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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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흥
劉載興
별명 호(號)는 국헌(菊軒)·자헌(自軒)
출생지 일본 아이치 현 나고야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본관 강릉(江陵)
부모 유승렬(부)
배우자 윤의상
자녀 슬하 2남 3녀
종교 불교개신교
복무 일본 제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복무기간 1941년 ~ 1945년 (일본군 육군)
1949년 ~ 1960년 (대한민국 육군)
근무 육군 제2군단
육군 제3군단
육군본부
육군 제1군사령부
연합참모본부
최종계급 일본군 육군 대위
대한민국 육군 중장
지휘 육군 제2군단장
육군 제3군단장
육군참모차장
육군 제1군사령관
연합참모총장 직무대리
주요 참전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기타 이력 대한석유공사 사장
한국골프협회 고문

유재흥(劉載興, 1921년 8월 3일 ~ 2011년 11월 26일[1])은 일제 강점기대한민국군인이다. 대한민국외교관정치가국영기업가 등으로도 활동한 바 있다.

그는 한국 전쟁 중에 이끌었던 현리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대한민국 국군이 작전통제권을 상실하는 데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다.[2]

생애

유승렬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호는 국헌(菊軒), 자헌(自軒)이다. 일본 아이치 현 나고야에서 출생하였고 다섯 살 때였던 1925년조선으로 돌아와 충청남도 공주에서 성장하였다.

평안북도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제55기)를 졸업했고,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에는 일본군 육군 대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미군정 시기에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국군육군 대위(군번: 10003)로 임관하였다. 육군사관학교 부교장으로 있다가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제주 4·3 사건에 관여하였다.[3] 그 후 1948년 6월, 육군 제4여단장에 보임되었으며 이듬해 1949년 5월 12일 육군 제6사단장에 전임 임명되었고,[4] 같은 해 1949년 8월에는 육군 제6사단장 직위에서 육군 제2사단장 겸 육군 태백산지구전투사령관 직위로 전임되어 북한군 게릴라 침투 저지 작전을 폈다.[5]

1950년 3월에는 육군 제7사단장에 보임되었고 같은 해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육군 제7사단장으로서 참전하여 의정부 축선을 책임지고 있었으나 북한군에 패전을 거듭하여 덕정-의정부-창동으로 축차 철수를 되풀이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육군 제7사단은 붕괴 괴멸되고 서울이 함락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그 후 1950년 7월 경상북도 함창에서 육군 제2군단이 창설될 때 육군 제2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951년 3월에 육군 제3군단장으로 전임되었고 중공군 참전 이후 벌어진 덕천 전투에서 지휘 실수로 중공군 38군과 42군에 포위를 허용하여 제2군단이 전멸되어 해체케 하였으며, 현리 전투에서도 제3군단을 해체케하는 등 한국 전쟁에서 지휘한 전투마다 패전하였다. 이로 인하여 1951년 5월 25일 육군참모차장으로 전임되었고 같은 해 1951년 7월 시작된 정전회담 당시 남한 옵서버로 참관했으나 부친 유승렬 대좌에 의해 어릴 때부터 일본 군인 교육을 받아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했다.[6] 1951년 5월부터 이듬해 1952년 7월까지 육군참모차장을 지냈으며 1952년 7월부터 이듬해 1953년 3월까지 육군 제3군단장에 다시 보임되었고 1953년 3월부터 이듬해 1954년 3월까지 육군참모차장에 다시 보임되었으며 이후 1954년 3월부터 1957년 5월 17일까지 육군 제3군단장에 또다시 보임되었고 1957년 5월 18일부터 1959년 2월 26일까지 연합참모총장 직무대리를 지냈으며 1959년 2월 27일부터 이듬해 1960년 8월 29일 육군 중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육군 제1군사령관 직위를 지냈고 1960년 5월 31일에는 같은 해 1960년 8월 29일 육군 중장 예편할 때까지는 육군 제1군사령관연합참모총장 직무대리를 직위하고 있었다.

왼쪽부터 이후락, 양유찬, 유재흥, 양유찬의 아내, 김형일.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 정군 대상으로 지목되어 1960년 8월 29일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지만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한 뒤 박정희 정권의 제3공화국에서 등용되어 타이, 스웨덴, 이탈리아 대사 및 대통령 특별보좌관, 국방부장관 등을 지냈다. 주 태국 대사로 있던 1962년 9월, 친선사절단으로 버마를 방문하였다.[7] 1963년, 주 스웨덴 대사에 임명되었다.[8] 이어, 주 이탈리아 대사에 임명되었다.(1967년 9월 16일) [9] 1970년, 대통령 안보담당·국방담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고 1971년,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다. 퇴임 후에는 1974년부터 대한석유공사 사장으로 6년간 재직했다. 1978년에는 석유화학공업협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83년, 한스칸디나비아재단 이사장이 되었고, 1991년 성우회 회장이 되었다.

