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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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탑*
Welterbe.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Tower of London, Traitors Gate.jpg
영어명* Tower of London
프랑스어명* Tour de Londres
등록 구분 문화유산
기준 Ⅱ, Ⅳ
지정 역사
1988년  (12차 정부간위원회)

* 세계유산목록에 따른 정식명칭.
** 유네스코에 의해 구분된 지역.

런던탑(영어: the Tower of London)은 센트럴런던템즈강 북안에 있는 유서깊은 이자 궁전이다. 정식 명칭은 여왕 폐하의 궁전이자 요새인 런던탑(Her Majesty's Royal Palace and Fortress of the Tower of London)이다. 종종 그냥 (The Tower)이라 부르기도 한다. 타워햄리츠 구에 속해있으며 서쪽은 타워힐 공원을 사이에 두고 시티오브런던과 마주하고 있다.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인 1066년에 세워진 요새를 기반으로 건축되었다. 런던탑의 명칭은 1078년 정복왕 윌리엄이 잉글랜드에 새로운 지배자가 들어섰음을 상징하는 건물로서 세운 화이트 타워에서 유래되었다.

런던탑은 헨리 1세가 1100년 더럼의 주교 래널프 플래임버드를 감금하는데 사용된 이후[1] 1952년 크레이 형제가 감금될 때까지[2] 종종 감옥으로 쓰였다. 15세기 후반 장미 전쟁의 와중에 에드워드 5세요크 공작 리처드가 런던탑에 갖혔다 행방이 묘연해지는 런던탑의 두 왕자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3] 이 때문에 누군가 감옥에 가는 것을 "탑에 보낸다"(Sent to the Tower)라고 하는 풍속이 생기기도 하였다.[4] 16세기에서 17세기 동안 런던탑은 많은 인사들을 감금하는 장소였다. 즉위 전의 엘리자베스 1세, 월터 롤리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롤리와 같은 사람들이 탑으로 보내졌다.

여러 차례 주요 인사를 감금한 역사가 있지만, 런던탑의 주요 기능은 감옥이 아니라 궁전이었다. 몇 개의 건물들로 이루어진 런던탑은 해자성곽으로 이중의 방어 시설을 갖추었다. 런던탑은 12세기와 13세기를 거치면서 리처드 1세헨리 3세,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증축되어 13세기 후반 무렵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런던탑의 중심 건물인 화이트 타워는 애초 지어질 때에는 흰색이 아니었지만 헨리 3세가 흰색으로 외장을 꾸민 뒤 그렇게 불리기 시작했다. 런던탑은 궁정으로서 군주가 기거하는 장소로, 군주가 없을 때에는 런던탑 무관장이 성의 관리를 일임한다. 런던탑 무관장은 중세 시기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군주의 신임을 받는 지위였으며 현재는 영국군의 육군 원수가 역임하고 있다.[5] 튜더 왕조 이래로 런던탑은 왕실 자산이 되었다.

런던탑은 무기고 또는 국고동물전람원을 위한 장소, 왕립조폐국, 등기소, 영국 왕관 및 보주 보관소 등으로 쓰였다. 14세기 초반에서 찰스 2세 재위 기간까지 잉글랜드 국왕의 대관식 의례에는 런던탑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까지 행진하는 관례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런던탑 역시 독일의 공습으로 피해를 입었다. 전쟁 후 보수를 거친 런던탑은 역사적 궁전의 하나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건축[편집]

배치[편집]

런던탑의 평면도

영국의 고고학자 앨런 빈스는 런던탑이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 피지배민이 된 앵글로-색슨의 반란을 우려하여 건설된 요새에서 출발하였다고 본다.[6] 세워질 당시 런던탑은 런던 시내와 분리되어 탬즈 강을 이용해 드나들었다.[7] 성은 크게 세 곳의 베일리로 구획되어 있는데 가장 먼저 지어진 화이트 타워가 제일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과 동, 서의 내부 베일리는 리처드 1세(1189년 –1199년) 시기 지어진 것이다. 이후 에드워드 1세가 외곽 성벽과 베일리를 건축하여 1285년 완공하였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증축이 있었지만 기본적인 모양은 에드워드 1세 시기의 것을 유지하고 있다. 성의 면적은 12 에이커(4.9 헥타르)이고 주변으로 6 에이커(2.4 헥타르)의 리버티가 추가되어 있다. 리버티는 보안상의 이유로 주변을 정리한 구역이다.[8] 헨리 3세는 성 주위 구역에 방해물을 제거하라고 명령했고 그것이 리버티의 기원이 되었다.[9] 널리 퍼진 이야기들과는 달리 런던탑엔 항시적인 고문실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고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화이트 타워에는 종종 이 설치되었다.[10] 에드워드 1세가 물품의 하역을 위해 런던탑 남측에 부두을 설치했고 리처드 2세가 이를 오늘날의 크기로 확장했다.[11]

화이트 타워[편집]

견고한 중세 건축물인 화이트 타워는 런던탑의 아성으로 군주의 거처로 지어졌다.[12] 군사 역사학자 앨런 브라운은 "화이트 타워는 거대한 탑으로 그 견고함 자체가 군주의 안녕과 존엄을 나타내었다"고 평가하였다.[13] 화이트 타워는 서유럽 일대에서 가장 큰 아성 가운데 하나로서[14] "11세기 유럽의 궁전들 가운데 가장 완벽한 궁전"이었다.[15]

화이트 타워 1층에 있는 원래의 출입구

화이트 타워는 연결된 부속 탑들을 제외하고 가로 36 m, 세로 32 m로 가장 높은 남쪽 흉곽의 높이는 27 m 이다. 건축 당시에는 기반층, 출입층, 위층의 3층 구조였다. 노르만 건축 양식으로 지은 전형적인 아성으로 남쪽으로 낸 출입구에는 방어시 제거할 수 있는 나무 계단이 놓였다. 헨리 2세(1154년 - 1189년)가 화이트 타워 출입구 외곽에 방어용 성문을 추가하였지만 현존하지는 않는다. 각 층은 세 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고 서쪽 방이 가장 크고 북동쪽의 방은 작다. 출입층과 위층의 남동쪽엔 예배실이 마련되어 있다.[16] 서쪽 모서리에는 정방형 탑이 세워져 있고 북동쪽엔 나선 계단이 놓인 원형 탑이 세워져 있다. 남동쪽 모서리로 예배실의 후진이 원호를 그리며 튀어나와 있다. 유사시 농성을 염두에 두고 지었기 때문에 벽 안쪽으로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으며 난방을 위한 벽난로도 네 곳에 설치하였다.[15]

화이트 타워에 사용된 건축 재료는 주로 켄트 지방의 경질암으로 이 밖에 런던 주위의 이암 (암석)도 함께 쓰였다. 외장재로는 석회암이 쓰였는데 원래는 노르망디에서 가져온 캉 스톤이 쓰였지만 중세를 지나면서 대부분 유실되었고, 17세기 - 18세기 무렵 포틀랜드 스톤으로 대체되었다. 18세기에 탑의 창문들을 보수하면서 남측의 외형이 크게 바뀌어 두 개의 창문만 예전의 모습을 유지게 되었다.[17]

둔치 쪽으로 테라스를 만들면서 북면의 기반층 가운데 일부는 지하가 되었다.[18] 대부분의 아성이 그렇듯이[19] 화이트 타워도 바닥층의 지하실을 창고로 사용하였다. 우물은 지하층의 방들 가운데 하나에 설치되었다. 화이트 타워의 평면 배치는 최초의 건축 당시와 큰 변화가 없지만 내부 장식은 대부분 18세기에 개조한 것이다.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예전까지 나무 마루로 되어 있던 바닥을 벽돌로 교체한 것이다.[18] 기반층에는 채광을 위한 좁은 홈들이 있다.[15]

화이트 타워 내의 성 요한 예배실

출입층은 런던탑 무장관과 부관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남측 출입문은 17세기에 폐쇄되었다가 1973년 다시 개방하였다. 남측 출입문으로 들어가 동쪽의 작은 방을 지나면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남동쪽으로 성 요한 예배실의 크립트가 있으며 동쪽 방을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다. 크립트의 북쪽 벽에 벽감을 만들어 놓았다. 조프리 파넬은 "창문이 없는 형태와 하나만 나있는 출입문을 고려할 때 이 곳은 왕실의 보물과 중요 문건을 보관하기 위한 수장고로 보인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18]

