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차일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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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차일드가의 문장

로스차일드가(영어: Rothschild family)은 독일-유대계(German Jews) 혈통의 국제적 금융 재정 가문이다. 오스트리아와 영국 정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다.

조상들[편집]

로트실트 금융 가문의 계보도.

174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지역에서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가 태어난다. 마이어의 아버지 암셀 모세 바우어는 골동품상과 대금업자였다.[1] 가문의 국제적 위상이 올라가기 시작한 것은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때부터였다. 마이어의 아들들은 다음과 같다.

워털루 전투[편집]

로트실트 가문은 워털루 전투로 상당한 부를 쌓으며 발전을 했다. 로트실트 가문에서는 전쟁이 발발할때 산업 스파이를 보내어 프랑크푸르트-파리-런던--나폴리로 이어지는 정보망을 구축했다. 그들은 정부의 정보 즉 워털루 전투가 영국군이 이겼다는 정보보다 1일이나 앞선 날에 사람들을 향해 영국군이 졌다하며 소리쳐 거짓 정보를 알려주었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덜 손해보기 위해 영국 국채를 팔기 시작해 영국 국채가 이전의 5%밖에 안되는 상황 이였을때, 로트실트 가문은 그 즉시 모든 국채를 사들였고 그 다음날 영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프랑스군이 패배 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로트실트 가문은 20배나 되는 이득을 챙겼다.(또한 살로몬 마이어 폰 로트실트남북전쟁때 군수물자를 지원하면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 이야기는 소문일수도 있으며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루머라는 주장이 오히려 로트실트 가문이 퍼뜨린 루머라는 주장이 있다.

-이 이야기에 관한 보다 디테일한 정보는 '쑹훙빙' 저작인 화폐전쟁 1편에 소개되어 있으나 그 또한 오리지널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에 대한 근거로 일본의 반핵운동가인 히로세 다카시의 1986년 저작물인 [제 1권력(원제; 億万長者はハリウッドを殺す)]에 이은 국제금융사슬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자본가들에 관한 [붉은 방패 - 로스차일드의 수수께끼(赤い楯 - ロスチャイルドの謎)]가 이미 출간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음모론 서적들이 흔히 그런것과는 달리 비교적 억측이 덜한(이 의견은 칼 폴라니의 저서인 '거대한전환' 번역판 주석에도 언급되어 있음) 저자의 저작물들이 이미 오래전에 소개되어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에 관한 서방권 전문가로는 경제학자 니얼 퍼거슨(Niall Campbell Douglas Ferguson)이 있으며 그의 최근작인 '시빌라이제이션'을 비롯한 많은 저작물들이 국내에 번역출간되어 있으나 로스차일드 가문에 관한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세권의 책은 아직 번역출간되어 있지 않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연구했던 하버드의 교수 니얼 퍼거슨 같은 저명한 학자들은 다르게 말하고 있다. 원래 로스차일드는 나폴래옹의 대륙 봉쇄령이 내려진 사이 영국의 금을 프랑스로 밀수출하는 일을 해서 이득을 취했고,(프랑스로써도 영국의 금이 빠져나가면 이득이라 생각해서 막지 않은 모양) 나폴레옹 전쟁이 터진 이후로는 패밀리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금을 영국군의 군자금으로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이후 엘바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자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쟁이 장기전으로 갈 것이라 잘못 예상하였다. 그리고 금을 대량으로 매입하였는데, 워털루 전투로 인해 전쟁이 금방 끝나버리자 금값 폭락을 통해 손해를 크게 볼 위기에 처했던 것. 이 때 네이선은 이를 매꾸기 위해서 승부수를 띄웠고, 엄청난 자금을 들여 국채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정부 차입이 감소하고, 국채 가격이 오른다고 예상했던 것. 그리고 결국 채권 가격이 40% 상승한 고점에서 네이선은 채권을 매각했다. 로스차일드는 현재 가치로 6억 파운드 넘게 벌었다. 결국 음모 같은 것은 없었고, 예측 가능한 경제적 흐름을 절묘하게 이용하였을 뿐이다.

