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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무르
소련의 학자 미하일 게라시모프가 티무르의 두개골을 토대로 복원한 흉상
소련의 학자 미하일 게라시모프가 티무르의 두개골을 토대로 복원한 흉상
후레겡〔부마(駙馬)〕, 위대한 아미르
재위 1370년 ~ 1405년
대관식 1370년 4월 10일
후임 할릴 술탄
이름
별호 절름발이 티무르
신상정보
출생일 회력 736년 샤반 월月 25일

서력 1336년 4월 8일

출생지 케쉬 (지금의 샤흐리 삽스)[1]
사망일 회력 807년 샤반 월月 17일

서력 1405년 2월 18일

사망지 우트라르
왕조 티무르 왕조
부친 무함마드 타라가이
모친 테키나 모흐 베김
배우자 사라이 물크 하눔
자녀 자한기르, 우마르 셰이크, 미란 샤, 샤 루흐
종교 이슬람교
묘소 사마르칸트, 구리 아미르

티무르( 1336년 4월 9일~1405년 2월 18일; 재위: 1370년 ~ 1405년; 페르시아어: تيمور Tīmūr/Taymūr; 우즈베크어: Amir Temur ko‘ragoniy ibn Amir Tarag‘ay ibn Amir Burqul)는 중앙아시아의 몽골·투르크계 군사 지도자이며, 티무르 제국(존속기간: 1370년 ~ 1507년)의 창건자이다. 그의 이름은 본래 투르크·몽골어계 인명인 테무르이나, 그것의 이란어형인 티무르라는 표기로[2] 더 많이 쓰인다. 유럽권에서는 태멀레인 또는 타메를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티무르는 인도에서 러시아와 지중해에 이르는 지역을 정복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가 행한 야만적인 행동들과 그가 세운 왕조의 문화적 업적으로 유명하다.[3]

이름과 칭호[편집]

‘티무르’는 몽골어 ‘테무르Temür(현대 우즈베크어로는 ‘Temur’)’의 이란어형이다.[2] 테무르는 “쇠(鐵, iron)”라는 의미로, 투르크-몽골인들의 이름에 흔히 사용되었다.[4]

티무르의 시대의 투르크-몽골의 전통은 칭기즈 칸의 후예가 아닌 사람이 ‘’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을 자칭할 수 없었다. 그는 대신 ‘아미르’(지휘관)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때때로 그 앞에 ‘위대한’을 붙여 ‘위대한 아미르’라 자칭했다.[5]

그가 칭기스 칸의 후손들을 허수아비 칸으로 세워 그의 이름으로 통치한 뒤에는 ‘부마‘(몽골어: хүргэн /kürügän/)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이는 ‘사위’라는 의미인데, 그가 칭기스 가문의 공주와 결혼했기 때문에 이런 호칭을 사용할 수 있었다.[5] 티무르의 후손들인 무굴 제국의 군주들은 이를 근거로 스스로의 왕조를 ‘구르칸Gurkān(‘후르겡’의 이란어형) 왕조’라고 불렀다.[6]

이란의 사서들에서 그는 티무리 랑(페르시아어: تيمور لنگ Tīmūr-i Lang)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절음발이 티무르라는 의미이다. 그의 적들은 그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싶을때 그를 이렇게 불렀다. 유럽에서 그를 부를때 사용하는 태멀레인(Tamerlane)은 ‘티무리 랑’의 변형이다.

배경[편집]

13세기 후반의 차가타이 울루스

1340년대 차가타이 칸국은 동과 서로 분열되었다. 마 와라 알나흐르를 중심으로 한 서부 지역에서는 1346년에 유력한 아미르인 카자간이 군주인 카잔 칸을 살해하고 실권을 잡았다. 권력을 장악한 카자간은 헤라트와 인도 방면에 대한 원정을 기도했지만, 1358년에 암살당하고 만다. 카자간의 죽음이후 마 와라 알나흐르 지역은 다시 무정부 상태로 돌아갔다. 이때 동차가타이 칸국에서는 투글루크 티무르가 칸으로 즉위하면서 칸의 권력이 확고하게 되었다. 투글루크 티무르는 이슬람을 수용하고 카자간의 암살 이후 혼란에 빠진 마 와라 알나흐르에 두 번이나 진군해 차가타이 울루스를 재통일했다.(1360년1361년) 티무르가 역사의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때이다.[7]

