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의 북벌
| 제갈량의 북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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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 시대의 전쟁의 일부 | |||||||
청나라에서 출판된 《삼국지연의》의 삽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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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전국 | |||||||
| 위나라 |
촉한 강족 선비족 | ||||||
| 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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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 조진 사마의 장합 † 학소 왕쌍 † 곽회 비요 대릉(戴陵) 우금(牛金) 가사(賈嗣) 위평(魏平) 신비 하후무 진랑 |
유선 제갈량 † 위연 ☠ 조운 등지 마속 ☠ 진식 왕평 오의 오반 고상 양의 강유 가비능 | ||||||
제갈량의 북벌(諸葛亮의 北伐)은 227년부터 234년까지 촉한(蜀漢)의 승상인 제갈량이 조위를 상대로 단행한 다섯 차례의 군사 원정이다. 표면적으로는 후한(後漢)을 찬탈한 위를 벌하여 한실을 부흥시킨다는 명분으로 시행되었다.
전략적 배경으로는 유비 시기의 대전략인 융중대가 형주 공방전과 이릉 대전으로 인해 실현 불가능해짐에 따라, 익주의 방어선을 북쪽으로 확장하고 위나라의 옹주와 량주를 병합하는 목표로 수정된 결과였다. 원정 결과 무도와 음평 두 군을 편입하는 성과가 있었으나, 장안 방면 진출에는 실패하여 양측의 전선은 교착 상태로 귀결되었다. 이 원정은 234년 5차 북벌 중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하면서 종료되었다.
배경
[편집]
220년 후한 멸망 이후 중국은 위, 촉, 오 3국으로 분열되었다. 촉이 북쪽의 위를 공격하고자 한 계획의 연원은 207년 제갈량이 유비에게 제시한 융중대에 있다. 이는 유비 세력이 형주와 익주를 거점으로 삼은 뒤, 변고가 생기면 양면에서 장안과 낙양으로 북진한다는 전략이었다.[1]
214년 익주 확보로 일부 조건이 충족되었으나, 219년 오나라의 형주 점령과 관우의 전사(형주 공방전), 221년 유비의 이릉 대전 패배로 인해 기존 전략은 폐기되었다.
223년 오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여 후방을 안정시킨 제갈량은, 227년 황제 유선에게 원정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출사표》를 올렸다.[2] 재가를 받은 제갈량은 동원령을 내려 군대를 면양(沔陽, 현재의 산시성 몐현)에 집결시켰다.[3]
지정학
[편집]북벌의 전초기지는 익주 북부의 중심지인 한중이었다.[4] 한중은 한강 유역의 평야가 북쪽의 진령산맥과 남쪽의 미창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북서쪽의 서량(오늘날의 간쑤성)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진령산맥은 한중과 위나라 중심지인 장안을 잇는 지리적 장벽이었다. 지진 작용으로 단층이 많아 지형이 험준했으며, 산맥을 통과하는 경로는 잔도로 한정되어 대규모 병력 이동과 보급에 제약이 컸다. 주요 경로는 다음과 같다.
- 자오도(子午道): 장안으로 직행하는 경로이나 거리가 길고 지세가 험해 보급이 어려웠다.
- 당낙도(儻駱道): 낙곡도라고도 부르며 험준하여 제갈량 원정에서는 주요 통로로 쓰이지 않았다.
- 야곡도(斜谷道): 미현 방면으로 연결되며 제갈량의 5차 북벌 경로로 이용되었다.
- 기곡도(箕谷道): 진창 방면으로 연결되며 1차 북벌 시 조운의 양동 부대, 2차 북벌 시 제갈량 본대가 이용했다.
- 기산로(祁山路): 서쪽으로 우회하여 농우 방면으로 향하는 경로. 상대적으로 평탄하여 대군 운용에 유리해 가장 빈번하게 이용되었다.
