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다치 미쓰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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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치 미쓰히로
足立 光宏

기본 정보
국적 일본의 기 일본
생년월일 1940년 3월 10일(1940-03-10)(84세)
출신지 오사카 부
신장 173cm
체중 74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투수
프로 입단 연도 1959년
첫 출장 1959년 4월 10일
마지막 경기 1979년 10월 9일
경력

선수 경력

코치 경력

  • 한큐 브레이브스(1980 ~ 1985)


아다치 미쓰히로
일본어식 한자足立 光宏
가나 표기あだち みつひろ
국립국어원 표준아다치 미쓰히로
통용 표기아다치 미츠히로
로마자Mitsuhiro Adachi

아다치 미쓰히로(틀:Ja-y, 1940년 3월 10일 ~ )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이다.

인물

프로 입단 전

오사카 부 출신으로 중학생 시절까지는 오버핸드 투수였지만 오사카 시립 니시 고등학교 1학년 시절 팔꿈치에 부상을 당하면서 1년 간의 휴양 생활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을 계기로 서서히 팔의 위치가 내려지면서 언더핸드 투수가 되었다. 1958년 사회인 야구팀 오사카 다이마루에서 활동할 당시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서 가네보의 보강 선수로서 출전하는 등의 맹활약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프로 구단 스카우트가 아다치를 주목하게 되었다.

현역 시절

이듬해 1959년에는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 애초에는 언더핸드 특유의 성장이 있는 스트레이트를 주무기로 삼아 1962년 5월 24일의 난카이 호크스전에서 1경기 17개의 탈삼진을 뺏어내는 프로 야구 기록(당시)을 수립했고 5년 후인 1967년에는 시즌 20승 10패, 평균자책점 1.75를 기록하면서 최고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함과 동시에 팀의 역사상 최초로 리그 우승 달성에 기여하는 등 퍼시픽 리그 MVP에 선정되었다.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V9시대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2승 4패를 기록하여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그 2승은 모두 아다치가 기록하면서 일본 시리즈 감투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1968년에는 갑작스런 어깨 부상으로 그 해에는 단 한 번도 승리 투수가 된 적은 없었고 다음 해인 1969년에도 2승을 올리는 데에만 그치는 등 침체에 겪었다. 지금까지의 구위력은 없어졌지만 이전에 습득한 싱커를 무기로 삼아 1971년에는 시즌 19승을 기록하여 부활을 이루었고 요네다 데쓰야, 가지모토 다카오, 야마다 히사시 등과 함께 한큐 브레이브스 황금 시대의 주력 투수로서 맹활약을 했다. 타구 처리에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어 1972년에는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수상했고 그 후 1974년부터 1976년까지 통산 네 차례의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33세였던 1973년에는 체력이 쇠퇴해지기 시작하면서 기술적인 벽에 막혀 극심한 부진을 겪는 등 4.63의 평균자책점과 4승 6패의 시즌 성적을 기록했지만 이번에는 원래 가지고 있던 공에다가 커브를 연마하여 두 종류의 커브를 던지는 등의 투구 방법을 익혔다. 그리고 상대의 호흡이나 목적을 제외하는 투구 방법을 익히면서 1974년부터는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기록을 세웠고 1976년에는 아다치로부터 싱커를 습득하면서 배운 야마다가 26승을 올리는 등 한큐의 완전 우승(2시즌제의 전·후기 리그 모두 우승)에 기여했지만, 아다치 본인도 17승을 기록해 야마다와 함께 한큐 투수진의 주축이 되었다.

일본 시리즈에는 강하면서 특히 오 사다하루나가시마 시게오가 소속된 요미우리와 상대하여 좋은 성적을 올린 얼마 안되는 투수였다. 일본 시리즈 통산 9승(5패)은 역대 3위 기록이었는데 그 중 요미우리와 상대하면서 8승 4패라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남기고 있다. 요미우리의 V9시대, 한큐가 요미우리와 상대하면서 승리한 것은 8승이었지만[1] 그 중 5승은 아다치에 의한 것이다. 또 1976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한큐가 3연승을 거둔 뒤에 내리 3연패를 당했고 11월 2일의 7차전에서는 당시 36세 나이에 등판했지만 요미우리의 찬스가 있으면 5만 여명의 요미우리 팬들이 함성을 지르는 분위기 속에 아다치는 “떠들어라, 계속 떠들어라….”라고 중얼거렸고, 그 경기에서 9이닝까지 호투한 끝에 완투 승리를 거둬 한큐의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에 기여했다.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인해 극심한 부진에 빠진 1978년에는 4승 6패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시즌 후반부터는 일본 시리즈에 목표를 두면서 조정했고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맞붙은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3차전에서 완봉승을 따냈는데 1977년 일본 시리즈 2차전(대 요미우리)과 2경기 연속 완봉승은 시리즈 타이 기록이었다. 그리고 한큐의 투수로서 일본 시리즈에서 완봉승을 기록한 것은 아다치가 유일하다. 그러나 1978년 일본 시리즈 7차전에서는 상대 타자 오스기 가쓰오에게 애매한 홈런을 허용했는데 그 홈런으로 인해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이 심판에게 항의하면서 일본 시리즈 사상 1시간 19분 동안 경기가 중단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아다치는 그 원인으로 어깨를 차갑게 해버리는 동시에 부상당했던 무릎에 물이 차면서(아다치는 무릎에 고여있는 물을 빼내면서 일본 시리즈에 임하고 있었다) 경기가 재개되자마자 그대로 강판당했다. 이것이 아다치로서는 일본 시리즈의 마지막 등판이 되었다.