티무르가 속한 바를라스부는 칭기스 칸차가타이에게 부여한 4개 천호의 하나이다. 티무르의 가문은 바를라스부의 명문에 속했지만, 티무르가 태어날 무렵에는 소수의 하인을 거느린 가문에 불가했으며,[8] 바를라스부의 지배 가문에 속하지도 않았다.[9] 그러나 이와 별개로 그의 가문의 사회적 명망은 아주 높았었다. 그의 가문은 칭기스 가문과 공통적인 조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 티무르의 아버지 아미르 타라가이는 부유한 사람은 아니었음에도 바를라스부 내부에서는 존중받았다.[10]

생애[편집]

어린 시절[편집]

2006년의 샤흐리 삽스

티무르는 1336년 4월 8일에 사마르칸드 남쪽의 케쉬(후의 샤흐리 삽스[1])에서 태어났다.[11] 그가 어린시절과 청년기를 보낸 것도 이곳으로 추측된다. 부족의 전통에 따라 티무르는 청년기에 승마술과 활쏘기를 비롯한 전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기술을 배웠다. 또, 그는 투르크어 이외에 페르시아어로 말하는 법(티무르는 문맹이었다)을 배웠다. 티무르가 후일 종교적인 사람으로 성장한 것은 이 시기에 타라가이의 영적인 조언자 샴스 알딘 쿠랄에게서 받은 영향으로 생각된다.[10] 티무르는 청년 시기에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을 발휘하여 점차 부하의 수를 늘려갔던 것으로 보이나, 이 시기의 상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12][8]

초기 경력[편집]

투글루크 티무르가 마 와라 알나흐르를 정복하자, 그곳의 부족장들 몇몇은 그에게 항복했는가 하면, 또 다른 몇몇은 도망쳤다. 당시 바를라스부를 다스리던 핫지 베그는 투글루크 티무르를 거부하고 도망친 쪽에 속했었다.[9] 반면 티무르는 1360년에 일찍이 그의 휘하에 들어가 조상들의 소유지였던 케쉬 인근의 땅을 얻었다.[12] 투글루크 티무르가 모굴리스탄으로 돌아가자 핫지 베그가 돌아왔고, 티무르는 다시 그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361년에 투글루크 티무르가 다시 마 와라 알나흐르로 돌아옴에 따라 상황은 핫지 베그는 또 도망쳤고, 이제 상황은 티무르에게 호전되었다.[13] 이때 투글루크 티무르가 군대를 이끌고 티무르를 찾아오자,[12] 티무르는 그를 설득하여 바를라스부의 지배권을 위임받았다. 이후 티무르는 빠르게 핫지 베그에 반대하는 부족 수령들과 동맹을 맺었는데, 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카자간의 손자이며, 이제는 서차가타이 칸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아미르 후세인이었다.[9]

핫지 베그는 후라산에 도착한 직후 사브제와르 근처에서 암살당했고, 이 덕분에 티무르는 바를라스부의 항구적인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투글루크 티무르는 자신의 아들 일리야스 호자를 마 와라 알나흐르의 총독으로 남겨놓고 떠났는데, 이때 티무르를 그의 자문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투글루크 티무르는 얼마 뒤에 베그칙이라는 또 다른 수령을 일리야스 호자의 보좌관으로 임명하여 막강한 권한을 주었다. 그러자 티무르는 2인자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에 티무르는 투글루크 티무르의 대리인들과 손을 끊고[14] 아미르 후세인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후 몇 년 간 아미르 후세인은 마 와라 알나흐르의 권력을 쥐기 위해 투쟁을 계속했으나, 몇 차례인가는 실패하여 후라산으로 도망쳐 그곳의 영주들 휘하에서 지내기도 했다.[9] 기록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티무르는 화살에 맞아 팔과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유골을 조사한 결과, 이것은 질병의 후유증이었다.[15] 어쨋든, 이로 인해 티무르는 다리를 절게 되었고, 티무리 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16]