신성의 난 (227년)
[편집]원정 개시 전, 위나라에 투항했던 신성태수 맹달이 촉과 내응하여 반란을 시도했다.[5] 제갈량은 맹달과 대립하던 신의를 이용해 맹달의 반란 계획을 위나라 조정에 노출시켰고, 궁지에 몰린 맹달은 반란을 일으켰다.[6]
위나라 장수 사마의는 신속하게 병력을 이동시켜 8일 만에 신성에 도달했다.[7] 오나라와 촉나라에서 파견한 지원군은 사마의의 병력에 의해 차단되었다.[8] 포위 16일 만에 맹달의 부장 이보와 조카 등현이 성문을 열고 항복하면서 반란은 진압되었다.[9]
제1차 북벌 (228년)
[편집]
228년 봄, 제갈량은 한중에서 첫 원정을 개시했다. 출병 과정에서 위연이 자오도를 통해 장안을 기습하는 '자오곡 계책'을 건의했으나, 제갈량은 보급과 전략적 위험을 들어 이를 기각했다.
전략에 따라 조운과 등지의 부대가 기곡(箕谷)을 통해 미현 방면으로 양동 작전을 전개하고, 제갈량의 본대는 기산로를 거쳐 농우(隴右)로 진군했다. 이에 위나라 관할이던 천수, 남안, 안정 3개 군이 촉군에 항복했다.[10] 천수군의 강유가 이때 촉에 귀순했다.
위나라 황제 조예는 장안으로 이동해 방어군을 재편했다. 조진이 미현에서 조운의 부대를 저지했고, 조운 부대는 교전 후 병력을 수습하여 물러났다.[11] 장합은 제갈량 본대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갈량은 마속을 선봉으로 파견해 요충지인 가정을 수비하게 했다. 그러나 마속은 제갈량의 지시를 위반하고 산 정상에 진영을 구축했다. 장합이 산을 포위하고 수원을 차단하자 마속의 군대는 격파되었고, 왕평 휘하의 병력만이 퇴각에 성공했다(가정 전투). 가정 방어선 붕괴로 제갈량은 한중으로 철수했으며, 촉이 점령했던 3개 군은 다시 위나라에 귀속되었다.[12][13] 철수 후 제갈량은 군율 위반의 책임을 물어 마속을 처형하고(읍참마속),[14] 자신은 우장군으로 강등 처분되었으나 승상의 직무를 유지했다.[15]
제2차 북벌 (228년 겨울)
[편집]228년 하반기 동오가 위나라를 상대로 석정 전투에서 승리했다. 위나라가 서부 전선 병력 일부를 동쪽으로 이동시키자, 제갈량은 그해 12월 기곡도를 지나 진창(陳倉)을 공격했다.
진창은 위나라 장수 학소가 1,000명의 병력으로 수비하고 있었다. 조진은 앞서 진창의 성벽을 보수하여 방어를 강화해둔 상태였다.[16] 촉군이 항복을 권유했으나 학소가 이를 거절했다.[17] 제갈량은 운제와 충차 등 공성 병기를 운용하여 공격을 시도했으나 학소는 방어에 성공했다.[18] 공성전이 20여 일 지속되는 가운데 촉군의 식량이 감소하고 위나라의 증원군이 접근하자 제갈량은 철수했다.[19] 이때 퇴각하는 촉군을 추격하던 위나라 장수 왕쌍이 교전 중 전사했다.[20]
제3차 북벌 (229년)
[편집]229년 봄, 제갈량은 부장 진식을 파견하여 위나라의 무도(武都)와 음평(陰平)을 점령하게 했다. 옹주자사 곽회가 진식을 견제하기 위해 병력을 이동시켰으나, 제갈량이 직접 건위(建威) 방면으로 나아가자 철수했다. 촉군은 무도와 음평 두 군을 교전 없이 편입시켰고,[21] 이 성과를 바탕으로 제갈량은 승상직으로 복권되었다.[22]
자오도 공역 (230년)
[편집]230년 8월, 위나라는 조진과 사마의를 중심으로 한중 진공을 기획했다. 조진은 자오도로, 사마의는 한수를 거슬러 다방면에서 병력을 이동시켰다.[23] 제갈량은 이엄(이평)을 한중으로 이동시켜 수비 태세를 갖추었다.[24]
그러나 진령산맥 일대에 30일 이상 폭우가 내려 잔도가 훼손되고 보급로가 단절되었다. 기상 악화로 진군이 불가능해지자 위나라는 군대를 철수시켰다.[25] 한편 촉군 장수 위연과 오반은 서강족 지역에서 곽회, 비요의 부대와 교전하여 승리했다.[26]