위층 서쪽에는 큰 방이 있으며 동쪽으로 거실 두 개가 딸려 있다. 거실은 둘 다 지붕으로 덮여있고 벽 속으로 지은 갤러리에 둘러 쌓여 있다. 남동쪽으로 성 요한 예배실이 있다. 최상층은 15세기 무렵 현재의 지붕을 만들면서 함께 만든 것이다.[16][20] 화이트 타워가 처음 만들어 질 때에는 예배실이 없었지만 흉곽을 추가하면서 건물에서 튀어나온 형태로 덛붙여 건축하였다.[18] 건물의 기능과 디자인이 변화함에 따라 예배실의 모습도 계속 변하여 현재는 만들어졌을 당시의 인테리어는 그다지 남아있지 않다.[21] 현재의 예배실은 노르만 왕조 시기의 건축물이 연상되도록 단순하고 꾸밈없는 모습이지만, 헨리 3세 재위 기간이었던 13세기에는 예배실을 금장한 십자가로 장식하였고 성모 마리아성 삼위를 나타낸 스테인드 글라스를 설치하였다.[22]

이너모스트 와드[편집]

런던탑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안뜰인 이너모스트 와드(Innermost ward)는 화이트 타워 바로 남쪽에 있으며 템즈 강변과 맞닿아 있다. 런던탑은 11세기 요새 건축의 일반적 양식이었던 헨 도멘 방식으로 지어졌으므로 건축 당시에는 이너모스트 와드에 목조 건물이 있었을 것이다. 화이트 타워에 군주가 기거하지 않게 되면서 이너모스트 와드의 목조 건물이 철거되었지만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1170년대 쯤이지 않을까 추측된다.[17] 왕실은 1220년대와 1230년대 사이에 다시 런던탑에 거주한 바가 있고, 이로서 왕실의 다른 거처인 윈저성과 견주어지곤 하였다.[23] 1220년대에 이너모스트 와드와 템즈강 사이를 성벽으로 막고 경계를 위한 망루인 웨이크필드 타워와 렌턴 타워를 조성하였다.[24][nb 1] 이너모스트 와드 남쪽의 두 망루 사이에 그랜트 홀을 지었고 이로서 이너모스트 와드는 궁전이 되었다. 유물을 살펴 보면 헨리 3세 시기 왕비의 거처는 백색으로 도장하고 꽃을 그려 넣었으며 바닥에는 판석을 깔았다.[25] 이러한 구조는 헨리 3세 시기 지어진 윈체스터 성의 것과 매우 유사하다.[26] 웨이크필드 타워 옆으로 군주의 거처와 통하는 은밀한 샛문이 있엇다. 이너모스트 와드는 원래 해자로 둘러쌓여 있었지만 1220년대에 매꾸어졌다. 그 당시엔 조리실 역시 여기에 있었다.[27] 1666년에서 1676년 사이에 이너모스트 와드에 있던 궁전은 해체되었다.[28] 화이트 타워 주변에는 시야를 가릴만 한 어떤 것도 남지 않게 되었고 아성에 들어서려는 사람은 누구든 개활지를 통과하여야만 하였다. 화이트 타워의 수장고가 무너지자 영국 왕관 및 보주는 마틴 타워로 옮겨졌다.[29]

이너모스트 와드의 내부. 뜰 안에 11세기게 지어진 화이트 타워가 있다. 보도의 왼쪽 끝은 웨이크필드 타워이고 그 뒤로 트레이터즈 게이트(Traitors' Gate 반역자의 문)이 보인다.

이너 와드[편집]

이너 와드는 사자심왕 리처드 시기에 이너모스트 와드 서쪽의 뻘을 매꾸어 지어졌다. 이로서 런던탑의 크기는 두 배 가량 확장되었다.[30][31] 헨리 3세가 이너 와드의 동쪽과 북쪽에 성벽을 쌓았고 그 뒤로 이너 와드는 오늘날까지 같은 크기를 지니게 되었다.[9] 이너 와드를 둘러싼 성벽에는 아홉 개의 망루가 세워졌는데 그 중에 두 개가 새로 지어진 것을 빼고는 헨리 3세 당시의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있다.[32] 이너 와드를 둘러싼 성벽은 이너모스트 와드의 웨이크필드 타워와 렌턴타워 사이의 성벽과 합하여 런던탑의 막벽을 이룬다.[33] 이너 와드의 주출입문은 서쪽 성벽과 연결괸 문루인 뷰챔프 타워이다. 이너와드의 서쪽 막벽은 에드워드 1세 시기 개축되었다.[34] 뷰챔프 타워는 벽돌로 지어졌다. 영국에서는 이미 로마 속주 시기였던 5세기 무렵부터 벽돌을 건축 자재로 사용해 왔지만, 뷰챔프 타워가 지어진 13세기 당시 이 건물은 영국에서 가장 큰 벽돌 건축물이었다.[35] 현재는 이너 와드의 막벽을 둘러싸고 13 개의 망루가 세워져 있는데, 남서쪽 구석에서 부터 시계방향으로 벨, 뷰챔프, 데버루, 플린트, 보우여, 브릭, 마틴, 콘스터블, 브로드 애로우, 솔트, 렌턴, 웨이크필드, 블루디 타워로 불린다.[33] 망루는 경계과 방어를 위한 시설로 이름들 역시 역할에 따라 붙여진 것이 많다. 벨 타워엔 경종이 있고, 보우여 타워는 장궁이나 크로스보우, 투석기 따위를 제작하던 궁장인의 작업실이 있었고, 렌턴 타워에는 등대가 놓여 있었다.[36]

워털루 블록의 남측 벽

헨리 3세가 이너 와드의 막벽을 건축하면서 원래 런던탑 밖에 있던 노르만 양식의 속박된 성 베드로 예배실이 성 안으로 편입되었다. 헨리 3세는 예배실에 장엄한 창문을 내어 자신과 왕비를 위한 성소로 삼았다.[32] 에드워드 1세는 300 파운드의 비용을 들여 예배실을 개축하였고[37] 1519년 헨리 8세가 다시 개축하였다. 예배실은 19세기에 개조되었지만 현재도 헨리 8세 시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38] 이너 와드를 만들면서 웨이크필드 타워 바로 옆에 세운 블루디 타워에는 템즈강에서 런던탑으로 물을 끌어드리기 위한 수문이 달려있었다. 수문에는 방어를 위해 내려닫이 창살문인 포트컬리스를 달았다.[39] 블루디 타워란 이름은 16세기에 붙여졌는데 런던탑의 두 왕자가 죽임을 당한 뒤 여기를 통해 버려졌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40] 1339년에서 1341년 사이에 막벽의 벨 타워와 솔트 타워에 문루가 세워졌다.[41] 튜더 왕조 시기 이너 와드 북쪽 안뜰에 군수품 창고가 세워졌다.[42] 스튜어트 왕조 시기에는 성의 대부분 지역이 군수품 보관과 관리를 위한 사무소로 쓰였다. 1663년 4000 파운드를 조금 넘기는 비용을 들여 이너 와드에 새 창고가 건설되었다. 이 건물은 뉴 아모리즈(New Armouries, 새 무기고)고 불리게 되었다.[43] 1688년에는 튜더 시기 세워졌던 군수품 창고를 개축하였으나[44] 1841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옛 병영인 워털루 블록은 투더 시기에 신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로서[45] 오늘날에는 지하실을 왕가 수장고로 사용하고 있다.[46]

아우터 와드[편집]

