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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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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녹수
張綠水
조선 연산군의 후궁
이름
장녹수(張綠水)
작호 숙용(淑容)
신상정보
출생일 1470년경
사망일 1506년 9월 2일(1506-09-02)
가문 흥덕 장씨
부친 장한필
모친 미상
배우자 연산군
자녀 1녀
영수

숙용 장씨(淑容 張氏, 1470년경 ~ 1506년 음력 9월 2일)는 조선 연산군후궁으로, 본명은 장녹수(張綠水)이다. 자녀로는 연산군과의 사이에 딸 영수(寧壽)가 있다.[1]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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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녹수의 아버지충청도 문의 현령(文義縣令)을 지낸 장한필이고 어머니는 천민 출신의 이었다. 이 때문에 녹수는 성종의 종제인 제안대군의 노비로 살았다.[2] 제안대군의 가노(家奴)와 결혼해 아들을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 기생이 되었다.[3] 얼굴은 보통을 넘지 못했으나 매우 동안(童顔)이었고, 특히 노래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4]

연산군은 이를 듣고 녹수를 입궐시켜 숙원(淑媛)에 봉하고 많은 재물을 집으로 보내주고 노비와 전답, 가옥을 내렸다.[5] 또한 그녀의 청으로 장녹수의 주인이었던 제안대군의 장인 김수말에게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6] 장녹수는 연산군을 젖먹이 다루듯 하였지만, 연산군은 그녀를 무척 총애하여 모든 상벌이 장녹수의 영향 아래 이루어졌다.[7] 1503년 연산군은 장녹수를 숙용에 봉했다.[8]

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형부 김효손(金孝孫)에게 함경도 전향 별감(傳香別監) 등의 벼슬을 주게 하였다.[9] 장녹수가 궁 안에 살고 있는데도 그녀의 집을 새로 짓기 위해 민가를 헐게 하였으며,[10] 동지중추부사 이병정(李秉正)은 장녹수의 집 하인에게 크게 모욕을 당했지만 오히려 사재를 털어 뇌물을 바치고서야 화를 피할 수 있었다.[11] 1505년 12월에는 장녹수의 치마를 밟았다는 이유로 하급 기생인 운평(運平)에 속하는 옥지화(玉池花)를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취홍원(聚紅院), 뇌영원(蕾英院)에 돌려 보이고, 연방원(聯芳院)에 효시(梟示)하기도 하였다.[12]

1506년 1월에는 내수사의 여종이었던 언니 장복수(張福壽)와 조카들을 면천해 양인(良人)의 신분으로 올렸다.[13] 그러나, 장녹수의 영화는 같은 해 9월 2일 중종반정으로 그 빛을 잃고 만다.

장녹수의 최후는 비참했다. 중종반정이 성공하고 연산군이 폐위된 후, 반정군들에게 붙잡혀 군기시 앞에서 참형(斬刑)을 당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참수당한 그의 시체에 돌을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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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녹수가 등장하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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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녹수는 수많은 문학 작품과 드라마·영화 등에서 그 이야기를 다루었다.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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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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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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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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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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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산군일기》 47권, 연산 8년(1502년) 12월 8일 1번째 기사
  2. 《연산군일기》 47권, 연산 8년(1502년) 11월 25일 2번째 기사 중 "金孝孫 張綠水姊夫, 綠水 齊安大君家婢也." (김효손은 장녹수의 형부이고, 녹수는 제안대군의 가비였다.)
  3. 《연산군일기》 47권, 연산 8년(1502년) 11월 25일 2번째 기사 중 "爲大君家奴妻 生一子. 後學歌舞爲娼." (대군의 가노의 처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 뒤에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가 되었다.)
  4. 《연산군일기》 47권, 연산 8년(1502년) 11월 25일 2번째 기사 중 "善歌不動脣齒 其聲淸亮可聽. 年三十餘 貌如二八兒."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다.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
    "容色不踰中人, 而陰巧妖媚 莫有比者." (얼굴은 보통을 넘지 못했으나,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었다.)
  5. 《연산군일기》 47권, 연산 8년(1502년) 11월 25일 2번째 기사 중 "王聞而悅之 遂納焉. 自是 寵愛日隆 所言皆從, 封淑媛" (왕이 듣고 기뻐하여 궁중으로 맞아들였다. 이로부터 총애함이 날로 높아져 말하는 것은 모두 따랐고, 숙원으로 봉하였다.)
  6. 《연산군일기》 49권, 연산 9년(1503년) 4월 3일 6번째 기사
  7. 《연산군일기》 47권, 연산 8년(1502년) 11월 25일 2번째 기사 중 " 操弄王如嬰兒, 戲辱王如奴隷. 王雖盛怒 見綠水則必喜笑, 賞刑皆在其口."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젖먹이 다루듯 하고, 왕을 희롱하기를 마치 노예 다루듯 하였다. 왕이 비록 몹시 화가 났더라도 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상주고 벌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렸다.)
  8. 《연산군일기》 51권, 연산 9년(1503년) 12월 24일 1번째 기사
  9. 《연산군일기》 51권, 연산 9년(1503년) 11월 13일 2번째 기사
  10.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1504년) 3월 8일 3번째 기사
  11. 《연산군일기》 55권, 연산 10년(1504년) 8월 2일 2번째 기사
  12. 《연산군일기》 60권, 연산 11년(1505년) 12월 23일 3번째 기사
  13. 《연산군일기》 61권, 연산 12년(1506년) 1월 14일 5번째 기사 중 "傳曰: 淑容兄先內需司婢福壽及子女爲良." (전교하기를 "숙용(淑容)의 언니, 전 내수사 여종 복수 및 그 자녀들을 양인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