제4차 북벌 (231년)
[편집]231년 봄, 제갈량은 보급을 위해 목우(木牛)를 운용하며 기산 방면으로 북상했다.[27] 천수군을 향해 진군한 촉군은 선비족 수장 가비능과 연합하여 위군의 후방을 견제했다.[28] 위나라는 조진의 사망에 따라 사마의를 대촉 전선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29]
촉군이 상규(上邽) 방면에서 식량을 확보하려 하자 사마의는 본대를 이끌고 대치했다. 촉군이 노성(鹵城)에 방어선을 구축하자 사마의는 정면 교전을 피하고 수비 위주의 전술을 취했다.[30] 위나라 장수들의 교전 요구가 이어지자[31] 사마의는 장합을 남쪽 방면으로, 본대를 노성 방면으로 진격시켰다. 이에 제갈량은 위연, 고상, 오반을 출격시켜 위군을 격퇴했으며, 기록상 위군은 3,000명의 병력 손실과 다수의 장비 피해를 입었다.[32]
이후 촉군 측에서 보급 문제가 발생했다. 보급을 담당한 이엄이 기상 악화로 식량 조달이 늦어지자, 책임을 모면할 목적으로 조서를 위조해 회군을 종용했다. 이로 인해 제갈량은 병력을 철수시켰다.[33][34] 위군은 퇴각하는 촉군을 추격했으나, 추격을 이끌던 장합이 목문도(木門道)에서 촉군의 복병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35] 한중 귀환 후 제갈량은 이엄의 허위 보고를 문책하여 그를 평민으로 강등했다.
제5차 북벌 (2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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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년 봄, 제갈량은 유마(流馬)를 이용해 식량을 수송하며 야곡도를 거쳐 오장원에 주둔했다.[36] 동오의 손권과 일정을 맞추어 합비 방면으로의 연계 공격도 진행되었다. 촉군은 장기 대치에 따른 식량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위수 인근에서 둔전(屯田)을 병행했다.[37]
사마의는 전면전을 피하고 진영을 방어하는 데 주력했다. 제갈량이 부녀자의 의복을 보내며 교전을 유도했으나 사마의는 수비 위치를 고수했고, 황제 조예는 신비(辛毗)를 파견해 군의 출전을 통제했다.[38] 사마의는 촉의 사신을 통해 제갈량의 식사량이 적고 군무가 과중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의 수명이 길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39][40]
대치 상태가 100일 이상 지속되던 중,[41] 234년 8월 제갈량은 오장원 진영에서 54세의 나이로 병사했다.[42] 그의 유언에 따라 양의, 강유 등 지휘부가 군대 철수를 결정했다.
철수하는 촉군을 사마의가 추격했으나, 촉군 측이 군기를 돌리고 반격 태세를 갖추자 사마의는 철수했다. 이 사건을 두고 당대에는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아냈다(死諸葛走生仲達)"는 민요가 회자되었다.[43] 《진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후 사마의는 촉군이 머물렀던 진영을 순시하며 제갈량을 "천하의 기재(天下奇才)"라 평가했다고 한다.[44]
촉군의 한중 귀환 과정에서 지휘부 내 양의와 위연 간의 대립이 발생하여 위연이 처형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제갈량 사후 촉한의 대규모 공격 지향적 북벌은 막을 내렸고, 이후 전략 기조는 수비 위주로 개편되었다.
