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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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契丹)은 5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족이라 하지만,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거란 당시에는 *깃단의 이름으로 역사에 나온 것이 이르기로는 5세기초까지 이르기도 하지만, 유목민의 특성상 이들이 발해를 멸망케 한 그 깃단인지는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다만 나라이름과 관련하여 현중어로는 치딴(Qìdān)이며, 그들이 역사에 나타났을 무렵의 한자중고음으로는 *낏단(kitdan) 비슷하였을 것으로 여겨짐. 참고로 보수적인 남방의 한자음들이 이를 뒷바쳐주고 있다. 예, 월남 키엩단(Khiết Đan), 민남 케딴(khè tan) 등등이며 일본에서도 깃딴(きったん)또는 기따이(キタイ)로 읽는다. 하지만 나라이름인 낏단은 원래 스뀌티아(skythia)에서 파생된 것으로 유럽의 비교언어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 말이 다시 현위구르지역에 있던 월지(月氏, 중고한자음 *ngwet-si; 월남 Nguyệt Chi; 민남 goeh-sī; 일본 げっし: 이들은 인구어학에서 말하는 인도유럽계의 토하라말을 인도의 브라흐미문자에서 파생된 문자와 함께 남겼음)로 아마도 *궤티 또는 퀫띠 등등으로 불렸다가 다시 이웃의 아시아계 유목민(거란)의 이름으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나라이름의 분포가 보여주듯이 거란의 민족구성을 단순히 몽골 및 퉁구스계라고 단정짓는 것은 문제를 너무 단순화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이들이 북중국과 서만주에서는 기단/깃딴 등으로 불렸지만, 서쪽의 투르크스탄(위구르포함)지역에서는 한편 쿠사 또는 쿠차라는 月氏의 다른 이름으로 여전히 인도유럽계의 무리들이 명맥을 유지했다. 나중에 이들은 아프간과 인도를 점령하는 무갈조이전의 쿠샨조라고 보고 있다. 다시 동쪽의 깃단족들도 이후 만주의 주르천(女眞)에 의해 망하고 서로 쫓겨나 까라끼타이 또는 하라끼타이[黑遼, 또는 서요]를 원래의 月氏지역에 우연히 다시 자리를 잡는다.

이들이 이른바 알타이족(아직 순수비교언어학에서는 하나의 어족으로 인정이 않됨)의 주구성원이라는 투르크계와도 전혀 다르다는 것은 시사점이 많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 고구려에는 복속되어 있었거나 또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르칸드(당시 월지지역)의 아프라시압 궁전 터에서 보여지는 고구려사신의 모습도 퀫티 또는 깃단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들과의 관계를 적쟎게 혼동을 줄 수 있다.

고구려멸망이후의 깃단은 이미 고구려시절의 그 깃단과는 다를 수 있는 게, 907년 야율아보기의 깃단의 통일후 이전의 깃단과는 전혀 달리 漢化(아마도 실제로는 구성원 자체의 변화일 수도 있음)한 요나라를 세웠고 아울러 발해까지 멸망시켰다. 요나라는 993년부터 1019년까지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패퇴했다.

이들은 한자를 본따서 거란문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요나라가 멸망하기에 앞서서 벌써 한족이 되었거나 되어가고 있었으며, 결국은 아직 한화하지 않았던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하였다.

1642914판을 1404960판으로 되돌렸습니다. -- 66 Quotation Marks. 99 2008년 4월 22일 (화) 21:08 (KST)[답변]

어원 추가[편집]

