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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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유란(馮友蘭, 1894년~1990년)은 현대 중국철학자이다. 호는 지생(芝生), 허난 성(河南省) 탕허 현(唐河縣) 사람이다.

1915년 베이징 대학에 들어갔으며, 1919년 컬럼비아 대학에 유학, 베르그송, 듀이, 러셀에 경도(傾倒)하면서 중국문화의 독자성을 추구하였다. 귀국 후 중저우 대학(中州大學), 광둥 대학(廣東大學), 옌징 대학(燕京大學), 칭화 대학(淸華大學), 국립 서남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 등의 교수를 역임, 중국철학사의 강좌를 담당하고 1934년 명저 《중국철학사(中國哲學史)》를 간행하였다. 이것은 빈델반트의 방법을 적용하여 고대 이래의 중국철학사의 체계화에 성공한 최초의 저술이다. 1939년 발표한 《신이학(新理學)》에서는 송학(宋學)에 새로운 해석을 하여 독자적인 관념론 철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인간과 자연의 본질을 봄에 있어서 항상 중국 고전철학의 인성설(人性說), 특히 송학에서 근거를 구했다. 펑유란이 학문적 성취를 본격적으로 이루기 시작한 것은 칭화 대학에 초빙된 뒤이다. 당시 중국 대학에서는 신문화운동 이래로 중국사상이 무너지는 풍조가 휩쓸고 있었지만 그는 동서철학을 종합하면서 중국철학의 주체성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성장과 교육[편집]

그는 1895년 12월 4일 중국 허난성 탕허현 치이진의 비교적 부유한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지방의 명문가였고, 아버지는 진사 합격자였으며, 어머니는 고전에 조예가 있는 학자의 집안에서 자라났다.[1] 그의 여동생은 펑유전으로 중국의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펑유란은 상하이(上海)에 있던 대학이자 대학예비과정을 제공하던 중국공학(中國公學)에서 1912년에서 1915년까지 철학을 공부하고, 1915년에서 1918년까지 베이징 대학(北京大學) 철학문(哲學門)에서 중국철학과 함께 서양철학논리학을 공부하였다. 1919년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자배관장학금을 받아 수학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그의 사상과 진로에 많은 영향을 끼친 철학자들을 만났는데, 그 중에는 그의 지도교수가 된 실용주의자 존 듀이신실재론을 그에게 가르쳐준 윌리엄 몬태규도 있었다. 1923년 "인생 이상에 대한 비교 연구(A Comparative Study on Life Ideals)"라는 제목의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그는 귀국하여 1923년 중저우 대학, 1925년 광둥 대학을 거쳐 북상하여 1926년에 옌징 대학, 1928년에 국립 칭화 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그 뒤로 국립 서남연합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루쉰이나 천두슈, 쑨중산 등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적 사상이 있었고 량치차오를 한때 논박하기도 했던 펑유란은 뤄자룬과 천인커의 도움으로 국립 칭화 대학에 자리를 얻게 된 후로는 좋은 연구 조건에서 칭화 대학 학자로서의 훈육을 받으면서 또한 자신의 기질을 변화시키면서 유가 철학자로서의 풍모를 갖춰가기 시작하였다. 펑유란은 1934년부터 1937년까지 그리고 다시 1937년부터 전쟁 기간 칭화 대학 철학과 학과장과 문학원 원장, 서남연합대학 문학원 원장을 맡았다. 1934년 그는 칭화 대학에서 가르칠 때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두 권짜리 '중국철학사'를 출간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당시 서양철학자들에게 친숙한 관점에서 중국 철학을 소개하고 비평했으며,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신유학[편집]

그는 1934년 프라하에서 열린 학회 참석 뒤 다시 소련의 학회에 건너가 잠깐 머무는 동안 현지의 사회 변혁과 문화적 동요를 지켜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중국에 돌아간 뒤 연 두 차례의 연설 석상에서 스탈린주의를 찬양한 듯한 연설로 장제스 정부에 의해 주목을 받고 연행되어 잠시동안 구금되기도 했으나 곧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과 정부에 대한 강렬한 후원자가 되었다. 중일 전쟁 기간에 그는 유교적 가치를 새롭게 하는 신생활 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몇 편 발표하였다. 신생활 운동은 장제스가 전란에 맞서면서 국가의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 폈던 운동으로 그는 중국의 유교 전통에 관심을 가졌었다. 펑유란은 이에 호응하였고, 쿵샹시의 후원을 받은 학술대회에서 1등을 하여 1만 위안의 거금을 받았고, 중국 국민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전국대표로 선출되었다.[2] 1939년 그는 신이학(新理學)을 발표했는데, 이학은 20세기 신유학의 한 분파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 책에서 그는 '이(理)'와 '도(道)' 같은 철학적 개념을 송학과 도교로부터 가져와서 분석하고 그 함의를 서양철학의 전통에 입각하여 발전시켜 신실재론적 신유학 형이상학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또한 동서양 철학을 하나의 틀로 융합해 도덕의 본질을 설명하고 인간의 도덕적 발전의 구조를 풀어냈다.

전쟁과 그 이후[편집]

제2차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칭화 대학, 베이징 대학 그리고 톈진의 난카이 대학의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학교를 옮겨서 창사에서 임시대학을 세웠다. 그리고 이후 쿤밍으로 옮겨가 시난연합대학을 세웠다. 1946년 대학을 따라 베이징에 돌아온 뒤 펑유란은 이 해 가을 미국으로 다시 가서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방문교수로 머물렀다. 그는 1948년 가을까지 2년 간 펜실베니아에 머무는 동안 공산주의자들이 대륙을 장악할 것이 확실하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의 친구들이 만류하였지만 그는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1948년 12월부터 1949년 5월까지는 칭화 대학 총장 대리로 있었다. 그는 1949년 국공 내전에서 패한 장제스가 대만으로 떠나면서 함께 가자는 요청을 받았으나 중국 대륙에 남았고, 1952년부터는 베이징 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되었다. 그는 마오쩌둥에게 "과거 봉건 철학을 강의하면서 국민당을 도왔지만, 사상을 개조해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해서 5년 안에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입장에서 중국철학사를 다시 쓰겠다"는 서신을 보내 농장 노동과 자아 비판을 거쳐 베이징 대학 철학과로 옮겨 교수로 있을 수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사상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나 그는 정치적인 상황이 그가 바라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알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 중반과 이후까지 그의 철학적 방법론은 정부 관계자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 그리고 인민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그는 민국 시기에 저술했던 저작들을 부정하고 그 이후의 저술들도 문화대혁명의 이상에 맞추어 수정을 하라는 강요를 받으면서 온갖 모욕을 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 대륙을 떠나지 않았고, 긴 고난의 시간을 참아내고 비로소 사상 자유가 생기기 시작할 때, 조금의 자유를 얻어 집필을 계속 할 수 있었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사상을 개조한 후 1952년 가을부터 사망할 때까지 베이징 대학에서 줄곧 교수로 있었으며 85세부터 시작하여 95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몇 달 전까지는 7권으로 이루어진 '중국철학사 신편'을 써냈다. 펑유란은 1990년 11월 26일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저작[편집]

  • 중국철학사, 영어판, 1948년 (1985년 중국어 번역본 출간)
  • 중국철학사 신편, 1990년

참고 문헌[편집]

각주[편집]

  1. 황희경, 중국만큼 큰 철학자, 펑유란을 아십니까?, 프레시안, 2012년 1월 20일
  2. 이동훈, 중국 특사는 왜 박근혜 만나 펑유란을 말했나?, 주간조선, 2013년 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