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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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9일 (금) 18:41 판

장준하
출생1918년 8월 27일
의주
사망1975년 8월 17일
사인의문사
성별남성
국적대한민국
직업독립운동가, 군인, 정치인, 사회운동가
부모장석인, 김경문
배우자김희숙
웹사이트장준하 기념사업회

장준하(張俊河, 1918년 8월 27일 의주 - 1975년 8월 17일)는 일제 강점기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정치가, 공무원, 언론인, 사회운동가, 잡지발행인이다. 일제강점기에 교육 활동을 하였고 일본군 쓰가다 부대에 강제 징집되었다가 탈출, 중국군 중앙군 준위를 거쳐 한국 광복군을 찾아가 1945년 2월부터 한국 광복군, 미국 CIA의 전신인 OSS 활동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공화국에서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무과장, 사무국장을 지내고 《사상계》를 창간하였으며, 제2공화국에서는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의원,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제2대 국토건설단 단장 등을 지냈다. 1967년부터는 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56년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였으며 최남선을 추모하기도 했다. 1975년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당시 정부는 실족사로 발표했으나, 의문사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1962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1999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생애

생애 초기

1918년 8월 27일 평북 정주군에서 목사이던 장석인의 4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3살이 되던 해에 삭주 대관보통학교 5학년에 들어가 이듬해인 1932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 있던 숭실중학에 입학했다.[1] 그러다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천 신성중학교로 전학해 졸업한 후 1938년 정주에 있던 신안소학교 교사로 3년 동안 지냈다. 그뒤 일본에 유학하였다.[2]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간 장준하는 도요 대학 철학과 예과를 거쳐 1941년 일본신학교에 입학했다. 장준하가 입학할 무렵 전택부, 문익환, 김관석, 박봉랑 등이 같은 학교에 있었다. [3][1]

독립운동

1944년 1월 일본 육군에 학도병으로 끌려가 관동군에 배치되었으나 7월에 소수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군을 탈영, 김준엽을 만나 함께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臨川分校)의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 들어갔다. 이때 〈등불〉을 발행했다.[3] [4] 1944년 8월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군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았고, 1944년 12월 중국 중앙군 준위로 임관되었다.[5]

그 뒤 쓰촨성 충칭(重慶)으로 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하였다. 한편 장준하 등을 끌어들이려고 김원봉은 노력하였는데, 뒷날 장준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계열이 심지어 미인계를 쓰기도 하였다고 비판하였다.[6]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부의 파벌 다툼에 염증을 느끼고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1945년 충칭[重慶]에서 광복군에 들어갔고, 1945년 11월 귀국하였다.[3] 장준하는 1945년 4월29일 서안에 있던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3개월간 미군 전략첩보대(OSS) 대원이 되어 국내 진공작전에 가담했다. 하지만, 1945년 8월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선언을 하는 바람에 모든 군사작전이 백지화됐다. 앞서 8월14일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등은 서울로 향하는 미군기에 편승해 서해 상공을 날았으나 미국과 일본의 방해로 회항했다. 장준하 일행은 분루(憤淚)를 삼키면서 시안으로 되돌아갔다가, 그해 11월 23일이 되어서야 김구 주석 등 임정요인들과 함께 김포공항에 내렸다. [3].

광복 직후 활동

해방후, 11월 임시정부 환국 제1진에 포함하여 귀국하여 김구의 비서로 있다가 김구의 경교장을 나와 1947년 12월 이범석조선민족청년단에 참가, 중앙훈련소의 교무처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장준하는 곧 족청을 떠나고 말았다.[7] 1949년 1월 도서출판 한길사를 설립하다. 2월 한국신학대학원에 편입, 같은해 6월에 졸업하였다.[8]

관료, 언론 활동

제1공화국

6·25 전쟁 후 장준하는 이승만정부에서 1952년 3월 대한민국 행정부 서기관에 임용되어,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무과장, 사무국장 등을 역임했다.[8] 1953년 잡지사상계를 창간하였다. [9]