세번째 안뜰인 아우터 와드는 에드워드 1세 시기 증축된 것으로 성과 인접하여 있다. 같은 시기 성의 북서쪽에 레그즈 마운트(Legge's Mount)로 불리는 보루가 건축되었다. 북동쪽의 브라스 마운트(Brass Mount)는 그 보다 나중에 지어진 것이다. 세 개의 사각형 탑이 동쪽 성벽을 따라 지어졌지만 1843년 해체되었다. 레그즈 마운트의 건축이 튜더 왕조 시기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 고고학적 조사 결과는 이 보루의 건축이 에드워드 1세 시기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47] 레그즈 마운트 남쪽에 남아 있는 흉곽은 런던탑의 흉곽 가운데 유일하게 중세 시기의 것이 남은 것이다. 흉곽의 나머지 부분은 빅토리아 시대에 해체되었다.[48] 아우터 와드가 만들어지면서 그 주위로 새로운 해자가 놓였다. 새 해자의 폭은 50 m 이고 깊이는 4.5 m 이다.[47] 아우터 와드에 새 막벽을 건축함으로써 옛 출입문은 역할이 애매하게 되었다. 새 성벽의 출입문은 성벽의 남서쪽에 세워졌고 이너 와드와 아우터 와드 문루 사이의 공간은 옹성 역할을 하게 되었다. 1330년대에 런던탑이 왕실 동물원으로 사용되면서 아우터 와드의 문루는 라이언 타워로 불리게 되었다.[49] 라이언 타워는 훗날 해체되었다.[50] 에드워드 1세는 런던탑의 남쪽과 템즈강변 사이에 성벽을 보강하고 1275년에서 1279년 사이 문루인 토머스 타워를 세웠다. 이 문루는 훗날 트레이터즈 게이트 즉 배신자의 문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튜더 시기 이 문을 통해 죄수들을 런던탑에 보냈기 때문이다. 트레이터즈 게이트는 블루디 타워를 대신하여 수문으로 쓰였다. 문루에는 강변에서 공격해 올 경우를 대비하여 궁수가 틈새로 활을 쏠 수 있는 에로우슬릿을 설치하였고 1층에는 화려하게 꾸민 숙소가 있었다.[51] 에드워드 1세는 또한 왕립 조폐국을 런던탑으로 옮겼는데 그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라이언 타워 인근의 아우터 와드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52] 이후 1560년 조폐국은 솔트 타워 부근으로 이전하였다.[53] 1348년에서 1348년까지 국왕 전용의 두번째 수문인 크래들 타워가 토머스 타워 동쪽 옆으로 증축되었다.[41]

런던탑의 외부 막벽. 중앙에 보이는 것이 레그즈 마운트이고 뒤로 이너와드의 막벽이 보인다.

건립 초기의 역사[편집]

노르망디 공작 정복자 윌리엄은 1056년 10월 14일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한 뒤 그 해의 나머지 기간 동안 자신의 정복지를 지키기 위해 요새를 지었다. 윌리엄 1세는 런던으로 향하면서 길을 따라 여러 곳에 요새를 만들었다.[54][55] 윌리엄 1세가 캔터베리에 당도하였을 때 런던으로 통하는 다리는 앵글로-색슨의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그는 서더크를 공략하는 대신 잉글랜드 남부로 우회하기로 결정하였다.[56] 1056년 12월 까지 노르만 군대는 전투를 피하고 주변 도시의 길을 차단하여 런던을 고립시켰다.[57][58] 1066년에서 1087년 사이 윌리엄 1세는 36개의 성을 축조하였다.[55] 당시 토지 소유와 인구를 조사한 둠스데이 북에는 그 보다 많은 영지가 기록되어 있다.[59] 새로운 지배자는 "중세 유럽 사상 가장 큰 규모의 집중된 축성 프로그램"을 집행해 나갔다.[60] 로르만 군은 저항 세력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요새를 겸하면서 지배력의 중심지이자 자신들의 거주지인 다용도의 건축물을 지었다.[61]

윌리엄 1세는 그가 당도할 도시에 선봉대를 보내 개선 행사와 축성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윌리엄 1세의 담당사제이자 연대기 기록자인 푸아티에의 윌리엄은 "불안에 떠는 많은 군중들이 저항하는 가운데 확고하게 요새화가 완성되었다. 그(윌리엄)은 이것이 런던인들을 위압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란 것을 깨달았다"고 기록하였다.[54] 당시 런던은 잉글랜드의 가장 큰 도시로서 에드워드 참회왕이 건설한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옛 웨스트민스터 궁전이 있는 곳이었다. 노르만이 잉글랜드 정복을 완성하고 새로운 지배자가 되려면 런던은 반드시 정복하여야 하였다.[58] 윌리엄 1세는 시티오브런던 외곽에 베이너즈성몬트피셰츠성을 건립하면서[62] 템즈 강변의 추가적인 방어를 위해 옛 로마시대의 성벽 위에 임시 요새를 지었는데 이것이 런던탑의 시초가 되었다.[54] 최초의 요새는 통나무 울타리를 세운 것에 불과했지만 윌리엄 1세는 그곳에 거처를 마련하였다.[63]

11세기 후반에 세워진 화이트 타워

초기의 노르만 성들은 대부분 목재를 이용한 것이었지만 11세기 말엽엔 런던탑을 비롯한 거의 모든 성이 석재로 대체되었다.[62] 런던탑의 화이트 타워는 1078년 건축을 시작하였고[14] 정확한 완공 날짜는 알 수 없다. 윌리엄 1세는 로체스터의 주교 건둘프에게 성의 축조를 일임하였지만 그가 사망한 1087년까지도 공사가 완료되지는 못하였다.[14] 화이트 타워는 잉글랜드 최초의 석조 아성으로 당시로서는 가장 견고한 성이었으며 군주의 숙소 역시 이곳에 있었다.[64] 런던탑의 첫 죄수는 1100년 수감된 래널프 플램바드 주교이었으므로 런던탑 역시 최소한 그 무렵에는 완공되었을 것이다.[21][nb 2] 플램바드는 재임 시기 가혹한 세금 수취로 악명이 높았다. 플램바드는 런던탑의 첫 수감자이자 처음으로 탈출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포도주통에 몰래 숨겨 들여온 밧줄을 이용하여 탈출하였다. 플램바드는 런던탑에서 성대한 연회를 배풀고 모두 만취하자 런턴탑을 빠져나갔다. 플램바드의 탈출이 너무나 급작스러웠기 때문에 연대기 작가는 그가 마법을 부렸다고 기록하였다.[66]

1097년에 작성된 앵글로색슨 연대기윌리엄 2세가 런던탑 주위를 성벽으로 애워싸도록 지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성의 북서측에 로마시대의 성벽과 템즈강변 사이에 설치된 목책 대신 석벽을 쌓았다는 의미일 것이다.[67] 런던의 노르만 정복자들은 스스로를 새로운 지배자로 선포했을 뿐만아니라 도시의 건설자로 자처하였다. 옛 영주들의 토지는 몰수되어 노르만 영주들에게 다시 배분되었다. 노르만 영주들은 또한 수백 명의 유대인들을 런던탑에 들여 금융업에 종사하게 하였다.[68] 유대인들은 반유대 폭력이 발생할 때 런던탑을 피난처로 삼았다.[69]

1135년 헨리 1세가 사망하자 블루아의 스티븐은 헨리 1세의 유일한 적통인 잉글랜드의 마틸다를 축출하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스티븐과 마틸다가 왕위 계승을 놓고 내전을 벌이게 되자 잉글랜드는 무정부시대를 맞게 되었다. 런던탑은 평소의 쓰임새였던 군주의 거처에서 런던탑 무장관이 관할하는 방어 기지로 역할이 바뀌었다. 당시 런던탑 무장관은 아버지의 직책을 승계한 엑세스 백작 조프리 드맨더빌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스티븐과 마틸다 사이를 오갔다. 1141년 링컨 전투의 결과 스티븐이 사로잡히게 되자 조프리는 마틸다에게 충성을 서약하였다. 마틸다는 런던탑의 지원 없이는 런던을 장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계속하여 런던탑의 무장관으로 임명하였고, 조프리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70] 마틸다의 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최측근이었던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가 사로잡히자 마틸다는 스티븐과 로버트를 교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프리는 다시 한 번 충성의 대상을 바꾸고자 하였지만 이 번엔 그의 부관이 마틸다에게 이를 밀고하였다. 마틸다는 조프리를 그가 지키던 런던탑에 가두었다. 런던탑 무장관 직책은 정복자 윌리엄이 자신의 측근이었던 조프리 드맨더빌을 임명한 이후 대대로 세습되었으며 스티븐과 마틸다 역시 이러한 세습을 인정하고 있었다. 마틸다에 의해 런던탑에 갖힌 조프리는 윌리엄 시대 조프리의 후손이다.[70] 런던탑 무장관은 런던탑의 방어와 함께 런던시의 치안 유지와 세금 징수와 같은 공무도 함께 하고 있었지만, 1191년 런던 시장경이 신설되면서 더 이상 런던의 시정에 관여하지는 않게 되었다.[71]

