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둥쑨
장둥쑨 張東蓀 | |
|---|---|
| 로마자 표기 | Zhang Dongsun |
| 출생 | 1886년 12월 9일 청나라 저장성 항저우시 |
| 사망 | 1973년 6월 2일 중국 베이징시 창핑구 |
| 성별 | 남성 |
| 국적 | 중국 |
| 경력 | 연구계 《시사신보》 주필, 칭화 대학교 교수, 칭화 대학교 《문철월간》 편집인, 옌징 대학교 교수 |
| 직업 | 정치인, 철학자, 평론가, 언론인, 사상가, 윤리학자, 교육자, 사상문화학자, 사회철학자,지식사회학자, 인식론 학자, 사회문화학자 |
| 소속 | 중국 입헌파 연구계, 중국국가사회당, 중국민주사회당, 중국민주동맹 |
장둥쑨(장동손, 張東蓀, 1886년 12월 9일 ~ 1973년 6월 2일)은 중국의 정치인, 철학자, 평론가, 언론인, 사상가, 윤리학자, 교육자, 사상문화학자, 사회철학자, 지식사회학자, 인식론 학자, 사회문화학자이다. 중국 입헌파 연구계, 중국국가사회당, 중국민주사회당, 중국민주동맹의 지도자였으며, 개혁 사상가 량치차오의 계파 학자로도 알려졌다. 《시사신보(時事新報)》 주필, 칭화 대학교의 논리학, 철학총론, 인식론, 윤리학, 서양철학, 사회철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생애와 활동
[편집]1905년~1911년, 청말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도쿄 제국대학 철학과 수료, 사립 철학관 졸업 후 1912년 1월 쑨원의 중화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13년 량치차오 진보당 톈진 《용언(庸言)》 주필, 1917년 상하이 연구계 기관지 《시사신보(時事新報)》 주필, 1918년 《시사신보》 부간(副刊) 《학등(學燈)》 주필, 1919년 상하이 연구계 《해방과 개조(解放與改造)》 주필, 1920년 상하이 · 베이징 연구계 《개조(改造)》 주필, 1920년 상하이 개신교 《흥화(興華)》 객원 주필 (정론). 1920년 박은식과 이광수가 주필을 맡아 상하이에서 출간한 《신한청년(新韓靑年)》 창간호 중국어판에 축사를 기고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같은 해, 상하이에서 공산주의 소조를 설치한 베이징 대학교의 천두슈와 중국 사회주의에 관한 논전에 나서고 중국 공산당의 레닌주의 혁명에 반대하였다. 1920년 량치차오의 강학사(講學社)로 영국 철학자이자 길드 사회주의자였던 버트런드 러셀을 중국 각 지역의 강연자로 유치하였다. 1920년대 이후 1940년대까지 상하이 중국 공학, 상하이 자치 학원, 베이징 칭화 대학교, 옌징 대학교에서 철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23년에는 과학과 현학의 논전에 철학파로 나섰고, 1930년에 『도덕 철학』, 1932년에는 자유주의 격률파 인문학 문철 연구 단체 신월사(新月社)로 『현대 윤리학』을 내놓았으며, 1931년 중국국가사회당 《재생(再生)》 창간 발기인을 역임하였다. 칭화 대학교의 량치차오가 이사장을 지낸 입헌파 연구계 상지학회(尙志學會) 주관의 《철학평론(哲學評論)》 창간 발기인 겸 편집 주간, 장쥔마이와 함께 학회 총서 주간을 역임하였다. 칭화 대학교 문철월간사 《문철월간(文哲月刊)》 발간인, 편집인(1935~1937), 옌징 대학교 《옌징학보(燕京學報)》 편집위원(1937~1941)을 지냈다. 1946년 말 제2차 국공 전쟁을 개시한 장제스에게 반대하였고, 1948년 이후에는 중국민주동맹 중앙상임위원이자, 칭화 대학교의 야권의 학계 · 정치권의 유력한 지도자로서, 중화인민공화국의 베이징 정부에 참여하여 중앙인민정부 위원,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위원, 칭화 대학교 정치 총장직 등을 겸하였는데, 소비에트 연방과 중국 공산당의 한반도 공산화 정책에 반대하여, 1951년 이후에는 공적 활동이 전해지지 않는다.