귀족 작위[편집]

1816년, 4형제는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1세에 의해 귀족 작위를 받았다. 네이선은 1818년에 작위를 받았다. 그들 모두 1822년 9월 29일 오스트리아 남작의 권리를 수여 받았다. 몇 명은 드 혹은 폰을 귀족의 증거로 인정했다. 1885년에 로트실트 은행 런던 지점의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 2세(1840–1915)는 귀족 직함을 수여받았다.

로트실트 은행 사업은 유럽의 산업화 동안 국제적 융자로 높이 발전했고 세계 전역을 걸쳐 철도사업을 후원할때 철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 계획을 지지하여 공장에 자금조달을 해주었다. 대다수의 사업은 직접적으로 로트실트 가문의 해상보험을 포함한 자본으로 이루어진다.(1824년)

시오니즘[편집]

로트실트 가문은 이스라엘의 후원자이다. 에드몽 자크 드 로쉴드 남작은 팔레스타인에 위치한 리소레치온의 첫 번째 이민 후원자이다. 1917년, 워터 로스차일드밸푸어 선언의 수신인이었고, 유대인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영국 정부로부터 약속받았다.

제임스 아먼드 드 로스차일드는 이스라엘에 많은 자금을 조달했다.

이스라엘의 지방법원건물은 도로시 드 로스차일드가 후원하였다.[2] 도로시 드 로스차일드가 새 지방법원 건물 건축을 후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려고 국무총리 피러스에게 썼던 편지가 국외 대통령 회의실에 전시되어 있다.

프랑스 지점[편집]

막내 아들 자크 메이어 드 로쉴드(1792–1868)는 파리에 지점을 세웠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그는 대다수 철도 건설과 채광 산업의 자금조달 역할을 했다. 자크의 아들 귀스타브 드 로쉴드알퐁스 자크 드 로쉴드는 은행 사업을 계속했고, 모은 돈을 프로이센 왕국1870년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점령한 땅의 반환을 요구하는데 사용하였다. 다음 파리의 로쉴드 가문 세대는 여전히 가문 사업에 집착했고 국제적 투자 은행의 거장이 되었다. 로트실트는 투자 뱅킹 합병 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획득 계약의 톰슨 금융 업계를 이끌었다. 미국에선 그들의 합병 뱅킹 리스트럭처링 그룹은 미국 항공과 델파이의 재정이 곤란할 것 같은 거래를 하였다. 로트실트는 2003년년에 영국 친척이 개인의 탄탄한 회사를 창설하기 위해 공적으로 소유한 프랑스의 로쉴드 뱅킹 하우스가 기인됐다는 사실로 매각한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미국EU의 공적인 상업 뱅킹 거장들로부터 경쟁의 맹습을 받았다.

두 번째 프랑스 지점은 너세니얼 드 로스차일드에 의해 창설되었다.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가문의 영국 지점의 소유주인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 의 4번째 아들이었다. 1850년에는 너세니얼 드 로스차일드가 파리로 옮겨왔고, 표면상 그의 삼촌과 자크 메이어 드 로쉴드와 함께 일했다. 그런데 1853년 너세니얼 드 로스차일드는 지롱드 주의 보르도 포도주의 생산 양조장인 샤토 무통 로쉴드를 획득했다. 너세니얼 드 로스차일드는 사유지를 개명했고, 샤토 무통 로쉴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상표중 하나가 되었다. 너세니얼의 삼촌 자크 메이어 드 로쉴드는 샤토 라피트 로쉴드 양조장을 획득했다.

파리 사업가들은 1982년프랑수아 미테랑의 사회주의적 정부가 그것을 Compagnie Européenne de Banque라고 개명했을때 죽음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다비드 드 로쉴드 남작이 39세에 오직 세 명의 직원과 자산의 100만 달러로 새로운 Rothschild & Cie Banque의 재건축과 창조를 결정했다. 오늘날 파리의 은행은 글로벌 사업에 상당수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해서 22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다.

