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원 (축구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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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한국 한자: 金胄元, 1933년 ~ 2005년 10월 25일)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심판이며, 대한축구협회의 국제위원장과 부산광역시축구협회의 회장을 지냈다. 영어일본어에 능했으며, 폭넓은 국제적 인맥을 가져 국제 대회 유치 및 해외 섭외 등 국제 전문 행정가로 활동하였다.

생애[편집]

부산광역시 출신으로, 부산상업고등학교를 거쳐 1952년 부산대학교에 입학하였다.[1] 이후 군에 입대해 한국 전쟁에 참전했으며, 전후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에서 골키퍼로 활동하며 1957년 개최된 '이승만 탄생 기념 경축 전국 축구대회'에서 팀의 준우승에 일조하였다.[2][3] 그 뒤 1968년 국제축구연맹(FIFA) 소속 국제 심판으로 선임되었으며,[4] 1969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해 준결승전 및 결승전의 주심을 맡았다.[5][6] 이후 1970년 대한축구협회가 조직한 심판위원회의 위원에 포함되었으며,[7] 1970년 아시안 게임의 축구 분야 대한민국 심판으로 선정되었다.[8] 그 뒤 1972년 아시안컵에 참가했으며,[9] 그 해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에서 싱가포르버마와의 경기 등의 주심을 보았다.[10] 또한 이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1972년 하계 올림픽 경기 분석을 위해 박경화와 함께 테헤란에 파견되기도 했다.[11][12]

이후 1973년 대한축구협회가 주최한 '축구지도자 강습회'의 강사로 참여했으며,[13] 1974년 FIFA 월드컵 예선 B조 및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의 심판으로 배정받았다.[14][15] 그 뒤 1974년 FIFA 월드컵아시아 부문 예비 심판 후보로 추천되었으며,[16] 같은 해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월드컵 심판 강습회'에 파견되었다.[17] 또한 1974년 아시안 게임의 축구 분야 대한민국 심판으로 선정되었으며,[18] 대한축구협회에서 지정한 심판원급별제도규정에서 1급에 포함되었다.[19]

하지만 1975년 자카르타 창립 기념대회의 결승전 주심을 맡았으나 판정 논란에 시달리며 경기가 중단되었으며, 이로 인해 심판위원회에서 김주원을 국제 심판으로 추천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축구협회에서 경위서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심판위원장인 곽정빈이 사퇴했으며,[20] 결국 김주원이 국제 심판 명단에 포함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21] 그리고 그 해 한양대학교상업은행 축구단과의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경기에서 주심을 맡았으나 판정에 불복한 일부 상업은행 선수들에 의해 폭행을 당했으며,[22] 이로 인해 상벌위원회가 개최되어 폭행을 가한 이순명 코치와 신은균 선수가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23][24] 이후 대한축구협회에서 개최한 '축구지도자 강습회'의 강사로 참여하였다.[25]

그 뒤 1976년에는 1976년 하계 올림픽 예선 2조의 심판 및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의 심판으로 배정받았으며,[26][27] 1977년에는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 1조의 심판으로 선임되었다.[28] 하지만 그 해 규정에 미치지 못하는 이수율로 인해 '심판 태만 및 실적 미달' 사유로 심판위원회의 국제 심판 명단에서 제외되었으나,[29] 이후 대한축구협회 측에서 심판위원장인 김영진을 압박해 김주원에게 각서 및 공개 사과를 이행한다는 조건으로 국제 심판 명단에 다시 올리도록 하여 국제 심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파장이 일었다.[30][31] 그 뒤 1978년에는 다른 전형위원들과 함께 대한축구협회의 회장직에서 사임한 김윤하의 후임으로 박준홍을 추천했으며,[32] 그 해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쿠웨이트북예멘과의 경기 등의 주심을 보았다.[33]