예삿말로 쓰여지지 않은 아래 내용이 본문에 있어 옮겨옵니다. 수정하고 출처를 밝혀 다시 삽입하면 좋겠습니다. --케골(토론) 2022년 2월 18일 (금) 16:27 (KST)[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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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할만한 내용은, 거란(契丹)에서 '契' 글자를 읽은 소리가 다양한 것. 계(契)맺을, 친목 모임을 친목계라 합니다. 상(商)나라 시조 설(契)로도 읽는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거란으로도 만들어져 있습니다.. 거란이 동호족에서 파생됐다면, BC300년~249년 연나라 요하 침공 때, 요하 북쪽에 있는 동호와 요하 고조선을 공격해서 요하를 뺏었는데, 단군조선 = 단군(檀君)+조선(朝鮮)으로, 수도 아사달은 요하 강 상류 지역에 있는 현재 조양(朝陽)시, 조(朝)아침은 일본 말로 '아사' 언덕에 있는 동네를 한국인은 동네라고 합니다. 상(商)나라 마지막 수도 조가(朝歌) = 은허(殷墟)유적 역시 허(墟)언덕에 있고, 첫 수도 상구(商丘) 역시 구(丘)언덕에 있습니다. 상나라 왕실 성(姓)은 자(子)아들로, 시조 설족(契族)을 화하족(華夏族) 하(夏)나라가 하대하며 무시하다 탕왕에게 망했고, 바이칼호 아래 설련하(偰輦河)에서 남하한 북방계로 보이고, 화하족 주나라에 BC1122년~BC1046년 망하는 동안, 자성(子姓)에서 파생된 기씨(箕氏) 여(餘)는 주나라 무왕이 반란 후에 감옥에서 풀어줬고, 기자(箕子)가 살던 백적(白狄) 일족을 이끌고 지역을 떠나 요하로 이동, 단군 조선이 만주에서 시작됐는데, 적(狄)오랑캐는 화하족 관점에서 자신들과 다른 이민족이란 뜻이고, 백(白)엄지는 맏형이란 뜻,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선(鮮)고울로 불렀습니다. 백(白)흰, 하얀색 옷 선(鮮)고운 선을 즐기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조선(朝鮮)은 북쪽에 뿌리가 있기 때문에, 맥(貊)북방 종족에 해당, 예(濊)흐릴, 먼저 살고 있던 단군(檀君)과 이동해 온 기자가 요하에서 예맥, 단군조선을 시작하게 된 상황. 단군조선 수도 아사달 조양은 북방계 동호, 거란, 기자 여(餘)를 잇는 부여(扶餘) 해씨(解氏), 오녀산성 높은 지역에 세운 졸본부여 고구려(高句麗) 역시, 고(高)높을, 여(餘)일 수 있는 것은, 고구려에서 내려가 온조(溫祚)가 세운 남부여 백제 마지막 태자 성(姓) 여(餘)가 당나라에 끌려가 서(徐)로 바뀐 것을 공통 글자에서 알 수 있다. 연나라 요하 침공전까지 단군 조선은 만주에서 공존했는데, 북방계 조선은 요하를 제외한 나머지 만주 지역에서 부여를 세웠고, 기자가 아사달로 이동했을 때 단군이 자리를 내주고 이동한 곳이 요동으로, 단군은 연나라 요하 침공으로 평양으로 남하 100년 후, 위장 귀순한 위만에 평양도 뺏기고 남하 한(韓)을 세웠기 때문에, 한국인에게 단군이 시조가 되고, 부여계 온조에게 한(韓)이 망했지만, 만주 단군 조선에 한 뿌리가 있기 때문에, 단군과 기자는 조선시대까지 시조로 여기고 제사를 지냈지만, 화하족 사마천이 쓴, 사기에 적힌 몇마디에 사대주의로 폄훼, 기자는 우리 역사에서 삭제 됐습니다. 거(契)는 상나라, 조선, 부여, 고구려에서 파생된 북방계로, 상(商)나라 시조 설(契)을 거(契)로 읽는 같은 글자와 흐름에 한국인과 고대사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신뢰할 수 없는 민간어원설입니다. 契丹 이나 乞大 등 거란을 나타내는 한자 음차 표기는 거란어의 자칭(endonym)인 /kʰi.tan/ /kʰi.tai/ 를 한자의 발음을 빌려 적은 것에 불과한 표기입니다. 따라서 이들을 한자의 의미를 통해 해석하려는 시도는 민간어원이며 문서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서술입니다. --Konoponpokopon (토론) 2022년 2월 19일 (토) 16:17 (KST)[답변]
언어 외적으로도 한민족과 거란족을 혈통상에서 관련짓고 있는 위 서술은 위서 환단고기를 추종하는 부류의 역사왜곡과 그 의도와 논리전개가 유사하므로 애초에 유사역사학의 범주에 속하는 서술입니다. 이러한 서술은 역사학적으로 검증될 수 없으며 따라서 수정하여 다시 삽입할 것이 아니라 본문에서 삭제해야 합니다. --Konoponpokopon (토론) 2022년 2월 19일 (토) 16:21 (KST)[답변]
본문에 해당 내용을 작성한 사용자는 계속된 환단고기성 서술로 무기한 차단되었음을 알립니다.--Kirschtaria (토론) 2022년 2월 19일 (토) 16:23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