증축[편집]

런던탑은 1100년 이후 리처드 1세 시기까지 건축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고[72], 대법관이자 리처드가 십자군 원정을 떠나 있는 동안 잉글랜드의 내정을 담당하였던 윌리엄 롱챔프가 런던탑을 증축하였다. 파이프 롤의 기록에 따르면 1189년 12월 3일에서 1190년 11월 11일까지 이어진 런던탑 증축에는 모두 2,881 파운드 1 실링 10 데니르의 비용이 들었다.[73] 당시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에 건설한 성들의 총비용은 7천 파운드였다.[74] 12세기 연대기 작가인 하우든의 로저는 롱챔프가 성 주위에 해자를 파고 탬즈 강물을 끌어들여 채우려 하였으나 허사였다고 기록하였다.[30] 롱챔프는 런던탑 무장관도 겸직하였는데 리차드 1세의 동생이자 십자군 원정기간 동안 잉글랜드의 섭정이었던 과 갈등을 빚었고 롱챔프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한 런던탑을 견고하게 구축하였다. 1191년 10월 5일 존이 롱챔프를 파면하고 재판에 세우려 하자 롱챔프는 이에 불응하고 런던탑에서 농성하였으나 3일만에 항복하였다.[75]

더 샤드에서 바라본 런던탑. 남쪽으로 템즈강이 보인다. 외곽 성벽은 13세기에 건축된 것이다.

1199년 리처드 1세가 사망하자 존이 왕좌를 계승하였다. 존은 휘하의 봉신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1214년 존이 윈저성에 있는 동안 봉건 영주들의 군대는 로버트 피츠월터의 지휘 아래 진군하여 런던탑을 포위하였다. 런던탑은 존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할 때까지 포위되었다.[76] 마그나 카르타의 이행과 존의 왕위를 둘러싸고 잉글랜드는 제1차 남작 전쟁이 일어나 내전을 겪게 되었으며 결국 존은 1216년 사망하고 만다. 내전은 존의 아들 헨리와 프랑스 왕가의 루이 사이의 왕위 계승전으로 전환되었다. 피츠월터는 루이의 편에 섰으며 런던탑은 여전히 피츠월터의 관할 아래 있었다.[76] 1217년 육상과 해상에서 헨리 3세를 받드는 귀족들이 승리하자 루이는 프랑스로 철수하였다. 당시 헨리 3세의 나이는 9살이었다.

헨리 3세와 에드워드 1세가 통치하던 13세기 동안 런던탑은 더욱 확장되어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24] 헨리는 런던탑을 더욱 견고한 요새이자 살기 편한 궁전으로 만들어 그곳에 거주하였다.[77] 1216년에서 1227년까지 지속된 런던탑 증축 공사에는 거의 1만 파운드가 소비되었다. 비용의 대부분은 이너모스트 와드에 신축된 궁전 공사에 쓰였다.[23] 1240년 아성의 외장을 하얗게 꾸몄고 이 때부터 런던탑의 아성은 화이트 홀로 불리게 되었다.[78]

1238년 무렵부터 런던탑은 때때로 런던의 소요에 대응하면서 동쪽, 북쪽, 동북쪽으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확장은 헨리 3세 시기를 거쳐 에드워드 1세 시기까지 계속되었다. 새롭게 확장된 구역들은 템즈 강에 의한 방어의 잇점을 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해자를 파 성벽을 격리시켰다. 동쪽 구역이 확장되면서 런던시 방벽의 일부였던 로마 시기에 세워진 옛 성벽은 런던탑의 방어 시설로 편입되었다.[78] 런던의 거주민들은 오랫동안 런던탑을 억압의 상징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헨리 3세의 성벽 증축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런 이유로 런던인들은 1240년 있었던 문루 붕괴를 축하해 마지않았다.[79] 확장 과정에서 주변의 건물들 역시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었고, 왕실은 런던탑 성 케서린 병원앨드게이트 성삼위 수도원에 그 보상으로 166 파운드를 지급하였다.[80]

헨리 3세는 종종 런던탑에서 법정을 개최하였고 봉신들의 충성이 의심되자 최소 두 번(1236년과 1261년) 이상 런던탑에서 의회를 개회하도록 하였다. 헨리 3세가 마그나 카르타를 따르지 않자 불만에 찬 귀족들은 1258년 시몽 드 몽포르를 앞세우고 헨리 3세를 압박하여 정기적인 의회가 개최되도록 하였다. 당시 헨리 3세는 안팍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그는 둘째 아들 에드워드를 위해 시칠리아를 정복하고자 하였고 교황 인노첸시오 4세와 협약하였다. 교황의 용병들이 시칠리아를 침공하면 그에 대한 비용뿐만 아니라 교황이 지고 있던 빚도 갚아주기로 한 것이다. 교황은 이 약속을 믿고 전쟁 비용으로 135,000 마르크를 사용했지만 헨리는 밀약을 맺은 지 4년이 지나도록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다. 인노첸시오 4세는 약속 이행을 독촉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헨리 3세의 전쟁 비용을 감당할 마음이 없었다. 결국 1259년 헨리는 귀족들과 옥스퍼드 조항을 맺어 행정권을 의회로 이양하였다.[81] 1261년 용병들이 돌아오자 헨리 3세는 런던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귀족들과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왕은 어떤 군대의 공격도 받지 않았지만 런던탑에 틀어박혔다. 이로서 런던탑은 다시 한 번 국왕의 아성이 되었다. 1264년 국왕과 귀족들 사이에 다시 한 번 내전이 발생하였고 헨리 3세는 런던탑을 발판삼아 1265년 이브셤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당시 교황 특사로 파견되어 있었던 오토부오노(훗날 교황 하드리아노 5세)는 국왕과 귀족 사이를 중재하다 런던탑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귀족들의 요구는 단 하나였는데 "잉글랜드의 관습"을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주장한 관습은 외국인을 국왕의 자문으로 임명하지 말 것과 옥스퍼드 조항과 웨스트민스터 조항에 따른 의회 권력의 인정을 의미하였다. 1267년 4월 길버트 드 클레어는 런던시에 입성한 다음 런던탑을 포위하였다.[82] 드 클레어 백작은 많은 군사와 공성 병기를 동원하였으나 런던탑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런던 시내로 군대를 물렸고 헨리 3세는 런던탑을 지켜내었다.[83]

에드워드 1세는 십자군 원정을 비롯한 많은 원정을 다녔기 때문에 런던에 있던 적은 많지 않지만 1275년에서 1285년까지 21,000 파운드를 들여 런던탑을 개축하였다. 이는 헨리 3세 통치 기간 전체 동안 런던탑에 들인 돈의 두 배에 달하는 양이었다.[84] 에드워드 1세는 런던탑을 개축하면서 자신이 십자군 원정에서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공성전에 대비할 방어 시설을 지었다.[84] 그는 웨일스귀네드 지역에도 많은 성들을 지었는데 궁수가 성벽 안에서 안전하게 활을 쏠 수 있도록 만든 에로우슬릿을 도입하였다. 동방의 영향을 받은 양식인 에로우슬릿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의 여러 성들에 도입되었다.[85] 성을 확장하면서 에드워드 1세는 헨리 3세 시기의 해자를 매우고 외곽 성벽 밖으로 새로운 해자를 팠다. 새 성벽엔 옹성을 갖춘 문루가 세워졌고[86] 성의 자급력을 높이기 위해 두 개의 물레방아를 놓았다.[87]