오랜 세월 낮은 투구 자세를 지탱했던 무릎에 부상을 당하면서 그 후 시즌 성적은 뚜렷한 결과를 남기지 못했고 1980년 시즌 끝으로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전년도인 1979년까지의 은퇴로 여겨지기는 쉽지만 1980년에는 코치 겸임으로 선수 등록을 하고 있었다).

그 후

1980년부터 1985년까지 한큐의 2군 투수 코치를 거쳐 1986년부터는 한큐·오릭스 구단의 스카우트가 되었다. 2009년 2월부터는 간세이가쿠인 대학 야구부의 임시 코치로 부임되었다.

에피소드

스트레이트 중심의 투구 폼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 야마다 히사시는 아다치에게 싱커를 던지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지만 “그런 것은 기억하지 않아도 좋다!”라고 거부했다. 이것은 “직구로 승부할 수 있는 시기는 그것을 살린 투구를 하는 것이다”라는 자신의 경험에 의한 것이었지만 후에 “자신보다 젊은 야마다가 싱커를 기억하면 대단한 위협이 된다고 느꼈다. 팀에 같은 타입의 투수는 2명 정도 필요 없다”라고 정직한 기분을 드러냈다.[2]

그 후에는 야마다에게 싱커를 던지는 방법을 가르쳐주면서 세심하게 지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렇게 잡지만 던지는 방법은 사람마다 각자 다르다. 그 후에는 스스로 생각해라” 라고 힌트를 주는 것에 그치고 있다. 그것은 야마다 본인이 싱커 습득에 열을 올리고 있었을 무렵 야마다는 “처음부터 배우면 ‘아, 이런 것인가’라고 끝났을 지도 모른다. 스스로 고심하고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극히 참고가 되었다”라고 말했다.[2]

상세 정보

출신 학교

  • 오사카 시립 니시 고등학교

선수 경력

사회인 시대
프로팀 경력

지도자·기타 경력

수상·타이틀 경력

타이틀

  • 최고 평균자책점 : 1회(1967년)

수상

개인 기록

등번호

  • 16(1959년 ~ 1980년)
  • 71(1981년 ~ 1985년)

연도별 투수 성적














4






















4














W
H
I
P
1959년 한큐 36 11 2 0 0 4 7 -- -- .364 466 111.2 113 4 25 1 3 63 0 0 57 47 3.78 1.24
1960년 41 13 1 1 0 4 7 -- -- .364 449 112.1 101 6 19 2 3 52 1 0 42 40 3.19 1.07
1961년 27 6 0 0 0 1 4 -- -- .200 267 62.0 71 7 11 0 2 37 0 0 33 28 4.06 1.32
1962년 39 9 4 4 2 8 4 -- -- .667 483 123.2 92 8 22 3 1 94 0 0 32 27 1.96 0.92
1963년 47 24 5 2 0 6 18 -- -- .250 803 200.2 187 24 31 6 6 121 0 0 89 77 3.45 1.09
1964년 46 29 8 4 2 13 15 -- -- .464 927 236.0 200 26 37 3 5 125 0 0 82 73 2.78 1.00
1965년 31 24 10 4 2 15 9 -- -- .625 684 171.0 146 14 35 1 11 104 0 0 59 52 2.74 1.06
1966년 52 30 10 3 2 17 14 -- -- .548 1099 270.1 243 27 49 5 14 158 0 0 98 79 2.63 0.71
1967년 43 29 17 5 1 20 10 -- -- .667 1042 268.0 191 13 60 10 9 130 0 0 65 52 1.75 0.94
1968년 5 4 0 0 0 0 1 -- -- .000 74 18.0 13 2 5 0 1 12 0 0 11 7 3.50 1.00
1969년 33 5 0 0 0 2 1 -- -- .667 265 60.1 73 10 10 2 6 32 0 0 39 32 4.80 1.38
1970년 46 6 3 0 0 9 2 -- -- .818 469 117.0 112 11 24 3 3 59 0 0 45 39 3.00 1.16
1971년 43 32 18 4 3 19 8 -- -- .704 996 252.2 200 21 55 9 11 116 0 0 80 70 2.49 1.01
1972년 34 23 12 1 2 16 6 -- -- .727 785 195.1 174 25 31 5 4 71 0 0 69 57 2.63 1.05
1973년 27 15 3 0 1 4 6 -- -- .400 443 103.0 117 20 23 5 6 41 0 7 60 53 4.63 1.36
1974년 30 27 8 3 0 10 9 1 -- .526 758 180.2 183 17 40 9 11 66 1 1 76 63 3.13 1.23
1975년 26 25 16 1 3 11 10 0 -- .524 780 191.2 177 12 32 7 11 66 0 0 69 58 2.72 1.09
1976년 31 29 14 2 3 17 8 1 -- .680 868 212.2 207 18 27 3 14 67 2 0 80 60 2.54 1.10
1977년 20 15 7 2 3 7 7 0 -- .500 461 114.0 117 10 17 3 3 38 0 0 54 40 3.16 1.18
1978년 15 14 3 0 0 4 6 1 -- .400 371 85.2 101 13 12 3 6 23 0 0 47 40 4.19 1.32
1979년 4 2 0 0 0 0 1 0 -- .000 71 16.1 20 4 2 0 0 7 0 0 13 11 6.19 1.35
통산 : 21년 676 372 141 36 24 187 153 3 -- .550 12561 3103.0 2838 292 567 80 130 1482 4 8 1200 1005 2.91 1.10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 1980년은 코치 겸임으로 선수 등록을 했지만 실제로는 한 경기도 등판하지 않았음.

주석

  1. 1967년 ~ 1969년, 1971년 ~ 1972년 일본 시리즈 당시 한큐는 요미우리와의 상대 전적에서 8승 20패의 성적을 기록했다.
  2. 분슌 비주얼 문고 《마구 열전》 - 문예춘추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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