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요시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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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영정. 쇼코슈세이칸(尚古集成館) 소장. *尚古集成館: 카고시마시(市) 요시노마찌(吉野町) 소재(所在)
시마즈씨(島津氏)의 가문(家紋)

시마즈 요시히로(일본어: 島津義弘 (しまづよしひろ), 1535년 ~ 1619년)는 센고쿠 시대에서 에도 시대에 걸쳐 활약한 무장이자 다이묘이다. 약 200여년간 조상 대대로 사츠마 지방의 슈고 다이묘(守護 大名)[1] 였으며, 시마즈씨의 17대 당주(堂主)이자, 에도 시대 사츠마번(薩摩藩) 초대 번주 시마즈 이에히사(일본어: 島津家久 (しまづいえひさ))의 아버지이다. 임진왜란 당시 풍신수길의 명을 받아 선발대로 조선 반도에도 건너왔으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의 일본측 지휘관이었으며 전라북도 남원성 점령 당시 심당길 등 조선의 도공 80명을 전리품으로 일본에 강제 연행했던 일 등으로 한국에서도 악명이 높다[2].


생애[편집]

성장기[편집]

1535년(덴몬4년) 7월 23일생. 시마즈 타카히사(일본어: 島津貴久 (しまづたかひ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3]. 성인식 때 부여된 이름은 타다히라(忠平)였지만 후일 세이이대장군에 오른 아시카가 요시아키[4]의 이름 중 한 글자를 하사받고 요시타카(일본어: 義珍 (よしたか))로 바꿨다[5].

1554년(덴몬23년) 다이묘인 아비 타카히사와 함께 오오스미 지방[6]의 이와츠루기(일본어: 岩劍 (いわつるぎ)) 공략전에 처녀 출전했다.

1557년(코지3년) 오오스미 지방의 호족 가모우씨(蒲生氏) 토벌전에서 처음 적의 수급을 베고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자신 역시 화살 5발을 맞는 중상을 입은 끝에 거둔 승리였다[3].

1560년(에이로쿠3년) 음력 3월 19일 휴우가 지방[7]슈고 다이묘인 이토 요시스케(일본어: 伊東義祐 (いとうよしすけ))의 침입으로, 오비성(일본어: 飫肥城 (おびじょう))의 친척 시마즈 타다치카(일본어: 島津忠親 (しまずただちか))가 위기에 처했는데 종가 회의 전체의 결정으로 요시히로의 입양이 결정되었다. 그에게 할당된 얼마간의 병력과 함께 오비성에서 농성했다.

1562년(에이로쿠5년) 버티길 1년여, 이번엔 사마즈 본가가 오오스미 지방의 다이묘 기모츠키(일본어: 肝付 (きもつき)) 일족의 공격을 받게 되자 본가로 다시 돌아가야 했고, 요시히로의 부대가 없어진 오비성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어 입양됐던 일도 흐지부지되었다.

1563년(에이로쿠6년) 오오스미 북부의 키타하라(北原)씨의 영지가 휴우가의 다이묘, 이토 요시스케에게 점령되자 요시히로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가 그곳을 재점령하였으며, 점령 이래 키타하라씨의 이이노성(일본어: 飯野城 (いいのじょう))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았다[3].

1566년(에이로쿠9년), 휴우가(日向) 지방의 다이묘 이토 요시스케가 이이노성을 재공략하기 위해 교두보로서 미츠야마 산성(三ツ山城)을 건설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급히 큰형 요시히사(義久), 동생 토시히사(일본어: 歳久 (としひさ))와 함께 군대를 끌고 완공 직전에 함락시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토의 원군이 도착, 고립되어 절망적인 전투를 계속해야 했고 부하들의 목숨 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도 위험한 지경에서 겨우 퇴로를 마련한 끝에 삼형제가 겨우 사지를 빠져나왔다.


세력확대[편집]

1566년(에이로쿠9년), 하쿠유우(伯囿)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승이 되어 은거[8]한 아버지 타카히사의 뒤를 이어 큰형 요시히사가 16대 당주 자리에 올랐다. 지략이 뛰어나기로 규슈에서 유명했던 형[9][3]을 보좌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마즈씨의 세력확대에 절대적인 공헌을 시작했다.