한국 전쟁 시 잘못된 상황판단으로 본인 지휘하의 1개 사단과 2개 군단이 패주 후 해체되는 결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공으로 1951년에 받은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하여, 수교훈장 등 여러 차례 훈장을 받았다. 1990년대에 전직 장성 모임인 성우회의 부회장과 회장을 지냈으며, 전시 작전통제권 회수 등의 국방 관련 현안에 대해 친미 성향의 보수 세력과 정치적인 행보를 같이 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미군에게 일임하자는 운동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계속되는 패전과 무단도주로 작전통제권이 미군으로 넘어간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였지만, 1990년대 이후 작전통제권 반환 움직임에 결사 반대해 많은 비아냥을 사기도 하였다.1994년 탈출한 조창호 소위가 유재흥과의 면담을 원하였으나 조 소위가 2006년 사망할 때까지 일체의 만남을 거부했다고 전해진다.[10] 경북 경산 하양초등학교에는 유재흥 장군 전승기념비가 있다.[11]

현리 전투 패배와 작전지휘권 상실

현리전투는 1951년 5월 중공군의 5월공세 당시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에게 점령당하여 지휘하던 3군단이 포위됐을 때 벌어진 전투로, 유재흥은 3사단장을 대리로 지정한 후 군단전체가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 군단 사령부로 복귀하겠다며 경비행기를 이용해 포위망 밖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따라 3군단은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와해 상황이 되었으며, 사단장들을 비롯한 모든 지휘관들이 지휘를 포기하고 계급장을 제거한 후 살기위해 무질서한 도피를 시작했다. 결국 현리 전투의 결과 군단 병력의 30%와 중장비의 70%를 손실하게 되었고,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 장군에 의해 3군단은 해체되었다. 이 사건은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 장교의 작전지휘능력을 철저하게 불신하게 된 계기였다. 당시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국군의 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하였다. 1군단 또한 육군본부를 지휘선상에서 제외하고 미군 사령부에서 직접적인 지휘를 받도록 하여서, 이 시점부터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상실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일본에서 자라며 철저한 일본인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어가 서툴러 군에 명령을 하달할 때 "돌아가라"를 "또라가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12]

현리 전투 중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과의 다음과 같은 대화는 아직까지도 유명하며 현리에서의 국군의 치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밴플리트: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잘 모르겠습니다."
밴플리트: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그런 것 같습니다.
밴플리트:"유장군,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일자리나 알아보시오!"[13]

사후

2011년 11월 26일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2011년 11월 29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됐다.[14] 향년 91세

학력

비학위 수료

가계

평가

대표적인 친일파 정치 군인으로 일본군 장교로 활동 중 8.15 광복에 이은 미 군정 당시 제도권 안에 있던 행정, 군사 인력들을 그대로 차용하려는 미 군정의 정책에 힘입어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활용되었다. 대한민국 국군의 전시 작전통제권미국으로 넘어가는 데 결정적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며, 최악의 패전 군인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17]

같이 보기

각주

  1. “유재흥”. 엠파스 인물정보. 2008년 3월 31일에 확인함. 
  2. 김진혁. 전시작전통제권과 세 명의 대통령. 뉴스타파. 2014년 11월 19일.
  3. 제주4ㆍ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유재흥이 부임한 1949년 3월 이후에도 불법적인 군사재판에 의한 학살과 시신 암매장이 있었음.
  4. “각 여단을 사단으로 승격”. 동아일보. 1949년 5월 20일. 
  5. 조갑제 (2011년 11월 28일). “낙동강 방어전의 영웅 劉載興 장군 별세”. KONAS. 
  6. 정경모,판문점의 국군 장성 ‘일본말이 모국어’
  7. 양승윤 (2005). 《미얀마》.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쪽. ISBN 8974643634. 
  8. “瑞典大使에- 劉載興씨任命”. 경향신문. 1963년 8월 7일. ) 
  9. “12國大使任命의결”. 동아일보. 1967년 9월 16일. 
  10. 국군포로 1만9천명 추정 2000년 8월 21일 경향신문
  11. “역대 국방장관들 `전시작통권 국회 동의 거쳐야`”. 중앙일보 (연합뉴스 인용). 2006년 8월 10일. 2008년 3월 31일에 확인함. 
  12. 백선엽,老兵이 걸어온 길-56-사흘간의 2군단장 보직, 국방일보
  13. 육군대학 현리전투 설명문 http://www.army.mil.kr/history/51전반기/반격/현강의9.htm 한글주소인 관계로 직접 링크 불가. 주소 복사후 새주소창에서 열것
  14. 한국전 ‘최악의 패전’ 장군, 국립현충원에 안장〉《한겨레신문》(2011년 11월 30일)
  15. 유재흥 전 국방장관 별세〉 《서울신문》(2011년 11월 28일) 27쪽.
  16. 강태순 두산 고문 모친상 外〉《서울경제》 (2011년 11월 27일)
  17. 한국전 ‘최악의 패전’ 장군, 국립현충원에 안장〉《한겨레신문》(2011년 11월 30일)

참고 자료

전임
정일권
제3대 연합참모본부총장
1957년 5월 18일 ~ 1959년 2월 26일
후임
백선엽
전임
백선엽
연합참모본부총장 권한대행
1960년 5월 31일 ~ 1960년 8월 29일
후임
최영희
전임
(초대)
초대 주(駐)타이 대한민국 대사
1960년 8월 ~ 1963년 8월
후임
이동원
전임
정래혁
제19대 국방부 장관
1971년 8월 25일 ~ 1973년 12월 3일
후임
서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