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다이니노 산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다이니노 산미
大弐三位
본명후지와라노 가타이코
출생999년
사망1082년
성별여성
국적일본
직업가인
배우자후지와라노 가네타카

다이니노 산미(일본어: 大弐三位 だいにのさんみ[*], 999년 ~ 1082년)는 헤이안 시대 중기의 가인이다. 겐지모노가타리의 저자 무라사키 시키부의 딸이다. 본명은 후지와라노 가타이코/겐시(藤原賢子 ふじわら の かたいこ / けんし[*])이다. 도노 산미(일본어: 藤三位とうのさんみ({{{2}}})), 에치고노벤(일본어: 越後弁(えちごのべん)), 벤노메노토(일본어: 弁乳母(べんのめのと))라고도 불리며, '다이니노 산미'란 그 자신이 종3위 관위였던 것에 더해 배우자가 된 다카시나노 나리아키(일본어: 高階 成章(たかしな の なりあき))가 다자이노다이니 관직에 있었던 데에서 비롯된 호칭이다.

약력

[편집]

조호(長保) 3년(1001년) 세 살 때 아버지 후지와라노 노부타카(藤原宣孝)와 사별했다. 노부타카와 어머니 무라사키 시키부와의 결혼 생활은 3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조와(長和) 6년(1017년) 18세 무렵에 어머니의 뒤를 이어 고이치조인(一条院)의 뇨인(女院)인 쇼시(彰子, 조토몬인上東門院)의 뇨보(女房, 궁녀)로써 출사하였다.[참고 1] 고시키부노 나이시와는 서로 동료가 되었고, 이 사이에 후지와라노 아키무네(藤原頼宗), 후지와라노 사다요리(藤原定頼), 미나모토노 도모토(源朝任) 등과의 교제가 있었던 것이 알려져 있다. 그 뒤 간파쿠(関白) 후지와라노 미치카네(藤原道兼)의 차남 가네타카(兼隆)와 결혼하여 딸을 두었고, 그 딸은 미나모토노 요시무네(源良宗)에게 시집갔다. 이는 《에이가 이야기》(栄花物語) '초왕의 꿈'(楚王の夢)에서 "오미야(大宮)의 무라사키 시키부의 딸 에치고노벤,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의 아이를 낳았다"(大宮の紫式部が娘・越後の弁、左衛門督の子産みたる)라는 구절의 '사에몬노카미'를 가네타카로 보는 해석이다.[1]

다만 이 배우자를 '효에노카미'(兵衛督)의 오기로 보아 후지와라노 긴노부(藤原公信)로 비정하는 설도 있다.[2]이마카가미》(今鏡)에 요시무네의 아들인 도모후사(知房)가 다자이노 산미의 손자라고 한 기록에 따른 것으로, 긴노부는 딸이 태어난 이듬해인 만쥬(万寿) 3년에 세상을 떠났다.

만쥬 2년(1025년) 지카히토 친왕(親仁親王, 훗날의 고레이제이 천황)의 탄생으로 그 유모(乳母)로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조랴쿠(長暦) 원년(1037년)까지의 사이에 동궁권대진(東宮権大進) 다카시나노 나리아키(高階成章)와 재혼하였고, 조랴쿠 2년(1038년)에는 아들 다메이에(為家)와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덴기(天喜) 2년(1054년), 고레이제이 천황(後冷泉天皇)의 즉위와 함께 종3위(従三位)로 관위가 올랐으며, 남편 나리아키 역시 다자이노다이니(大宰大弐)로 임명된다.[참고 2]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078년(조랴쿠 2년)에 개최된 노래 시합(歌合)에 와카를 써서 제출하고 있어서, 이 무렵이면 여든에 가까운 당시로써는 상당한 고령에 해당하지만 최소한 이 시기까지는 살아 있었음이 확인된다.

와카

[편집]

백인일수

[편집]
아리마 산의 사사하라의 바람 소리, 어떻게 그대를 잊을 수 있으리까.
ありま山ゐなの篠原風吹は いてそよ人をわすれやはする

각주

[편집]

내용주

[편집]
  1. 당시에는 할아버지의 임국(任国)이었던 에치고 국(越後国)과 관명(官名)을 따서 에치고노벤(越後弁)이라 불렸다.
  2. 大弐三位라는 뇨보나(女房名, 궁녀로써의 이름)는 이 나리아키의 관직명과 자신의 관위에서 따온 것이다.

출처주

[편집]
  1. 柏木由夫 (1999). 大弐三位賢子の生 (일본어). 『源氏物語研究集成』15巻. 風間書房.
  2. 萩谷朴 (1971). 紫式部日記全注釈 (일본어). 上巻. 角川書店. 114–1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