1572년(모토카메3년), 키사키하라의 전투에서 숙적 이토 요시스케의 3천의 대군을 300명에 불과한 병사로 요격했다. 이 전투는 후일 규슈의 오케하자마 전투로 불린다.

1577년(텐쇼5년)에는 이토 요시스케를 휴우가 지방에서 몰아내고 규슈 남부를 제패했다. 이토 일족은 북규슈의 오오토모 일족에게 귀순한다.

1578년(텐쇼6년)에는 미미카와(耳川) 전투를 진두 지휘, 분고[10] 방면에서 쳐들어온 규슈 북부의 패자(覇者) 오오토모 군을 격퇴했다.

1581년(텐쇼9년)에는 히고 지방[11]의 슈고 다이묘 사가라씨(相良氏) 일족이 시마즈씨에게 귀순했고, 공석이 된 히고 슈고직에 그가 임명됐다. 원래 거점이었던 이이노성에서 사가라 일족의 근거지였던 야시로(八代)성으로 옮겨 아소씨(阿蘇氏) 등 규슈 중부의 반 시마즈 세력들을 정리하고 분고 지방으로 쳐들어가 규슈 북부 오오토모 일족의 영토를 하나하나 점령해 들어갔다. 그는 다이묘였던 형을 대신하여 사츠마 군의 총대장으로서 직접 진두에서 승전을 거듭했다.

1587년(텐쇼15년) 음력 4월 17일 파죽지세로 규슈 통일을 목전에 두게된 시점에, 토요토미 히데요시(일본어: 豊臣秀吉 (とよとみひでよし))가 보낸 10만 연합 규슈 원군과 네시로자카(일본어: 根白坂 (ねしろざか)) 언덕에서 맞딱뜨렸다. 이때 요시히로는 총대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칼을 뽑아들고 뛰어들어야 했을 정도로 전황은 어려웠고 분전했으나, 상식적으로도 일개 사츠마 지방의 병력으로는 일본을 거의 통일한 토요토미 연합군과 애시당초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이윽고 음력 5월 8일에 형 요시히사가 먼저 항복했다. 요시히로의 시마즈군 본대는 고립되어 이 사실조차 몰랐고, 배수진을 치고 결전을 앞둔 상태에서 5월 22일 토요토미의 사자로 형이 직접 항복을 설득하러 오자, 장남 히사야스(久保)를 인질로 보내고 항복했다. 히데요시는 이에 보답, 원래 시마즈씨의 영지였던 사츠마[12], 오오스미[6] 지방에 휴우가(日向) 지방까지는 시마즈씨의 영지로 인정해줬다. 결과 토요토미 치하에서 시마즈씨는 규슈 남부 전체를 수중에 넣게 됐다.

형 요시히사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머리를 깎고 은거(隱居), 스님이 되었고 후임으로 요시히로가 뒤를 이어 시마즈씨의 17대 당주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일로, 실질적으로 형이 시마즈씨 집안의 정치, 군사적 실권을 계속 쥐고 있었고 시마즈 집안 모두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정식적인 다이묘 이임식은 없었다고 한다. 일각에선 히데요시와 그의 측근들이 시마즈씨가 너무 강대해지지 않도록 계속 분열을 획책했기 때문에 일부러 형인 요시히사를 제치고 동생 요시히로를 다이묘로 임명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 예로 이듬해 1588년(텐쇼16년)에 요시히사, 요시히로 형제가 같이 상경(上京)[13]했다. 요시히로는 칸파쿠(關白)[14]였던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원래 히데요시의 성씨(氏)인 하시바(羽柴)씨와 일본 유수의 귀족 성씨인 토요토미씨(豊臣氏)를 함께 하사받은 반면 형에겐 하시바씨만이 하사됐다. 그럼에도 시마즈 형제는 서로 대립하는 일없이 결속을 풀지 않았다[15][16].

