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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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

나철(羅喆, 1863년[1] 12월 2일 ~ 1916년 8월 15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대종교의 창시자이고 한국독립운동가로, 본명은 나두영(羅斗永), 개명은 나인영(羅寅永)[2]이며 아호는 홍암(弘巖)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를 지냈으며, 1897년(광무11년) 2월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의 매국대신(賣國大臣)을 저격한 죄로 귀양살이를 하였고, 귀양이 끝나자 정계와 손을 끊고 민족의식의 집결을 위한 국조(國祖) 단군숭배 사상을 고취하며 수도(修道)에 전념하였다. 1916년 일본 천황과 국회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장서(長書)를 보내고 자결함으로써 순교(殉敎), 순국(殉國)하였다. 아버지는 유학 나용집(羅龍集), 어머니는 송씨(宋氏)이다.[3]

생애[편집]

전라남도 보성 출신[4] [5] 인 그는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고 1891년(고종 28)에 식년문과에 급제[6]하고 이어 1891년에 가주서에 제수되고, 1895년에 징세서장(徵稅署長)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귀향한 후 1904년에 강진의 오기호, 부안이기, 최전(崔顓) 등 호남 출신의 지식인들과 함께 비밀 결사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고, 을사조약 직전인 1905년 6월에는 오기호(吳基鎬), 이기(李沂), 홍필주(洪弼周) 등과 일본에 건너가 동양 평화를 위한 단식농성을 하는 등 일찍부터 민족주의적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이철, 강원상(康元相) 등을 포섭하여 오적암살단을 결성,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907년 자수하여 지도(智島)에 10년 유형을 선고 받았으나, 1년후 풀려났다.

그 후 나철은 민족 종교 운동에 주력해 1909년 1월 15일 한성부에서 대종교를 창시했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로는 일제의 박해를 피해 교단을 만주 쪽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인들이 독립 운동에 대거 뛰어들었다.

1916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한배검(단군)에게 제천의식을 올린 뒤 순명삼조(殉命三條, 한배님께 제천하고, 대종교를 위하고, 한배님을 위하고, 인류를 위해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저서에 대종교 경전인 《신리대전(神理大全》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맏아들 나정련, 둘째 아들 나정문도 대통령 표창을 받은 독립운동가이다.

오늘날 대종교에서는 음력 1월 15일을 중광절(重光節, 나철이 대종교를 창시한 날), 음력 8월 15일을 가경절(嘉慶節, 나철이 순교한 날)로 정하고 이를 기념한다.[3]

구국운동[편집]

구국운동(救國運動)의 일환책으로 1909년 오기호(吳基鎬)등 동지 10명과 함께 서울 재동(齋洞)에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셔 놓고 <단군교 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한 것이 단군교, 즉 대종교의 시작이다. 1년 뒤 대종교로 개칭하는 한편(신도수 2만여 명으로 증가),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하였는데 1914년에는 본사를 그곳으로 옮겨 포교영역을 만주 일대까지 넓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탄압을 노골화하였고 교단의 존폐위기에 봉착한 나철은 이듬해 1916년 8월 15일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에서 일제의 폭정을 통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2세 교주가 된 김교헌(金敎獻)은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和龍)으로 옮긴 뒤 홍범규칙(弘範規則)을 공포하는 한편,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발전시켰으며 1920년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다음해에 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김교헌은 통분 끝에 병으로 죽었다. 김교헌은 대종교를 제도적으로 정립하고 역사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신단실기』(神檀實記), 『신단민사』(神檀民史), 『단조사고』(檀祖事攷) 등을 저술하였다.

3세 교주가 된 윤세복(尹世復)은, 일제의 압력을 받은 길림성장(吉林省長) 장쭤상(張作相)에 의해 <대종교 포교금지령>이 내려지자 총본사를 발해의 옛 도읍터였던 동경성(東京城)으로 이전,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대종교서적간행회를 발족시켜 『삼일신고』, 『종지강연』 등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천전(天殿) 건립을 서두르던 중 1942년 11월 윤세복 외 20명의 간부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구성>이란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옥사하였다.[7]

가경절[편집]

1916년 음력 8월 14일, 상교(尙敎) 김두봉(金枓奉)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사당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문 앞에 써붙인 뒤 수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16일 새벽 이상스럽게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니, 나철은 자신이 죽음을 택한 이유를 밝힌 유서를 남기고 조식법(調息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나철 유언대로 청파호에 유해를 안장하였으며, 그 후 대종교에서는 나철이 운명한 날을 가경절(嘉慶節)이라 하여 4대절(四大節)의 하나로 기념하고 있다.

저서[편집]

함께 보기[편집]

주석[편집]

  1. 나두영(나철의 본명)의 문과방목에는 생년이 1859년으로 기재되어있다.
  2. 한국언론진흥재단, 황성신문(皇城新聞) - 1900년 05월 03일 (97호) ~ 05월 05일 (99호) / 廣告 : 前注書羅斗永名改以璌永辱知君子僉諒 / 1900년에 나두영이 나인영으로 개명했음을 알 수있으며, 다만 차이가 나는 것은 기사에서는 나인영을 羅'璌'永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3. 『대종교중광육십년사』, 대종교종경종사편수위원회, 대종교총본사(1971년)
  4. 나철의 출신지는 전남 보성이지만, 1891년 식년문과에 급제할 당시 그의 거주지는 낙안(樂安 :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이었고, 1900년 나인영으로 개명할 당시에는 전북 전주에 살았다.
  5. 한편, 그의 독립유공자 포상자 공적조서에는 본적이 전남 순천으로 기재되어있다. 공훈전자사료관, 포상자 공적조서
  6. 나두영의 문과방목,
  7. 《종교학대사전》, 대종교, 한국사전연구사(1998년)

참고 자료[편집]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 임
초대
제1대 대종교 도사교
1909년 1월 15일 - 1916년 8월 15일
후 임
김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