1278년 런던탑에는 6백명의 유대인이 구금되었는데 그들은 은화의 테두리를 깍아내어 은을 빼돌리는 동전 깍아내기를 하다가 적발되었다.[69] 에드워드 1세는 그의 치세에 추방령을 공표하여 많은 유대인을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추방하였다.[88]

중세 후기[편집]

에드워드 1세 시기 증축을 반영한 런던탑 모형

14세기 초 에드워드 2세의 치세 동안에도인 런던탑에 얽힌 소소한 사건들이 있었다.[89] 이 시기 잉글랜드 왕실에는 왕가의 의상을 담당하는 의상서가 설치되었다. 의상서는 점차 역할이 확대되어 왕실의 무장과 보물도 관리하게 되었으며 런던탑에 사무실을 두고 상비군을 조직하였다.[90] 당시 잉글랜드 왕실은 시종관, 상서 등의 궁정 신하들과 요리사, 집사, 말몰이꾼과 같은 시종들, 무장한 기사들, 그외 손님과 식객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수도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런던탑을 비롯한 몇 곳의 성을 번갈아 가며 이동하는 궁정이었다.[91]

1321년 베들레스메어 여남작 마거렛 드 클레어가 런던탑에 수감되어 런던탑의 첫번째 여성 수인이 되었다.[92] 마거렛은 에드워드 2세의 아내인 이사벨 드 프랑스리즈 성 입성을 거부하고 왕실 근위대를 상대로 활을 쏘게 하여 여섯 명을 죽였다.[93][94][95] 당시 신분이 높은 죄수는 대게 런던탑에 갖혔는데[96] 엄중한 보안과 수인에 대한 감시가 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탈출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1323년 제1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는 자신의 추종자였던 런던탑 내부자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들은 감옥 벽에 구멍을 낸 뒤 템즈 강에 마련한 보트를 타고 탈출하였다. 로저 모티어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이사벨 드 프랑스와 연락을 유지하였다. 1326년 로저 모티어는 에드워드 2세에 반대하는 다른 귀족들과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이사벨의 조력과 에드워드 2세의 아들 에드워드 3세의 묵인 아래 에드워드 2세의 폐위를 압박했다. 1327년 모티어는 양위를 통해 즉위한 에드워드 3세가 당시 열다섯살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잉글랜드의 섭정이 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1330년 모티어를 다시 런던탑에 가두고 친정을 시작하였다.[97] 에드워드 3세는 주변국과 크고 작은 전쟁을 계속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 프랑스의 장 2세와 같은 군주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들은 모두 런던탑에 수감되었다. 당시 전쟁으로 런던탑에는 많은 귀족들이 수감되어 있었다.[98] 이런 사정때문에 런던탑은 더 이상 왕이 편안이 거처할 곳으로는 마땅치 않았고 에드워드 3세는 거처를 윈저 성으로 옮겼다.[99]

프랑스 국왕의 조카였던 샤를 1세 도를레앙 공작은 백년전쟁 기간 중에 런던탑에 수감된 프랑스의 왕족 가운데 가장 유력한 인사였다. 15세기 후반에 그려진 이 그림은 도를레앙 공작의 수감을 묘사하면서 배경에 화이트 타워와 수문, 옛 런던 다리를 묘사하고 있다.[100]

리처드 2세는 1377년 즉위하면서 관례에 따라 런던탑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까지 행진하였다. 이 관례는 적어도 14세기 초부터 시작된 것으로 1660년까지 계속되었다.[98] 와트 타일러의 난이 있던 때에 군주의 거처였던 런던탑은 반군에 포위되었다. 리처드 2세가 와트 타일러와 협상을 위해 런던탑을 비우고 마일엔드로 간 사이에 반군은 런던탑을 점령하고 주얼 하우스를 약탈하였다. 군중들은 런던탑에 있던 귀족과 시종들을 붙잡아 타워 힐에서 참수하였다. 캔터버리 대주교 사이먼 서드버리는 성 요한 예배실로 들어가 교회의 신성함에 의지하여 목숨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군중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끌어내었다.[101] 이로부터 6년 후 런던탑은 다시 시민들에게 포위되었다.[102] 의회를 탄압하던 리처드 2세는 자신의 사촌이기도 한 의회파 랭커스터 백작 헨리를 추방하고 그의 영지를 몰수하고자 하였으나, 1399년 오히려 의회파에 붙잡혀 화이트 타워에 연금되었다. 리처드 2세는 헨리 4세에게 왕위를 이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101]

15세기 동안 런던탑은 약간의 개축을 거쳐 주요 인사들을 구금하는 용도로 쓰였다. 리처드 2세의 추종자들이 주현절 반란을 일으키자 헨리 4세는 런던탑으로 피신하였다. 이 시기 동안에도 런던탑에는 많은 귀족들이 수감되었는데 나중에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는 1406년 제임스 1세는 프랑스를 여행하다 납치되어 런던탑에 갖혔다. 헨리 5세백년전쟁을 일으킨 뒤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하자 런던탑은 많은 프랑스 귀족 포로들을 수감하게 되었다.[103]

15세기 중후반에 잉글랜드 왕위를 놓고 랭커스터 왕가요크 왕가 사이에 장미 전쟁이 일어났다.[104] 1460년 런던탑은 장미 전쟁의 여파로 다시 한 번 포위되었다. 이 번에 탑을 포위한 것은 요크 왕가의 군사들이었다. 런던탑은 포격을 받아 피해를 입었으나 함락되지 않다가 노샘프턴 전투에서 헨리 6세가 사로잡힌 뒤에야 항복하였다. 1470년 "킹메이커"로 불리던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도움으로 헨리 6세는 잠시나마 다시 왕좌를 차지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워드 4세가 통치권을 되찾았고 헨리 6세는 런던탑에 구금되었다. 확실치는 않으나 헨리 6세는 아마도 런던탑에서 살해된 것으로 여겨진다.[101] 장미 전쟁 기간 동안 런던탑은 대포를 동원한 공성전의 장소가 되었고, 런던탑 역시 포격을 위한 총안이 설치되었다.[104]

1483년 수감된 런던탑의 두 왕자, 1878년 존 에버럿 밀레이 작품

1483년 런던탑의 두 왕자가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번졌다. 이는 런던탑과 얽힌 일들 가운데 가장 지탄 받은 사건이었다.[105] 에드워드 4세의 죽음 뒤 에드워드 5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의 삼촌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왕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스스로 호국경에 올라 섭정이 되었다.[106] 당시 12세의 에드워드 5세는 동생 리처드와 함께 런던탑에 연금되었으며 1483년 6월 행방이 묘연해졌다.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새로 왕위에 올라 리처드 3세가 되었다.[105] 그 해 여름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이 리처드 3세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번져나갔다.[106] 1674년 화이트 타워 출입문 인근의 12세기에 지어진 건물 근처 10 피트 깊이의 땅 속에서 인골이 발견되자 이러한 소문은 더욱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현대의 고고학 발굴 결과 인골이 발견된 층은 로마 시대의 무덤 자리로 밝혀졌다.[107] 1485년 헨리 튜더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죽이고 왕위에 올라 튜더 왕조를 열었다.[105]

근세 이후[편집]

튜더 시대를 열면서 런던탑은 국왕의 거처가 되었다. 16세기 연대기 작가 레피얼 할린제드는 "런던탑은 무기고이자 군수 창고, 죄수의 구금처, 왕 또는 여왕의 궁전"으로 사용되었다고 기록하였다.[100] 왕실 경비대인 요맨 와더는 늦어도 1509년 무렵 창립되었다.[108] 헨리 8세 치세 동안 런던탑은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보수되었다. 1532년 토머스 크롬웰은 3,593 파운드를 들여 탑을 보수하였고 이를 위해 에서 들여온 3천 톤의 석재가 사용되었다.[38] 그렇게 하였어도 런던탑은 새롭게 대두한 공성 무기인 대포의 화력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견고함을 갖추지는 못하였다.[109] 탑의 방어 시설은 보수되었지만 궁전은 헨리 8세의 죽음 이후 방치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궁전은 더 이상 거처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하였다.[100] 1547년 이후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 등의 군주들은 런던탑을 여전히 왕실의 자산으로 두었지만 거처로 삼지는 않았다.[110]

