃카와 가문의 당주 깃카와 오키쓰네에게 불만을 품은 오키쓰네의 숙부 깃카와 쓰네요(吉川経世)의 일당과 손을 잡아, 차남 모리 모토하루(毛利元春)를 깃카와 가문에 입적시키고 오키쓰네를 강제로 당주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 후 덴분 19년 (1550년) 화근을 없애기 위해 깃카와 오키쓰네를 비롯 일가를 살해했다. 이로써 모리 모토나리는 깃카와 가문을 장악했다. 한편 누타 고바야카와(沼田小早川) 가문의 당주 고바야카와 시게히라(小早川繁平)가 어리고 눈이 멀어 아마고씨의 침공을 막아낼 수 없다고 생각한 오우치 요시타카와 일부 고바야카와 가신들과 공모해, 고바야카와 시게히라의 후견인 다사카 요시아키(田坂義詮) 등 친 시게히라파 고바야카와 가신들을 숙청하고 고바야카와 시게히라를 출가시킨다. 그리고, 시게히라의 여동생을 3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에 시집보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누타 고바야카와 가문를 승계시킨다. 이로써 다케하라, 누타 고바야카와 가문을 통합하고 장악했다. 이후, 깃카와 가문과 고바야카와 가문은 모리 가문의 분가로서 종가의 양 날개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것을 《모리 료센(毛利両川) 체제》라고 한다.

이로써 아키 이와미에 세력을 가진 깃카와 가문과 아키, 빈고(備後), 세토 내해에 세력을 가진 고바야카와 가문의 세력을 장악했으며 아키 일국을 대부분 수중에 넣었다.

덴분 19년 (1550년) 가문내에 전횡을 일삼던 이노우에 모토카네(井上元兼)와 그의 일족을 살해하고, 가신단의 충성 서약을 받아 권력기반을 강화하였다.

이쓰쿠시마 전투[편집]

덴분 20년 (1551년) 대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의 가신 스에 다카후사가 모반을 일으켜 주군 요시타카를 자결로 몰았다(다이네지의 변(大寧寺の変)). 당초에 모리 모토나리는 스에 다카후사와 연계해 가나야마 산성사쿠라오 성(桜尾城)을 점령하여 그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다카후사도 모토나리와 협력하지 않으면 오우치 영내를 지배하기 어렵다고 생각해 모토나리에게 아키, 빈고의 호족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를 배경으로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아키 국내의 오우치 요시타카를 지지하는 호족을 공격하였고, 히라가 다카야스(平賀隆保)가 농성하고 있는 아키 가시라자키 성(頭崎城)을 공격 함락하였다. 그리고, 다카야스를 죽인 후, 히라가 히로스케(平賀広相)에게 가독을 승계시켜 히라가 가문을 장악하였다. 덴분 22년 (1553년) 아마고 하루히사의 아키 침공 때에는 오우치 가신 에라 후사히데(江良房栄)와 함께 격퇴하였다. 이 후 모리 가문의 세력 확대에 놀란 스에 하루카타(陶晴賢; 모반 이후 다카후사는 오우치 요시나가를 옹립한 후 개명하였다.) 는 모토나리가 가지고 있던 지배권을 빼앗으려 하였고, 점차 양측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 무렵 이와미의 요시미 마사요리(吉見正頼)가 스에 하루카타에게 반기를 들었다. 하루카타는 모토나리에게 원군을 요청하였고, 모토나리도 하루카타의 원군으로 참전하려 하였지만, 가문내에서 하루카타를 반대하는 의견이 많아 출병하지 않았다. 이에 하루카타는 직접 아키의 호족들에게 출병을 제촉하는 사자를 파견하였다. 히라가 히로스케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모토나리의 적장자 모리 다카모토(毛利隆元)와 중신들은 지난번 스에 하루카타가 모리 가문과 맺은 약속을 철회한 일을 들어 원군을 보내지 말 것을 제촉했다. 그래서 모토나리는 하루카타와의 대결을 결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력으로는 스에 하루카타를 이길 수 없었다. 하루카타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3만, 이에 반해 모토나리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5천에 불과했다. 또, 아키의 호족들이 오우치 가문의 지원을 얻지 못하는 모리 가문을 돕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게다가, 배후에 있는 아마고 가문이 언제 침입해올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모토나리는 모략으로 오우치 가문과 아마고 가문에 각각 내분을 일으켜야 했다.