이후 1982년 머라이언컵에 출전하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단장을 맡았으며,[34] 해당 대회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대표로 참가했던 앨런 데이비드슨과 협의해 오석재에게 사우스 멜버른 FC 이적을 권유하기도 했다.[35] 그리고 1983년에는 아시아 축구 협회 심판위원회의 동북아시아 지역 담당 자격으로 1983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할 심판에 이도하를 추천했으나 대한축구협회 내에서 선정 과정에 대한 논란으로 초청 자체가 취소되어 대한축구협회가 비판을 받았으며,[36] 1984년 하계 올림픽 2차 예선을 서울특별시에서 유치하기 위해 파견되기도 했다.[37] 또한 대한축구협회의 감사로 활동하며 말레이시아 측의 1986년 FIFA 월드컵 예선 경기 일정 연기 요청이 이사회의 논의 없이 사무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는 사실을 적발했으며,[38] 1985년 AFC U-17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는 국가대표팀의 단장으로 임명되었다.[39]

그 뒤 1985년 대한축구협회 국제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40] 압둘라흐만 빈 사우드 알사우드의 요청으로 박종환에게 알나스르 감독직을 제안하기도 했다.[41] 그리고 섭외담당자로도 활동하며 국가대표팀의 해외 출국에 동행했으나,[42][43] 외유성 출장이 잦다는 지적을 받았다.[44] 또한 1986년에는 아시아 축구 연맹의 상벌위원장 자격으로 상벌위원회에 참석하였으며,[45] 1986년 FIFA 월드컵의 수익금이 전용된 사실을 밝혀낸 뒤 언론에 알렸다.[46]

이후 1987년 출범한 최순영 체제의 대한축구협회 집행부의 국제위원장으로 유임되었으며,[47] 그 해 최순영이 사퇴하고 집행부가 이종환 과도 체제로 운영된 이후에도 계속 국제위원장을 맡았다.[48][49] 그리고 1988년 새로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김우중 산하 집행부에서도 국제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50] 한중일 축구 협회 관계자들과의 공조로 다이너스티컵 창설에 일조하였다.[51] 또한 1989년에는 10여년동안 20회 이상의 A매치 주심을 본 것에 대한 공로로 국제축구연맹으로부터 특별표창기장을 수여받았으며,[52] 1990년에는 아시아 축구 연맹의 상벌위원에 출마하였다.[53][54] 그 뒤 같은 해 열린 아시아 축구 연맹 집행위원회 총회에 상벌위원 자격으로 참석했으며,[55] 1992년 개최된 아시아 축구 연맹 집행위원회 총회에도 참여하였다.

이외에 부산광역시축구협회의 심판이사, 전무이사 및 부회장으로 활동했으며,[56]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부산광역시축구협회의 회장을 지냈다.[57] 이후에는 부산광역시축구협회의 고문 및 명예회장, 부산광역시체육회의 이사로 있으며 1993년 출범한 '아시안 게임 범시민추진위원회'의 운영위원을 맡았고,[58] 1996년 구성된 '2002년 FIFA 월드컵 기획단' 명단에 포함되었다.[59] 또한 1997년 동아시아 경기 대회의 경기전문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했으며,[60] 1997년 부산광역시체육회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61] 그리고 2002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시행된 조추첨 행사가 벡스코에서 개최되도록 국제축구연맹 관계자들을 설득하였고,[62] 2004년에는 2005년 부산국제청소년축구대회일본 U-20 대표팀중화인민공화국 U-20 대표팀이 참가할지 여부에 대해 관계자들과 협상을 가졌다.[63] 같은해에는 오거돈이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나왔을 당시 열린 간담회에 참석하기도 했다.[64]

2005년 10월 25일 세상을 떠났으며, 유해는 부산광역시 영락공원의 묘지에 안장되었다.[65]

A매치 심판 경력[편집]

각주[편집]

