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드레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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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드레퓌스

알프레드 드레퓌스(프랑스어: Alfred Dreyfus, 1859년 10월 9일 - 1935년 7월 12일)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알려진 프랑스 육군의 주요 인물이다.

목차

[편집] 어린 시절

알자스에서 방직 공장 경영인의 아들로 태어난 드레퓌스의 어린 시절은 풍요롭고 평범했다. 그 당시는 방직 산업이 잘 돌아가던 때였다. 그는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다으며 친구들도 매우 신뢰했다고 전해진다. 학교 선생님들도 '성실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비록 유대인이었지만 그가 살고 있는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강렬했다. 군에서도 그를 '성실하며 군에 대한 충성심이 강렬하다'고 평가했다.

[편집] 드레퓌스 사건

드레퓌스 사건
관련된 표제어
조사와 체포
재판과 유죄 판결
피카르의 조사
다른이들의 조사
정치적 의혹
해결
알프레드 드레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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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는 1890년에 육군 대위로 승진했고 루시라는 여자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행복하게 지냈고 별다른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1894년 9월 어느 날, 육군 참모본부 손에 들어간 편지 한 장이 그를 괴롭게 하였다. 부부 사이에는 '별다른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그 편지는 소령페르디낭 에스테라지(프랑스어: Ferdinand Walsin Esterhazy)라는 간첩(Spy)가 쓴 것인데도 불구하고 참모본부는 'D'라는 글자 하나 때문인지 죄 없는 사람을 체포했다. 정작 체포당한 사람은 프랑스에 대한 애국심이 강렬하고 임무도 성실하게 다했다는 드레퓌스였다고 한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잡아들였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반유대주의 감정이 폭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드레퓌스를 무죄라고 주장한 사람(사실 무죄였다)은 조르쥬 피카르(프랑스어: Georges Picquart)라는 중령 계급의 영관장교였다. 그는 참모본부 정보국에서 일하면서 또다른 간첩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드레퓌스는 무죄이며, 진범은 에스테라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참모본부 상부에 이 사실을 알리며 재심을 건의했지만 오히려 체포되었다. 그 때 증거자료 몰래 복사해서 실어 낸 어느 한 신문에 의해 드레퓌스 사건이 세상에 공개된다. 하지만 가장 곤란한 상대는 진범인 에스테라지 본인이었다. 그는 이런저린 거짓말을 늘어놓고 다녔고, 놀랍게도 참모본부는 그의 거짓말을 눈감아주었다. 소설가에밀 졸라(역시 참모본부를 모욕한 죄로 1년간 영국으로 망명함)와 장 조레스 등의 지식인과 피가로라는 신문 등이 에스테라지 범인설을 주장했지만 대부분 언론들은 반유대주의 감정 때문에 '드레퓌스는 죽어라'는 등의 폭언을 일삼았다.

드레퓌스가 악마섬에서 유배된 동안 프랑스에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그렇지 않은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는 반(反)드레퓌스파로 완전히 양분되었다. 테오도르 헤르츨시오니즘을 제창한 이유도 드레퓌스 사건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면 된다.

1898년 8월, 앙리 중령이 면도칼로 목을 찔러 자살하자 드레퓌스는 재판을 다시 받을 수 있었다. 드레퓌스는 1899년에 사면되었다. 그러나 반유대주의 정서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1904년에 재심이 청구되었고 1906년에 드레퓌스의 무죄가 선고되었다. 참모본부가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드러났음을 보여주는 극적인 사건이었다.

[편집] 그 이후

그 이후 계급장을 돌려받고 소령으로 승진함은 물론, 레지옹도뇌르 훈장까지 받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하고 진급도 하고 일반 군인들처럼 생활하다가 1935년에 지병으로 별세했다.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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