덴분 23년 (1554년) 이즈모에서 아마고 가문의 내분이 일어나 아마고의 당주 아마고 하루히사가 그의 숙부로 신궁당(新宮党)의 우두머리인 아마고 구니히사(尼子国久)와 그 아들 사네히사(誠久) 등을 숙청하였다.[4] 또한, 모토나리는 자신과 함께 전투를 치러본 스에 하루카타의 가신 에라 후사히데를 제거하기 위해 후사히데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소문을 흘린다. 그리고, 그의 필적을 모사하여 모리 가문과 내통하고 있다는 서찰도 만들어 스에 하루카타가 에라 후사히데를 암살하게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반기를 든 요시미 가문 공략에 착수한 스에 하루카타에 모리 모토나리는 반기를 들었다. 하루카타는 격노하였고, 즉시 중신 미야가와 후사나가(宮川房長)에게 3천의 병력을 주어 모토나리를 공격하게 하였다. 하지만, 아키 오시키바타 산(折敷畑山)에서 모토나리에게 패배하였고, 미야가와 후사나가는 전사했다(오시키바타 전투).

고지 원년 (1555년) 스에 하루카타가 2만의 대군을 이끌고 야마구치를 출발했다. 도중, 중신 히로나카 다카카네(弘中隆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야오 성(宮尾城)을 공략하기 위해 이쓰쿠시마 섬(厳島)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카타를 이쓰쿠시마 섬으로 유인하기 위해 섬안에 성을 축성한 모토나리의 계략이었고, 기습을 받은 스에 하루카타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결하였다. 이 전투가 일본의 3대 야전인 이쓰쿠시마 전투이다.

2년뒤인 고지 3년 (1557년) 오우치 가문은 모리 모토나리의 공격을 받고 멸문되었다. 이로써 규슈를 제외한 오우치 가문의 영지 대부분을 수중에 넣었다(보초게이랴쿠(防長経略)).

모리 료센 체제[편집]

같은 해인 고지 3년 (1557년) 모토나리는 장남 모리 다카모토에게 가독을 양도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단, 실권은 모토나리가 대부분 장악하였고, 깃카와 모토하루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 따른 《모리 료센 체제》를 확고히 굳혀 같다. 정계 은퇴 후, 같은 해 음력 11월 25일 14개조의 유훈을 남겨 가문의 결속을 다졌다. 이 유훈은 후세에 유명한 세 화살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었다. 음력 12월 2일 모토나리 이하 주요 12 명의 아키 호족들에게 충성 서약인 연판장을 받았다. 이것은 상하관계를 명확히 하지 않고, 이것은 호족들간에 대등한 입장을 표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 보면, 당시 모리 가문은 가신 이노우에 가문 숙청으로 이제 막 가문의 가신단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고, 아직 아키의 호족연합 맹주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 또, 자식들이 당주로 있던 깃카와, 고바야카와 가문에게서도 주종관계는 아니었다. 이렇기 때문에 아키 호족들을 모리 가문으로 재편해 명실하부하게 아키 호족의 연합맹주에서 벗어나 아키 일국을 완전히 통일한 때는 적장자 모리 다카모토가 아키 슈고로 임명된 에이로쿠 3년 (1560년) 무렵이다. 단, 그 후에도 이와 같이 호족 영주에 대해 모리 가문과 주종관계를 형성했지만, 그 한계가 있어 일부에 있어서는 그 자립성을 인정했다. 이러한 가문의 가신단과 종속된 호족무리라는 이원적 주종관계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모리 가문이 조슈 번으로 감봉 이봉될 때까지 계속 유지되어 왔었다. 이러한 이원적 지배체를 유지시킨 원동력은 모리 가문을 중심으로 보좌한 깃카와, 고바야카와 가문이었다. 즉 료센 가문이었다.

아마고, 오토모 가문과의 전투[편집]

에이로쿠 원년 (1558년) 숙청에 따른 가문내 혼란을 수습한 아마고 가문의 당주 아마고 하루히사야마부키 성(山吹城)을 공격해 이와미 은광을 손에 넣었다(오시바라 구즈레(忍原崩れ)). 하지만, 에이로쿠 3년 (1560년) 아마고 하루히사가 죽고, 아마고 가문의 세력이 약해지자, 에이로쿠 5년 (1562년) 모토나리는 이즈모 원정을 단행한다(제2차 갓산토다 성 전투). 이렇게 되자 당시 당주 아마고 요시히사(尼子義久)는 난공불락의 명성 갓산토다 성(月山富田城)에서 농성을 하였고, 아마고 짓키(尼子十旗)라는 주변 10개 지성에 군을 동원하여 방위망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에이로쿠 6년 (1563년) 모토나리는 아마고 가문의 지성인 시라가 성(白鹿城)을 공략하였고, 드디어 갓산도다 성을 포위해 병량이 고갈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지난번 오우치 가문을 따라 종군했던 제1차 갓산도다 성 전투를 교훈삼아 무리하게 공격하지 않았고, 내분으로 적이 무너지기를 기다렸다. 모토나리는 책략을 부려 아마고 요시히사가 자신의 가신단을 믿지 못하게 만들었고, 의심으로 점철된 요시히사는 그의 중신 우야마 히사카네(宇山久兼)를 살해하였다. 이후 아마고 가문의 내부 분열로 투항자가 속출했다. 에이로쿠 9년 (1566년) 음력 11월 요시히사는 모토나리에게 항복하였다. 이렇게 하여 모토나리는 주고쿠 지방 8개국을 지배하는 대 다이묘가 되었다.

