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빈 윤씨
공회빈 윤씨
恭懷嬪 尹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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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세자빈 | |
재위 | 1561년 10월 21일 ~ 1563년 9월 20일 (음력) |
전임 | 세자빈 박씨 (인성왕후) |
후임 | 세자빈 유씨 (폐비 유씨) |
이름 | |
시호 | 공회빈(恭懷嬪) |
작호 | 덕빈(德嬪)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53년 7월 21일(음력) |
사망일 | 1592년 4월 4일(양력) | (38세)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창경궁 통명전 |
가문 | 무송 윤씨 |
부친 | 윤옥 |
모친 | 파평 윤씨 |
배우자 | 순회세자 |
자녀 | 없음 |
능묘 | 순창원(順昌園)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
공회빈 윤씨(恭懷嬪 尹氏, 1553년 7월 21일(음력 6월 1일[1]) ~ 1592년 4월 4일(음력 3월 3일))는 조선의 세자빈으로, 명종과 인순왕후의 아들인 순회세자의 아내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이며, 순회세자 사후 덕빈(德嬪)에 봉해졌다.
생애
[편집]탄생과 세자빈 책봉
[편집]1553년(명종 8년) 6월 1일, 공조판서를 지낸 윤사익(尹思翼)의 손녀이자 윤옥(尹玉)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윤봉종(尹奉宗)의 딸 파평 윤씨이다.[1]
1561년(명종 16년), 순회세자와 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이 되었다. 원래 윤원형의 인척인 황대임의 딸 황씨가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책빈례(冊嬪禮)까지 마쳤으나 황씨가 고질병인 복병을 앓는다는 이유로 양제(良娣)로 강등되자, 새로운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2]
순회세자 사후
[편집]1563년(명종 18년) 순회세자가 요절하자 11세의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었고, 덕빈(德嬪)에 봉해졌다.
순회세자 사후에도 인순왕후의 명으로 궁궐에서 머물며 생활하였다. 인순왕후는 며느리 덕빈과 함께 문덕전에 친제하였으며, 1574년(선조 7년) 이어할 때는 덕빈을 대동하기도 하였다.[3] 윤씨는 순회세자 사후 세자의 영혼을 기원하는 뜻에서 자주 불공(佛供)을 드렸으나 선조는 이를 가엾게 여겨 금지하지 않았다.[4]
사망
[편집]1592년(선조 25년) 3월 3일, 창경궁 통명전에서 사망하였다.[4]
덕빈이 죽자 창경궁에 빈소를 설치하고 시신을 안치하여 상례(喪禮) 절차를 진행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였고, 4월 28일 어가가 궁을 버리고 피난을 가면서 빈소를 모시던 관리 몇 사람이 후원에 임시로 매장하려 하였으나 재실(梓室, 관)이 무거워 옮기지 못하였다.
조금 있다가 궁궐에 불이나자 관리들도 모두 흩어져버리는 바람에 시신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되었다. 궁인들이 비통해하며 ‘빈이 살았을 적에 불교를 숭상하였는데, 우연히 화장(火葬)하게 되었으니 그것도 생전의 뜻에 부합된다.’고 하였다.[4]
순회세자빈 윤씨의 졸기
- 3일에 순회세자빈(順懷世子嬪) 윤씨(尹氏)가 졸(卒)하였다.
- 윤씨는 참판 윤옥(尹玉)의 딸로서 10세에 간택되어 덕빈(德嬪)에 책봉되었는데,
- 이듬해에 세자(순회세자)가 졸하였다.
- 그러나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유명으로 궁궐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 상(선조)이 또 왕세자를 세우지 않았으므로 빈이 그대로 동궁(東宮)에 거처하였다.
- 상이 정성을 다해 그를 대우하였으며 여러 비빈(妃嬪)들도 모두 따르며 수학(受學)하였다.
- 빈의 성품이 지극히 정결하였는데
- 세자의 상사를 당한 뒤로부터 종신토록 언제나 상중에 있는 것처럼 하였으며
- 친척들의 궁궐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 그리고 세자의 영혼을 기원하는 뜻에서 불공을 자주 드렸으나
- 상이 가엾게 여겨 금지시키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
- 시호를 공회(恭懷)라 하고 장차 세자원(世子園)에 부장하려고 공사를 크게 일으켰는데,
- 갑자기 왜변(倭變, 임진왜란)을 만나 미처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상이 피난을 가게 되었다.
