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대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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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년 리스본 대지진
1755 Lisbon earthquake.jpg
날짜 1755년 11월 1일
규모 8.5 ~ 9.0
깊이 약 200km
진앙 세인트 빈센트 곶 남서쪽 200km
지진 해일 포르투갈 왕국, 에스파냐 왕국, 모로코, 그레이트브리튼 섬, 아일랜드 섬
피해 지역 포르투갈 왕국, 에스파냐 왕국, 모로코
인명 피해 30,000명 ~ 100,000명 사망

리스본 대지진(포르투갈어: Grande terremoto de Lisboa, 영어: Great Lisbon earthquake)은 1755년 11월 1일 토요일, 만성절 날에 포르투갈 왕국을 덮친 전대미문의 재앙이다. 지진이 리스본에 도달한 것은 현지시각으로 09시 40분이었다.[1] 지진에 뒤따른 화재해일로 인해 리스본과 그 일대 지역이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오늘날의 지진학자들은 리스본 대지진의 모멘트 규모를 8.5 ~ 9.0,[2][3] 진앙지는 상비센트 곶 서남쪽으로 약 200 킬로미터 지점 대서양 해역으로 비정한다. 리스본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는 적게는 1만 명에서 많게는 10만 명 정도로 추정되어,[4] 역사상 가장 사망자 수가 많은 지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리스본 대지진은 포르투갈 왕국의 정치적 긴장을 고조시켰고 포르투갈의 식민지 팽창에 심대한 지장을 미쳤다. 유럽의 계몽주의 철학자들 역시 이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어 신정론숭고에 관한 의문과 발전이 뒤따랐다. 또한 광범위한 지역에 영향을 미친 지진 중 최초로 과학적 연구가 이루어진 지진으로써, 현대의 지진학지진공학의 모태가 되었다.

지진과 뒤따른 해일[편집]

리스본 대지진으로 발생한 해일의 진행을 계산한 도표.

1755년 11월 1일 아침, 만성절 축일 날 지진이 일어났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3분 30초 ~ 6분 가량 지진이 지속되었고, 이 첫 번째 타격으로 도시 한복판에 너비 5 미터(15 피트)의 균열이 쩍 갈라졌다. 건물들이 붕괴하는 아비규환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건물이 없는 탁 트인 곳이 안전할 것이라 판단하고 부둣가로 몰려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해저가 드러나고 배들이 좌초할 정도로 물이 후퇴한 바다였다. 지진이 덮치고 약 40분 뷔, 해일이 항구와 도심지로 쇄도했고, 탕구스 강을 역류했다.[5] 몇몇 말탄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사력을 다해 박차를 가했다. 그 뒤 해일이 두 번 더 왔고, 해일이 덮치지 않은 곳에서는 화재가 발생해 5일 밤낮을 불탔다.

이 재앙에 휘말린 포르투갈 도시는 리스본만 있는 게 아니었다. 리스본 남부, 특히 알가르브 지역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었다. 해일이 알가르브의 해안요새들 중 일부를 박살냈고, 숱한 가옥들이 무너졌다. 리아 포르모사 모래톱이 해일을 막아준 파루를 제외한 알가르브 지역의 거의 모든 해안도시 및 촌락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라구스에서는 파도가 도시 성곽 꼭대기에 다다랐다. 프니치카스카이스를 비롯한 다른 포르투갈 지역들도 피해를 입었으며, 심지어는 내륙도시인 쿠빌러도 영향을 받았다. 지진의 충격파로 인해 쿠빌라의 성벽과 높은 탑들이 무너졌다. 마데이라 제도에서는 푼샬을 비롯한 작은 정착지들이 심대한 피해를 입었다. 아조레스 제도의 거의 모든 항구가 해일로 파괴되었고, 바닷물은 내륙 150 미터까지 육박했다.

지진의 충격파는 전 유럽에서 느낄 수 있었다.[6] 베네치아의 감옥에 갇혀 있던 카사노바도 충격파를 느꼈다.[7] 충격파의 진행범위는 북으로는 핀란드, 남으로는 북아프리카에 이르렀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그린란드[8] 캐리비안까지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9] 높이 20 미터의 해일이 북아프리카 해안을 휩쓸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마르티니크바베이도스에 이르렀다. 잉글랜드 남부 콘월에는 높이 3미터의 해일이 찾아왔고, 아일랜드 서해안의 골웨이 역시 해일로 인해 도시 성곽 일부가 파괴되었다. 아일랜드 남해안 킨세일에서는 선박 여러 척이 항구 안으로 굴러들어오고 시내의 장터에 물이 들어찼다.[9]

추정 진앙 위치.

