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철 (18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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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철

이원철(李源喆, 1896년 8월 19일 ~ 1963년 3월 14일)은 일제 강점기대한민국의 천문학자[1], 기상학자, 교육자, 관리다. 국내 최초의 이학박사이다. 본관은 우계, 자는 우경(禹卿), 호는 우남(羽南)이다.

학력[편집]

  • 1919 연희전문학교 수학물리과 졸업 (1회 졸업생)
  • 1922 美 앨비온(Albion) 대학 졸업
  • 1923 ~ 1926 美 미시간대학교 천문학 전공 (이학 석·박사)

보성고등보통학교선린상업고등학교를 거쳐 1919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알비언 칼리지에서 학사학위, 미시간대학(University of Michigan)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전공하여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경력[편집]

  • 1926 ~ 1938 연희전문학교 교수(수학물리과)
  • 1945 ~ 1948 군정청(軍政廳) 학무국 기상과장(氣象科長) 겸 관상대 대장
  • 1948. 8 ~ 1961. 5문교부 산하 국립중앙관상대 초대대장
  • 1954- 1956 인하공과대학(仁荷工科大學) 초대학장
  • 1947 한국기상학회 초대회장
  • 1948 국립중앙관상대 초대대장
  • 1960 ~ 1963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 1961 ~ 1963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

광복 후 미군정청 문교부 기상국장 겸 중앙관상대장과 연희전문학교 교수한국천문학회장을 역임했고, 정부수립 후 초대 중앙관상대장에 임명됐으며, 인하공과대학 학장,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 천문학계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독수리자리 에타 별이 세페이드 변광성임을 밝혔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우남 이원철은 1896년 경기도 양주(후에 남양주로 분군된 지역)에서 태어났다. 이원철은 이억의 아들 이원길(李原吉)의 18대손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이규현(李奎顯)의 손자이자 사헌부감찰을 지낸 이중억(李重億)의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2] 아버지 이중억은 무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역임했으나 그가 6세 되던 해에 사망한다. 형 이원상(李源祥)은 1929년 당시 미국 영사관 통역관을 지냈다고 한다.

큰형 이원창(李源昌)과 형 이원상은 1910년대 초 YMCA 기독교청년회의 영어학당의 영어교사로 있었다. 운석 장면에 의하면 당시 영어학당 영어 교사로 이원창, 이원상과 윤태헌 등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는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현재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고등보통학교(1910-1915년)와 선린상업고등학교를 나와, 1915년에 현재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 1회 입학생이 되었다. 1919년 연전 수물과를 졸업하고 1922년 1월까지 연희전문의 전임강사로 강단에서 교육 활동을 하였다.

그 뒤 미국으로 유학, 1926년 미국 미시간대학(University of Michigan)에서 천문학 박사 학위를 수령했다.

교육 활동[편집]

연희전문학교 교사 시절

그 뒤 미국에 유학, 1922년 1월 미국 미시간주에 있는 앨비언 칼리지(Albion college)에 학부 4학년생으로 편입하였다. 이원철은 5개월만에 학사학위를 받고, 1922년 6월미시간대학교 천문학과에 입학하였다. 그 학과에는 1910년대와 1930년대에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 와서 연희전문에서 천문학을 강의했던 칼 루퍼스(Carl W. Rufus) 박사가 있었고, 이원철은 그의 지도를 받는 학생이 되었다. 그는 1년만인 1923년에 석사학위를 받고, 다시 3년 뒤인 1926년 6월세페이드 변광성독수리자리 에타를 연구하여 이별이 변광성임을 입증하고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제 강점기 치하에서 고생하던 우리 민족에게 큰 자긍심을 안겨주는 등 대한민국 항성연구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이 논문은 독수리자리 에타별이 시간에 따라 팽창과 수축을 되풀이하며 밝기가 변하는 ‘맥동변광성’임을 정교한 분광학적 관측과 계산으로 밝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논문은‘Publications of the Observatory of the University of Michigan’에 게재되었다. 독수리자리 에타별은 이후 ‘원철성(星)’이라는 별칭으로 삼천리 등 언론에 의해 대서특필되었다.

박사 학위를 받자마자 귀국, 다시 서울의 모교로 돌아와 1938년까지 12년간 연희전문 수학물리과 교수 및 학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여러 제자들을 길러냈다. 1928년에는 대학 구내에 한국 최초로 현대식 굴절망원경을 설치해 교육과 연구에 활용하도록 했고 이로 인해 연희전문 개교 당시부터 지속되어오던 천문학 강의가 더욱 내실 깊어질 수 있었다.