원인 분석
[편집]북벌 원정은 전술적 승리와 일부 영토(무도, 음평) 편입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장안 방면 확보와 위나라 정복이라는 근본적 목표는 달성되지 않았다. 이후 장완, 비의 체제하에서 촉한은 방어적 국방 정책을 채택했다.
현대 학자 이중톈(易中天)은 원정 실패의 원인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45]
- 위나라의 국력: 위나라의 체제가 안정적이었고 국력이 강성하여 정복이 어려웠다.
- 지형적 제약: 진령산맥 등 험난한 지형 조건은 원정군에게 심각한 병참 문제를 초래했다.
- 군사적 한계: 제갈량의 행정 및 조직 능력은 우수했으나, 군사적 기만 등 임기응변 전술의 부재가 한계로 작용했다.
반면, 이러한 악조건에도 원정을 추진한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제시된다.[45]
- 정치적 대의: 촉한 건국의 근본 명분인 '한실 부흥'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 내부 결속: 국가를 전시 상태로 유지하여 익주 토착 세력을 통제하고 국가 기강을 확립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존재했다.
- 전략적 방어: 국력이 가장 약했던 촉한 입장에서, 방어에 치중하기보다는 선제공격을 통해 적대국의 공세를 둔화시키려는 예방 전쟁의 성격이 있었다.
역대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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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북벌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 진수: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표면적으로는 "임기응변의 장략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蓋應變將略, 非其所長歟!)"라고 평가하며, 제갈량의 임기응변 능력이 부족했던 것을 북벌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그러나 진수가 위나라를 계승한 서진(西晉) 시대에 관료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제갈량을 사마의보다 높게 평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진수는 제갈량전의 말미에 황제에게 올리는 글에서 극도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진수가 사마의가 제갈량을 "천하의 기재(天下奇才)"라고 칭찬한 기록 등을 통해, 북벌의 실패가 능력의 문제가 아닌 "천명(天命)"에 있었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고 보기도 한다.
- 장엄(張儼): 동시대 동오(東吳)의 인물인 장엄은 그의 저서 《묵기(默記)》에서 제갈량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공명(孔明)은 파촉(巴蜀)의 한 주(州) 땅에서 일어나 대국과 비교하면 병사와 백성이 9분의 1에 불과했지만, 오나라에 공물을 보내며 북쪽의 적에 대항했다. (...) 중달(仲達)은 천하의 열 배가 넘는 땅과 막강한 군대를 가지고도 성을 굳게 지키며 자신을 보전하기에 급급했을 뿐, 공명이 스스로 오고 가게 만들었다. 만약 공명이 죽지 않고 뜻을 계속 펼쳤다면, 승패의 형세는 이미 결정되었을 것이다"라고 서술하며, 제갈량의 조기 사망이 아니었다면 북벌은 성공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 후세 문인들: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제갈량의 북벌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 당나라 시인 두보의 유명한 구절인 "출사하여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길이 영웅의 옷깃을 눈물로 적시네(出師未捷身先死,長使英雄淚滿襟)"는 이러한 정서를 대표한다. 이 외에도 여러 문학 작품에서 북벌의 실패를 아쉬워했으며, 이러한 관점은 소설 《삼국지연의》에 대거 반영되어 민간의 보편적인 시각을 형성했다.
