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식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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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RULE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6월 28일 (일) 07:54 판
김용식
金容植
출생1910년 7월 25일
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황해도 신천
사망1985년 3월 8일(1985-03-08)(74세)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거주지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황해도 신천
일제강점기의 기 일제강점기 황해도 신천
일제강점기의 기 일제강점기 경성부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별남성
국적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학력경성 경신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 보성전문학교 졸업
직업스케이트 선수 (축구로 전향)
축구 선수
축구인
활동 기간1919년 ~ 1952년
소속대한축구협회 부회장 겸 기술지도위원장
부모김주역(부)
김용식
金容植
개인 정보
로마자 표기 Kim Yong-Sik
출생일 1910년 7월 25일
출생지 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황해도 신천
사망일 1985년 3월 8일(1985-03-08)(74세)
사망지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포지션 미드필더 / 공격수
구단 기록*
연도 구단 출전 (득점)
1933–1937
1940-1942
1946-1948
경성 축구단
평양 축구단
경성 축구단
국가대표팀 기록
1936-1940
1945-1950
일본
대한민국
3 (0)
지도자 기록
1954-1955
1960
1968
1969
1981-198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양지 축구단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할렐루야 축구단
* 구단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정규 리그의 공식 리그 경기 기록만 집계함. 또한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마지막 리그 경기 기준임.
‡ 국가대표팀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마지막 리그 경기 기준임.

김용식(金容植, 1910년 7월 25일 ~ 1985년 3월 8일[1])은 대한민국축구 선수이다. 본관은 개성(開城)이다. 황해도 신천 출생이며 경성부에서 성장하였다. 역시 원적지는 황해도 신천이다.

1935년, 경성축구단의 멤버로 전일본선수권대회(현재의 천황배)에서 우승하였다. 1936년에 개최된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출전하여 조선 선수로는 유일하게 출전하였다. 이 대회에서 〈베를린의 기적〉이라 불리던 8강 진출에 성공하였다. 이 대회에서 베를린으로 떠나는 배 갑판에서 우연히 손에 넣은 영국의 축구기술 서적을 읽고 축구는 체력이 아니라 기술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때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훈련하는 이른바 ‘1만 일 훈련’을 1936년 11월 15일에 시작해 1979년 1월 15일 마침내 뜻을 이룬다.[1][2]

서울축구단, 교통부 축구단(현 인천 코레일 축구단), 조선전업 축구단(현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축구단), 육군 축구단에서 활동하였으며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대한민국 대표로 출전하여 8강까지 진출하였다. 1952년에 현역에서 은퇴하였고. 1954년 FIFA 월드컵에서는 감독으로 참가하여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일구어냈다. 이 대회에서 김용식 감독은 "다 져도 좋다. 그러나 한 골만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 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3] 1968년에는 양지 축구단의 감독을, 1980년에는 할렐루야 축구단의 창단 감독을 맡았고, FIFA 국제심판과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지병으로 타계한 1985년에 체육 훈장 맹호장이 수여되었다.

2004년 대한축구협회가 추천한 FIFA '100주년 인물'이었기도 하며 2005년 홍덕영, 차범근, 거스 히딩크 감독 등 여섯 명과 함께 대한축구협회가 선정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4] 현재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 있는 월드컵 기념관에 흉상이 장식되어 있다.

학력

같이 보기

각주

바깥 고리

전임
대한민국 이유형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54년 6월
후임
대한민국 박정휘
전임
대한민국 정국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60년 3월
후임
대한민국 위혜덕
전임
대한민국 박일갑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69년 1월 - 1969년 10월
후임
대한민국 강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