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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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7세
전임자알렉산데르 2세
후임자빅토르 3세

교황 그레고리오 7세(라틴어: Gregorius VII, 이탈리아어: Papa Gregorio VII)는 제157대 교황(재위: 1073년 4월 22일 - 1085년 5월 29일)이다. 세속명은 힐데브란트(Hildebrand)이다. 세속 황제 권력과의 서임권 분쟁으로 유명하다.

생애

이탈리아토스카나 지방 소바나에서 1020년에서 1025년 사이에 태어났다. 로마의 수도원에서 성직 교육을 받고 교황청과 연관을 맺어 1046년 교황 그레고리오 6세독일로 피난을 갈 때 동행을 하였으며 쾰른에서 공부하였다. 원래 클뤼니 수도원과도 연관이 있는 듯하다.

로렌의 개혁가들과 접촉하여 툴의 주교 브루노가 1048년 교황 레오 9세가 되었을 때 로마로 동행하여 교황청의 일을 담당한 지적으로 뛰어난 인물 중의 하나였다. 레오 9세는 그를 부제서품하고 교황청의 재무 담당관과 성 바오로 대성당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때부터 그의 역할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1054년 교황청 사절로 투르의 지방 공의회를 주관하여 성체성사의 이단자 베렌가리우스의 사건을 담당하였다. 또한 그는 1058년 교황 니콜라오 2세1061년 교황 알렉산데르 2세의 선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니콜라오 2세의 업적인 1059년의 교황 선거령의 재정은 그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073년에 힐데브란트는 만장 일치로 교황이 되어 그레고리오 7세로 명명하고 성 베드로성 바오로의 축일에 교황좌에 올랐다. 그레고리오 7세는 평소에 두 사도들에 대하여 깊은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재위 초창기에 십자군의 모집에 관심이 많았으나 여러 장애 요인들로 인해 포기하였다. 동방 정교회와의 분열과 중동에서 셀주크 투르크의 작태에 관심을 가지고 성지를 순례할 수 있기 위해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레고리오 7세는 전례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로마 전례를 에스파냐에 보급하여 모자라빅 전례에 대치시키고 사계 시기에 재를 지키게 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는 예외적인 성격, 예지, 전망의 소유자였다. 서신과 칙령에서 그는 자신의 지적인 출중함을 유감 없이 드러내보였다. 그레고리오 7세는 엄격한 법을 통한 행정을 강조하여 타락해 있던 교회를 엄하게 다스렸다. 개혁은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들의 정화된 생활을 요구하였다. 성직 매매, 사제의 결혼, 평신도의 임직권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1074년1075년의 지방 공의회는 이전 교황들의 쇄신 정책을 확인하여 성직매매와 성직자들의 결혼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반대에 봉착하였다. 특히 프랑스신성로마제국에서 그런 움직임이 일어나자 그레고리오 7세는 사절을 보내어 극복하게 하였다. 개혁을 위하여 이제부터 서품되는 주교들은 순명 서약을 하게 하였고 정기적으로 교황청을 방문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가 주관한 라테란 지방 교회회의의 결정 사항들은 자연적으로 공의회로 발전되었다.

교회 쇄신 개혁은 다른 면으로는 세속 군주의 주교 감독을 폐지한다는 의미였다. 이제까지 세속의 군주들은 자신들이 직접 주교들을 서임하여 직책과 은전을 베풀어 왔다. 그레고리오 7세는 선임 교황들에 의해 이미 단죄되어 온 이 제도를 공격한 것이다. 가장 심한 마찰을 빚은 나라는 신성 로마 제국이었다. 왜냐하면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청은 여러 면에서 상호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마찰은 전임 교황이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의 고문 다섯 명을 파문했을 때부터 생기기 시작하였다. 또한 밀라노의 교구장이 공석이었을 때 황제는 황실과 가까운 지원자를 임명하였으나 파타리노들은 교황과 가까운 지원자를 추천하였다. 평신도 서임에 대한 교황청의 단죄에도 불구하고 신성로마제국은 밀라노, 스폴레토, 페르모 그리고 독일에서 황제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주교아빠스로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교회 내부의 가장 큰 부패 요인은 세속인의 서임이었다. 1075년 사순절 로마 회의에서 세속인의 서임을 더욱 엄격히 규제하고 교구 점류의 모든 권리를 왕으로부터 찾아낼 것을 파문의 위협하에 결정하여 이를 12월에 왕들에게 통보하였다. 이 내용은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제국주의적 전복을 의미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의 서신을 접한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굽히지 않고 1076년 1월 말 보름스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교황 반대 운동을 전개하여 주교 스물여섯 명의 서명을 받아 그레고리오 7세가 저질렀다는 범행들을 규탄하고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키기로 결정하였다. 1076년 사순절, 로마 회의에서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그의 모든 권한을 금하며 황제의 신하들에게는 충성의 의무에서 면제시켜 주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폐위되지 않았다. 그는 교황청의 명령에 반대하고 황제 편에 섰던 주교들을 파문하거나 성무 정지를 시켰다. 신성로마제국 내의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가 1년 내에 그레고리오 7세에게 파문을 취소해 주도록 간청하거나 아니면 힘을 합쳐 새 황제를 뽑을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자 황제는 1076년 겨울 소수의 수행원만을 대동하고 알프스의 아펜니노 산맥의 북쪽 카노사에서 회개의 옷을 입고 마침 그 곳에 가 있던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성문 앞에서 2일간 기다렸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이다.

하인리히 4세는 제후들의 분쟁에 있어서 교황의 중재적 판결에 따른다는 조건으로 그레고리오 7세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받아 권한의 일부를 회복할 수 있었으나 제국의 위세는 무너지고 말았다. 황제의 마음은 복수로 불타고 있었다. 얼마 안 가 제후들이 1077년 3월 15일 교황청의 승인 없이 슈바벤공작 루돌프를 새 황제로 선출하자 그 여파로 신성로마제국에서는 3년간 격렬한 내전이 일어났다. 이 내란을 중재하기 위하여 그레고리오 7세는 《대화》를 발표하여 양측의 분쟁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1080년 사순절에 하인리히 4세를 재차 파문하여 그를 폐위시키고 제후들이 선출한 루돌프 공작을 신성로마제국의 합법적인 황제로 승인하였다. 유럽의 실권은 황제에게서 교황에게로 넘어갔다. 이를 계기로 그는 유럽의 질서를 바로잡고 교황권의 절대성을 확립하여 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묘소

그레고리오 7세의 처사는 불안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1080년 6월 하인리히 4세가 브릭센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라벤나의 귀베르트대립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1084년 하인리히 4세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오자 그레고리오 7세는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한 후 로베르토 기스카르의 도움을 받아 살레르노로 피신하여 노르만족의 보호를 받다가 1085년 5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와의 대립에서 패배한 것처럼 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레고리오 7세가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만이 아니라 여러 국경을 넘어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모든 나라들과 교섭하여 통치자로 임하였다.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잉글랜드, 프랑스 그리고 그 외의 여러 작은 나라들과도 연락을 취하여 로마 교회의 우위성을 주장하였다. 토스카나의 여공작 마틸다는 황제를 반대한 교황청의 동맹자로서 영토의 일부를 교황청에 양도하여 다음 세대에 교황령의 일부가 되었다.

1606년 교황 바오로 5세가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바깥 고리

전임
알렉산데르 2세
제157대 교황
1073년 4월 22일 - 1085년 5월 29일
후임
빅토르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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