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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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을 둘러싼 당대 프랑스 국민들의 분열을 풍자한 1898년 2월 14일자 만평. 대가족의 식사 시간에 “오늘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맙시다.”라고 이야기하지만, 바로 다음 장면에서 “결국은 이야기했다”라면서 온 가족이 난장판이 되도록 싸우고 있다.

드레퓌스 사건(프랑스어: L'affaire Dreyfus)은 19세기 후반의 수년 동안 프랑스를 양분했던 정치적 추문 사건이다.

사건의 전말[편집]

프랑스 육군의 포병대위였던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1894년 소령페르디낭 에스테라지(프랑스어: Ferdinand Walsin Esterhazy)라는 간첩이 쓴 문건으로 인하여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강제로 불명예 전역된 뒤, 프랑스령 기아나악마섬으로 유배당한다.

드레퓌스는 잘못된 증거 자료에 기초를 둔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사실 드레퓌스는 무죄였다.(정보 유출에 사용된 문건에서 발견된 암호명 'D'. 이에 따라 유태계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그 이름의 첫글자가 암호와 일치한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지목했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고간 것이다. 당시 고급 장교들은 그들의 실수를 덮으려고 사실을 은폐했으며, 반유대적인 가톨릭교회보수주의 언론들도 드레퓌스 사건을 침소봉대하여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 조르쥬 피카르 중령이 우연한 기회에 진짜 간첩 에스테라지를 적발하게 되었다. 그는 참모본부 정보국에서 일하면서 또다른 간첩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드레퓌스는 무죄이며, 진범은 에스테라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따라 그는 참모본부 상부에 이 사실을 알리며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진범은 무죄로 풀려나고 피카르는 군사기밀 누설죄로 체포된다. 그의 무죄 주장도 묵살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때 증거자료를 몰래 복사해서 실어 낸 어느 한 신문에 의해 드레퓌스 사건이 세상에 공개된다. 하지만 가장 곤란한 상대는 진범인 에스테라지 본인이었다. 그는 이런저린 거짓말을 늘어놓고 다녔고, 놀랍게도 참모본부는 그의 거짓말을 눈감아주었다.

나는 고발한다[편집]

작가 에밀 졸라1898년 1월 13일 문학 신문 로로르(L'Aurore, 여명)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제목으로 대통령 펠릭스 포르(Félix Faure)에게 보내는 유명한 공개 편지를 기고함으로써 일반 사회에 그 사건을 폭로한다.(에밀은 군법회의를 중상모략했다는 이유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 중에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1899년에 귀국한다.) 역사학자 바브라 투흐만은 이를 한마디로 '역사상 위대한 소동'의 하나라고 말한다.

이 밖에도 여러 지식인과 신문사 르 피가로 등이 에스테라지 범인설을 주장했지만 대부분 언론들은 반유대주의 감정 때문에 '드레퓌스는 죽어라'는 등의 폭언을 일삼았다.

드레퓌스가 악마섬에서 유배되어 있는 동안 프랑스에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그렇지 않은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는 반(反)드레퓌스파로 완전히 양분되었다. 유대인들은 간첩으로 몰리기까지 하자 테오도르 헤르츨을 중심으로 하느님이 약속했다는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을 건국하겠다는 시오니즘운동을 시작한다.

진보적 지식인들의 비판[편집]

에밀 졸라를 비롯하여 아나톨 프랑스, 앙리 푸앵카레, 장 조레스 등등의 수많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프랑스 군부와 정부에 대한 비판, 세계 언론과 외교적인 부담이 가중되었고, 1898년 8월, 앙리 중령이 면도칼로 목을 찔러 자살하자 드레퓌스는 재심을 받지만, 군사법원에서는 10년형으로 형량만 감했을 뿐 유죄판결을 뒤집지는 않았다.

단, 선고 후 대통령이 사면해서 감옥에서는 풀려나왔지만 복권은 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지식인들의 끈질긴 요구에 의해 1904년에 재심이 청구되었고 1906년에 드레퓌스의 무죄가 선고되어 모든 혐의를 벗고, 복권도 되어 육군에 복직했다. 그 이후 소령으로 승진함은 물론,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하고 진급도 하고 일반 군인들처럼 생활하다가 1935년에 지병으로 별세했다.