이후 아미르 후세인은 아프가니스탄쿤두즈 지방으로 일시 후퇴해 군대를 재조직한 뒤 마 와라 알나흐르로 갔다. 일리야스 호자의 군대가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석교(石橋) 전투와 카바 마탄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일리로 도망쳤다.(1363년) 후세인은 마 와라 알나흐르를 장악하고 두아 칸의 증손자 카불 샤를 군주로 즉위시켜 자신의 정권을 합법화했다.[17]

이때 일리에서는 투글루크 티무르가 죽고 일리야스 호자가 그의 뒤를 이었다. 1364년, 그는 군대를 새로 조직하여 마 와라 알나흐르로 다시 돌아왔다. 티무르와 후세인은 진흙탕의 전투에서 패배하였고,(1365년) 후세인은 쿤두즈 북방의 살리 사라이로, 티무르는 발흐로 도망침으로서 마 와라 알나흐르는 일리야스 호자의 침략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그의 군대는 곧 사마르칸드를 포위하였지만,[18] 사마르칸드의 주민들은 주민 자치 조직인 사르베다르를 중심으로 방어전을 펼쳤다.[19] 이때 일리야스 호자의 군대에는 역병이 돌기 시작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퇴각하여 일리로 돌아갔다.[18]

일리야스 호자의 군대에 대항한 사르베다르 집단은 도시 상공업자들이 주 구성원들로, 지식인과 장인의 그들의 우두머리였다. 도시 주민들의 이러한 자치 조직은 패권을 노리는 후세인과 티무르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때문에 그들은 사르베다르의 자치를 인정한다고 속여 지도자들을 꾀어낸 다음 모두 죽여버렸다. 다만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울라마 마울라나 자다는 티무르의 도움으로 구제되었다.[20]

후세인과의 권력 쟁탈전[편집]

티무르가 후세인의 여동생과 결혼함으로서 두 사람의 패권은 더욱 공고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동 정권은 오래 가지 못 하였다. 후세인의 여동생이 죽자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 되었다. 처음에는 후세인이 우세하여 티무르를 카르시에서 몰아냈으나, 티무르는 곧 카르시를 수복하고 역습을 가해 부하라를 차지하였다. 후세인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 와라 알나흐르로 출정하여 부하라와 사마르칸드를 빼았았다. 수적으로 압도되고 있음을 깨달은 티무르는 후라산으로 도망쳐버렸다.[21]

이후 티무르는 후라산과 타쉬켄트 사이를 오가는 생활을 하였다. 이후 그는 모굴인들을 충동해 마 와라 알나흐르를 침공하게끔 했다. 모굴인들은 마 와라 알나흐르에서 승승장구 하였는데, 티무르는 이를 이용해 후세인에게 빼앗긴 지배권을 되찾았다.[22]

궁지에 몰린 후세인은 티무르에게 모굴인들에 대항하는 연합을 맺자고 제의했다. 티무르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티무르는 케쉬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고, 후세인과 다시 한 번 공동지배체제를 성립시켰다. 이후 티무르는 후세인에게 외견상으로는 충실한 동맹자로서 행동했다. 그는 후세인의 영지에서 일어난 반란들을 진압하는데 도움을 주었다.[23]

반면 후세인은 티무르의 손에서 마 와라 알나흐르를 빼앗기 어렵다고 보고 아프간 지역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서둘러 발흐의 성채를 요새화하였는데, 그의 행동은 티무르를 불쾌하게 만들었다.[23][24] 게다가 여러 유목 집단들도 후세인에게 반발하고 티무르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24][25]