지진학자들과 지질학자들은 리스본 대지진의 진앙지가 이베리아 반도 쪽으로 치우친 대서양 어딘가라는 점에는 모두 동의하지만,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에 관해서는 다소의 논란이 있었다. 초기 이론에서는 고린지 해산이 진원으로 추측되었으나 시뮬레이션 결과 역사상의 피해를 입힐 만한 해일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진앙지가 보다 포르투갈 해안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아조레스-지브롤터 변환단층을 따라 해저 반사 탐사를 하던 도중 세인트빈센트 곶 서남쪽에서 길이 50 킬로미터의 충상구조와 깊이 1 킬로미터 이상의 이동구조가 발견되었다. 이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지각에 상당한 구조적 영향이 가해졌을 것이다.[10]

전대미문의 재앙[편집]

타구스 강 쪽에서 바라본 리스본 지진을 묘사한 그림.

경제사학자 Álvaro Pereira 는 당시 리스본 인구를 대략 200,000 명으로 추산하는데, 그 중 30,000 ~ 40,000 명이 죽었다. 모로코 해안에서도 10,000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2009년에 당대 기록들을 조사하던 결과 11월 1일의 지진과 11월 18일의 국소적 지진의 보고가 서로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 밝혀졌다.[11] Pereira는 지진과 지진으로 인한 해일 및 화재로 인해 포르투갈, 에스파냐, 모로코에서 사망한 사람의 수를 40,000 명에서 50,000 명으로 추산한다.[12][13]

리스본 대지진 때 파괴된 카르모 수도원폐허.

리스본 건물들 중 85%가 파괴되었고, 이때 16세기 마누엘리네(포르투갈의 고딕 양식) 건축물들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지진을 견뎌낸 건물들도 곧이은 화재로 파괴되었다. 지진 발생 불과 6개월 전에 개장한 오페라하우스는 불에 타 폭삭 주저앉았다. 타구스 강 바로 옆에 있던 리베이라 궁전도 해일에 휘말려 박살났다(오늘날 그 자리에는 코메르시우 광장이 있다). 궁전 안에 소장되어 있던 장서 70,000여권과 티치아노, 루벤스, 코레지오 같은 거장들의 미술품 수백 점이 모두 소실되었다. 왕실문서보관소도 바스쿠 다 가마를 비롯한 대항해시대 초기 탐험가들의 항해 기록 등 소중한 사료들을 품은 채 소멸했다. 귀중한 장서 18,000여권이 소장되어 있던 de Lourical 후작 궁전도 파괴되었다.[14] 지진은 리스본 대성당, 상파울루 바실리카, 산타 카타리나, 상비센테 데 포라, 노사 센호라 다 콘세이상 벨하 등 리스본의 이름난 교회 건물들도 파괴되었다. 당시 리스본 최대 규모의 병원이던 호시우 광장만성병원이 불길에 휩싸여 입원 중이던 환자 수백 명이 타죽었다. 국가 영웅인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의 무덤도 떠내려가 시신이 유실되었다. 오늘날에도 리스본을 찾으면 카르모 수도원을 비롯해 당시 파괴된 폐허들 중 보존된 것들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도시의 재건[편집]

당시 포르투갈 왕가는 무사히 리스본을 빠져나갔다. 당시 공주 중 한 명의 부탁으로 주제 1세를 비롯한 왕가는 해돋이 구경 인파와 함께 있었고, 덕분에 화를 면했다. 지진이 지나간 뒤 주제 1세는 폐소공포증에 걸렸고, 리스본 교외의 아주다 언덕에 천막과 정자를 만들고 그곳을 궁전 대신 삼았다. 왕의 폐소공포증은 평생 낫지 않았고, 왕이 죽은 뒤에야 그 딸 마리아 1세아주다 궁전의 건설을 시작했다. 수상 세바스티앙 데 멜루(소위 폼발 후작)도 왕가와 마찬가지로 살아남았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냐는 물음에 폼발은 “망자를 묻고 산 자를 치유하라”고 답했다.[15] 소방관들은 넘실거리는 불길을 잡기 위해 사투를 벌였고, 여러 노동자 및 일반 시민들이 나서서서 시체가 썩어 역병이 돌기 전에 수천 구의 시체를 모두 치웠다. 교회는 싫어했지만 시체들은 바지선에 태운 뒤 바다 한가운데 수장시키는 식으로 처리되었다. 도시의 혼란 상태를 정리하기 위해 포르투갈 육군이 전개되었고, 도시 곳곳에 교수대가 설치되었다. 당시 공개처형된 사람은 서른 명이 넘는다.[16] 군은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이 도망가는 것을 막고 그들을 잡아다 도시 재건 사업에 투입했다.

