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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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 조헌
重峯 趙憲
조선국 공조좌랑
(朝鮮國 工曹佐郞)
임기 1581년 ~ 1582년
군주 조선 선조 이연

신상정보
출생일 1544년
출생지 조선 경기도 김포
거주지 조선 경기도 김포
조선 한성부
조선 전라도 금산
사망일 1592년 (49세)
사망지 조선 전라도 금산에서 전사
국적 조선
경력 문신, 유학자, 경세사상가, 의병장
정당 서인 후예 세력
종교 유교(성리학)
상훈

조헌(趙憲, 1544년 ~ 1592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유학자이자 경세사상가, 의병장이다. 조선국 공조좌랑 등을 지냈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시호는 문렬(文烈). 본관은 배천(白川). 성혼의 문인이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1]

생애[편집]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난 조헌은 5살 때에 글을 읽는 등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효성이 있고 유순했다. 집은 가난하였으나 12세 때부터 김황(金滉)에게 시와 글을 배워 1565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567년(명종 22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예하 교서관에 속하였다. 이후 평안도 정주(定州) 성균관 향교 교수로 3년간 있으면서 그곳 선비의 풍속을 일신시켰다. 경기도 파주 성균관 향교 교수로 옮겨 성혼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니 성혼은 사양하면서 감히 사제 간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5년) 홍문관 정자(正字)로 왕의 불공이 옳지 않음을 말하다가 파면되었다.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의 문물과 제도의 따를 만한 것을 조목별로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동환봉사》에는 명나라의 신분제 실상을 일리며, 조헌은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명나라를 본받을 것을 제안하면서, 조선에서도 공·사노비를 양민화해 징병자원을 증대시키면 20년 뒤 100만의 정예 병사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2][3] 후에 박사(博士), 호·예 2조 좌랑, 전적(典籍), 감찰 등을 거쳐 경기도 통진(通津) 현감으로 다스리다가 법을 어긴 궁노비를 취조 중 장살(杖殺)하고 부평에 귀양을 갔다.

1581년에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고, 전라도사로 나가 소를 올려 연산군 때의 공안(貢案)이 아직도 민폐가 되므로 개혁할 것을 청하고 이율곡 등의 선비들과 친분을 유지하였다.

1582년에는 보은 현감으로 소를 올려 노산군(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할 것을 청했으나 모함을 받아 파면되었다. 1586년 조정에서 학제(學制)를 수정하고 각도 제독(提督)을 창설할 때 공주(公州) 제독이 되어 선비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앞장서서 실천하니 찾아드는 선비가 많았다. 이때 또 소를 올리는 한편 정여립의 행패를 따지고 공격하였으나 관찰사가 화를 두려워하여 여러 번 물리치므로 벼슬을 내놓고 옥천(沃川)으로 돌아갔다. 1589년에는 대궐에 엎드려 소를 올려 시정(詩政)의 장단점을 철저히 논하였는데 광론(狂論)이라 하여 삼사의 배척을 받고 드디어 길주(吉州)로 귀양 갔으나 그해 겨울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다 하여 석방되었다. 이렇듯 조헌은 철저한 유교적 입장에서 많은 개혁안을 상소하고 정론(正論)을 폈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 등을 보내와서 명나라를 칠 것을 전달하여 임금과 신하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상소를 올려 겐소 등을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경하여 왜군을 대비할 책을 상소했으나 정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시골에 내려가 왜란에 대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고경명, 김천일, 영남곽재우, 정인홍과 함께, 호서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보은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였으나 순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의 시기로 홍성 지방에 옮겨가서 또 의병 천여 명을 모집했다. 이때 왜군은 청주에서 진을 치고 있어 관군이 여러 번 패하였는데, 승장(僧將) 영규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여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등 전과를 세웠다.

곧이어 의주로 북상하기 전에,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흩어지고 남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게 되었다. 그때 당시 금산(錦山)의 왜군이 충청도 일대로 세력을 넓힐 기세라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영규와 함께 금산을 향해 가서 왜군에게 함락된 금산의 10리 밖에 이르렀다. 당초 호남 순찰사 권율과 합세하여 적을 협공할 약속이었으나 권율로부터 그 기일을 미루자는 편지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왜군은 이미 조헌이 거느린 의병의 약점을 알고 역습해 왔다. 그의 군사는 역전 분투하여 왜군에게 많은 손해를 주었으나 많은 수를 대적하지 못하여 조헌과 7백의사가 전멸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을 회복하게 된다.

사후[편집]

  • 1604년(선조 37년), 이조판서로 추증
  • 1609년(광해군 1년), 조헌의 위패를 모신 옥천의 사당에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이 하사됨 : 표충사(表忠祠)
  • 1636년(인조 14년), 김포의 생가 터에 서원이 건립됨
  • 1670년(현종 11년), 서원에 편액이 내려짐 : 우저서원(牛渚書院) 사액
  • 1754년(영조 30년), 영의정으로 가증(加贈)
  • 1883년(고종 20년), 성균관 문묘(文廟)에 종사됨

관련 작품[편집]

같이 보기[편집]

관련 항목[편집]

관련 인물[편집]

관련 도로[편집]

각주[편집]

  1. 조헌 - 한국학중앙연구원
  2. 민족문화추진회. 《연행록선집Ⅱ》. 민족문화추진회. 
  3. 배영대 (2018년 4월 7일). ““백성이 다 귀하면 나라 망해” … ‘양반들 리그’ 옹호한 정약용”. 중앙일보. 2018년 4월 7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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