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Epicaxas/바르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역사[편집]

팀 창단과 발전 (1899–1908)[편집]

호안 감페르가 신문에 낸 선수 모집 광고
1903년의 FC 바르셀로나

1899년 10월 22일, 호안 감페르는 로스 데포르테스 (Los Deportes) 신문에 축구 클럽을 만들고 싶다는 광고를 실었다. 한달 가량 지난 11월 29일, 광고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힘나시오 솔레에서 모임을 가졌고, 팀 창단을 결의했다. 왈테르 윌드, 유이스 도소, 바르토메우 테라다스, 오토 쿤츨레, 오토 마이어, 엔릭 투칼, 페레 카보트, 카를레스 푸욜, 호셉 요르베트, 존 파슨스, 그리고 윌리엄 파슨스 이렇게 열한명의 사람들이 제1기 선수가 되었고, 이로써 FC 바르셀로나라는 클럽이 탄생했다. 몇몇의 다른 팀들, 예를 들어 레알 마드리드나 아틀레틱 빌바오같은 팀들도 이처럼 주로 영국인들에 의해 창설된 클럽이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팀의 색인 '블라우그라나'는 호안 감페르가 FC 바젤의 엠블럼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감퍼가 뛰었던 다른 스위스 팀들과, 잉글랜드 크로스비에 있는 머천트 테일러 학교도 자신들에게서 이 색깔이 유래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그 유래가 분명한 것은 아니다. FC 바르셀로나는 얼마지나지 않아 카탈루니아 축구 챔피언십코파 델 레이에서 선전하며 스페인에서 가장 수준 높은 클럽의 반열에 올라섰다. 1902년에 바르셀로나는 코파 마캬야에서 첫번째 트로피를 들었다.

호안 감퍼 시대 (1908-1923)[편집]

호안 감페르

1908년, 호안 감페르는 클럽의 회장이 되었다. 그가 회장직을 맡았을 당시 바르셀로나는 위기 상황에 놓여있었다. 1905년 이후로 카탈루니아 축구 챔피언십에서 한번도 우승하지 못했고, 이로인해 클럽의 재정은 더욱 어려워진 상태였다. 감퍼는 1908년부터 1925년까지 다섯번의 회장 임기를 지냈고 25년간 사실상 클럽의 수뇌부로 일했다.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바르셀로나가 고유 구장을 소유할 수 있게 도운 일이었다.

1909년 3월 14일, 팀은 총 수용 가능 인원 8000명의 카르레르 인두스트리아 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지정했다. 감퍼는 또한 클럽 멤버를 더 모집하기 위한 캠페인을 발족했고 1922년쯤에는 클럽 멤버가 10,000명까지 늘어났다. 이것은 또 한번 연고 구장을 라스 코르테스로 옮길 수 있게한 큰 계기가 되었다. 이 경기장의 수용 인원은 22,000명이었고, 나중에는 60,000명까지 가능하도록 확장되었다.

감퍼는 또한 감독으로 잭 그린웰을 선임했다. 그의 지도 하에서 팀의 성적은 진일보했다. 감퍼의 임기 동안 FC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니아 챔피언십에서 11번이나 우승했고, 코파 델 레이에서 6번 우승했으며 또한 쿠페 드 피레니에서 네번의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등 팀의 "황금 시대"를 맞았다.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과 스페인 내전 (1923-1939)[편집]