아마고 가문을 다이묘로써 멸문시킨 모토나리였지만,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지원을 받은 아마고 가문의 부흥군이 산인(山陰)으로 침입해 모리 가문에 대항하였다. 더욱이 분고(豊後)의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이 부젠(豊前)을 거의 손에 넣었고, 에이로쿠 11년 (1568년) 규슈 북부를 둘러싸고 모리 가문과 대립하였다. 그 일환으로 오우치 요시타카의 6촌인 오우치 데루히로(大内輝弘)에게 병력을 주어 야마구치로의 잠입을 시도하는 등, 모리 가문을 괴롭혔다. 모리 가문으로써는 적대세력과 영지내의 잔당세력의 저항으로 위기를 맞았지만, 모토나리의 명석한 자식들의 도움으로 오토모 가문과 화친할 수 있었고, 아마고 가문의 잔당세력을 진압할 수 있었다.

말년[편집]

에이로쿠 3년 (1560년) 전반부터 모토나리는 기력이 약해, 쇼군 가문의 명의 마나세 도산(曲直瀬道三)으로부터 치료를 받았다. 이 후 모토나리의 기력은 돌아왔고, 에이로쿠 10년 (1567년) 막내 아들 모리 히데카네(毛利秀包)의 탄생을 보았다. 겐키 원년 (1570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와 오다 노부나가는 대립하였고,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모리 가문도 오다 노부나가와 적대해 노부나가 포위망의 한 축을 담당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모토나리는 오다 노부나가의 실력을 인정하였고, 노부나가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포위망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겐키 2년 (1571년) 음력 6월 14일 요시다 고리야마 산성에서 임종을 맞이하였다. 향년 75세였다.

인물 및 일화[편집]

우리 모리 가문은 판도의 보존만 원하고 천하는 바라지 않는다.

이 유언은 사실로 확인 되지 않았지만, 모토나리가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 영지 보전을 부탁한 것은 사실이다. 일개 호족에서 다이묘까지 신분이 상승한 모토나리는 자신의 주가였던 오우치, 아마고 가문이 천하 패권을 위해 세력을 키우다 다이묘로써 멸망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유언을 남겼다고 생각된다.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감독의 영화 《(乱)》에서 이 일화을 인용하였다. 덧붙여 모토나리의 유언은 대략 "천하를 지배하는 자가 아무리 영요영화를 자랑하더라도 몇대가 지난 후에는 가문의 가지가 꺽기고 그 기둥이 잘려나가 후대의 자손에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천하에 뜻을 품어 세상에 무명을 떨치기보다는, 오히려 육십여 주(六十余州:일본 전토)를 5등분해 그 한 곳에 터를 잡아 영화를 자손 만대에 물려주어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세 자루의 화살

어느날, 모토나리는 세 아들 다카모토, 모토하루, 다카카게를 불러 모아 한 자루의 화살을 부러뜨리라고 명령하였다. 자식들은 어렵지 않게 부러뜨리자, 다음에는 세 자루의 화살을 부러뜨리라고 명령하였지만, 자식들은 누구도 부러뜨릴 수 없었다. 모토나리는 한 자루의 화살은 약하지만, 뭉치면 강하다는 일을 일깨우며, 삼형제에게 결속할 것을 강하게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세 자루 화살의 일화다. 이 일이 모토나리의 임종전의 일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 왜냐하면, 이미 장남 다카모토는 죽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이라면, 청년기의 인간이 대나무 화살 3자루를 부러뜨릴 수 있을 가능성도 있어 의문점이 있다. 이런 이유로 후세의 창작이라는 설도 있지만, 어떻게 보던 모리 가문의 가훈을 알기 쉽게 풀이한 이야기이고, 또, 모토나리가 남긴 14개 조의 유훈과도 일맥상통하며, 모토나리 생전부터 친지들의 결속을 자식들에게 이야기한 것은 사실이다. 덧붙여 히로시마 시를 연고로 하는 J리그산프레체 히로시마의 팀명은 이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산은 일본어의 3을 의미하고 프레체는 이탈리아어로 화살을 의미한다.