  1. “부산시축구협회 김주원 명예회장”. 국제신문. 2004년 6월 29일. 
  2. “3對(대)3으로無勝負(무승부)”. 경향신문. 1957년 4월 24일. 
  3. “兵站團(병참단)「팀」優勝(우승) 本社後援全國蹴球大會閉幕(본사후원전국축구대회폐막)”. 경향신문. 1957년 4월 30일. 
  4. “國際審判七(국제심판칠)명추천”. 동아일보. 1968년 7월 13일. 
  5. “團長權寧達(단장권영달)씨뽑아 아시아靑少年蹴球(청소년축구)”. 동아일보. 1969년 3월 13일. 
  6. “亞州靑少年蹴球(아주청소년축구) 선수단解團(해단)”. 동아일보. 1969년 5월 7일. 
  7. “축구審判委(심판위) 구성 심판비도 2천원으로 인상”. 경향신문. 1970년 2월 3일. 
  8. “아시아競技國際審判(경기국제심판) 韓國人(한국인) 十(십)명확정”. 동아일보. 1970년 11월 16일. 
  9. “亞州蹴球(아주축구)나갈 代表(대표)팀構成(구성) 非常備軍(비상비군)서七(칠)명補强(보강)”. 동아일보. 1972년 4월 8일. 
  10. “은방울”. 매일경제. 1972년 9월 26일. 
  11. “두蹴球人(축구인) 테헤란에 파견키로 이란·北傀(북괴) 뮨헨豫選戰(예선전) 參觀(참관)위해”. 동아일보. 1972년 5월 20일. 
  12. “北韓(북한)의 스포츠”. 경향신문. 1972년 7월 19일. 
  13. “蹴球(축구)지도자 講習(강습) 7~13일 釜山(부산)서”. 경향신문. 1973년 1월 9일. 
  14. “월드컵축구豫選審判(예선심판)에 金胄元(김주원)씨를선출”. 동아일보. 1973년 2월 24일. 
  15. “3回亞洲(회아주)축구 朴(박)대통령 始蹴(시축)…開幕(개막)”. 경향신문. 1973년 9월 22일. 
  16. “뮌헌蹴球(축구)심판후보 金胄元(김주원)씨選出(선출) 통보”. 경향신문. 1974년 3월 16일. 
  17. “월드컵 審判訓練(심판훈련)코스에 金胄元(김주원)씨派遣(파견)키로”. 경향신문. 1974년 5월 23일. 
  18. “金胄元(김주원)·金知泰(김지태)씨 亞洲大會(아주대회) 심판추천”. 경향신문. 1974년 7월 16일. 
  19. “審判(심판) 級別(급별)제도 실시 蹴協(축협),1次(차)로 32명에”. 동아일보. 1974년 12월 24일. 
  20. “축구審判界(심판계) 멀썽 잇달아 FIFA추천싸고 위원장 辭表(사표)”. 경향신문. 1975년 7월 15일. 
  21. “축구협회 國際審判人選(국제심판인선)매듭”. 동아일보. 1975년 7월 16일. 
  22. “商銀(상은)선수들,主審(주심)에暴言(폭언)·暴行(폭행)”. 동아일보. 1975년 7월 21일. 
  23. “「매너不在(부재)」에强硬策(강경책)”. 동아일보. 1975년 7월 24일. 
  24. “誤審(오심)등 무더기징계 蹴協(축협)”. 경향신문. 1975년 7월 25일. 
  25. “全國(전국)순회 강습회 蹴協(축협),코치·審判(심판)자질향상 위해”. 경향신문. 1975년 12월 19일. 
  26. “金胄元(김주원)심판 招請(초청) 올림픽 蹴球(축구)예선”. 경향신문. 1976년 1월 15일. 
  27. “메르데카배 축구단장에 백승빈씨”. 중앙일보. 1976년 7월 10일. 
  28. “亞洲(아주)1組豫選(조예선)엔 金胄元審判選定(금주원심판선정)”. 동아일보. 1977년 1월 15일. 
  29. “축구 협회 국제심판 7명選任(선임)”. 경향신문. 1977년 7월 8일. 
  30. “蹴球(축구)국제심판 選任(선임) 엎치락 뒤치락 말썽일자 金胄元(김주원)씨 뒤늦게 재추천”. 경향신문. 1977년 7월 15일. 
  31. “석연챦은 蹴球國際審判(축구국제심판)추천…內規(내규)까지 어기며 缺格者(결격자)를 미는 協會(협회)”. 동아일보. 1977년 7월 21일. 
  32. “蹴協(축협)회장에 朴埈弘(박준홍)씨 취임”. 경향신문. 1978년 8월 8일. 