1925년 6월 14일, 오르페오 카탈라를 기념하기 위한 경기를 보기 위해 모인 관중들은 스페인의 국가를 조롱했다. 당시 계속되고 있던 미구엘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 정권에 대해 저항하는 의미였다. 독재 정권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경기장을 폐쇄하였고 감퍼는 강제적으로 회장직을 빼앗겼다. 1928년 바르셀로나의 스페인 컵 우승은 “Oda a Platko”라는 시로 기려졌다. 이 시는 스페인의 '27년 세대'의 중요한 멤버 중 한명인 라파엘 알베르티가 바르셀로나 골키퍼의 환상적인 퍼포먼스에 감명받아 쓴 것이었다. 1930년 7월 30일에는 호안 감퍼가 개인적 사정과 금전적 사유로 우울증에 빠진 나머지 자살을 택하는 충격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호셉 에스콜라같은 좋은 선수들이 지속적으로 배출되었지만, 정치 분쟁으로 인해 스포츠를 포함한 사회 전반이 암흑기에 빠지면서 바르셀로나는 침체기에 빠졌다. 바르셀로나는 세가지 측면에서 위기를 겪고 있었다. 금전적인 문제가 첫번째였고, 멤버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등 사회적으로도 침체 상태였다. 또한 비록 1930년, 1931년, 1932년, 1934년, 1936년 그리고 1938년의 카탈루냐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긴 했지만, 스페인 전체의 리그에서는 우승하지 못하는 등 스포츠적인 면에서도 시련을 겪었다.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고 한 달 후, 좌익적 정치성향의 바르셀로나 회장 호셉 수뇰과다라마 인근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군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1937년 여름 멕시코미국으로 떠난 팀은 저항중인 스페인 제2공화국의 대사로서 대우받았다. 이 투어는 클럽에 재정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고 팀원중 절반정도가 멕시코나 프랑스로의 이민을 모색한 계기가 되었다. 1938년 3월 16일, 파시스트들이 클럽 오피스에 폭탄을 투척하는 등 심각한 파괴를 가했다. 몇 달 후, 바르셀로나는 파시스트 정권 하에 놓이게 되었고 팀은 '규율없는 카탈란주의'로 낙인찍혀 그 멤버가 3,486명으로 줄게되는 등 수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프랑코 독재와 클룹 데 풋볼 바르셀로나 (1939-1974)[편집]

FC 바르셀로나에 적대적이었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스페인 내전 직후, 카탈루냐어카탈루냐 국기 사용이 금지되었고 스페인어가 아닌 이름을 가진 축구 클럽에 제재가 가해졌다. 이것은 FC 바르셀로나가 강제적으로 클룹 데 풋볼 바르셀로나(Club de Fútbol Barcelona, 줄여서 CF 바르셀로나)로 팀 명을 바꾸고 클럽 휘장에서 카탈루냐 국기를 삭제하도록 만들었다. 그나마 프랑코 독재 치하 동안 카탈루냐어가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장소가 클럽의 경기장이었다.

1943년, 바르셀로나는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준결승전에서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게 되었다. 레스 코르츠에서 있었던 1차전에서는 바르셀로나가 3-0으로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2차전이 열리는 날, 바르셀로나 선수들의 라커룸에 프랑코의 안전보장부장이 찾아왔다. 그는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경기에서 뛸 수 있는 것은 '제국이 관대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잊지 말라고 경고했다. 결국 이러한 조건 하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경기를 지배했고, 바르셀로나는 11-1로 처참히 격파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CF 바르셀로나는 1940년대와 50년대 상당한 성공을 이어갔다. 1945년에는, 호셉 사미티에르 감독 하에서 세자르, 라마예츠, 발라스코와 같은 선수들이 대활약 하여 1929년 이후 처음으로 라 리가 우승컵을 따냈다. 그들은 1948년과 1949년 두번의 타이틀을 더 따냈다. 1949년에는 최초로 코파 라티나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1950년에는 바르셀로나는 라디슬라오 쿠발라를 영입했다. 쿠발라는 처음에는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하려 했으나, 당시 호셉 사미티에르와 친분이 있고 바르셀로나에서 스카우트로 활동하고 있던 페르디난트 다우치크의 딸과 결혼하면서 바르셀로나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1951년 비오는 여름날, 2-1로 라싱 산탄데르를 이긴 바르셀로나의 관중들은 어떠한 트램도 타지 않고 모두 걸어서 집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프랑코 정권 당국을 놀라게 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 당시에 트램기사 파업이 바르셀로나에서 열렸고, 바르셀로나 팬들이 그것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벤트들이 FC 바르셀로나를 단순히 카탈루냐를 대표하는 클럽 그 이상으로 만들게 되었고, 많은 진보적인 스페인인들이 이 클럽을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지조있는 수호자로 여기게 되었다.

