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요하라노 후카야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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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하라노 후카야부'''({{ja-y|清原深養父|きよはらの ふかやぶ}} |
'''기요하라노 후카야부'''({{ja-y|清原深養父|きよはらの ふかやぶ}})는 일본 [[중고36가선]]중 한명이자 [[백인일수]]중 한명이다. 헤이안(平安) 중기의 관인(官人)이자 가인(歌人)이었다. 부젠(豊前, 풍전)의 국사(國司)였던 기요하라노 후사노리(清原房則|きよはらの ふさのり)를 아버지로 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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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기(延喜|えんぎ, 연희)8년 ([[908년]])에 내장소윤(内匠少允), 엔쵸(延長|えんちょう, 연장)원년 ([[923년]])에 내장대윤(内蔵大允)을 역임하였다. 엔쵸 8년 ([[930년]])에는 종5위하(従五位下)에 보위되었다. 말년에는 [[에도]] [[이와쿠라]](岩倉, 암창)에 사원을 지어 그곳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
엔기(延喜|えんぎ, 연희)8년 ([[908년]])에 내장소윤(内匠少允), 엔쵸(延長|えんちょう, 연장)원년 ([[923년]])에 내장대윤(内蔵大允)을 역임하였다. 엔쵸 8년 ([[930년]])에는 종5위하(従五位下)에 보위되었다. 말년에는 [[에도]] [[이와쿠라]](岩倉, 암창)에 사원을 지어 그곳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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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 고금화가집)에 17수(首), 여타 촉센와카슈(勅撰和歌集, 칙선화가집)에 총 41수가 정리되어 있다.<ref> 『勅撰作者部類』</ref> |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 고금화가집)에 17수(首), 여타 촉센와카슈(勅撰和歌集, 칙선화가집)에 총 41수가 정리되어 있다.<ref> 『勅撰作者部類』</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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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헤이안 시대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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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일본의 귀족]] |
2016년 1월 2일 (토) 23:51 판
기요하라노 후카야부(틀:Ja-y)는 일본 중고36가선중 한명이자 백인일수중 한명이다. 헤이안(平安) 중기의 관인(官人)이자 가인(歌人)이었다. 부젠(豊前, 풍전)의 국사(國司)였던 기요하라노 후사노리(清原房則|きよはらの ふさのり)를 아버지로 두었다.
엔기(延喜|えんぎ, 연희)8년 (908년)에 내장소윤(内匠少允), 엔쵸(延長|えんちょう, 연장)원년 (923년)에 내장대윤(内蔵大允)을 역임하였다. 엔쵸 8년 (930년)에는 종5위하(従五位下)에 보위되었다. 말년에는 에도 이와쿠라(岩倉, 암창)에 사원을 지어 그곳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 고금화가집)에 17수(首), 여타 촉센와카슈(勅撰和歌集, 칙선화가집)에 총 41수가 정리되어 있다.[1]
각주
- ↑ 『勅撰作者部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