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대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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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포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교전국
Coat of Arms of Joseon Korea.png
Toyotomi mon.png
지휘관
윤흥신
박홍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병력
실제 병력 800명 병력 1만 8700명
병선 700척
피해 규모
윤흥신 장군 및 다대포 군민 불명

다대포 전투(多大浦戰鬪)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첫 번째로 벌어진 전투로 병력, 식량, 무기 등 모든 것이 부족했던 조선군이 완패하고 다대포성은 함락되었다.

배경[편집]

당시 조선명나라 정벌을 계획하고 있던 일본의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선 정벌을 명령한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사위 소 요시토시가 포함된 제1군이 병력 1만 8700명과 병선 700척을 이끌고 동래부 영도에 상륙한다. 이 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병력을 둘로 나눠 다대포로도 같이 공격했다.

다대포[편집]

다대포는 현재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산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8km 떨어진 낙동강 하구와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있다.

1417년 태종 17년 8월 20일에 수군도절제사 정문의 건의로 만호를 파견하였다.[1]

1490년 성종 21년 11월 다대포에 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13척(3m 90cm), 둘레가 1,806척(5.4km)이었다.[2] 1593년 선조 26년에는 이곳의 성이 증축되었다.[3]

전투[편집]

1592년 4월 경주의 왜적이 군대를 나누어 서생포와 다대포를 함락시켰는데, 경상좌수사 박홍은 바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다대포에 왜군들이 벌떼같이 몰려있는 것을 확인한 다대포 첨사 윤흥신은 맞서 싸웠으나 죽고, 중과부적으로 결국 다대포는 부산과 같이 함락하고 말았다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계묘) 2번째기사 경상 좌수사 박홍(朴泓)은 바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경주(慶州)의 왜적이 군대를 나누어 서생포(西生浦)와 다대포(多大浦)를 함락시켰는데, 다대포 첨사 윤흥신(尹興信)이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으니 바닷가의 군현(郡縣)과 진보(鎭堡)들은 모두 소문을 듣고 도망하여 흩어졌다.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2장 B면

【영인본】 25책 611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결과[편집]

다대포와 부산진이 함락된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동래성을 향해 진격했다.

각주[편집]

  1. 경상도 다대포에 만호를 차견하다, 《태종실록》 34권 1417년 8월 20일
  2. 이 달에 경상도의 다대포성을 쌓다, 《성종실록》 247권, 1490년 11월 29일
  3. 경상좌도 관찰사 한효순이 왜적이 부산 등지에 성을 쌓고 있다고 치계하다, 《선조실록》 35권, 1593년 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