임진왜란 이후[편집]

정유재란(1597년) 당시 1천여 척의 일본 전선을 총집결시켜 연합 함대를 조직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元均)이 지휘하던 조선함대를 격파하였고, 이듬해(1598년) 봄에는 사천 선진리성에서 7천 명의 병사로 조(朝)·명(明) 연합군 4만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사천 전투) 12월에 순천왜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일본어: 小西行長 (こにしゆきなが))를 구출하기 위해 5백 척의 함대를 이끌고 갔으나, 노량 해전에서는 조·명 연합 함대와의 야간 해전에서 겨우 50여 척만이 도주했을 정도로 참패했다[17](다만 일본군의 퇴로 확보라는 목적 달성에는 성공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의 서군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시다 미쓰나리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고작 1천 5백명의 병력만 이끌고 오자 명색이 다이묘인데 데리고 온 병력이 1만명도 안되냐며 마구 꾸짖고 모두 앞에서 망신을 줬다. 한 번은 요시히로가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직접 기습작전을 건의하였으나 병력이 1천 5백명밖에 안되는 주제에 말이 많다는 답변을 들으며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면박을 당한 일도 있었다. 결국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잇다른 배신으로 승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쪽으로 기울었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전황을 파악하고 적진을 정면으로 돌파 철수하였다. 퇴각 작전으로 1,500명의 병사 중 300여명만이 살아남는 피해를 입었고 그나마도 계속 동군의 공격을 받아 80여명만이 사츠마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후 시마즈 요시히로와 사츠마 군은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를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화해를 도모하는 한편, 동남아시아와의 교역을 바탕으로 군비를 증강한다. 그러자 이에야스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를 주축으로 한 사츠마 토벌군을 보내지만 번번이 패하였고, 장기전으로 막 출범한 막부 위신의 손상을 우려한 이에야스는 정벌 중단 명령을 하달했다.

1602년 결국 세이이 대장군 이에야스에게 아들 시마즈 다다쓰네를 인질로 보내는 조건하에 영지를 보존받을 수 있었고 그의 집안은 유력 토자마 다이묘로서 에도 시대에도 존속하게 됐다. 1619년 음력 7월 21일 요시히로는 오스미 가지키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85세.


인물 및 일화[편집]

  • 조선왕조가 역대 유명인물의 하마평을 정리한 국조인물고(國造人物庫) 중 이순신(李舜臣)편을 보면 시마즈 요시히로를 심안돈오(沈安頓吾)라고 적고 있다[18]. 이것은 일본 풍습에 고대 중세 근세를 통틀어 사무라이나 귀족의 성씨(氏)[19][20] 옆에, 존칭에 해당하는 토노(展)를 붙이는데 항왜(降倭)들의 보고나 왜군과의 교섭과정에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존칭으로 불린 것을 본명으로 착각, 심안돈오(沈安頓吾)라고 표기한 듯하다.
  • 명나라의 허의후에게서 배운 의술 뿐 아니라 다도(茶道)와 학문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문화인이었고, 가신을 소중히 여겨 아랫사람이라고 하대하지 않고 때로는 병졸과 함께 불을 쬐기도 했다. 당시 조선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겨울철이면 대부분의 병사들이 얼어죽었는데 시마즈군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으며, 사후에 순사를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13명의 가신이 그를 위해 순사하였다고 한다.
  • 집에 새로 아이가 태어난 가신이 있으면, 아이가 생후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부모와 함께 저택으로 불러서 아이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아이는 보물이다"라며 그 탄생을 축하하기도 했다. 또 원복한 사람의 첫 알현 자리에서 그 사람의 아버지가 공훈이 있는 사람이면 "아버지를 닮아 아버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겠지?", 공훈이 없는 사람에게도 "자네 아버지는 운이 안 좋아 공훈을 세우지 못했지만, 자네는 아버지보다 우수해 보이니 공훈을 세울 수 있을 게야."라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을 걸어 격려하였다.
  • 《간양록》에서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무용이 다른 무장들 못지 않으며, 당시 사람들이 "요시히로가 제 실력을 발휘한다면 일본 하나 집어 삼키는 것 정도는 문제도 아니다"라고 평가하였다고 적고 있다. 또한 게이초 4년(1599년)에 시마즈 집안의 영지 8만 석의 가신 이쥬인(伊集院) 집안이 일으킨 쇼나이의 난에서 반란군이 장악한 12성 가운데 겨우 3성만을 함락시킬 정도로 고전하는 와중에도 원병을 보내주겠다는 가토 기요마사 등의 제안에 "내 부하가 반기를 들었으니 마땅히 내 손으로 없애야지 어찌 남의 구원병을 번거롭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고 한다.
  • 전쟁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굉장한 애처가로 가정적이고 인정미가 넘치는 성격이었으며, 조선에 주둔하는 와중에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3년이나 조선의 진중에서 고생한 것도 시마즈의 집이나 아이들을 위해서였소. 하지만 만약 내가 죽으면 아이들은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 눈물이 멈추지 않소. 당신에게는 많은 아이가 있으니까, 내가 죽더라도 아이들을 위해서도 강하게 살아주기 바라오. 그렇게 해주는 것이 불경 1만 부를 읊어 주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요." 라고 적고 있었다.
  • 숙적 이토 요시스케(일본어: 伊東義祐 (いとうよしすけ))와의 기자키하라(木崎原) 전투에서 그의 애마가 앞발의 무릎을 번쩍 들어 적의 공격을 튕겨내(원문:일본어: 躱す (かわす)) 요시히로의 생명을 구한 일이 있는데, 이후 요시히로는 이 말을 히자츠키쿠리게(슬돌율모 일본어: 膝突栗毛 (ひざつきくりげ): 무릎찌르기밤색말이란 뜻)라 명명하고, 자신의 목숨을 건 중요한 일전에만 타고 다녔다 한다[21].