- 사마광: 일부 사학자들은 제갈량의 북벌이 천명을 어긴 행위라고 보았다. 사마광은 "제갈량이 자신의 재능을 자부하여 하늘을 거슬러 행동했으니, 스스로 패배를 자초한 것이다(諸葛亮自負才能,逆天而行,自取敗之也)"라고 논하며, 제갈량의 북벌이 천명에 순응하지 않았기에 자연히 성공할 수 없었다고 여겼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제갈량의 북벌을 '입구(入寇, 외적이 침입함)'라고 일컬었는데, 이는 북송과 서진의 건국 정통성 관점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 관점은 당대에도 이미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찬할 때의 조수였던 유서(劉恕)는 일찍이 사마광에게 다음과 같이 따져 물었다. 「그러나 한 소열제(유비)가 파촉으로 피신한 것은 진(晉) 원제(元帝)와 같고, 오 대제(손권)가 강표(江表)에서 일어난 것은 후위(後魏)와 같습니다. 만약 중원(中國)에 주인이 있으니 촉이 한을 이을 수 없어 '거짓(偽)'이라고 한다면 동진(東晉) 역시 중원이 아니게 되며, 오나라가 사이에서 독립하여 이어받은 곳이 없어 '거짓'이라고 한다면 후위 역시 이어받은 곳이 없게 됩니다. 남북조 시대를 서술할 때는 '어느 군주(某主)'라고만 쓰고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았는데, 위나라는 어찌 오와 촉 군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46]
- 이중톈: 현대의 학자 이중톈은 제갈량의 북벌을 다각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북벌이 첫째로 한실 부흥이라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고, 둘째로 익주 토착 세력 등 국내 반대파를 억누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북벌로 인해 촉한이 장기간 전쟁 상태에 놓이면서, 치안은 안정되었으나 과도한 세금으로 백성들의 부담이 매우 컸다고 평가했다.[47]
그 밖에, 제갈량이 위연의 '자오곡 계책(計出子午谷)'(《삼국지》: "다른 길로 나아가 동관(潼關)에서 군사를 합치자(異道會師潼關)")을 쓰지 않은 것 또한 천고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연표
[편집]| 제갈량 북벌 주요 연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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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기 | 장소 | 사건 |
| 227년 4월 ~ 5월 | 한중, 산시성 | 제갈량이 북벌을 준비하며 한중으로 이동.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림. |
| 227년 12월 ~ 228년 3월 | 후베이성 북서부 | 신성의 난: 사마의가 맹달의 반란을 진압함. |
| 228년 2월 ~ 5월 | 산시성 서부 및 간쑤성 남동부 | 제1차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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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8년 9월 ~ 10월 | 안후이성 | 석정 전투: 동오가 위나라군을 상대로 승리. |
| 228년 12월 ~ 229년 1월 | 진창 방면 | 제2차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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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9년 2월 ~ 5월 | 간쑤성 룽난 | 제3차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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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년 8월 ~ 9월 | 한중 및 자오도 | 자오도 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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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1년 3월 ~ 8월 | 간쑤성 남동부 | 제4차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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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4년 3월 ~ 10월 | 오장원 | 제5차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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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묘사
[편집]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북벌이 다소 윤색되어 서술되었으며, 이를 흔히 육출기산(六出祁山)이라고 부른다. 소설 내에는 빈 성을 열어두어 사마의를 물러나게 했다는 공성계(공성전), 목우유마의 구체적이고 기계적인 작동 원리 묘사, 오장원에서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북두칠성 제단을 세우는 장면 등 문학적 허구 요소가 첨가되어 제갈량의 지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창작되었다.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亮荅曰:「自董卓已來,豪傑並起,跨州連郡者不可勝數。 ... 誠如是,則霸業可成,漢室可興矣。」)
- ↑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建興]五年,率諸軍北駐漢中,臨發,上疏曰:先帝創業未半, ... 不知所言。)
- ↑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遂行,屯于沔陽。)
- ↑ Killigrew, John (1999). "Zhuge Liang and the Northern Campaign of 228–234". Early Medieval China. 1999 (1): 55–91.