대표적인 반일인사이기도 했던 이원철 박사는 백낙준, 최현배 교수와 함께 수양동우회 사건, 흥업구락부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교수직을 두 번이나 박탈당했다.[3] 1940년에는 창씨개명령이 내려졌으나 역시 거절하였다. 1928년 연희전문 졸업앨범에는 이원철은 연희전문학교에 소장하던 한 망원경 앞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사진이 실려있다. 하지만 그가 애지중지하던 이 망원경은 1942년 총독부가 전시물자로 징발 해가고 말았다.

해방 직후엔 현대적인 기상대 체계를 갖추는 일에 매진했다. 군정 치하에서 일제의 기상대를 인수해 관상대장으로 부임, 이를 국립중앙관상대로 발전시켜 대한민국 기상과 천문업무의 기틀을 마련했다. 1948년부터 1961년까지 초대중앙관상대장으로 근무하며 열악했던 우리나라의 기상 및 천문학 분야를 개선하는 한편 한국 최초의 과학기관인 국립중앙관상대에서 국가의 시간 기준이 되는 역서를 발간하는 등의 업적을 쌓았다.


광복 이후[편집]

미군정 문교부 기상국장 시절
초대 중앙관상대장 시절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나서, 1945년 9월에 미군정청 문교부 학무국 기상과장(氣象科長) 겸 중앙관상대장직을 맡게 되었다. 10월 15일 관상대의 부족한 인력을 확충하기 위해 관상대 실습학교를 개설하여 중학교 이상 졸업자 35명을 선발하여 천문학과 기상예보 과정을 이수시키고 46년 봄 1기생을 배출했다. 1947년 미군정청 기상국장이 되면서 다시 중앙관상대장직을 겸하였다. 1947년 한국기상학회의 설립에 참여하고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948년 8월 정부수립 후 문교부 산하 제1대 중앙관상대장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1961년 5월까지 중앙관상대장직을 맡으면서 그는 기상기술원양성소를 설립하여 기상요원을 훈련해 내고 현대적인 기상관측 장비를 들여오는 등 대한민국 기상업무를 본궤도에 올려 놓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자 피난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었다. 이때 그는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 1953년 서울에서 휴전을 맞이하였다. 전쟁 중에는 정상적인 기상관측업무가 정상적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노력했고, 전쟁 후에는 복구와 민간항공기 기상 지원을 위해 김포국제공항측후소를 신설해 민간항공기 안전운항에 기여했다.

생애 후반[편집]

1953년 휴전 이후 다시 천문학 연구와 교육, 저술, 강연 활동에 전념하였으며,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로도 출강하였다. 이때 아폴로 박사로 유명한 조경철을 가르치기도 했다.[4] 1956년에는 대한민국이 68번째로 세계기상기구(WMO)의 정회원국으로 가입시켰다. 1955년부터 1957년까지는 서울 YMCA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인하공대 초대학장을 역임했고, 1960년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에 피선되었다. 1961년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61년 서귀포 출장소 기상관측센터의 신설 등 대한민국 기상관측업무 및 항공기 운항업무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한국 최초 공과대학인 인하공과대학 설립과정에 참여했고, 초대학장으로 선임되어 현재의 인하대학교를 건립하는데 있어 기초를 닦았다. 한국 천문학을 발전시킨 장본인으로 당시 열악했던 국내 교육 여건 속에서도 대학 교육과 YMCA 재단 이사와 이사장을 역임하고 대중 과학강연을 펼쳤다.

이원철은 1963년 3월 14일 오전 11시,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7-77 자택에서 고혈압에 의한 심장마비 등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5]. 슬하에 자녀는 없었고,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군 진접읍 금곡리(金谷里)에 안장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67세였다.

사후[편집]

경기도 남양주군 진접면 금곡리산 오좌(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에 안장되었다. 부인 경주김씨 김화순 역시 임술(1982)년 8월 29일에 서거하면서 그의 묘소에 합장되었다. 근처 우측 상단에는 계모 경주김씨의 묘소가 있다.

국립과학관 명예의 전당 이학분야에 그의 흉상 동판이 헌정되었다.

사회 기여[편집]

슬하에 자녀가 없었으나 자신의 재산과 토지를 친족에게 상속하지 않고 남양주YMCA에 모두 기부하였다.

가계[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각주[편집]

  1. 과학기술인 명예의전당
  2. 경향신문 1984년 12월 29일자 기사.
  3. 1938년 9월에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해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켜 군국주의로 치닫던 일본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을 조작해내서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투옥하고 민족의식이 있는 교수들을 교단에서 몰아냈는데, 그는 흥업구락부 사건최현배(崔鉉培) 등과 함께 교직에서 추방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4. '아폴로 키드'들, 조경철 '우주여행' 길 지키다 - 오마이뉴스
  5. 동아일보 1963년 3월 15일 뉴스

외부 링크[편집]

전임
(초대)
초대 국립중앙관상대장
1949년 11월 3일 ~ 1961년 5월 30일
후임
국채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