참고문헌[편집]

  • '시마즈 중흥기'『島津中興記』(세이쵸샤(青潮社), 1979년 8月 초판발행)
  • '시마즈 요시히로에 관한 모든 것'『島津義弘のすべて』 미키 야스시(三木靖)作 (신진부츠오라이샤(新人物往来社)、1986년 7月 초판발행)
  • '전국큐슈군기'『戦国九州軍記』(가쿠겐 홀딩스(学研ホールディングス), 역사군상 시리즈 제12권、1989년 6月 초판발행)
  • '큐슈전국의 무장들'『九州戦国の武将たち』 요시나가 마사하루(吉永正春)作(우미노토리샤(海鳥社)、2000년 11月 초판발행)
  • '열백 시마즈전기'『裂帛 島津戦記』(가쿠겐 홀딩스(学研ホールディングス), 역사군상 시리즈 제6권、2001년 8月 版))
  • '시마즈 요시히로의 도박'『島津義弘の賭け』야마모토 히로부미(山本博文)(츄오코-론신샤(中央公論新社) 츄코우분코(中公文庫)、2001년 10月 초판발행
  • '전국무장 시마즈 요시히로'『戦国武将 島津義弘』(카고시마 아이라쵸(姶良町) 역사민속자료관(歴史民俗資料館) 펴냄、2006년 10月 발행)


주석[편집]