  33. “북한선수, 말 걸어도 피하기만”. 중앙일보. 1978년 10월 9일. 
  34. “멀라이언컵 축구 결승전 판정 불복”. 경향신문. 1982년 10월 19일. 
  35. “세미프로蹴球(축구) 사우드멜번 연봉 4千(천)5百萬(백만)원 조건 吳錫載(오석재) 濠洲(호주)서 스카웃提議(제의)”. 경향신문. 1982년 10월 21일. 
  36. “찾아온 복 놓치고 망신만”. 중앙일보. 1983년 4월 15일. 
  37. "화랑, LA 축구 1차 예선 통과하면 2차 예선 서울유치". 중앙일보. 1983년 10월 28일. 
  38. “월드컵축구豫選(예선) 韓(한)·말레이지아戰(전) 事務局(사무국)서 날짜변경 잘못┈말썽”. 경향신문. 1984년 11월 2일. 
  39. “스포츠短信(단신)”. 동아일보. 1985년 3월 15일. 
  40. “축구協(협) 상근부회장 李壽煥(이수환)씨”. 매일경제. 1985년 1월 24일. 
  41. “사우디"朴鍾煥(박종환)감독 와달라". 경향신문. 1985년 1월 24일. 
  42. “「28년 숙원」풀자”. 중앙일보. 1985년 2월 21일. 
  43. “월드컵代表(대표) 印尼(인니)로”. 동아일보. 1985년 7월 27일. 
  44. "말레이지아쯤이야"「김칫국」부터 마시는 월드컵代表(대표)팀씨”. 동아일보. 1985년 2월 22일. 
  45. “퇴장당하면 1년동안 출전정지”. 경향신문. 1986년 12월 12일. 
  46. “광성·휘문·경성·서라벌 4强(강)대결로 압축”. 경향신문. 1986년 12월 18일. 
  47. “마라도나 來韓(내한)확정”. 매일경제. 1987년 1월 31일. 
  48. “축구협 회장에 李鍾煥(이종환)씨”. 동아일보. 1987년 12월 1일. 
  49. “축구협회 새집행부 구성”. 동아일보. 1987년 12월 3일. 
  50. “축구協(협) 새집행부 발표”. 동아일보. 1988년 2월 16일. 
  51. "4개國(국) 친선축구 열자". 경향신문. 1988년 6월 14일. 
  52. “洪德永(홍덕영)씨등 축구심판 4명 FIFA특별표창기장 받아”. 동아일보. 1989년 1월 28일. 
  53. “축구協,朴鍾煥감독 징계해제 기각”. 연합뉴스. 1990년 4월 4일. 
  54. “아주경기연 “감투 잡기” 장외 신경전”. 중앙일보. 1990년 8월 16일. 
  55. “A F C 상벌위원에 피선”. 부산일보. 1990년 10월 15일. 
  56. “부산시 축구협회 새 회장 金주元씨”. 부산일보. 1989년 1월 11일. 
  57. “새회장에 金胄元씨”. 부산일보. 1989년 1월 10일. 
  58. “아주게임유치위 임원확정…회장 우병택, 운영위원장 권오현씨”. 국제신문. 1993년 8월 5일. 
  59. “돋보기...부산 월드컵기획단 졸속 일관”. 국제신문. 1996년 6월 6일. 
  60. “동아대회 첫 경기전문위 개최...김주원 위원장등 18명”. 국제신문. 1996년 5월 23일. 
  61. “부산시체육회이사 대폭교체...김상훈본사사장 부회장선임”. 부산일보. 1997년 3월 28일. 
  62. “벡스코 작년 277건 전시 부산경제 재도약 이끈다”. 매일경제. 2003년 5월 6일. 2019년 9월 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9월 3일에 확인함. 
  63. “박성화호·부산축구 '한배'. 국제신문. 2004년 9월 21일. 
  64. “오거돈 후보, 기장 월드컵 빌리지에 잔디구장 11개 조성”. 뉴시스. 2004년 5월 30일. 
  65. “김주원 전 부산시축구협회장 별세”. 부산일보. 2005년 10월 26일.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