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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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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 생활 ===
=== 관료 생활 ===
[[영조]]의 즉위를 추진하다가 사형당한 노론 4대신 [[김창집]]의 4대손으로 태어났다. [[178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과 [[규장각]] 대교(待敎)를 지냈다. 그는 [[노론]]계열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788년]] 규장각의 대교를 지낼 당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당쟁]]에서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단호히 없앨 것을 정조에게 주장하였다. [[1792년]]에는 동지(冬至) 겸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직각(直閣)과 이조참의, 승지, 총융사, 양관([[홍문관]],[[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냈다.
[[영조]]의 즉위를 추진하다가 사형당한 노론 4대신 [[김창집]]의 4대손으로 태어났다. [[178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과 [[규장각]] 대교(待敎)를 지냈다. 그는 [[노론]]계열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788년]] 규장각의 대교를 지낼 당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당쟁]]에서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단호히 없앨 것을 정조에게 주장하였다. [[1792년]]에는 동지(冬至) 겸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규장각 직각과 이조참의, 승지, 총융사, 양관([[홍문관]],[[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냈다.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정조로부터 어린 순조의 보필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받은 규장각의 각신들 중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정조는 사망 직전 그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였으나 결혼은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1802년]]에는 딸이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자 [[보국숭록대부]]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어린 순조를 도와 국구(國舅)로서 30년간 순조를 보필하여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정조로부터 어린 순조의 보필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받은 규장각의 각신들 중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정조는 사망 직전 그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였으나 결혼은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1802년]]에는 딸이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자 [[보국숭록대부]]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어린 순조를 도와 국구(國舅)로서 30년간 순조를 보필하여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2011년 8월 27일 (토) 20:31 판

김조순
출생1765년
조선
사망1832년 (68)
조선 한성부
성별남자
국적조선
직업문신, 작가, 화가
종교유교 성리학
부모김이중
배우자청양부부인 청송심씨
자녀김유근, 김원근, 순원왕후, 김좌근
친척조카 김문근, 김수근, 김조근

김조순(金祖淳, 1765년~1832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가이다. 본관은 (신)안동(安東)이며, (字)는 사원(士源), (號)는 풍고(楓皐),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영의정을 지낸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현손이며 서흥부사(瑞興府使) 김이중(金履中)의 아들이다. 노론이었으나 시파에 속하였으며, 정조의 신임이 바탕이 되어 딸인 순원왕후순조의 왕비로 책봉되면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1]돈녕부사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사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생애

관료 생활

영조의 즉위를 추진하다가 사형당한 노론 4대신 김창집의 4대손으로 태어났다. 178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과 규장각 대교(待敎)를 지냈다. 그는 노론계열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788년 규장각의 대교를 지낼 당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당쟁에서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단호히 없앨 것을 정조에게 주장하였다. 1792년에는 동지(冬至) 겸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규장각 직각과 이조참의, 승지, 총융사, 양관(홍문관,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냈다.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정조로부터 어린 순조의 보필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받은 규장각의 각신들 중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정조는 사망 직전 그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였으나 결혼은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1802년에는 딸이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자 보국숭록대부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어린 순조를 도와 국구(國舅)로서 30년간 순조를 보필하여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1800년, 대왕대비정순왕후(貞純王后)에 의해 병조판서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에 비변사 제조가 되었으며 1801년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환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1년 뒤인 1802년에 다시금 훈련대장과 호위대장에 제수되었으며 역시 같은 해인 1802년에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에도 제수되었으나 두 차례의 사직 상소를 올려 윤허(允許)되었고 같은 해에 판의금부사에 제수되었으며 1805년 섭정이던 정순왕후가 사망하자 그는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섭정을 하게 되었다.

섭정이 되다

섭정에 오른 직후 노론 벽파의 지도자들을 정조의 유지를 저버린 역적으로 단죄하였고, 김관주와 자신의 친척이기도 했던 김달순을 사형에 처하고, 노론 벽파의 당수였던 김종수, 심환지 등 역시 선왕 정조의 치적을 파괴한 역적들로 지목하여 추탈시켰다.[2] 그 밖에 노론 벽파,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김씨 일문을 조정에서 일망 타진하고, 남인 계열 역시 숙청하였으며 새로 과거로 뽑아들인 노론 청명당 및 노론 시파 계열 인사들과 일부 소론, 규장각에서 눈여겨봤던 각신들을 대거 발탁하여 조정의 요직에 배치했다. 1811년에는 금위대장(禁衛大將)에 임명되었으나 세 차례나 사직상소를 올려 결국 윤허되었다.

1827년에는 관서 지방을 여행하다가 서하(西下) 지방의 열악한 민간 실정을 순조에게 보고하여 경외(京外)에 위치한 각 아문(衙門)들의 절미(折米)와 형정(刑政), 인사, 대동미 등의 폐단을 정리하게 하였다.

아래는 김조순이 환곡과 대동미의 폐단을 순조에게 보고한 내용 중 일부이다.