오스트리아 지점[편집]

오스트리아 지점 로트실트 가문의 무덤

에선, 살로몬 마이어 폰 로트실트1820년대에 은행을 청설했고 가족은 존경받는 시민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로트실트 가문은 그들의 서비스 때문에 후에 오스트리아 황제에게서 귀족 작위를 받는다. 1929년 대공황이 일어나 루이스 폰 로트실트 남작과 오스트리아의 가장 큰 은행은 은행의 파산을 막기위해서 미수의 크리 디트 안시 탈트를 떠받쳤지만 제2차 세계대전동안 나치에게 그들의 은행을 내어주고 나라에서 도망쳤다. 그들의 로트실트 궁전들은 나치에 의해 압수되고 약탈당했다. 그들 중 몇명은 미국에 안식처를 찾았다. 1999년 오스트리아 정부는 나치에 의해 빼앗겼던 250개의 예술품과 전리품을 로트실트 가문에게 돌려주는 것에 승인했고 예술품과 전리품은 박물관에 보내졌다.

이탈리아 지점[편집]

1861년 이탈리아 통일로 마침내 로트실트 가문은 나폴리 은행사업을 종결했다.

현대 사업[편집]

2003년 7월에 런던과 파리의 은행들이 한 David René de Rothschild의 공동 의장 밑의 Concordia BV라는 마스터 소유 회사를 통해 통합되었을 때 새로운 로트실트 사업 조직의 상관이 재편성 되었다. 이 주장에는 Rothschild et Cie Banque가 로트실트 가문이 다른 어떤곳에서도 N M 로트실트와 런던에 있는 그의 아들을 포함한 AG 은행 통제를 연속적으로 잡고 있을 동안 프랑스와 유럽 대륙의 뱅킹 사업을 컨트롤 한다는 것이다.[3] 로트실트가 2005년에 연속적으로 가지고 있던 AG를 홍콩자딘 메서슨의 보조였던 자딘 스트레직에게 파는 확률은 20%였다. N M Rothschild & Sons는 사업의 대부분을 기업 인수 합병을 해주는 전문가로 일을 하였다. 2006년, 그는 전체적으로 104.9억 달러로 영국 인수합병에서는 2위가 되었다.[4] 2006년 그는 5.5억 파운드 자산 총계와 83.2만 파운드의 세금이익을 기록했다.[5]

자크의 또다른 자손인 에드몽 아돌프 드 로쉴드는 오늘날 세계의 15개국과 교류할 수 있는 제네바에 LCF 로트실트 연합을 창설했다. 연합의 Banque Privée Edmond de Rothschild S.A, La Compagnie Benjamin de Rothschild S.A를 포함한 수위의 사업은 비록 이 그룹이 본래 금융 그룹이지만 특별하게도 자산관리와 개인 뱅킹과 또한 양조 보험을 했고 (아르헨티나, 남아프리카보르도 양조장을 가지고)농장경영, 아름다운 호텔들과 요트 레이싱도 같이 했다. LCF 로트실트 그룹은 일반적으로 에드몽 남작의 아들인 벤야민 드 로트실트에 의해 통솔되었다.

메이어 암셀 로트실트의 중요한 자손들[편집]

유명한 문화 주석[편집]

로트실트 가문 이야기는 영화의 한장면 같다. 《로트실트의 집》이라는 제목의 1934년 할리우드영화는 George ArlissLoretta Young이 주역이고 메이어 암셀 로트실트의 생을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국가 사회주의자(나치) 선전 영화인 불변의 유대인이라는 영화와 1940년에 다른 독일 영화인 Erich Waschneck에 의해 만들어진 죽어라 로트실트(또한 Aktien auf Waterloo라고도 부른다)를 인용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로트실트》는 1818년에 패밀리 부흥역사로 만들어졌고 1971년 토니 상을 수상했다.

프랑스에선 로트실트가 여전히 전통적인 관례로 위험한 건강에 걱정했다. 가문은 또한 가문의 이름을 르네상스 궁전, 금과 돈의 엄청난 사용, Victorian horror vacui의 센스와 미술의 걸작들을 포함한 장식예술의 예술가인 매우 매혹적인 생활 스타일을 사는 le goût Rothschild에게 빌려주었고, Le goût Rothschild는 내국의 로버트 데닝, 비센트 가브리엘 Fourcade와 같은 디자이너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화폐전쟁》, 쏭훙빙
  2. "도로시 드 로스차일드,93,이스라엘의 후원자" (사망기사), 뉴욕 타임즈,1988년,12월 13일.2008년 6월 19일 정보 입수.
  3. Paris-Orléans
  4. League tables
  5. N M Rothschild & Sons의 매년 기록은 2006년 3월 31일을 끝으로 한계가 있었다.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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