- ↑ 방현령 외, 《진서》 권1 선제기. (蜀相諸葛亮惡其反覆,又慮其為患。)
- ↑ 어환, 《위략》; 진수, 《삼국지》 권3 위서 명제기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諸葛亮聞之,陰欲誘達,數書招之,達與相報答。魏興太守申儀與達有隙,密表達與蜀潛通,帝未之信也。司馬宣王遣參軍梁幾察之,又勸其入朝。達驚懼,遂反。)
- ↑ 방현령 외, 《진서》 권1 선제기. (帝恐達速發, ... 達得書大喜,猶與不決。帝乃潛軍進討。諸將言達與二賊交構,宜觀望而後動。帝曰:「達無信義,此其相疑之時也,當及其未定促決之。」乃倍道兼行,八日到其城下。)
- ↑ 방현령 외, 《진서》 권1 선제기. (吳蜀各遣其將向西城安橋、木闌塞以救達,帝分諸將以距之。)
- ↑ 방현령 외, 《진서》 권1 선제기. (上庸城三面阻水,達於城外為木柵以自固。帝渡水,破其柵,直造城下。八道攻之,旬有六日,達甥鄧賢、將李輔等開門出降。斬達,傳首京師。)
- ↑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建興]六年春,揚聲由斜谷道取郿,使趙雲、鄧芝為疑軍,據箕谷,魏大將軍曹真舉衆拒之。亮身率諸軍攻祁山,戎陣整齊,賞罰肅而號令明,南安、天水、安定三郡叛魏應亮,關中響震。)
- ↑ 진수, 《삼국지》 권36 촉서 조운전. ([建興]五年,隨諸葛亮駐漢中。明年,亮出軍,揚聲由斜谷道,曹真遣大衆當之。亮令雲與鄧芝往拒,而身攻祁山。雲、芝兵弱敵彊,失利於箕谷,然歛衆固守,不至大敗。)
- ↑ 진수, 《삼국지》 권17 위서 장합전. (諸葛亮出祁山。加郃位特進,遣督諸軍,拒亮將馬謖於街亭。謖依阻南山,不下據城。郃絕其汲道,擊,大破之。南安、天水、安定郡反應亮,郃皆破平之。)
- ↑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亮使馬謖督諸軍在前,與郃戰于街亭。謖違亮節度,舉動失宜,大為郃所破。)
- ↑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亮拔西縣千餘家,還于漢中,戮謖以謝衆。)
- ↑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於是以亮為右將軍,行丞相事,所總統如前。)
- ↑ 진수, 《삼국지》 권9 위서 조진전. (真以亮懲於祁山,後出必從陳倉,乃使將軍郝昭、王生守陳倉,治其城。明年春,亮果圍陳倉,已有備而不能克。)
- ↑ 어환, 《위략》; 진수, 《삼국지》 권3 위서 명제기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亮圍陳倉,使昭鄉人靳詳於城外遙說之, ... 詳以昭語告亮,亮又使詳重說昭,言人兵不敵,無為空自破滅。 ... 詳乃去。)
- ↑ 어환, 《위략》; 진수, 《삼국지》 권3 위서 명제기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亮自以有眾數萬,而昭兵才千餘人,又度東救未能便到,乃進兵攻昭,起雲梯衝車以臨城。昭於是以火箭逆射其雲梯,梯然,梯上人皆燒死。昭又以繩連石磨壓其衝車,衝車折。亮乃更為井闌百尺以付城中,以土丸填壍,欲直攀城,昭又於內築重牆。亮足為城突,欲踊出於城裏,昭又於城內穿地橫截之。)
- ↑ 어환, 《위략》; 진수, 《삼국지》 권3 위서 명제기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晝夜相攻拒二十餘日,亮無計,救至,引退。)
- ↑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冬,亮復出散關,圍陳倉,曹真拒之,亮糧盡而還。魏將王雙率騎追亮,亮與戰,破之,斬雙。)
- ↑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建興]七年,亮遣陳戒攻武都、陰平。魏雍州刺史郭淮率衆欲擊戒,亮自出至建威,淮退還,遂平二郡。)
- ↑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詔策亮曰:「街亭之役,咎由馬謖,而君引愆,深自貶抑...今復君丞相,君其勿辭。」)
- ↑ 진수, 《삼국지》 권9 위서 조진전. (真以八月發長安,從子午道南入。司馬宣王泝漢水,當會南鄭。諸軍或從斜谷道,或從武威入。)
- ↑ 진수, 《삼국지》 권40 촉서 이엄전. (八年,迁骠骑将军。以曹真欲三道向汉川,亮命严将二万人赴汉中。)
- ↑ 진수, 《삼국지》 권9 위서 조진전. (會大霖雨三十餘日,或棧道斷絕,詔真還軍。)
- ↑ 진수, 《삼국지》 권40 촉서 위연전. (八年,使延西入羌中,魏後將軍費瑤、雍州刺史郭淮與延戰于陽谿,延大破淮等,遷為前軍師征西大將軍,假節,進封南鄭侯。)
- ↑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建興]九年,亮復出祁山,以木牛運, ...)