1370년, 티무르가 발흐 공성전의 와중에 사절들을 맞이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티무르는 선전포고도 없이 군대를 일으켜 후세인을 공격했다. 티무르의 군대는 금세 발흐를 포위했다. 급습당한 후세인은 저항할 방도가 없었기에 티무르에게 항복했다. 티무르는 후세인을 용서했고, 후세인은 메카로 순례 여행을 떠났지만, 여행의 와중에 티무르의 부하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발흐 주민들은 후세인에게 충성을 받친 대가로 티무르에게 학살 당했다.[26][27] 티무르의 군대는 발흐에 후세인이 세운 성채를 파괴하였고, 티무르는 후세인이 소유했던 보물들을 군대에 나누어줬다.[28]

티무르는 후세인에 대한 원정을 수행하는 와중에 후세인에게 우호적이었던 칸, 카불샤의 죽음을 유도했다. 그리고 나서는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우구데이의 후손 소유르가트미쉬를 칸으로 세웠다. 또, 이 시기에 테르메스 부근에서 메카메디나기진재산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사이드 바라카를 만나 많은 재산을 기진하고 면세 특권을 부여했다. 사이드 바라카는 티무르에게 고귀한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큰북과 깃발을 하사했다.[29]

티무르 정권의 수립[편집]

발흐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있는 티무르의 모습.

1370년 4월 10일, 발흐 정복을 마친 티무르는 발흐에서 유목 집단의 우두머리들(즉, 아미르들), 지방 영주들, 종교적 권위가 있는 사이드들, 칭기스 가문의 왕자들의 지지를 받아 스스로가 마 와라 알나흐르의 군주임과 동시에 칭기스 칸과 차가타이 칸의 계승자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티무르는 칭기스 가문의 피를 잇지 않았기 때문에 칭기스 가문의 정통 후예가 아니라는 컴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티무르는 앞서 칸으로 세운 소유르가트미쉬 칸의 이름으로 통치를 하는 동시에, 죽은 후세인의 처들 가운데 카잔 칸의 딸인 사라이 물크 하눔과 결혼하여 칭기스 가문의 부마(駙馬; 즉, 후레겡) 지위를 얻었다.[30]

이리하여 티무르가 차가타이 울루스 서부 지역, 즉 트란스옥시아나에 정권을 확립하였으나, 그의 권력이 절대적이지는 않았다. 기회만 있으면 그를 뒤엎으려는 세력들이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이다. 즉, 이때 티무르는 그 자신의 측근과 같이 티무르 정권을 지탱하는 중핵들을 새로운 지배층으로 육성하는 동시에 기존의 부족 기반 위에서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던 세력들을 배제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티무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쉴 틈 없이 원정을 감행하고, 원정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해 나갔다. 쉴 틈 없는 원정으로 인해 구지배층은 정치적 책동을 꾀할 수가 없었던 반면 신지배층은 전리품을 얻고 승진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31]

호라즘 원정[편집]

우르겐치를 포위한 티무르의 군대.

몽골 제국 시대에 호라즘의 북부 지역은 조치 울루스, 남부는 차가타이 울루스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32] 그러나 1360년 경 쿵그라트 부족의 수령 후세인 수피가 킵차크 칸국에서 벌어진 혼란을 이용하여 호레즘에 독립적인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후 그는 트란스옥시아나의 주민들에게서 카트와 히바를 탈취했다.[33]

티무르는 정권을 수립한 직후인 1371년 이 도시들에 대한 영유권을 차가타이 울루스에 돌려줄 것을 후세인에게 요구하였다. 후세인 수피가 이를 거부하자 티무르는 카트를 점령하고 우르겐치를 포위하였다. 후세인 수피는 포위된 상황에서 사망하였다. 후세인 수피의 뒤를 이은 그의 동생 유수프 수피는 화평을 청하며 티무르에게 카트와 히바 지방을 양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유수프 수피는 이 결정을 후회하여 곧 카트 지방을 약탈하였다. 티무르는 1373년에 적대관계로 돌아섰다가 유수프의 딸인 한자다를 아들 자한기르의 처로 맞아들이면서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그리하여 호라즘 전역이 일단 티무르의 세력 아래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1375년에 다시 전쟁이 발발했지만, 사마르칸드에서 티무르의 부하 두 사람이 반란을 일으키자 철군했다.[34]