이쓰쿠시마 신사의 참배

모리 모토나리가 아직 성인식을 하기 전에 가신과 함께 이쓰쿠시마 신사에 참배하러 온 일이 있었다. 이때 모토나리가 가신에게 “무엇을 빌었나 ? ”라고 질문하자, 가신은 “쇼주마루(모토나리의 아명)님이 아키의 주인이 되는 것을 빌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모토나리는 “왜 천하의 주인이 되는 것을 빌지 않았나 ? ”라고 대꾸하였다. 가신은 “실현불가능한 일을 기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힘껏 해야 주고쿠 지방이겠지요.”라고 하며 웃었지만, 모토나리는 “천하의 주인이 되는 것을 빌면, 가까스로 주고쿠 지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처음부터 아키 일국의 주인으로 빌면, 아키 일국조차도 가지지 못한 채 끝나버린다.”라고 자신의 높은 이상을 알렸다. 그러나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나이를 먹으면서 천하를 취하기보다는 가문의 안위에 고민하게 된다.

백만일심(百万一心)

요시다 고리야마 산성을 축성할 때, 히토바시라(人柱)[5]대신 백만일심이라고 새긴 석비를 묻었다. 이 백만일심(百万一心)은 "일일 일력 일심(一日一力一心)"이라고 읽으며, "나라안 모든 사람이 힘을 합치면, 어떤 일이라도 이루어진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정말 이 말이 모토나리가 했다고는 단정지을 수 없다. 백만일심 비가 히토바시라 대신 사용한 데에는 요시다 고리야마 산성 전투 때에 원군으로 온 오우치 군의 장수 히로나카 다카카네의 조언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 석비는 1816년 조슈 번사였던 다케다 야스노부가 발견해 탁본을 뜬 후, 1882년 모리 모토나리의 제를 올리는 도요사카 신사에 봉납하였다. 그 후, 아키타카타 시에 있는 고리야마 산 전체를 뒤졌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 요시다 고리야마 산성터에 있는 모리 가문의 묘소 경내에 탁본을 토대로 모조한 석비가 세워져 있다.

모리 18무장[편집]


주석[편집]

  1. 사가미의 호조(北條) 씨는 다이라 씨의 후손으로 에치고의 호조와 동성이본이다. 두 집안은 적대 관계로 얽혀있었고 혈연 관계는 아니었다. 특히 이름도 같고 같은 지역 기반이었으나 시대가 전혀 다른 가마쿠라 막부싯켄 집안인 호조(北條)씨와 구별하기 위해 사가미의 호조를 특히 후(後) 호조씨로 부르기도 한다. 호조 소운(北條 早雲)호조 우지야스 등이 사가미 호조씨다.
  2. 죽음을 앞둔 모토나리가 아들 셋을 모아놓고 유언하는 장면을 묘사한 이야기로 일본인들은 모두 한 번쯤 들었을 유명한 에피소드이다. 화살 한 두 대는 부러지지만 화살 세 대는 쉽지 않다면서 자손들의 화목과 협력을 당부했다는 내용이다. 실제 정사에서는 장남은 일찍 전사해 없었고 손주는 어렸으며, 꼭 무예로 유명한 깃카와 모토하루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아니더라도 성인 남성이라면 대나무 화살 세 대 정도 부러뜨리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라는 점에서 진위성을 의심받고 있다. 비슷한 설화나 구전 이야기가 일본 각지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는 데다가 모토나리의 유언장에서는 삼시의 훈이란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모리 모토나리가 남긴 유언은 아니라고 여겨지고 있다.
  3. 원래 다케다 가문의 중신 집안으로 아마고 씨와 손잡았던 구마가이 가문은 아마고가 모리와 손을 잡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오우치 쪽으로 협력선을 바꿨었다. 오우치 가문이 쇠락하자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모토나리가 접근해 왔다.
  4. 모토나리는 간첩을 이용하여 하루히사의 숙부 구니히사가 모리씨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렸는데, 그동안 구니히사를 의심하던 하루히사는 이를 믿고 신궁당을 모두 주살하였다. 이는 모토나리가 본거지인 요시다 고리야마 산성을 비울지라도 아마고 가문이 공격해 오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것은 후세의 군기물에 나타나는 창작이며, 신궁당은 아마고 종가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고 종가와 대립하는 태도를 보였으므로, 아마고 하루히사에게 숙청당했다. 숙청 후 아마고 종가의 힘은 오히려 강해졌다.
  5. 대규모 토목공사나 건물을 조성할 때 무사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산 제물을 바치는 일

관련 항목[편집]

전 임
모리 오키모토
아키 모리가 역대 당주
1523년 ~ 1557년
후 임
모리 다카모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