신이 이번 관서에 내려가 이미 백성들의 고통스러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으니, 다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도의 구환(舊還)이 경외(京外) 각 아문의 절미(折米)를 아울러 계산하면 6만 9천 3백여 석이 되는데, 그중 3만 9천여 석은 유망(流亡)한 호구에서 받아야 할 것이어서 지적해 받을 곳이 없으며, 2만 9천여 석은 현재 있는 호구에서 받을 것인데, 이른바 현재 남아 있는 호구라는 것은 바로 신미년(辛未年)과 임신년(壬申年)의 난리 후에 미처 도망하지 못한 고아와 과부를 억지로 현재 있는 호구로 기록한 자들이니, 원호(元戶)와 비교할 수가 전혀 없습니다. 만약 법대로 징수해 받아들인다면 인족(隣族) 역시 조만간 화가 옮겨 올 것을 알기 때문에 의구(疑懼)하여 흩어질 마음을 두고 있으며, 심지어 풍년이라는 말을 원하지 않기까지 합니다. 이제 아무 이로움이 없는 빈 장부(帳簿)를 가지고서 포흠낸 환곡을 징수할 것으로 여겨 고할 곳 없는 자들로 하여금 더욱 독촉을 받게 하여 안도(安堵)했던 자들이 도리어 도망해 흩어지게 된다면 이미 차마 하지 못하는 정사가 아니며, 또 안정시키는 방도에 어긋납니다. 이는 묘당이나 방백이 경솔하게 거론할 것이 아니니, 신의 뜻으로는 주상께서 탕감하라고 특명하시어 한 도(道)의 잔민(殘民)과 실호(實戶)가 모두 조가(朝家)에서 다친 사람을 돌보아 주듯이 하는 덕을 입을 수 있게 하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3]

1828년, 김조순의 아내인 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이 사망하자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를 보내 직접 조문하게 하였으나 김조순이 “처음에는 놀라고 송구스러워하다가 이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으나 이는 국조(國朝) 수백 년 내에는 아직까지 듣고 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라며 사양하여 조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32년,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두 달 뒤인 1832년 음력 4월 3일에 사망하였다. 사후에는 충문(忠文)이라는 시호추증되었으며 1년 뒤인 1833년 음력 4월에는 예조판서조만영(趙萬永)의 건의로 종묘(宗廟)의 정조대왕(正祖大王)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4] 사후 증직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춘추관성균관관상감사에 증직되었다.

그 뒤에도 경기도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과 이천의 현암서원(玄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생전에는 문장력이 뛰어나 초계문신(抄啓文臣)을 역임하였다. 그외에도 죽화(竹畵)를 잘 그렸던 것으로 전해지며 문집으로는 16권 8책으로 구성된 《풍고집》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에 있다.

가계

  • (10대조)평양서윤 증이판 김번(金璠)...조선8대명당 남양주 덕소 석실(안동김씨분산)
  • (9대조) 신천군수 증좌찬성 김생해(金生海)...성종의 아들 경명군 이침의 사위
  • (8대조) 돈녕부도정 증영상 김극효(金克孝)...좌의정 임당 정유길의 사위
  • (7대조) 좌의정 증영상 청음 김상헌(金尙憲)...병자호란때 척화신(가노라삼각산아 다시보자한강수야...)
  • (6대조) 동지중추부사 증영상 김광찬(金光燦)
  • (5대조) 영의정 문곡 김수항(金壽恒)
  • (고조부) 영의정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숙종 경종때의 노론4대신
  • (증조부) 우부승지 증 의정부좌찬성 충민공 김제겸(金濟謙)
  • (조부) 증 의정부좌찬성 김달행(金達行)
  • (아버지) 서흥부사(瑞興府使) 증 영의정 김이중(金履中)
  • (아내) 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 청송심씨(淸松沈氏)
    • (장남)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 김유근(金逌根)
    • (차남)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김원근(金元根)
    • (장녀)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
    • (삼남)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 김좌근(金左根)
    • (차녀) 김씨 - 판관 남구순(南久淳)에게 출가
      • 이조판서 문정공(文貞公) 남병철(南秉哲)
    • (삼녀) 김씨 - 한성부윤 이겸재(李謙在)에게 출가
    • (사녀) 김씨 - 이긍우(李肯愚)에게 출가
    • (오녀) 김씨 - 이병익(李炳益)에게 출가
  • (종조부) 증영의정 김성행(金省行)[5]
  • (종조부) 남원부사 김탄행(金坦行)[6]

같이 보기

주석

  1. 글로벌세계대백과》, 〈양반정치의 파탄〉, 김조순.
  2. 김종수는 말년에 정조의 뜻을 알고 강경론에서 한발 후퇴한 반면, 심환지는 끝까지 노론 벽파의 당론을 고수했다.
  3. 《조선왕조실록 순조대왕실록》27권, 24년(1824 갑신 / 청 도광(道光) 4년) 9월 7일(병신) 1번째 기사.
  4. 《조선왕조실록 순조대왕실록》33권, 33년(1833 계사 / 청 도광(道光) 13년) 4월 12일(임자) 2번째 기사.
  5. 철종국구 김문근의 증조부
  6. 헌종국구 김조근의 증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