페르난도 다우식 코치와 라디슬라오 쿠발라는 1952년 한 해에만 팀을 라 리가,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코파 라티나, 코파 에바 두아르테 그리고 코파 마르티니 로시에서 모두 우승시키며 다섯 개의 우승컵을 모두 끌어안았다. 1953년에도 리가와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에서 또다시 우승했다.

헬레니오 헤레라 감독, 1960년에 발롱도르를 수상한 루이스 수아레스, 쿠발라가 추천한 두 헝가리인인 산도르 콕시스와 졸탄 치보르 등 걸출한 인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팀은 1959년에 또다시 더블을 달성했고, 1960년에는 리가와 페어스컵에서 우승하는 등 세미 더블을 이뤘다. 1961년에는 레알 마드리드를 유러피언 컵 1라운드에서 격파, 독주를 멈추게 한 최초의 클럽이 되었다. 결승전에서는 SL 벤피카에게 3-2로 패했다.

1960년대에는 레알 마드리드가 리가를 독주하면서, 바르셀로나는 상대적으로 덜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1957년에 완료된 캄프 누 건축은 클럽을 재정적으로 빈곤하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 새로운 선수를 영입할 자금이 거의 없었던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하지만 호셉 푸스테카를레스 렉사치 등의 선수가 활약하였고 1963년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1966년 페어스 컵에서 우승했다. 바르셀로나는 1968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결승전에서, 프랑코의 눈 앞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1-0으로 물리침으로써 실추되었던 명예를 회복하는 역사적인 사건을 만들어냈다. 당시 바르셀로나의 감독은 공교롭게도 스페인 내전 때 프랑코 정권에 맞선 제2공화국 측의 파일럿이었던 살바도르 아르티가스였다. 이 일은 지금까지도 스페인 내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클럽은 1974년에 원래 이름인 FC 바르셀로나(Futbol Club Barcelona)를 되찾았다.

요한 크라위프의 활약 (1974–1978)[편집]

FC 바르셀로나 선수 시절, 국가대표로도 활약한 크라위프

1973–74 시즌에, 훗날 FC 바르셀로나의 전설이 된 선수인 요한 크라위프가 팀에 입단했다. 당시 크라위프는 이미 AFC 아약스에서 검증받은 선수였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지원하는 클럽에서는 뛰고 싶지 않기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를 거절하고 바르셀로나로 왔다고 말해 팬들의 큰 환호를 얻었다. 그는 나중에 그의 아들에게 요르디 (Jordi) 라는 카탈루냐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후안 마누엘 아센시, 카를레스 렉사흐, 우고 소틸 같은 훌륭한 선수들과 함께 크라위프는 바르셀로나에 1960년 이후 13년만에 리그 우승컵을 가져다 주었다. 그 해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는 5-0의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크라위프는 이 같은 활약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누녜스와 팀의 안정기 (1978–2000)[편집]

유러피언컵 1991-92시즌 결승전 선발 라인업.

1978년 호셉 유이스 누녜스가 FC 바르셀로나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주 목표는 바르셀로나가 재정적, 스포츠적인 면에서 안정성을 확보하여 세계적인 수준의 클럽으로 발전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1979년 5월 16일, 바르셀로나는 바젤에서 열린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와의 UEFA 컵 위너스컵 결승전에서 4-3으로 승리, 우승컵을 안았다.

1982년 6월에는, 디에고 마라도나가 당시 역대 최고액으로 보카 주니어스로부터 영입되었다. 이어진 시즌에서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감독 하의 바르셀로나와 마라도나는 레알 마드리드를 꺾으며 코파 델 레이에서 우승했다. 그러나 마라도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SSC 나폴리로 팀을 옮겼다. 바르셀로나는 1984-85시즌에는 새로 부임한 테리 베너블스 감독과 독일 미드필더 베른트 슈스터의 활약에 힘입어 라 리가 정상에 등극했다. 그 다음 시즌에는 또다시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 올라갔고, 슈테우아 부쿠레슈티를 상대로 선전했으나 승부차기패를 맛봤다.