왕과 수상은 리스본 재건에 즉시 착수하여, 지진이 쉽쓸고 지나간 지 1개월이 조금 지난 1755년 12월 4일, 공학자 마누엘 다 마이아의 계획안에 따른 리스본 재건안이 발표되었다. 마이아는 다섯 가지 선택안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옛 리스본의 폐자재를 그대로 사용해 그 자리에 다시 도시를 짓는 것으로, 가장 값싼 방법이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일부 거리들의 너비를 넓히는 것이었고, 네 번째는 바이자(시내 지역)를 완전히 쓸어버리고 백지 상태에서 다시 도시를 짓는 것이었다. 다섯 번째는 리스본을 아예 버리고 다른 곳에 새 도시를 짓는 것이었다. 왕과 수상은 네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17]

"폼발의 우리"라고 불린 지진학적 보호구조물.

도시의 잔해는 10년 안에 모두 정리되었다. 새롭고 완전히 질서정연한 도시를 만들 생각에 왕은 커다란 광장, 직선형 대로, 넓은 거리 등을 신생 리스본의 새로운 표어로 삼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폼발 양식 건물들은 유럽 최초로 내진 설계를 사용한 건물들 중 하나이다. 실험을 위해 작은 나무 모형이 만들어졌고, 군대가 그 주위를 행진하면서 지진을 시뮬레이션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리스본의 새로운 중심지인 바이자 폼발리나는 오늘날 리스본의 최고 관광지 중 하나가 되었다. 리스본 뿐 아니라 알가브르빌라헤알드산투안토니우 등지에서도 폼발 양식에 따른 재건이 이루어졌다.

또 대지진으로 일해 발생한 사회적 혼란에 대한 해결책으로 주제 1세의 뒤를 이은 마리아 1세는 1780년 카사피아를 설치하고 경찰총수 피나 마니크에게 그 조직을 맡겼다.

역사에 미친 영향[편집]

대지진은 일반 대중 뿐 아니라 많은 인텔리겐치아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리스본은 당대 유럽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가진 도시였으며, 지진이 일어난 날은 다름아닌 만성절 축일 날이었다. 그리고 지진이 휩쓸고 간 뒤 리스본의 대형 교회들은 모두 파괴되다. 그 결과 기독교 교회와 교회의 가장 큰 후원자인 국가의 권위에 대한 의문들이 술렁였다. 신학자들은 지진의 종교적 원인과 메시지를 찾아내고자 노력하며 이것은 신의 천벌이라고 했다.[18] 그러나 철학자들은 지진의 피해를 피해간 유일한 지역이 리스본의 홍등가알파마였다는 점을 거론하며 코웃음을 쳤다.

《1755년 지진의 알레고리》. 왼쪽 위 구석에 천벌을 의인화한 천사가 불타는 검을 들고 있다.

마침 발흥하던 계몽주의로 인해 유럽 전역의 먹물들은 대지진에 대하여 신학자들과는 전혀 반대되는 생각을 했다. 볼테르는 《캉디드》 및 《리스본 재앙에 관한 시》에서 라이프니츠의 “최선의 세계 최선의 상태”를 마구 공격했다. 한편 장자크 루소는 지진으로 인한 대도시의 파괴는 자신이 주장하는 농촌지역의 자연적 삶의 정당성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훗날 독일의 아도르노는 리스본 대지진이 18세기 근세 사회에 미친 영향은 20세기 근대 사회에 홀로코스트가 미친 그것에 비견된다고 진단했다. 가톨릭의 총본산인 리스본 시민들이, 모든 성인들을 기리는 만성절 날 커다란 대성당들에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를 올리던 도중에 지진으로 깔려 죽고 불타 죽고 물에 빠져 죽었다. 자애로운 신의 존재를 상정하던 라이프니츠는 패배했다. 유럽의 문화와 철학은 영원히 바뀌었다.[19]

이마누엘 칸트도 리스본 대지진에 관한 세 개의 저서를 출판했다. 지진에 매혹되었던 젊은 칸트는 관련된 모든 자료를 긁어모았고, 지진의 원인을 기계적으로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그는 뜨거운 기체로 채워진 지하의 거대 동굴의 이동으로 인해 지진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결론적으론 틀렸으나, 지진의 원인을 신의 천벌 따위 초자연적 무엇이 아닌 자연적인 것에서 찾은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발터 벤야민은 칸트의 얇은 책들이 독일의 과학적 지리학의 태초이자 지진학의 시작이었다고 단언한다.

지진학의 탄생[편집]

폼발 후작의 정책은 실질적 재건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전국의 모든 교구에 지진과 그 결과에 관한 질문을 돌렸다.