가톨릭 교회의 선동[편집]

라 크롸와 르 펠렝 등 가톨릭 계열 주요 일간지와 지방 신문 등 <성모승천수도회> 회원 들이 경영한 신문들은 체계적으로 반드레퓌스파들을 지지하기 위한 종교적인 영역을 맡고 있었으며 민족주의를 찬양하고 유대인들을 적국 국민으로, 그리고 외국 시민으로 심지어 이웃국가가 파견한 스파이라고 매도했다. 반드레퓌스파 신문들은 집단적인 반드레퓌스파 프랑스의 이미지를 전파하는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1]

예수회의 조작[편집]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날 당시 프랑스 육군 사관학교 생도들은 가톨릭 예수회 교단이 운영하는 예비학교 과정을 거쳐야 했다.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하자 참모본부에 속한 이들의 대부분은 예수회 교단과 결탁해 공화국을 흔들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비요장군(당시 국방장관)은 참모본부를 예수회파(Jesuitiere)라는 이름으로 지칭했다. 또한 드레퓌스 지지파들도 경멸적인 의미로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2] 이에 에밀 졸라는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를 쓰기 전 1898년 1월 7일 <<프랑스에 보내는 편지>>라는 팜플렛을 통해 "프랑스여 그대는 교회가 지배하던 과거로 되돌아 가려고 하는가"라며 통탄했다.[3]

또 드레퓌스 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신문은 예수회가 자금을 지원한 <라 리브르 빠롤>지였고 바일리 신부가 창간한<라 크로와>등 여타 가톨릭 계열 신문들이 앞장서서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했고 반유태인 정서를 날마다 되풀이했다. 이 <라 리브르 빠롤>지의 발행인 에두아르 드뤼몽에게 자금을 대준 사람이 예수회의 뒤락(Du Lac) 신부였다. 그는 또 당시국회 내의 충실한 가톨릭 교회 옹호자 드문(de Mun)백작과 참모본부의 총참모장 드 브와데프르의 고해신부이기도 했다.[4]

가톨릭 연구가 에드몽 파리는 "대부분의 성직자와 주교는 드레퓌스의 범죄를 확신하고 있다"고 부르게레트는 기록하였으며, 게오르그 소렐 또한 이렇게 공언하였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사회 전체가 분열된 반면 가톨릭계는 철저하게 일치하여 재조사에 반대하였다. 교회의 모든 정치력이 드레퓌스 사건에 집중되었다."며 예수회가 만든 신문과 가톨릭 교회와 예수회가 주축이 된 군부가 한통속이 되어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5]

또 예수회의 기관지 <씨빌타 카톨리카>에 '유태인 드레퓌스라는 제하의 기사로 다음과 같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명확히 표명하였다. "유태인들은 프랑스 공화국을 장악하고 프랑스적이기보다는 히브리적인 나라로 이끌어왔다. 유태인들은 어느 곳에서나 반역을 도모하는 스파이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유태인은 프랑스 뿐만 아니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태리에서도 추방되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과거의 위대한 평화를 재건하게 되고, 제국은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게 될 것이다."[6]

에드몽 파리는 조셉 레이나크(Joseph Reinach)의 말을 인용해 이 사건을 이렇게 결론내린다 "보다시피 이 흉악한 사건은 이 예수회 회원들의 음모이다. 사실 드레퓌스 사건은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도 인정하듯이 사회적인 우상들과 1789년 대혁명 정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7]

각주[편집]

  1. 임종권《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세력-우파와 가톨릭 교회》(숭실사학회 제29집)
  2. 에밀 졸라<<전진하는 진실>>P209
  3. 에밀 졸라<<위 책>>P164
  4. 에드몽 파리<<예수회의 비밀 역사>>P165
  5. 에드몽 파리<<위 책>>P172
  6. <The Civilta Cattolica>1898년 2월5일자
  7. 에드몽 파리<<위 책>>P175

함께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