1986년 FIFA 월드컵이 끝나고, 잉글랜드 최다 득점자인 게리 리네커와 골키퍼 안도니 수비사레타가 영입되었다. 그러나 슈스터가 팀에서 제외되면서 팀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베너블스 감독은 곧 해임되었고 1987-88시즌엔 루이스 아라고네스 감독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레알 소시에다드를 누르고 코파 델 레이에서 우승컵을 드는 등 좋은 성과도 있는 시즌이었지만 시즌 말미에 'Motín del Hesperia'로 알려진, 누녜스 회장에 대한 선수들의 집단 반항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88년, 요한 크루이프가 클럽에 감독으로 다시 돌아왔고 훗날 드림팀이라고 불리게 된 선수들을 소집했다. 그는 주제프 과르디올라, 호세 마리 바케로, 치키 베히리스타인, 이온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게오르게 하지, 로날트 쿠만, 미샤엘 라우드룹, 호마리우,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같은 선수들을 지휘했다.


크루이프의 지도 하에, 바르셀로나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라 리가 우승 행진을 이어갔다. 그들은 1989년 UEFA 컵 위너스컵1992년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모두 UC 삼프도리아와 맞닥뜨렸는데, 두번 다 승리하였다. 웸블리에서 열렸던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터진 로날트 쿠만의 프리킥골은 아직도 유명하다. 바르셀로나는 또한 1990년에 코파 델 레이를 재패했고, 1992년의 유러피언 컵과 세번의 스페인 슈퍼컵을 더 들어올렸다. 총 11개의 우승컵을 든 크라위프는 역대 감독 중 가장 성공적인 감독으로 남아있다. 그는 또한 바르셀로나의 최장기 연임 감독이었다. 하지만, 그의 임기 마지막 두 시즌은 무관에 그쳤고, 결국엔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크라위프의 자리를 대신하고 올라온 바비 롭슨 감독은 1996-97시즌 단 한 시즌만을 맡았다. 그는 PSV 에인트호번으로부터 호나우두를 데려왔고 코파 델 레이, UEFA 컵 위너스컵,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를 들어올리는 세미 트레블을 달성했다. 그러나 그는 클럽이 루이스 반 할 감독을 데려오기 전까지 임시감독직을 맡기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한 시즌만에 하차했다.

마라도나처럼, 호나우두는 짧은 시간동안 팀에 있었고 곧 인테르로 이적했다. 하지만 루이스 피구,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루이스 엔리케, 히바우두 같은 스타들이 바로 떠올랐고 1998년 팀은 코파 델 레이와 리가에서 우승하며 더블을 달성했다. 1999년, 팀 창단 100주년을 맞이한 FC 바르셀로나는 리가에서 또다시 우승컵을 들었고 히바우두는 바르셀로나의 네번째 발롱도르 수상자가 되었다. 스페인 내에서의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이기는데 실패한 것은 반 할 감독과 누네즈 회장이 2000년에 사임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스파르트 의장과 팀의 쇠퇴 (2000–2003)[편집]

누네즈 회장과 반 할이 떠난 것은 나중에 터진 루이스 피구 사건에 비하면 극히 사소한 일일 뿐이었다. 팀의 부주장이었던 피구는 카탈루냐인들의 큰 우상이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팬들은 피구가 그들의 숙명의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는 소식에 경악했고, 그 후 캄프 누에 피구가 찾아올 때마다 극도로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번은 그가 뛰고 있던 그라운드로 한 팬이 새끼 돼지를 집어던진 일도 있었다. 그 후 3년간 팀은 하향세에 접어들었고 감독들이 수시로 바뀌었다. 반 할 감독도 그 중 한명으로, 다시 짧은 기간동안 감독직을 맡았다. 가스파르트 회장 역시 무능한 모습으로 일관했고 결국 2003년, 반 할 감독과 함께 직책에서 물러났다.