모굴리스탄 원정[편집]

1365년, 두글라트부에 속한 카마르 알딘이 모굴 칸국의 일리야스 호자 칸을 시해하고 칸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을 몰살한 뒤 스스로 칸을 칭하였다. 그의 반란에 당시 모굴 칸국의 유목민 상당수가 반발하여 격렬한 내분을 낳았다. 티무르는 이 틈을 이용하여 모굴 칸국의 정치에 간섭한다.[35]

우선 티무르는 휘하의 장군들을 모굴리스탄 방면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이 장군들은 이식쿨 호 북방의 알마아타 방향으로 탐색전을 펼치기만 하고 적과 휴전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티무르는 이를 폐기하고 타쉬켄트에서 출병하여 탄키라는 곳에 가 모굴 유목민들을 패주시키고 많은 약탈물을 거두었다. 1375년, 티무르는 모굴리스탄에 대한 세번째 원정에 나섰다. 그는 사이람에서 출병해 모굴리스탄으로 진입했다. 카마르 알딘은 통상적인 유목 전술을 사용하면서 퇴각하였다. 티무르의 아들 자한기르가 이식쿨 서부의 산지에서 적을 급습하자 그들은 일리 쪽으로 흩어져버렸다. 이후 티무르는 일리 너머의 지방을 유린하였다. 그 뒤에 티무르의 군대는 사마르칸드로 귀환하였다.[36]

그러나 카마르 알딘은 티무르의 군대가 트란스옥시아나로 돌아가자 페르가나를 공격하고 약탈했다. 티무르는 페르가나로 급히 달려가 그를 추격하였다. 천산 산맥 북방에서 티무르는 카마르 알딘의 매복에 걸려들었으나, 탈출한 뒤 적을 패주시켰다. 그리고 사마르칸드로 다시 돌아왔다. 이 원정에 티무르의 아들 자한기르는 참여하지 않고 사마르칸트에 머물렀는데, 티무르가 사마르칸트에 도착하기 직전에 죽었다.(1375년 또는 1376년)[37]

티무르는 귀환한지도 얼마 안 되어 카마르 알딘에 대한 다섯 번째 원정을 감행하였다.(1376년에서 1377년 사이의 시기) 이식쿨 호 서쪽의 협곡에서 양자는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티무르는 카마르 알딘을 호수 서쪽 끝에있는 코츠카르까지 추적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카마르 알딘을 완전히 몰락시키지는 못 했다.[38]

킵차크 초원 원정[편집]

1376년, 주치의 후손인 톡타미쉬가 사마르칸드의 티무르를 찾아왔다. 톡타미쉬는 티무르에게 백장 칸국의 칸이자 자신의 주군인 우루스에 대항하는데 지원해주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티무르는 킵차크 칸국의 칸위 후보자를 자신의 수하로 두는 것이 유용하다는 판단에 킵차크 초원과 마주한 시르다리아 중류 북방의 도시들을 톡타미쉬에게 주었다.[39]

그러나 톡타미쉬는 이 영지에서 우루스 칸에 의해 두 번이나 쫓겨났으며, 그때마다 티무르의 도움을 받았다. 1377년 초, 티무르는 시르다리아 전선을 지키기 위해 출정하여 우루스 칸을 격파하고 킵차크 초원으로 물러나게 만들었다.[40]

우루스 칸은 이 해에 죽었고, 그의 두 아들인 톡타 키야와 티무르 말릭이 그의 지위를 차례로 계승하였다. 티무르가 트란스옥시아나로 귀환한 직후 톡타미쉬는 티무르 말릭에게 패배하였고, 티무르는 다시 출정해 톡타미쉬의 영지를 되찾아주었다. 이후 티무르는 톡타미쉬에게 지원군을 보내주었는데, 1377년과 1378년 사이의 겨울에 톡타미쉬는 이 군대와 함께 카라탈에 동영하던 적을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톡타미쉬는 백장 칸국의 권좌에 오를 수 있었다.[40]

호라즘 정복[편집]

