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영 (18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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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영
申泰英
생애 1891년 2월 1일 ~ 1959년 4월 8일 (69세)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교 불교
자녀 신응균(장남)
신철균(차남)
신박균(삼남)
복무 일본군,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 1914년 ~ 1952년
최종 계급 일본 제국 육군 중좌
ROK army Jungjang.svg 중장(中將)
근무 육군본부
육군 전라북도편성관구사령부
육군 전라북도지구전투사령부
지휘 육군참모총장
육군 전라북도편성관구사령관
육군 전라북도지구전투사령관
주요 참전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기타 이력 국방부 장관

신태영(申泰英, 일본식 이름: 平山輔英 히라야마 호에이, 1891년 2월 1일 ~ 1959년 4월 8일)은 일제 강점기의 군인이자 대한민국 육군 장성 및 정치인이며 본관은 평산이다.

이력[편집]

그의 첫째 아들 또한 대한민국 육군 중장 출신이며 국방부 사무차관 겸 장관 직무대리를 지낸 신응균이며 막내아들 신박균 육군 하사(지금의 상병)는 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17세의 어린 나이로 1950년 8월 한국 전쟁에 참전을 지원해 포병이 되었고 최전방을 지원하여 가평지구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하다가 1951년 1월 2일 18세의 어린 나이로 전사했다. 한국군 고위층의 아들이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사례는 신태영 참모총장의 막내 아들 신박균 하사 단 한 명이다.

생애[편집]

한성부에서 태어나, 14세 때에 대한제국의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어서 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12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5월 28일 제26기로 졸업하였다. 졸업 동기 중 한국인은 후에 일본군 중장을 지낸 홍사익을 비롯하여 지청천, 이응준, 조철호 등 13명이었다.[1]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제국 육군 중좌였다. 광복 후 육사 동기생 대부분이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참여하였으나, 그는 근신하는 뜻으로 군문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뒤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이 터진 이후 자진 입대, 1948년 11월 대령계급과 함께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 겸 국방부 제1국장이 되었다.

1949년 준장으로 진급, 호국군참모부장이 되었으며, 1949년 10월 소장진급과 함께 제3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으나 재임 기간 7개월 만인 1950년 4월에 스스로 물러났다. 그것은 당시의 국방부 수뇌들과 의견이 맞지 않았고, 정세 판단에서도 낙관적인 견해를 보인 당시의 미국 고문관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전라북도 편성관구사령관으로서 이 지역의 방어에 임하였다. 그러나 이 때도 당시의 국방장관 신성모와 작전상의 의견충돌을 빚었으며 이에 따라 1950년 7월 해임되었다. 1952년 1월 복직되면서 곧 중장으로 승진하였으며, 2개월 후 1952년 3월, 육군 중장 예편과 동시에 국방부 장관이 되어 휴전 협정이 성립되기 직전까지 1년 3개월간 재임하였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역사문제연구소 (1995년 3월 1일). 《인물로보는 항일무장투쟁사》. 서울: 역사비평사. 146쪽쪽. ISBN 8976962249. 

참고 자료[편집]

전임
채병덕
제3대 육군참모총장
1949년 10월 1일 ~ 1950년 4월 9일
후임
채병덕
전임
이기붕
제4대 국방부 장관
1952년 3월 29일 ~ 1953년 6월 30일
후임
손원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