철학과 사상
[편집]중국 사회주의(socialism) 논전 양상에서 장쥔마이와 함께 과학적 사회주의에 반대하였고, 과학과 형이상학 논전에서는 천두슈, 후스 등의 베이징 대학교와 대립하였다. 칭화 대학교에서 ‘인생관’ 확립에 나서고, 논리학 · 인식론 · 윤리학 · 서양철학, 사회철학 등을 칭화 대학교에서 지도하였다. 다원적 인식론 등을 작업한 후에는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의 이론을 융합하여 사회철학 기반 위에서 중국 사상 문명 전반을 지식사회학적으로 탐구하여 중국학 연구자로도 명성이 있다. 중국내 마르크스-레닌주의 세력과 경쟁하기 위해 서양의 현대 문명 담론을 수용하고 이성론적이고 기술론적인 역사 해석(intellectualistic and technical interpretation of history)을 주장하였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에게 반대 입장을 취하고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기 중국 민주동맹에서 제3세력으로서 칭화 대학교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주력하였다. 중국의 사회주의 추세 하에서 자유와 민주 사상 형태를 옹호하고, 자유주의 체제에도 '계획(plan)'이 있듯이 사회주의 체제에도 '시장(market)'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주요 이력
[편집]- 상하이 중국 공학 (량치차오 연구계) 교장 (1921), 철학 교수 (1921~1925)
- 상하이 자치 학원 (량치차오 연구계) 철학 교수 (1924~1926)
- 베이징 칭화 대학교에 <과학과 철학> (과학과 인생관 논전) 강의 개설 (1925)
- 베이징 칭화 대학교 철학과 창립에 진웨린, 장쥔마이 등과 함께 참여 (1926)
- 베이징 칭화 대학교 철학과 선임 교수 (1926~1951)
- 상하이 광화 대학교 철학 교수 겸 문학원장 겸임 (1927 출강, 1929~1930 문학원장)
- 베이핑 옌징 대학교 철학과 교수 겸임 (1930~1951), 철학과장 (1948)
- 광저우 학해서원 원장 (1934~1935)
- 베이핑 칭화 대학교 철학과장 겸 문학원장 특별 대행 (1935~1937, 대학의 학문적 기반 재확립, 펑유란 사무 대리 및 학문적 재기 지원)
- 베이핑 칭화 대학교 교수 (잔류), 옌징 대학교 교수 (잔류), 중국 대학교 강의 (1937~1945)
- 베이징 칭화 대학교 정치 총장 (중국민주동맹 중앙 상임위원, 1950~1951)
정계 이력
[편집]- 중화민국 임시정부 총통부 비서 (내무부)
- 중화민국 북양정부 연구계 (량치차오계)
- 중화민국 중국국가사회당 (1931)
- 중화민국 국민정부 행정원 참사, 국방참의회 참정원
- 중화민국 중국민주정단동맹, 중국민주동맹 중앙상임위원
- 중화민국 충칭정치협상회의 위원 (중국국가사회당)
- 중화민국 중국민주사회당 (1946)
- 중화민국 중국민주동맹 비서장, 중국민주동맹 화북지구 (베이핑시) 서기, 주임 위원 (1948)
- 중화인민공화국 중국민주동맹 중앙상임위원
- 중화인민공화국 중국민주동맹 중앙상임위원, 중앙인민정부 위원, 중앙인민정부 문화교육위 위원 (1949~1951)
수감 이력 (태평양전쟁 기간)
[편집]대표 저작
[편집]활동 중단
[편집]중국 공산당이 중국 인민 지원군을 1950년 10월 한국 전쟁의 전장에 보낸 후, 반대 인사로 조사를 받던 중에 1952년 상반기 칭화대 출신 정치인들의 개입으로 인민 재판을 받지 않았으나 외부에서 사상 비판을 받았고, 정치적 연금이 되어 모든 활동을 중단하였다. 1951년, 《칭화주간(淸華週刊)》의 편집장 출신으로 중국 공산당의 항일 운동에 참여한 문학도 출신의 장난샹(蔣南翔)이 향후 동 대학 후임 교장을 맡는 조건으로, 같은 해 중화인민공화국 내의 모든 공적 활동을 중단하고 은퇴하였다.
인물 평가
[편집]학통적으로 량치차오의 정통적 계승자 중 하나로서, 그의 동반자 장쥔마이와 함께 동서양 철학 연구자 및 중국의 입헌파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철학 사상 계통 중의 일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지적인 관심, 문화 사상적 지향과도 맥을 같이 하였다. 량치차오의 연구계 기관지 《시사신보(時事新報)》 주필 직에서 1920년에 축사를 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성립을 공식 지지하였고, 1948년에는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한반도 민족의 평화적 통일을 지지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1948년 이후로, 중국 민주동맹의 고위 정치인으로서, 칭화 대학교의 사회주의화를 지도하였다. 중국 공산당이 한국 전쟁에서 중국 인민 지원군을 파병한 것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새로운 출발에 있어서 잘못된 행위라고 판단한 점이 학문적으로도 긍정적으로 회고된다. 중국 베이징의 공산주의 정부 성립에 연구계 출신의 민주 계파로서 참여한 중국 정치인으로서, 한국 전쟁 시기까지 칭화 대학교의 학문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남았다는 점에서 오늘날 큰 의미를 지닌다.
사상 비판
[편집]1951년~1952년,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마인추, 정신, 젠보짠 등이 정치적인 편향적 관점에서 장둥쑨의 철학과 사상에 대해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