런던탑은 16세기에도 냉혹한 감옥의 악명을 이어갔다. 다양한 인물들이 런던탑에 갖혔지만 대게는 고위층 죄수였고 당시 평민 죄수들에 비하면 구금 기간도 길지 않았다. 대중들 사이에 퍼진 으스스한 소문과 달리 고위층 죄수들은 런던탑 무장 부관의 관할 아래 비교적 편안한 대우를 받았다.[111] 요맨 와더는 왕실 경호대로 시작되었으나 16세기에서 17세기 사이 그들의 주요 임무는 런던탑의 수인을 감시하는 것이었다.[112] 평민들이 주로 수감되던 런던 시내의 플릿 교도소에서 빈번히 발생한 전염병에 수인들이 죽어 나간 것에 비하면 런던탑은 비교적 편안하고 안전한 곳이었다. 월터 롤리는 수감 기간 동안 심지어 가족을 런턴탑에 불러들였고 거기서 아들도 태어났다.[113] 1687년 애초에 별도의 감방이 없었던 런던탑은 "병사 죄수" 수감 시설이 화이트 타워 북서쪽에 세워졌다. 16세기에는 수장령에 반대한 사람들이 대거 런던탑에 구금되었고, 19세기에는 여러 명의 낭만주의자들이 런던탑에 수감되었다.[114] 앤 불린 역시 런던탑의 수인이었다.[114]

런던탑의 감옥 이미지는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16세기에서 17세기 사이 종교와 정치적인 이유로 런던탑에 갖힌 수인의 수는 절정에 달했다.[114] 고문의 시행 여부는 추밀원의 허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자주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1540년에서 1640년까지 런던탑 수인에 대한 고문은 48 건이 기록되어 있다. 대표적인 고문 도구는 , 스캐빈저의 딸, 수갑과 족쇄 같은 것이었다.[113] 사지를 잡아 늘리는 고문 도구인 랙은 1447년 당시 런던탑 무장관이었던 엑세토 공작이 잉글랜드에 들여왔기 때문에 엑세터 공작의 딸이란 별칭이 붙었다.[115] 윌리엄 스캐핑턴(William Skeffington)이 런던탑에 들여왔다고 하는[116] 스캐빈저의 딸은 수인의 목과 손목 발목을 연결하는 A자 모양의 구속 도구로 이를 착용하면 몸을 제대로 펼 수 없어 구부린 자세가 되었고 오래 방치 되면 코와 귀로 피를 흘렸다.[117] 1605년 화약 음모 사건의 주동자 가이 포크스 역시 런던탑에서 고문을 받았다.[114] 런던탑의 수인에 대한 사형 집행은 주로 타워 힐에서 이루어졌는데 400년 동안 112명의 사형이 여기서 집행되었다.[118] 드물긴 하지만 타워 그린 역시 처형 장소로 쓰였는데 20세기가 되기 전에 이 곳에서 처형된 수인은 서퍽 공녀 제인 그레이를 포함하여 7 명이었다. 타워 그린은 공개된 장소였기 때문에 여기서의 사형 집행은 위험한 국사범의 공개 처형 성격을 지녔다[118] 1554년 2월 12일 제인 그레이의 사형 집행 이후[119] 메리 1세는 자신의 동생인 엘리자베스를 토머스 와인어트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런던탑에 가두었다. 엘리자베스는 훗날 엘리자베스 1세가 되었다.[120]

런던탑 북쪽 구역의 타워 힐은 400년 동안 112명의 사형을 집행한 사형장이었다.[118]

15세기에 들어 군수품 및 무기 관리 사무소가 설치되어 이전까지 경비대가 담당하던 왕실 보물에 대한 경비 업무를 인수하였다.[121] 1661년 이전까지 잉글랜드에는 상비군이 없었고 전시에만 직업 군인들을 고용하였다.[122] 17세기에 들어 왕립 무기고군수품 위원회가 설립되어 상비군을 위한 보급을 확보하였다. 군수품 위원회는 화이트 타워에 사무실을 두고 주변 건물을 비축 창고로 사용하였다. 1885년 위원회가 해산되고 그 업무는 1869년 위원회가 쓰던 자리에 설립된 전쟁성 산하의 왕립 육군 보급대가 이어받았다.[123]

1640년 찰스 1세와 의회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자 런던의 민병대는 런던탑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런던탑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포대를 구축하였으나 잉글랜드 내전 기간 동안 런던탑에서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1642년 찰스 1세는 다섯명의 의원을 체포하고자 하였으나 이들은 런던 탈출에 성공하였다. 한편 런던탑의 민병대는 의회파로 돌아섰고 무장 부관 존 바이런은 왕의 허락을 얻어 런던탑을 포기하였다. 이로서 의회파는 내전 기간 동안 런던탑의 통제권을 쥐게 되었다.[124]

1661년 찰스 2세의 대관식에서도 관례에 따라 런던탑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까지의 행진이 있었지만 당시 런던탑은 이미 쇠락하여 더 이상 밤을 지내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125] 스튜어트 왕가의 군주들은 탑을 개조하여 군수품 관리 용도로 사용하였다. 1663년 4,000 파운드를 약간 상회하는 비용을 들여 새로운 창고를 지었고 이너 와드에 세워진 이 건물은 오늘날 새 무기고로 불린다.[43] 17세기에 들어 런던탑을 당시 군사 요새의 전형적 양식이었던 성형요새로 개조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대신 1670년 군사들을 위한 병영인 아이리쉬 배럭이 추가되었다.[126]

1737년 제작된 인그레이빙에 묘사된 런던탑. 새뮤얼 벅과 너새니얼 벅 형제의 작품

하노버 왕조 시대에 스코틀랜드 반란의 기미는 확실하지 않았다. 런던탑은 보수 되었지만 스튜어트 시대에 만들어진 포대는 그 수를 118문에서 45문으로 줄였고, 경비대는 "스물 하고도 네시간 계속하여 포위에 대비할 필요는 없다"는 지시를 받았다.[127] 1774년 옹성을 갖춘 문루가 남쪽 아우터 와드의 해자 건너편에 추가되었다.1830년 런던탑 무장관이었던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는 해자를 확장하고 물을 채웠지만 경비 부대에 대한 물 공급을 고려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1841년에는 물 공급이 부족해지면서 부대 안에 전염병이 돌아 사망자가 발생하게 되자 해자의 물을 비우고 다시 흙으로 채워 넣게 되었다. 이 작업은 1843년에서 1845까지 2년간 진행되었다. 1845년에는 1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영인 워털루 배럭이 화이트 타워 북동쪽에 건립되었다. 이 건물은 오늘날 왕립 수발총대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128] 1828년에서 1858년까지 차티즘의 열기가 달아오르자 런덥탑을 다시 요새화 하자는 요구가 있었다. 이것은 군사적 용도로 런던탑을 보수한 마지막 사례였다. 이 때 설치된 포대와 총안은 현재까지도 대부분 보존되어 있다.[129]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간첩 혐의로 11명이 런던탑에서 처형되었다.[130] 2차 대전 동안 런던탑은 다시 한 번 전쟁 포로를 수용한 적이 있다. 아돌프 히틀러지도자대리였던 루돌프 헤스는 1941년 5월 10일 화평안을 제안한다는 이유로 직접 비행기를 몰고 영국으로 건너왔으나 체포되었다. 그는 4일 동안 런던탑에 구금되었다. 헤스는 런던탑에 구금된 마지막 국사범이었다.[131] 런던탑에서 마지막으로 처형된 사람은 독일 간첩 요제프 야코브즈으로 1941년 8월 15일 총살되었다.[132] 2차 대전은 런던탑이 요새로 사용된 마지막 시기이기도 하다. 바다사자 작전으로 독일군의 영국 침공이 예상되자 런던탑은 인근의 창고, 왕립 조폐국과 함께 런던의 최후 방어 기지로 선정되었다.[133]

복원과 관광[편집]

배신자의 문 근처의 토머스 타워에 에드워드 1세의 침실을 복원한 모습.[134]