티무르가 시르다리아 하류의 북쪽에서 백장 칸국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유수프 수피는 트란스옥시아나 깊숙이 들어와 사마르칸드 부근을 약탈하였다. 1379년 티무르는 유수프의 도발에 대응하여 우르겐치의 성벽 앞으로 진군하였다. 3개월에 걸친 포위 기간 도중에 유수프는 죽었다. 도시는 마침내 함락되었으며, 살육이 뒤따랐다. 호라즘 병합으로 티무르의 트란스옥시아나 왕국이 완성되었다.[41]

승전기[편집]

티무르는 칭기스칸이 쌓아 올렸던 세계제국의 꿈을 이상으로 삼았고, 또한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투에서 승리를 계속해, 전리품을 휘하의 여러 부족에게 분배해 주어야 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에 대외 원정을 계속 되풀이하였다. 트란스옥시아나를 통일한 후 10년간 동 차가타이 한국을 지배한 모그리즈탄(동 투르크스탄)에 원정을 되풀이해, 코기란트 부족이 지배하던 호라즘을 병합하고, 주치의 후예 토그타미슈를 지원하여 토크다미슈를 주치 우르스의 칸에 추대해주고, 주변의 여러 세력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1380년부터는 일 한국왕조의 해체후 분열상태로 있던 이란에 진출하여 호라산을 정복하고, 1386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등까지 지배하에 두었다.

1388년 토그타미슈가 티무르 제국을 공격한 것을 계기로 잠시 3년 전쟁을 종료한 티무르는 토그타미슈를 격파한 뒤 다시 이란에 대한 원정을 재개하여 1392년부터 시작하여 5년 전쟁에서 무자파르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란 전역을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맘루크 왕조와 대치하게 된 티무르는 여기서 북상하여 카프카스를 넘어 토크타미슈를 격파하여 볼가강 유역에까지 진군하여 주치 우루스의 수도 사라이를 파괴하고 루시제국(諸國)까지 침입한뒤 1396년에 귀환했다.

1398년 티무르는 인도 원정을 결심하고, 델리 술탄 왕조를 격파하고 델리를 점령했다. 1399년 시작된 7년 전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반란을 일으킨 3남 미란 샤를 굴복시키고, 그루지아,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시리아로 들어가서 다마스커스를 점령하고, 거기서 이라크로 전진해 모술을 정복했다. 1402년 중앙 아나톨리아에 진출한 티무르군은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여 오스만 제국의 확대를 저지하고, 아나톨리아의 오스만 영지를 바야지드에게 영토를 빼앗겼던 옛 영주들에게 반환해 준 뒤에 귀환했다. 이 원정을 통해 몽골 제국의 서쪽 절반에 해당하는 곳이 티무르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오스만 제국, 맘루크 왕조가 티무르에게 명목상 복속하여 티무르의 지배영역은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1404년말 티무르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격파하여 원나라의 옛 영지를 탈환한다는 목표를 갖고 중국 원정을 개시했다. 그러나 티무르는 원정 도중에 갑자기 병이 나서 1405년 2월 오트라르에서 병사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맏아들 자한기르의 둘째 아들 피르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평가[편집]

티무르는 군사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인물로, 생애에 걸쳐 벌인 전투에서는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정을 할 경우 특별한 이슬람교적인 문화로서의 도시건설을 할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원정은 그곳을 다스리기 위함이라기보다 약탈하고 파괴하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또한 칭기즈칸은 항복하거나 투항하는 적을 살려주었던 반면에 티무르는 투항하는 적도 여지없이 살육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티무르 1대에 쌓아올린 티무르 왕조는 그 지배도 티무르의 개성에 크게 기대고 있었고, 티무르 생전에 확고한 지배체제가 준비되지 못했다. 그 때문에 티무르의 사후 그의 제국은 급속도로 동요하고 분열되어 갔다.