  1. 슈고 다이묘: 막부에서 직접 임명된 다이묘. 무로마치(室町) 막부는 가마쿠라 막부의 전례를 답습하여 일본 전국에 가신들을 지방 군주인 슈고직에 임명, 일본을 통치했다. 응인(應仁)의 난(亂)이후 아시카가(足利) 정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쇼군이 직접 임명한 슈고들의 힘 역시 약해졌으며, 유력한 신흥 세력이 막부에서 임명된 슈고 다이묘들을 내쫓고 스스로 다이묘(大名) 자리에 오르는 데 이를 따로 전국(戰國) 다이묘(大名)라고 부른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로 유명한 오다씨는 대표적인 전국 다이묘로, 슈고 다이묘였던 자신의 상전, 시바씨(斯波氏)를 몰아내고 스스로 다이묘 자리에 올랐다.
  2. <이병선기자의 외교기행 칼럼> `征韓論 발상지`한반도와 악연 -문화일보 2004년 12월 17일 기사
  3. 열백(裂帛-비단을 찢음) 시마즈 전기『裂帛 島津戦記』
  4.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 마츠나가 단조에 의해 처형된 전임 대장군 요시테루의 동생. 오다 노부나가의 추대로 후임 대장군에 올라 아츠치 모모야마 시대를 열었다. 후일 오다 노부나가를 토벌하려다 실패해 쿄토에서 쫓겨나 이곳저곳을 방랑하게 된다.
  5. 시마즈씨는 무로마치 시대에 같은 겐지(源氏)인 쇼군 아시카가씨에게 사츠마 지방의 슈고(守護)직을 제수받고 현재 카고시마 현에 정착하게 되었다. 아시카가씨와 인연이 깊은 집안이다.
  6. 현재 동(東)카고시마현(鹿児島県)
  7. 현재 규슈 남부의 미야자키현(宮崎縣)
  8. 은거(隱居):은퇴해 물러남
  9. 요시히로의 할아버지인 시마즈 타다요시(일본어: 島津忠良 (しまづただよし))는 사츠마 지방을 모두 손에 넣은 영웅이었는데 그런 그는 장손주 요시히사를 평하길 '요시히사는 삼개국 정도를 다스릴 재덕(材德)을 갖췄고, 요시히로는 걸출한 영웅이 될 것이고, 셋째 토시히사는 일의 선후를 판단할 통찰력이 뛰어나고 막내 이에히사는 군법전술을 터득했구나.'라고 평하여 요시츠구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10. 현재 규슈의 오이타현(大分縣)
  11. 규슈 쿠마모토현 남부
  12. 현재 규슈의 서(西)카고시마현((鹿児島県)
  13. 일본의 경우 상경(上京)은 벼슬아치등이 교토에 올라가 천황이나 조정 실력자인 쇼군(將軍)과 대면하는 일
  14. 일본 궁중의 최고자리. 남북조 시대 이후 일본은 천황이 유명무실한 존재가 됐고, 헤이안 말기에는 태정대신(太政大臣)이, 가마쿠라 정권과 무로마치 때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아츠치모모야마 시대에는 관백(關白)이 일본 최고의 권력자였다.
  15.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다이묘(大名)와 유력한 그의 신하사이를 이간질하여 지방 세력의 힘을 약화시키는 방법을 썼다. 토쿠가와(德川) 막부(幕府)때는 지방 세력에서 인질을 받아 수도인 에도에 머물게 하고 일정 시점마다 지방세력을 상경시켜 비용을 쓰게 만드는 참근교대(參勤交代)란 방법으로 지방 세력의 성장을 조절했다.
  16. 무라카와 코헤이(村川浩平) '일본근세무신정권론'『日本近世武家政権論』P22・P23、P29、P39.
  17. 패전에도 불구, 이때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명(明)의 수군 부장 덩쯔룽(鄧子龍)이 전사했고, 고립됐던 고니시 군이 포위망을 뚫고 퇴각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의 공훈으로 시마즈 요시히로는 영지를 가증받았다.
  18. 국조인물고 권56 왜난시 정토인(倭難時征討人) 이순신(李舜臣) 편
  19. 일본에서 씨(氏)는 성(일본어: (かばね)-'카바네'라 읽음)과는 다른 의미이다. 귀족 출신은 본관이 씨(氏)가 되고 평민등은 살던 동네나 지역 특징, 혹은 직업등을 씨(氏)로 삼는다. 한국 성씨의 김,이,박 등에 해당하는 것이 카바네(姓)이고 후손이 어떤 계기나 이주로 인해 정착해 일가를 세워 새로 짓는 것, 대표적으로 본관이 씨(氏)가 된다. 예를 들어 신촌에 영지를 하사받은 김성일이란 이름을 가정해보면 성(姓)은 김(金)이 되고 씨(氏)는 신촌씨가 되는 식, 그래서 이름이 신촌성일이 되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일제시대에 조선인의 이름을 강압적로 바꾸게 된 사건을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 한다.
  20. 시마즈(島津)씨의 성(일본어: (かばね)-'카바네'라 읽음)은 미나모토(源)이다.
  21. 이 말은 사람의 나이로 환산하면 83세에 해당하는 나이까지 장수했고 카고시마시 아이라쵸(姶良町) 역사민속자료관 경내(境內)에 말의 무덤과 묘비가 아직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