런던탑은 오늘날 영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 가운데 하나이다. 런던탑에서는 과거 왕가의 생활 모습을 살필 수 있고 무장을 비롯한 전시품을 관람할 수 있다. 1699년 이후의 영국의 보주와 왕관 역시 공개되어 있다. 런던탑은 19세기부터 이미 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였다. 19세기 말 무렵 연간 방문객은 50만명에 달했다.[135]

18세기에서 19세기를 거치는 동안 다른 용도로 사용되면서 런던탑의 보루들은 하나 둘 제거되어 원형 그대로 남은 것은 웨이크필드 타워와 토머스 타워 둘 뿐이었다.[125] 18세기에 잉글랜드 중세 시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증가하고 고딕 리바이벌 건축 운동이 일어나자 1825년 화이트 타워 남측에 새 기병 무기고가 이 양식에 따라 세워졌다. 다른 건물들은 워털루 배럭의 양식을 참고하여 "15세기 고딕 양식의 성" 양식으로 리모델링되었다.[136][137] 1845년에서 1885년사이에 왕립 조폐국과 같은 기관들은 수백년간 사용하던 런던탑의 사무소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 그와 함께 런던탑 안에 있던 "중세 이후" 건물들이 철거되었다. 1855년 전쟁성 산하의 군수품 사무소가 마지막으로 런던탑을 떠나자 대중 사이에 런던탑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다.[136]

19세기 영국의 역사 소설가 윌리엄 해리슨 에인즈워스가 쓴 《런던탑: 역사적 로맨스》는 런던탑에 대한 대중적 관심에 불을 지폈다. 그는 런던탑의 지하를 고문실과 고문도구가 가득한 곳으로 묘사하였고 이는 대중적인 고정 관념이 되었다.[114] 해리슨은 런던탑의 역사에서 또 다른 역할도 했는데, 16 세기에서 17 세기사이의 죄수들의 수감 생활을 알 수 있도록 뷰챔프 타워를 공개하자고 제안하였다. 그의 제안은 이후 런던탑 리모델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세 건축 전문가였던 앤서니 샐빈빅토리아의 배우자였던 앨버트 공의 의뢰를 받아 런던탑의 리모델링을 진행하였으며 그의 작업은 존 테일러가 승계하였다. 샐빈의 작업을 승계받은 테일러는 런던탑 내의 "중세적이지 않은" 건물들을 무자비하게 철거하였다. 그 결과 역사적 중요성을 가진 몇몇 건물들과 중세 이후의 내부 장식들이 헐려나갔다.[138]

런던탑의 주출입문.

제1차 세계대전 때 런던탑에는 오직 한 발의 폭탄이 해자에 떨어졌을 뿐이지만, 2차 대전 때에는 폭격으로 많은 피해를 받았다. 1940년 11월 23일의 영국 대공습으로 런던탑 안의 건물 몇 채가 파괴되었고 화이트 타워는 간발의 차이로 파괴를 모면했다. 전쟁 이후 런던탑은 폭격으로 받은 피해를 복구하고 대중에게 공개되었다.[139]

1974년 화이트 타워의 박격포 방에서 폭발이 일어나 한 명이 사망하고 35명이 부상하였다. 누군가 전시된 중세 시대 대포 안에 폭약을 넣고 폭발 시켰다. 경찰은 범인을 검거하지 못하였으나 아일랜드 공화국군 임시파를 배후로 지목했다.[140]

21세기에 들어 런던탑의 주요 역할은 관광객의 관람이 되었다. 20세기까지도 런던탑의 절반을 사용했던 왕립 수송대는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139] 그러나 런던탑은 여전히 왕립 수총연대의 상징적 본부로 사용된다. 런던탑은 수총연대의 전신인 왕립 수총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141][142] 버킹엄 궁의 퀸즈 가드 파견 분대 역시 요맨 와더와 함께 런던탑의 근위대로 복무하고 있으며 매일 수문장 교대 행사인 열쇠 의례를 한다.[143][144][145] 여왕의 생일과 같은 왕실 기념일에는 영예로운 포병대대가 축포를 쏜다.[146]

1990년 이후 런던탑의 운영은 정부 또는 왕실이 제공하는 기금인 역사적 왕궁에 의한 독립적인 자금으로 이루어지고 있다.[147] 유네스코는 1988년 런던탑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였다.[148][149] 하지만 인근에 건축된 초고층 건축물들이 악영향을 주고 있어 런던탑은 국제연합의 위험에 처한 유적 목록에도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150] 2006년 남아있는 중세 시기 공간도 개방되어 방문객들은 내부의 방들도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151] 오늘날에도 런던탑의 최고 책임자는 런던탑 무장관이지만[152], 실질적인 관리는 런던탑 판무관 겸 수장고 관리관이 수행하고 있다.[153]

런던탑의 까마귀에 대한 속설에 따르면 런던탑엔 언제나 최소 여섯 마리의 까마귀가 머물고 있는데 만일 이 까마귀들이 모두 사라지면 왕국이 무너진다고 한다.[154] 까마귀들은 요맨 와더가 보살핀다. 런던탑의 까마귀가 그려진 그림들은 늦어도 1883년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155] 요맨 와더는 매일 수문 의례를 펼치고 런던탑 주위의 경비를 맡고 있다.[108][112]

2017년 런던탑 방문객은 280만 명 이상이었다.[156]

왕관과 보주[편집]

런던탑이 왕관과 보주의 수장고로 쓰이기 시작한 전통은 헨리 3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장고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왕관과 보주, 보석, 왕홀, 검 등이 보관된다. 헨리 3세는 정부와 독립된 왕실의 재원 관리를 위해 수장고를 마련하고 관리관을 임명하였다.[157] 관리관의 보수는 높았는데 에드워드 3세 시기 매일 12 데니르를 급여로 받았다. 관리관의 업무는 점차 늘어나 나중에는 왕실 소유의 금 은 보석의 관리와 제금, 보석 세공의 업무까지 관할하였다.[157]

잉글랜드 내전이 한창이던 1649년 크롬웰은 수장고의 귀금속을 조폐국으로 가져가 녹인 뒤 다른 곳에 사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왕관 역시 통째로 녹여졌다고 한다.[158] 잉글랜드 왕정복고가 일어난 1660년 수장고에 남은 것은 12세기에 제작된 은수저와 의레용 검 뿐이었다. 그마저도 일부는 후일 왕관을 다시 만들기 위해 팔렸다.[159] 찰스 2세는 1661년 남아있는 옛 수장 목록을 바탕으로 새롭게 왕관과 보주를 갖추길 바랬으나 왕실의 남은 재산이 부족하여 그럴 수 없었다.[160]

1669년 기존의 수장고가 무너지는 일이 벌어지자[29] 마틴 타워가 새로운 수장고가 되어 1841년까지 사용되었다.[161] 1671년 스스로를 "대령"이라 칭하던 토머스 블루드는 수장고에서 왕관과 보주를 훔쳤다.[135] 블루드와 공모자들은 목사로 위장하여 여러 차례 런던탑에 들어가 수장고 관리인의 환심을 샀고, 기회가 보이자 관리관을 협박하여 제국관과 보주, 홀을 훔쳐내었다. 그러나 관리관의 아들이 경종을 울리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158][162] 블루드는 말을 타고 런던탑을 빠져나가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과정에서 왕관과 대부분의 보물이 회수되었지만 보석 몇 개는 결국 찾지 못하였다.