- ↑ 습착치, 《한진춘추》;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漢晉春秋曰:亮圍祁山,招鮮卑軻比能,比能等至故北地石城以應亮。)
- ↑ 방현령 외, 《진서》 권1 선제기. (乃使帝西屯長安,都督雍、梁二州諸軍事,統車騎將軍張郃、後將軍費曜、征蜀護軍戴淩、雍州刺史郭淮等討亮。 ... 遂進軍隃麋。)
- ↑ 습착치, 《한진춘추》;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亮屯鹵城,據南北二山,斷水為重圍。)
- ↑ 습착치, 《한진춘추》;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賈栩、魏平數請戰,因曰:「公畏蜀如虎,柰天下笑何!」宣王病之。諸將咸請戰。)
- ↑ 습착치, 《한진춘추》;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漢晉春秋曰:亮使魏延、高翔、吳班赴拒,大破之,獲甲首三千級,玄鎧五千領,角弩三千一百張,宣王還保營。)
- ↑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糧盡退軍)
- ↑ 사마광, 《자치통감》 권72. (六月,亮以糧盡退軍)
- ↑ 어환, 《위략》; 진수, 《삼국지》 권17 위서 장합전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魏略曰:亮軍退,司馬宣王使郃追之,郃曰:「軍法,圍城必開出路,歸軍勿追。」宣王不聽。郃不得已,遂進。蜀軍乘高布伏,弓弩亂發,矢中郃髀。)
- ↑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建興]十二年春,亮悉大衆由斜谷出,以流馬運,據武功五丈原,與司馬宣王對於渭南。)
- ↑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亮每患糧不繼,使己志不申,是以分兵屯田,為乆駐之基。耕者雜於渭濵居民之間,而百姓安堵,軍無私焉。)
- ↑ 방현령 외, 《진서》 권1 선제기. (亮數挑戰,帝不出,因遺帝巾幗婦人之飾。帝怒,表請決戰,天子不許,乃遣骨鯁臣衞尉辛毗杖節為軍師以制之。)
- ↑ 방현령 외, 《진서》 권1 선제기. (帝既而告人曰:「諸葛孔明其能久乎!」)
- ↑ 손성, 《위씨춘추》;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宣王曰:「亮將死矣。」)
- ↑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相持百餘日。)
- ↑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其年八月,亮疾病,卒于軍,時年五十四。)
- ↑ 습착치, 《한진춘추》;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百姓為之諺曰:「死諸葛走生仲達。」或以告宣王,宣王曰:「吾能料生,不便料死也。」)
- ↑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及軍退,宣王案行其營壘處所,曰:「天下奇才也!」)
- 1 2 이중톈(易中天), 《삼국지 강의(品三國)》 (2010). 제41장: 수비를 위한 공격.
- ↑ 《통감문의(通鑑問疑)》
- ↑ 이중톈(易中天). “제51강: 수비를 위한 공격 (第五十一讲 以攻为守)”. 《이중톈, 삼국지를 논하다 (易中天品三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