라포르타 회장과 새로운 시대의 개막 (2003–2009)[편집]

UEFA 챔피언스리그 2005-06시즌 결승전 선발 라인업.

실망스러운 가스파르트 시대 후에, 젊은 회장 호안 라포르타가 당선되었고 역시 젊은 감독이자, 네덜란드AC 밀란의 수퍼스타였던 프랑크 레이카르트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이들은 팀을 다시 최고의 자리로 끌어올렸다. 외국에서 영입한 호나우지뉴, 데코, 헨릭 라르손, 루도빅 지울리, 사뮈엘 에토, 라파엘 마르케스 등의 선수와 팀 유스에서 자체적으로 육성한 카를레스 푸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사비 에르난데스, 빅토르 발데스 같은 스페인 선수들은 팀을 성공가도에 올려놓았다.

바르셀로나는 2004-05 시즌 라 리가와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에서 모두 우승했고, 스타로 떠오른 호나우지뉴와 에토는 FIFA 올해의 선수에서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했다.

2005–06 시즌, 바르셀로나는 리그와 수퍼컵에서의 성공을 또 한번 이어갔다. 리그 상승세의 정점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3-0으로 제압한 때였다. 프랑크 레이카르트는 이로써 베르나베우에서 두번 승리를 거둔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 호나우지뉴의 활약은 실로 놀라웠고 그의 두번째, 세번째 골이 터진 뒤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팬들이 좌절한 나머지 그에게 기립박수를 쳐주는 해프닝도 일어났다. 또한 챔피언스리그에서, 바르셀로나는 결승전 상대인 아스날 FC를 2-1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15분이 남은 상태에서 1-0으로 뒤지고 있던 바르셀로나는 10명이 뛰고 있는 상태였던 아스날을 상대로 두 골을 몰아넣어 극적으로 승리했다. 헨릭 라르손은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 출장이 된 이날 경기에서 교체 투입되자마자 에투에게 어시스트를 하는 활약을 보였고, 그에 이어 교체 투입된 벨레티가 결승골을 기록하며 팀에게 14년만에 유럽 정상에 오르는 선물을 안겼다.

아스날을 상대로 05-06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한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메달을 수여받고 있다.

그러나 2006-07시즌 초반의 상승세에도 불구, 바르셀로나는 결국 무관에 그쳤다. 미국에서의 프리시즌은 팀의 골잡이 에토와 떠오르는 스타 리오넬 메시에게 부상을 안겨주었고 이는 후에 강도높은 비판을 받았다. 에토가 공개적으로 레이카르트 감독과 호나우지뉴를 비판하는 일도 있었다. 호나우지뉴도 체력 부족이 그의 실력 하락을 가져왔다는 점을 인정했다. 라 리가에서 바르셀로나는 시즌 대부분의 기간동안 1위를 유지했으나, 다음해로 넘어가면서 레알 마드리드가 역전 우승에 성공했다. 코파 델 레이에서는 준결승 1차전에서 디에고 마라도나를 연상시키는 메시의 골을 앞세워 헤타페 CF를 제압했으나, 2차전에서 4-0으로 대패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그들은 FIFA 클럽 월드컵에도 참가했으나 후반 늦게 터진 골로 브라질 클럽 SC 인테르나시오나우에게 패해 우승 기회를 놓쳤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16강전에서, 결국 대회 챔피언이 된 리버풀 FC에게 패했다.

바르셀로나는 2007-08 시즌 리그에서 3위를 기록했고, 챔피언스리그와 코파 델 레이에서 준결승에 진출하는데 그쳤다. 두 대회 모두 대회 챔피언이 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발렌시아 CF에 패한 것이었다. 레알 마드리드에게 4-1 패를 당한 다음날, 호안 라포르타는 바르셀로나 B팀의 감독인 주제프 과르디올라가 6월 30일에 종료되는 레이카르트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트레블 달성 (2008–2009)[편집]

UEFA 챔피언스리그 2008-09시즌 결승전 선발 라인업.