1994년부터 워털루 블록의 수장고에서 왕관과 보주가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영국의 제국관, 8백년 된 대관식 의례용 숫가락,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된 대관식에서 사용된 성 에드워드 왕관과 같은 보물을 관람할 수 있다.[163][164][165]

왕립 동물전람원[편집]

런던탑에 설치된 동물 조형물

존 왕 시절에 이미 런던탑에서 야생 동물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166][167] 1210년에서 1212년 사이 사자 관리인에 대해 급여를 지급하였다.[168] 이후로도 헨리 3세 시기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프레드릭 2세가 보내온 표범을 기르기 위해 왕실 1235년 무렵 런던탑에 동물전람원(Menagerie)을 설치하였다.[169]

1288년 에드워드 1세는 사자와 스라소니를 보살피기 위해 처음으로 동물 사육관을 공식 임명하였다.[170] 에드워드 3세는 여기에 사자 두 마리와 표범 한 마리, 삵 두 마리를 추가하였고, 막시밀리안 황제는 헨리 8세에게 표범, 삵, 자칼, 갈색곰, 하이에나와 같은 야생 동물을 선물로 주었다.[171] 1436년 헨리 5세 시기 모든 사자들이 죽게 되자 사육관 윌리엄 커비는 실직하게 되었다.[170]

역사 기록에는 에드워드 1세가 1277년 반원형의 구조물을 만들고 사자를 길렀기 때문에 이 곳의 보루에 라이언 타워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335년 기록에는 사자와 표범 우리를 잠그는 열쇠와 자물쇠를 이 보루의 서쪽 출입문에 두었다고 적혀있다. 1500년대에 이 구역은 동물전람원이라고 불렸다.[168] 1604년에서 1606년 사이 동물전람원은 해자와 라이언 타워를 마주하는 훈련장에 있었다. 왕실이 사자를 둘러볼 수 있도록 전망대가 세워졌다. 제임스 1세 시기인 1657년에는 6 마리의 사자가 있었다고 하며 1708년에는 11 마리로 늘었다. 이 외에도 다른 고양이과 동물들과 독수리, 올빼미, 자칼 등을 길렀다고 한다.[168]

18세기에 동물전람원은 대중에게 유료로 공개되었다. 입장료는 1.5 펜스 이었고 사자에게 먹이로 줄 개나 고양이를 돈 대신 받기도 하였다. 18세기 말 입장료는 9 펜스로 올라갔다.[168][172] 특히 인기를 끌었던 동물은 올드 마틴으로 불린 그리즐리 곰으로 1811년 허드슨 베이 회사조지 3세에게 헌사한 것이었다.[173][174] 1800년 기록에는 "호랑이, 표범, 하이에나, 비비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원숭이, 늑대, 그 밖의 동물들"을 사육하였다고 한다.[175] 1828년 사육 목록은 60 종의 동물 280 마리로 늘어나 있었으며 당시 사육관은 알프레드 콥스였다.[176]

1830년 조지 4세가 사망한 뒤 동물전람원은 폐쇄되었다. 기르던 동물의 대부분은 1831년 런던 동물원으로 이관되었다. 런던 동물원은 1828년 개장하였다.[177] 런던탑의 야생 동물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은 것들은 1835년 리전츠 공원으로 옮겨졌다. 당시 사자 한 마리가 병사를 물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178][179] 정확치는 않아서 물린 대상은 기록에 따라 선원이거나 기수, 또는 같이 기르던 원숭이라고도 한다.[168][180] 1852년 동물전람원은 완전히 철거되었으나 사육관은 여전히 라이온 타워를 자신의 거처로 삼았다. 기를 동물이 없어졌지만 여전히 사육관으로 재직했던 콥스는 1853년 라이온 탑에서 사망하였다.[178]

1999년 사자 우리가 발굴되었다. 가로 2 m 세로 3 m의 크기로 다 큰 사자가 지내기엔 매우 비좁은 공간이었다.[181] 2008년 바버리사자 수컷 두 마리의 유골이 런던탑 해자에서 발굴되었다. 바버리사자는 오늘날 야생에서는 이미 멸종하였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한 마리는 1280년에서 1385년 사이에, 다른 한 마리는 1420년에서 1480년 사이에 런던탑에서 기른 것으로 보인다.[167] 2011년 영국의 와이어 예술가 켄드라 하스트는 두 사자를 기념하는 조형물을 런던탑에 세웠다.[182]

유령[편집]

헨리 8세에 의해 1536년 참수당한 앤 불린은 런던탑에 출몰하는 유령으로도 유명하다. 속설에는 엔 불린의 유령이 자신의 잘린 머리를 팔로 감싸고 속박된 성 베드로 예배실에서 화이트 타워 사이를 거닌다고 한다. 속박된 성 베드로 예배실은 앤 불린이 묻힌 곳이다.[183] 이 괴담은 1934년 코미디 가요 〈With Her Head Tucked Underneath Her Arm〉(팔 아래 쳐박힌 그녀의 머리)의 소재가 되었다.[184] 이 외에도 헨리 6세, 제인 그레이, 샐리스버리 공녀 마거렛 폴, 런던탑의 두 왕자 등이 유령 이야기의 단골 소재이다.[185] 괴담에는 사람이 아닌 것도 등장하는데 1816년 1월에는 수장고 경비병이 갑자기 나타난 곰과 싸웠다가 며칠 후 죽었더라는 괴담이 있었고[185] 1817년 10월에는 수장고 관리관이 움직이는 관을 보았다고 주장하였다.[186]

같이 보기[편집]

내용주[편집]

  1. 웨이크필드 타워는 원래 블룬더빌 타워로 불렸다.[24]
  2. 더럼 주교 플램바드는 헨리 1세에 의해 "많은 부정으로 헨리 1세 자신과 그의 자식들에게 고통을 준" 죄로 런던탑에 갖혔다.[65]

각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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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he Twin Gangsters Who Ruled London, Daily Beast, 2015-11-22
  3. The History of the White Queen: The Princes in the Tower, History in the (Re)Making
  4. The story of the Tower of London, Historic Royal Palaces
  5. Who is the Constable of the Tower of London?
  6. Vince 1990 in Creighton 2002, 138쪽
  7. Creighton 2002, 138쪽
  8. Parnell 1993, 11쪽
  9. Parnell 1993, 32–33쪽
  10. Wilson 1998, 39쪽
  11. Parnell 1993, 49쪽
  12. Friar 2003, 163쪽
  13. Allen Brown 1976, 15쪽
  14. Allen Brown 1976, 44쪽
  15. Impey & Parnell 2000, 16쪽
  16. Parnell 1993, 19–23쪽
  17. Parnell 1993, 22쪽
  18. Parnell 1993, 20쪽
  19. Friar 2003, 164쪽
  20. Impey & Parnell 2000, 17쪽
  21. Allen Brown & Curnow 1984, 12쪽
  22. Parnell 1993, 32쪽
  23. Parnell 1993, 27쪽
  24. Allen Brown & Curnow 1984, 17쪽
  25. Parnell 1993, 28쪽
  26. Impey & Parnell 2000, 31쪽
  27. Allen Brown & Curnow 1984, 17–18쪽
  28. Parnell 1993, 65쪽
  29. Parnell 1993, 67쪽
  30. Allen Brown & Curnow 1984, 15–17쪽
  31. Parnell 1993, 24쪽
  32. Parnell 1993, 33쪽
  33. Parnell 1993, 10쪽
  34. Parnell 1993, 34–35쪽
  35. Parnell 1993, 42쪽
  36. Wilson 1998, 34쪽
  37. Parnell 1993, 46쪽
  38. Parnell 1993, 55쪽
  39. Parnell 1993, 29쪽
  40. 《Bloody Tower》, Historic Royal Palaces, 28 April 2010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2 July 2010에 확인함 
  41. Parnell 1993, 47쪽
  42. Parnell 1993, 58쪽
  43. Parnell 1993,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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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Parnell 1993, 35–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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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Impey & Parnell 2000, 36쪽
  50. Parnell 1993, 40-41쪽
  51. Parnell 1993, 38–39쪽
  52. Parnell 1993,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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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Allen Brown & Curnow 1984,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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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Bennett 2001, 45쪽
  57. Bennett 2001, 45–47쪽
  58. Wilson 1998, 1쪽
  59. Allen Brown 1976, 30쪽
  60. Allen Brown 1976, 31쪽
  61. Friar 2003, 47쪽
  62. Wilson 1998, 2쪽
  63. Allen Brown & Curnow 1984, 5–9쪽
  64. Allen Brown & Curnow 1984, 9–10쪽
  65. Wilson 1998, 5쪽
  66. Wilson 1998,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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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 Wilson 1998,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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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 Cathcart King 1988,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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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편집]

참조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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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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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편집]

좌표: 북위 51° 30′ 29″ 서경 0° 4′ 34″ / 북위 51.50806° 서경 0.07611°  / 51.50806; -0.07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