  • 지진이 언제 시작되어 얼마나 지속되었는가?
  • 충격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방향이 따로 있었는가? 예컨대 남쪽인가 북쪽인가? 건물들이 더 잘 무너지는 방향이 있었는가?
  • 몇 명이나 죽었고 그 중 시체를 분간할 수 있는 이는 몇인가?
  • 바닷물이 처음에 솟아올랐는가 가라앉았는가? 또 평소에 비해 몇 핸드나 더 솟아올랐는가?
  • 만약 불이 났다면 불길이 얼마나 지속되었고 그 불길로 인해 입은 피해는 무엇인가?[20]

이렇게 돌린 질문과 그에 돌아온 답변들은 오늘날에도 국립문서보관소인 토레 도 톰보에 모셔져 있다. 각지의 사제들이 보낸 보고를 연구 및 교차검증한 결과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리스본 대지진을 현대과학의 기준으로 재분석할 수 있었다. 폼발 후작의 설문조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렇듯 지진의 원인과 결과를 비록 포괄적이나마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서술로 기록하려 한 것은 폼발 후작이 최초이며, 그렇기에 그는 근대 지진학의 선구자로도 평가된다.

[편집]

  1. Between History and Periodicity: Printed and Hand-Written News in 18th-Century Portugal
  2. Gutscher, M.-A.; Baptista M.A. & Miranda J.M.; Miranda, J.M. (2006). “The Gibraltar Arc seismogenic zone (part 2): Constraints on a shallow east dipping fault plane source for the 1755 Lisbon earthquake provided by tsunami modeling and seismic intensity”. Tectonophysics 426: 153–166. Bibcode:2006Tectp.426..153G. doi:10.1016/j.tecto.2006.02.025. 20 March 2011에 확인함. 
  3. "Historic Earthquakes – Lisbon, Portugal." U.S. Geological Survey, October 26, 2009. {Estimate: 8.7}
  4. Pereira (2006), page 5.
  5. Viana-Baptista MA, Soares PM. Tsunami propagation along Tagus estuary (Lisbon, Portugal) preliminary results. Science of Tsunami Hazards 2006; 24(5):329 Online PDF. Accessed 2009-05-23. Archived 2009-05-27.
  6. An Extraordinary and Surprising Agitation of the Waters, ..., Philosophical Transactions, Vol. 49, (1755 - 1756) , pp. 351-398, [1]
  7. Memoirs of Jacques Casanova, Book 2, Ch. XXVI;
  8. Brockhaus' Konversations-Lexikon. 14th ed., Leipzig, Berlin and Vienna 1894; Vol. 6, p. 248
  9. Lyell, Charles. Principles of Geology. 1830. Vol. 1, chapter 25, p. 439 Online electronic edition. Accessed 2009-05-19. Archived 2009-05-21.
  10. Zitellini N. et al., The tectonic source of the 1755 Lisbon earthquake and tsunami. Anali di Geofisica 1999; 42(1): 49. Online PDF. Accessed 2009-05-23. Archived 2009-05-27.
  11. Blanc P.-L. Earthquakes and tsunami in November 1755 in Morocco: a different reading of contemporaneous documentary sources. Nat. Hazards Earth Syst. Sci. 2009; 9: 725–738. Online PDF. Accessed 2009-05-23. Archived 2009-05-27.
  12. Pereira (2006), pages 8–9.
  13. pages 33–9921.
  14. “A Comprehensive Report of the Great Lisbon Earthquake”. 2015년 3월 14일에 확인함. 
  15. T. D. Kendrick. The Lisbon Earthquake. 75쪽.  Kendrick writes that the remark is apocryphal and is attributed to other sources in anti-Pombal literature.
  16. Gunn (2008), page 77.
  17. Shrady, The Last Day pp. 152–155.
  18. “The Lisbon Earthquake”. Archive.org. 2014년 5월 7일에 확인함. 
  19. “Japan tsunami is small compared to five of world's biggest tsunamis”. 2014년 5월 7일에 확인함. 
  20. Shrady, The Last Day, pp.145–146

참고 문헌[편집]

  • Benjamin, Walter. The Lisbon Earthquake. En: Selected Writings, vol. 2. Belknap, 1999.
  • Hamacher, Werner. The Quaking of Presentation. En: Premises: Essays on Philosophy and Literature from Kant to Celan, pp. 261–293.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9.
  • (에스페란토) Marques, J. O. de Almeida. Voltaire e um episódio da história de Portugal (PDF). Originale en: Meditações - Revista de Ciências Sociais, vol. 9 n-ro 2. Londrina, 2004.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