1957년 10월 10일, "내선일체", "황국문화 선양" 따위 구호를 외치는 한편, 일제로부터 직위나 금전적인 혜택을 받아 누린 최남선이 향년 68세로 사망하자 발행인인 장준하는 서둘러 육당의 하세(下世)기념 특집을 냈고[10] 그를 옹호하는 글을 사상계에 게재하기도 하였다. [11] 바로 1957년

'사상계 편집위원회는 뜻을 문화의 소장(消長)과 민족의 명운에 두는 모든 인사와 더불어 충심으로 고 육당 최남선 선생을 애도하고 그 출중한 인격과 생전에 남기신 업적의 위대성을 명감(銘感)하여 이를 영세에 전하고자 선생이 서거하신 이 해 1957년 송년호를 육당 기념호로 삼아 재천(在天)의 영전에 드리나이다.' <단기 4290년(1957년) 12월 1일 발행 사상계> [10]

한 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본의가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나라 문화의 소장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사실로서 밝혀진 바요, 항간에 떠도는 요동부녀(妖童浮女)들의 억설과는 전면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赦)하는 법이 없고 인재를 자기 눈동자 같이 아낄 줄 모르고 사물을 널리 생각하지 못하는 옳지 못한 풍조 때문에 우리는 해방된 후에도 선생에게 영광을 돌린 일이 없고 그 노고를 치하한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욕된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실로 온 민족의 이름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11][10]

1956년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여 제1회를 발표하였다.[12] 동인문학상은 소설가 김동인을 추모하여 만든 김동인 문학상이었다.[13] 동인문학상을 통해 장준하는 선우휘, 오상원, 손창섭, 이범선, 서기원, 남정현, 전광용, 이호철, 송병수, 김승옥, 최인호, 이청준 등의 문인들을 발굴했다.[12]

제2공화국

1960년 10월 장면내각의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의원, 1961년 1월 대한민국 국토건설단 기획부장에 발탁되었다.[8] 그 뒤 국토건설단 단장을 맡기도 했다. 제2공화국 붕괴 후 언론활동에 종사하였다. 강원용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 뒤 사상계가 경영난에 빠지자 강원용을 찾아 인수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가 그 뒤 조선일보 출신 부완혁에게 사상계를 넘겼으나, 그후에 부완혁과 갈등하게 되었다. [3][9]

언론 활동

장준하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있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1964년 3월 장준하와 《사상계》는 한일회담 반대시위의 선봉에 섰다. 장준하는 한일회담을 일본 제국주의 군인 출신이 침략자이며 전범자 집단인 일본 자민당과 매국협상을 하는 것으로 판단해, 1964년 4월호를 긴급 임시증간호로 내놓았다. [3] ‘한일회담의 제문제’는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이 나라 지식층의 의사를 비판적으로 담아낸 한일회담 반대진영의 교과서가 됐다. 이어서 1965년 7월에 ‘신(新)을사조약의 해부’를 또다시 긴급 증간호로 발행해 한일회담 반대진영의 이론적 교두보가 됐다. [3] 박정희 정권은‘사상계’를 ‘반품작전’으로 되돌리는가 하면, 1965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물샐 틈 없는 세무사찰을 자행해 ‘사상계’를 고사상태로 몰아갔다. [3] [14]그 때 사카린 밀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집권층과 삼성 사이에 유착이 있었다는 정보가 새어 나왔고, 야당과 대학생들이 전국적인 규탄대회를 열었다. 장준하는 규탄대회에서 재벌총수와 고위층 사이에 오간 내용을 폭로하면서 “우리나라 밀수 왕초는 바로 박정희”라고 비판하였다.[3] 1967년 3월 야당 통합을 추진하여 신민당에 입당하였고 1967년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선거 유세에서 “박정희씨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광복군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박정희씨는 과거 남로당 군사조직책으로 남한에서 지하조직 활동을 한 사람으로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조직원을 팔아 희생시켰다.” 라고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1971년 장준하는 자신의 학병 탈출과 광복군 참여시절을 회고하면서 ‘돌베개’를 내놓았다. ‘돌베개’를 내면서 저술의 이유로 ‘현대사의 증언’임을 밝히면서 “광복군 출신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일부 인사들이 광복군 모자 하나를 얻어 쓰고 기실 과연 어떤 일을 했는가 하는 것도 역사 앞에 밝히고자 함”이라고 밝혔다.[3] 1967년 4월 야당 대통령 선거운동 중 국가원수모독죄로 3개월간 투옥되기도 하였다.[8] 1971년 출판사 사상사를 설립, 자서전 돌베개를 출판하였다.[8]