일화[편집]

구리 아미르 사당(“아미르의 묘”란 뜻)에 있던 티무르의 검은돌로 된 관 속에는 “내가 이 무덤에서 나올때, 가장 커다란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어 아무도 관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1941년 6월 19일 소련의 조사에 의해 처음으로 개봉되어 다리의 장애등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 일이 있은 후 3일 후 바르바로사 작전(독일에 의한 소련 침공)이 실행되어 이것이 소련에서 본 제2차 세계대전의 발단이었다. 후에 두려움을 느낀 소련에 의해 뚜껑이 납으로 용접되어, 이후 두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

티무르의 가족들[편집]

티무르의 누이[편집]

티무르의 아내들[편집]

  • 사라이 물크 하눔: 카잔 칸의 딸. 본디 후세인 베그의 처였으나, 후세인의 사후 티무르와 재혼함. 미란 샤와 한자다 베굼의 사이에서 태어난 할릴 술탄을 양육하였다.

티무르의 아들들[편집]

티무르의 딸[편집]

  • 아가 베기: 무사 타이치우트의 아들 무함마드 베그와 결혼하여 술탄 후세인을 낳았다.

티무르의 후손들[편집]

자한기르의 혈통[편집]

  • 무함마드 술탄 b. 자한기르 b. 티무르(어머니 한자다 베굼을 통해 모계로 칭기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음)
    • 무함마드 자한기르 b. 무함마드 술탄
      • (무함마드) 할릴 술탄 b. 무함마드 자한기르
    • 사디 와카스 b. 무함마드 술탄
  • 피르 무함마드 이븐 자한기르
    • 카이두 b. 피르 무함마드
    • 자한기르 b. 피르 무함마드

우마르 셰이흐의 혈통[편집]

  • 피르 무함마드 b. 우마르 셰이흐(어머니 마리카트 아가을 통해 모계로 칭기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음)
  • 루스탐 b. 우마르 셰이흐
  • 이스칸다르 b. 우마르 셰이흐(어머니 마리카트 아가을 통해 모계로 칭기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음)
  • 아흐마드 b. 우마르 셰이흐(어머니 마리카트 아가을 통해 모계로 칭기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음)
  • 바이카라 b. 우마르 셰이흐(어머니 마리카트 아가을 통해 모계로 칭기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음)

미란샤의 혈통[편집]

  • 아바 바크르 b. 미란샤
  • 우마르 b. 미란샤
  • 할릴 술탄 b. 미란샤(어머니 한자다 베굼을 통해 모계로 칭기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음)
  • 술탄 무함마드 b. 미란샤
  • 이칠 b. 미란샤

샤루흐의 혈통[편집]

아가 베기의 혈통[편집]

  • 술탄 후세인 b. 무함마드 베그: 티무르의 사후 계승전쟁에 뛰어들었다. 사마르칸드에서 할릴 술탄에게 패배한 뒤에 샤 루흐의 휘하로 도망쳤으나 샤 루흐는 후세인을 죽였다.

주석[편집]