2008-09시즌 개막 전, 호안 라포르타 회장의 불신임안이 표결에 부쳐졌다. 해임이 결정되는 66%의 찬성표에 조금 못미치는 60%의 찬성표가 나옴으로써 라포르타는 회장 임기를 가까스로 유지할 수 있었다. 라포르타는 축구 디렉터인 치키 베히리스타인과 함께, 국면 전환을 위해 팀의 전설적인 미드필더였던 주제프 과르디올라에게 새 사령탑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라포르타는 또한 선수단에도 큰 변화를 주었다. 지안루카 참브로타, 데코, 에드미우송과 호나우지뉴를 내보낸 것이었다. 그 후 스쿼드를 리빌딩하는데 거의 9천만 유로가 소비되었다. 베히리스타인과 라포르타는 세이두 케이타, 헤라르드 피케, 마르틴 카세레스, 다니에우 아우베스, 그리고 알략산드르 흘렙을 새로이 영입했다. 카를레스 푸욜, 리오넬 메시, 사비 에르난데스, 빅토르 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등 팀 유스에서 발굴한 인재들은 여전히 팀을 지켰다.

2009년 1월 17일, 바르셀로나는 전반기 리그 19경기에서 오직 한번의 패와 두번의 무승부를 기록하고 나머지 경기를 전부 승리하면서 라 리가 역대 전반기 최고 승점인 50점을 획득하는 기록을 세웠다. 또한 팀은 코파 델 레이 준결승전에서 RCD 마요르카를 제압하며 1998년 이후로 처음으로 결승전에 진출했다. 6개월 후인 1월 23일, 국제기구인 IFFHS는 최근 18년간의 최고 클럽 리스트에서 바르셀로나를 1위에 랭크시켰다. 국가 내 리그, 컵, 대륙간 경기 그리고 FIFA 주최 경기 등 모든 경기를 종합하여 나온 랭킹이었다.

파일:Copa, Champions, Lliga.JPG
트레블 트로피. 왼쪽부터 코파 델 레이, 챔피언스리그, 라 리가 우승컵.

시즌 후반기에, 바르셀로나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레알 마드리드와의 엘 클라시코를 치뤘다. 바르셀로나는 역사적인 스코어인 2-6으로 마드리드를 대파했는데 이는 클럽 역사상 엘 클라시코에서의 최다 득점이었으며, 요한 크라위프가 0-5 승리를 거둔 1970년대 이후로 최대 점수차의 승리였다. 이러한 역사적인 승리 후 며칠 지나지 않은 2009년 5월 6일, 바르셀로나는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전 2차전에서 첼시 FC를 상대로 경기를 가졌다. 1차전은 득점없이 비긴 상태였고, 설상가상으로 경기 종료 8분전에 터진 에시앙의 골로 첼시가 1-0으로 거의 승기를 잡았다. 그러나 추가시간인 후반 93분, 페널티 에어리어 바깥쪽에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가 동점골을 넣음으로써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FC 바르셀로나를 극적으로 결승전으로 이끌었다.

5월 13일에는 누에보 메스타야에서 열린 아틀레틱 빌바오와의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4-1로 승리함으로써 25번째 우승컵을 들었다. 며칠 후 레알 마드리드가 비야레알 CF에 패배하면서, 바르셀로나는 2008-09시즌 우승을 확정지었다.

과르디올라의 공격 점유율 축구 철학 하에서, 베스트 일레븐 멤버 중 7명(빅토르 발데스, 카를레스 푸욜, 헤라르드 피케, 사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세르히오 부스케츠, 리오넬 메시)에 해당하는 바르셀로나 유스 출신 선수들과 외부에서 온 훌륭한 선수들은 2009년 5월 27일 로마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디펜딩 챔피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2-0으로 제압했다. 이렇게 챔피언스리그 우승컵까지 든 FC 바르셀로나는 라 리가와 코파 델 레이 우승컵을 포함하여 트레블을 달성하였다. 이것은 스페인 축구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