야당 정치인 활동

10월 유신이후 정치활동을 하였고 신민당을 탈당, 1973년 2월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 최고위원에 뽑혔다. 1974년 1월 긴급조치 제1호 위반혐의로 구속되었으며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12월 신병 악화로 인한 형집행정지로 출감하였다. 1973년, 긴급조치가 기본권 탄압이라며 비판하고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15년에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15] 1973년 12월 24일 YMCA회관에서 전격적으로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시켜 ‘헌법개정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였다.[3]

1975년 4월 민주통일당을 탈당하였다.[8]

죽음

1975년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추락사로 사망하였다.[16]경찰은 사인을 실족사로 발표했다. 최초의 목격자 김용환은 당시 의문의 실족사를 이렇게 전했다.

“장준하는 두 손을 가슴에 나란히 얹고 편안한 자세로 자는 듯 누워 있었다. 등산모는 바위 중간쯤 나무 등걸에 걸려 있고 시계는 1시40분을 가리킨 채 멈춰 있었다. 왼쪽 귀밑이 약간 찢어진 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3] 부검 결과 시신의 귀 뒤에 뭔가로 얻어맞은 듯한 자국이 있었다. 높은 절벽에서 추락한 사람이 몸에는 상처가 없이 비교적 깨끗하여 당시 정권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는 말이 있고 현재 과거사위원회에서 조사하고 있다. 이후 동아일보 장봉진 기자가 이 사건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하다 체포당했다.[17]

2002년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타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조사[18]하여, 시뮬레이션을 통해 사망원인이 추락사가 아닐 가능성을 제기[19]하기도 했으나, 진상 규명 불능으로 최종 발표했다.[20] 진상 규명 불능 사유는 ‘정보기관의 자료 미확보’였다.[21]

한편, 추락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강조하고도 진상 규명 불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의문사위 결정이 객관성,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있으며,[22] 2009년 현재까지 그 의혹은 해소되지 않았다.[23]

평가

강원용은 그가 존경받아 마땅하나 그의 사상계 등의 활동에 대해 정치적인 목적이 강했다고 평하였다.[9]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상계 등을 창간하였으며 제3공화국 출범 뒤에는 박정희에 반대하는 것으로 정치적 목표를 바꿨다고 평하였다.[9]

안병욱은 ‘칼의 힘과 펜의 힘’(사상계 1969년 12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3] “‘사상계’는 펜을 가지고 칼에 대항했다. 지성의 무기를 가지고 권력의 아성에 육박했다. ‘사상계’에는 계몽의 메시지가 있었고, 비판의 언어가 있었다. 독재에 항거하는 자유의 절규가 있었고 관권에 대결하는 민권의 필봉이 있었다.”[3] 함석헌은‘돌베개와 브니엘’이라는 글에서 장준하를 “장준하의 사람됨을 보면 구약의 야곱 같은 데가 있습니다. 참사람이 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무외(無畏)의 덕을 그는 풍부히 가지고 있습니다. 겁이 없습니다.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라고 평가하였다.[3]

김준엽은 신청년이라는 중국 잡지를 예로 들면서‘사상계’는 자유·민권운동, 통일 문제, 경제발전 문제, 새로운 문화의 창조, 정의로운 복지사회를 줄기차게 추구했고, ‘사상계’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성인들이 모여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하였다. [3]