  1. 티무르가 직접 그 이름을 ‘녹색 도시’라는 의미의 샤흐리 삽스로 바꾸었다. Pavel Lurje, “KEŠ,” Encyclopaedia Iranica, Online Edition, July 15, 2009, available at this.
  2. 르네 그루쎄.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1 10쇄판. 서울: 사계절. 577쪽. 978-89-7196-506-1. 
  3. 「티무르」,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4. 칭기즈 칸의 본명인 테무진Temüjin에도 "쇠"(鐵)을 의미하는 테무르가 포함되어 있다.
  5. B. F. Manz, The rise and rule of Tamerlane(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9), p.14.
  6. 이주엽, “16세기 중앙아시아 지배계층의 몽골제국 계승성 연구 -우즈벡,카자흐칸국과 무굴제국의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中央아시아硏究》 9(2004), p.90.
  7. 호리카와 토오루,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이평래 옮김(서울: 소나무, 2005), pp.238-9.
  8. 호리카와 토오루,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이평래 옮김(서울: 소나무, 2005), p.239.
  9. B. F. Manz, “Temür and the early Timurids to c. 1450,” The Cambridge History of Inner Asia: The Chinggisid age, N. Di Cosmo, A. J. Frank and P. B. Golden eds.(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2009), p.183.
  10. H. R. Roemer, “Tīmūr in Iran,” The Cambridge History of Iran, vol.6, P. Jackson, L. Lockhart, eds.(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p.44.
  11. H. R. Roemer, “Tīmūr in Iran,” The Cambridge History of Iran, vol.6, P. Jackson, L. Lockhart, eds.(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p.44. 케쉬 근교의 호자 일가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호리카와 토오루, “중앙아시아의 융성: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교양인을 위한 중앙아시아사》, 마노 에이지, 호리카와 토오루 편집, 현승수 옮김(서울: 책과함께, 2009), p.98.
  12. 호리카와 토오루, “중앙아시아의 융성: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교양인을 위한 중앙아시아사》, 마노 에이지, 호리카와 토오루 편집, 현승수 옮김(서울: 책과함께, 2009), p.98.
  13.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서울: 사계절, 1998), pp. 578-79.
  14.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서울: 사계절, 1998), p. 579.
  15. B. F. Manz, “Tīmūr Lang,” The Encyclopedia of Islam, 2nd ed, vol. 10, p. 511.
  16. K. Z. Ashrafyan, “Central Asia under Timur from 1370 to the early fifteenth century,” History of Civilizations of Central Asia, vol.4: The age of achievement A.D. 750 to the end of the fifteenth century, part.1, M.S. Asimov and C.E. Bosworth, eds.(Paris: UNESCO, 1998), p.326.
  17.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서울: 사계절, 1998), pp. 580-81.
  18.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서울: 사계절, 1998), p. 581.
  19. 호리카와 토오루, “중앙아시아의 융성: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교양인을 위한 중앙아시아사》, 마노 에이지, 호리카와 토오루 편집, 현승수 옮김(서울: 책과함께, 2009), p.99.
  20. 호리카와 토오루,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이평래 옮김(서울: 소나무, 2005), p.240.
  21.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서울: 사계절, 1998), p. 581-82.
  22.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서울: 사계절, 1998), pp. 582-83.
  23.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서울: 사계절, 1998), p. 583.
  24. 호리카와 토오루,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이평래 옮김(서울: 소나무, 2005), p.241.
  25. H. R. Roemer, “Tīmūr in Iran,” The Cambridge History of Iran, vol.6, P. Jackson, L. Lockhart, eds.(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p.46.
  26. 호리카와 토오루,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이평래 옮김(서울: 소나무, 2005), pp.241-42.
  27.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서울: 사계절, 1998), p. 584.
  28. K. Z. Ashrafyan, “Central Asia under Timur from 1370 to the early fifteenth century,” History of Civilizations of Central Asia, vol.4: The age of achievement A.D. 750 to the end of the fifteenth century, part.1, M.S. Asimov and C.E. Bosworth, eds.(Paris: UNESCO, 1998), p.328.
  29. 호리카와 토오루,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이평래 옮김(서울: 소나무, 2005), pp.242-43.
  30. 호리카와 토오루,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이평래 옮김(서울: 소나무, 2005), p.243.
  31. 호리카와 토오루, “중앙아시아의 융성: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교양인을 위한 중앙아시아사》, 마노 에이지, 호리카와 토오루 편집, 현승수 옮김(서울: 책과함께, 2009), pp.99-100.
  32. 호리카와 토오루,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이평래 옮김(서울: 소나무, 2005), p.244.
  33.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서울: 사계절, 1998), p. 592.
  34. 호리카와 토오루,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 《중앙유라시아의 역사》, 이평래 옮김(서울: 소나무, 2005), pp.244-45.
  35. 김호동, “前期 모굴汗國의 繼承紛爭을 통해 본 遊牧的 部族政治의 特徵,” 《동양사학연구》 33(1990), p.74.
  36.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서울: 사계절, 1998), pp. 594-95.
  37.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서울: 사계절, 1998), pp. 595-96.
  38.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서울: 사계절, 1998), p. 596.
  39.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서울: 사계절, 1998), pp. 612-13.
  40.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서울: 사계절, 1998), p. 613.
  41.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서울: 사계절, 1998), p. 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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