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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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 시게루

호리 시게루(일본어: 保利 茂, 1901년 12월 20일 ~ 1979년 3월 4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내각관방장관, 일본 중의원 의장, 농림대신, 농림수산대신 등을 지냈다.

약력[편집]

사가현 출신으로, 주오 대학 경제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호치 신문 (報知新聞), 도쿄 니치니치신문 (지금의 마이니치 신문) 에 들어가 신문 기자로 활동하였다. 그 후 농림수산대신을 여러 번 지낸 야마자키 다쓰노스케 (山崎達之輔)의 비서가 되어, 농림 관계 회사에서 일한 뒤, 1944년 12월 고향인 사가 현에서 중의원 보궐 선거에 입후보 해 당선되었다.

전후 진보당, 민주당에 소속되었으나, 1950년 민주당이 분열되자 민주당 연립파에 속해, 요시다 시게루민주자유당에 합류해 자유당을 결성하였다. 이후 요시다 시게루에게 중용되어 내각관방장관, 노동대신, 농림대신을 지냈다.

1955년 보수 합동으로 만들어진 자유민주당에 들어가, 이케다 하야토 내각에서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이 되었지만, 1963년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하였다.

중의원 의원에 복귀한 후에는 사토 에이사쿠 정권에서 다나카 가쿠에이, 후쿠다 다케오와 대등한 세 기둥으로서, 내각관방장관, 자유민주당 간사장을 맡았다. 사토 에이사쿠 이후의 후계 총재 선거에서는 사토의 뜻대로 후쿠다를 지지했으나, 다나카 가쿠에이가 사토 파벌의 다수파를 거느리고 다나카 파벌을 결성하였다. 호리 시게루는 사토 파벌 내의 비 다나카 지지 의원을 규합해 호리 그룹을 결성하였고, 총재 선거 후 후쿠다 파벌로 합류하였다.

가쿠후쿠 조정 (角福調整)으로 후쿠다 다케오가 대장대신 직에서 물러나면서, 스스로 책임을 지고 행정관리청 장관에서 물러났다. 1974년 다나카 금맥 문제로 다나카 가쿠에이가 퇴진하게 되었을 때, 당시 자유민주당 부총재였던 시나 에쓰사부로와 짜고 후계 총재 조정에 관여해, 미키 다케오를 총재로 지명한 시나 재정을 연출하였다.

그러나, 록히드 사건이 발각된 1976년 미키 다케오 내각 당시, 미키 다케오의 퇴진을 기획하고, 반주류파 연합당거당 체제 협의회 (거당협, 挙党協)의 종합 정리역으로서 후쿠다 다케오·오히라 마사요시 밀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1976년 12월 24일부터 1979년 2월 1일까지는 일본 중의원 의장을 지냈다.

1979년 도쿄도의 병원에서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아들은 문부대신, 자치대신을 지낸 중의원 의원 호리 고스케이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