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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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성(烽山城)은 신라죽령(竹嶺)을 개척하고 한강유역을 진출하기 위하여 죽령천변 봉산에 전초기지를 구축한 관방유적이다.

봉산성의 위치[편집]

신라의 봉산성은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의 일원에 소재하며, 좌표는 N36 56.659 E128 19.275이다.

봉산성의 전적사료[편집]

  • 백제 구수왕(仇首王) 11년(224) 가을 7월에, 신라일길찬(一吉飡) 연진(連珍)이 침략해 왔다. 우리 군사는 봉산(烽山) 아래에서 역습한 전투에서 이기지 못했다.[1]
  • 신라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29년(224) 가을 7월에, 이벌찬(伊伐湌) 연진(連珍)이 백제봉산(烽山)[2] 아래에서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1천여 명을 살육하거나 포획하였다.[3]
  • 신라 내해니사금(奈解尼師今) 29년(224) 가을 8월에, 봉산성(峰山城)을 축성하였다.[4]
  • 신라 첨해니사금(沾解尼師今) 9년(255) 겨울 10월에, 백제가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했으나 항복시키지 못했다.[5]
  • 신라 미추니사금(味鄒尼師今) 5년(266) 가을 8월에, 백제가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해 왔다. 성주(城主) 직선(直宣)이 장사(將士) 2백 명을 거느리고 출격하니 적군이 패배하여 달아났다. 왕이 그것을 듣고 직선(直宣)을 일길찬(一吉湌)으로 삼고 사졸(士卒)도 후한 상을 내렸다.[6]
  • 봉산(烽山) 유역은 신라백제의 격전지로 신라는 성주가 있는 봉산성(烽山城)을 축성하여 백제로부터 공격을 방어한 전략적인 전초기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7]

봉산성의 학설[편집]

봉산성의 정립[편집]

봉산성의 자연환경[편집]

봉산성의 관련인물[편집]

각주[편집]

  1. 《三國史記  卷第二十四 百濟本紀 第二》仇首王 十一年秋七月新羅一吉飡連珍來侵我軍逆戰於烽山下不克
  2.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는 현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첨해왕과 미추왕대에도 백제와 격전을 치른 곳이다.
  3. 《三國史記  卷第二 新羅本紀 第二》奈解 尼師今 二十九年秋七月伊伐湌連珍與百濟戰 烽山下破之殺獲一千餘級
  4. 《三國史記 卷第二 新羅本紀 第二》奈解尼師今 二十九年秋八月 築烽山城
  5. 《三國史記 卷第二 新羅本紀 第二》沾解尼師今 九年冬十月 冬十月 百濟攻 烽山城不下
  6. 《三國史記 卷第二 新羅本紀 第二》味鄒尼師今 五年秋八月 百濟來攻 烽山城城主 直宣 率壯士二百人出擊之賊敗走王聞之拜 直宣 爲一吉湌厚賞士卒
  7. 《충북지방 성곽의 보존 및 활용방안》(2013)
  8.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데이터베이스》
  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0》
  10. 《三國史記 卷第二 新羅本紀 第二》阿達羅尼師今 五年 春三月 開竹嶺
  11. 《三國史記 卷第十七 髙句麗本紀 第五》
  12.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데이터베이스》
  13. 《증보문헌비고》
  14. 《단양군지》(2005)
  15. 《朝鮮歷史地理 上》
  16. 鄭寅普 지음 文盛哉 역주《朝鮮史硏究 下》(2013), 봉산성에 성주가 상주한 것으로 보아서 소이산봉수대를 봉산성으로 단정할 수 없다.
  17. 《양백지간의 산성봉수》(2000)
  18. 《三國史記  卷第二 新羅本紀 第二》
  19. 1918년 조선총독부 5만대 1의 지형도에 봉산리(烽山里)로 수록하였다.
  20. 《충북지방 성곽의 보존 및 활용방안》(2013)
  21. 《신증동국여지승람》단양군 고적조
  22.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23. 《문화재청》1979년 5월 22일 국보 제198호로 지정하였다.
  24. 《문화재청》1979년 7월 26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265호로 지정하였다.
  25. 《충북지방 성곽의 보존 및 활용방안》(2013)
  26. 《충북지방 성곽의 보존 및 활용방안》(2013)
  27. 《양백지간의 산성봉수》(2000)
  28. 《三國史記 卷第二十四 百濟本紀 第二》
  29. 《三國史記 卷第二 新羅本紀 第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