- 이에 빈소를 모시고 있던 관리 몇 사람이 후원(後苑)에 임시로 매장하려 하였으나
- 재실(梓室)이 무거워 옮길 수 없었는데, 조금 있다가 궁전에 불이 나는 바람에
- 관리들도 모두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 이에 궁인들이 그를 추모하고 비통해 하면서 말하기를
- ‘빈이 살았을 적에 불교를 숭상하였는데, 우연히 화장(火葬)하게 되었으니
- 그것도 생전의 뜻에 부합된다.’ 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3월 3일 (갑자)
사후
[편집]시호는 공회(恭懷)이며, 묘소는 서오릉 내에 위치한 순창원(順昌園)이다. 순창원의 원래 이름은 순회묘(順懷墓)인데, 고종 대에 순창원으로 개칭되었다. 전란중에 시신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으므로 시신 없이 빈 재궁만 묻혀 있다.
1593년(선조 26년)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윤씨의 시신을 수습하려 하였을 때 찾지 못하였다.[5] 당시 사평(司評) 이충(李忠)이 시신을 함춘원(含春苑)에 묻었다고 했으나 그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덕빈의 동생인 윤백상에게 찾아보게 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5]
1594년(선조 27년), 공회빈의 제사를 대제의 예에 따라 지내고 이후 매장지에 다수의 군인을 보내 지키게 하였다.
1603년(선조 36년), 선조는 신주(神主)만 봉안하여 순회세자와 공회빈을 순회묘(順懷墓)에 합장하였으나, 신주마저도 병자호란 때 분실되어 순회묘에는 순회세자와 공회빈의 빈 재궁(梓宮, 관)만 안장되어 있다.
비망기로 전교하였다.
“ 공회빈(恭懷嬪)의 일은 차마 말할 수조차 없다.
사변 때문에 국가가 황급하여 지금까지도 신주를 모시지 못하였으니
이는 참통한 중에서도 참통한 일이다.
순회세자도 신주가 없으니, 이 양위(兩位, 순회세자와 공회빈)의 신주를 세워
전례대로 유사가 치제하고 조처하는 일이 있어야 할 듯하다.
내 우연히 생각하니 말보다 눈물이 앞선다.
의논하여 처리할 것을 예조에 말하라.”
- 【임진년(1592년) 4월에 빈의 상이 빈소에 있었는데, 왜적이 갑자기 쳐들어왔다.
- 대가가 서쪽으로 행행하여 시사가 창황하게 되자 그대로 버려두고 떠났다.
- 그 뒤에 빈의 족인들이 겨우 전의 뜰에다 매장하였는데, 왜적이 파내어 불태웠다.
- 그러니 당시 국사를 도모한 대신과 도감의 여러 신하들이
- 기일을 앞당겨 잘 조처하지 못한 죄를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 환도한 지 10년에 간혹 이 사실을 말하는 사람은 오열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이러한 전교가 있었다.】
— 《선조실록》 136권,
선조 34년(1601년 명 만력(萬曆) 29년) 4월 25일 (임진)
순창원은 지난 2006년 문화재청에 의해 도굴 미수 현장이 발견돼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6]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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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편집]- 문경 봉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보물 제1748호
각주
[편집]- ↑ 가 나 《순회묘등록(順懷墓謄錄)》
공회빈 윤씨는 참판 윤옥의 딸이다.가정 계축(1553년) 6월 초1일에 탄생하였으며, 만력 임진(1592년) 3월 초3일에 졸하니 향년 40세였다.
(중략) - ↑ 《명종실록》 27권, 명종 16년(1561년 명 가정(嘉靖) 40년) 10월 21일 (정축)
명정전에 나아가 세자빈을 책봉하는 예를 거행하다
상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세자빈을 책봉하는 예를 거행하였다. - ↑ 《선조실록》 8권, 선조 7년 10월 27일(1574년 명 만력(萬曆) 2년) (무진)
의성전이 이어하다
의성전(懿聖殿, 인순왕후)이 이어(移御)했다.상(선조)은 광화문(光化門)까지 나가 있고 의성전은 덕빈(德嬪)을 대동했다.
연(輦)이 지나갈 적에 백관(百官)이 길 곁에서 지송(祗送)하고, 각사의 관원 1명씩과 당상이 있는 아문(衙門)의 관원 1명씩이 모두 말을 타고 연을 따라 창덕궁 돈화문 밖까지 갔다.
- ↑ 가 나 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3월 3일 (갑자)
순회세자빈 윤씨의 졸기 - ↑ 가 나 《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4월 18일 (임인)
대신이 덕빈의 재궁을 찾아보는 일을 직장 윤백상에게 시키라고 아뢰다 - ↑ 문화재청, 서오릉 순창원(順昌園) 도굴 미수 현장 발견
- ↑ 계양군의 외5대손
계양군 → 정경조의 처 이씨 → 정승우 → 정현손 → 이섭의 처 정씨 → 이안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