지명관은 ‘사상계’가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앙가주망의 전통을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했다. 그는 “장준하 선생 같은 분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다시 있을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3] 영문학자 여석기는 ‘사상계’는 ‘좋은 잡지’였고 ‘잘 팔리는 잡지’였다고 하면서, “이런 경우가 앞으로 있을 것이라고 잘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3] 언론학자 정진석은 1950년대부터 6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잡지를 대표한 것은 ‘사상계’였으며, 장준하는 잡지 언론인으로는 제1인자로 이 나라 언론과 민주주의 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3]

상훈

가족

  • 조부 : 장윤희
  • 부 : 장석인(1901년 ~ 1966년), 목사
  • 모 : 김경문
  • 처 : 김희숙(金熙淑, 1926년 ~)
    • 아들 : 장호권(張豪權, 1949년 5월 14일 ~), 언론인·출판인
    • 아들 : 장호성(張豪誠)
    • 아들 : 장호준(張豪峻)
    • 딸 : 장호경(張豪瓊)
    • 딸 : 장호연(張豪姸)
  • 동생 : 장명하(張明河), 치과의사
  • 동생 : 장창하(張昌河)
  • 동생 : 장영하(張英河)

함께 읽기

주석

  1.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11/03/200811030500016/200811030500016_1.html
  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86975
  3. 사상계와 장준하
  4. 쉽게 읽는 돌베게
  5. 장준하 《장준하 문집 3권, 사상계지 수난사》(장준하 저, 장준하선생 10주기 추모문집 간행위원회 편, 1985.8, 도서출판 사상) 473쪽 연보
  6.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돌베개, 2006) 165 페이지
  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67쪽
  8. 장준하 《장준하 문집 3권, 사상계지 수난사》(장준하 저, 장준하선생 10주기 추모문집 간행위원회 편, 1985.8, 도서출판 사상) 474쪽 연보
  9.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신동아 2004년 03월호(534호)
  10. (시론) 장준하와 최남선 중앙일보 2004년 09월 10일자
  11. 진보에겐 '최남선'도 달리 볼 시야가 필요 프레시안 2009-06-30자
  12.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11/03/200811030500016/200811030500016_5.html
  13.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86975
  14. 사상계와 장준하
  15. 장준하 선생 '긴급조치 사건' 재심 청구
  16. 함석현 평전
  17. 한권으로 보는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
  18. 오남석. “의문사진상규명위 성과와 한계”. 문화일보. 2009년 8월 19일에 확인함. 
  19. 김성훈. ““장준하씨 '등산중 추락사'아닌 듯””. 문화일보. 2009년 8월 19일에 확인함. 
  20. 연합뉴스. “장준하 의문사 또 '진상규명 불능' 결정”. 동아일보. 2009년 8월 19일에 확인함. 
  21. 김경탁. "흙탕물 한국 현대사의 한떨기 연꽃" - [새책]『장준하 평전』…‘금지된 동작’을 제일 먼저 시작한 혁명가”. 레디앙. 2009년 8월 19일에 확인함. 
  22. 이정훈. “장준하 선생 추락사 재조사 의문 쌓이는 의문사委 발표 - 시뮬레이션 결과와 결정 엇갈려 …“추락 가능성 희박” 강조하고도 “진상규명 불능””. 주간동아. 2009년 8월 19일에 확인함. 
  23. 정경모. “[길을찾아서] 막무가내 3류소설 ‘장준하 실족사’”. 한겨레신문. 2009년 8월 19일에 확인함. 

바깥 링크

전임
(동대문구 갑)민관식
(동대문구 을)이영준
제7대 국회의원(서울 동대문구 을)
1967년 12월 17일 - 1971년 6월 30일
신민당
(동대문구 갑)송원영
후임
(동대문구 갑)송원영
(동대문구 을)유옥우
전임
장면
제2대 국토건설단 단장
1961년 5월 18일 - 1961년 12월
후임
(국토건설청장이 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