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폰 미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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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폰 미제스(독일어: Ludwig von Mises)는 1881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나 1973년 미국에서 사망한 경제학자이자 철학자다.

미제스는 1906년 빈 대학에서 법학 및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09년에 오스트리아 상업회의소의 경제 자문역이 되었다. 1차 대전에 복무한 후, 빈 대학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고, 1934년에는 제네바의 국제학 대학원의 국제 관계학 교수가 되었다. 1945년 뉴욕 대학 객원 교수가 되어 1969년 은퇴할 때까지 머물렀다.

미제스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일원이자 최고봉으로서, 소비자 민주주의 체제로서 시장경제의 성격을 분명히 밝혔으며, 개성이 없는 무차별의 개인이 아니라 상이한 욕구를 가지고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개인의 선호와 선택이 만들어내는 교환 및 제휴가 시장경제를 만든다고 했다. 미제스에게 경제학은 이러한 인간행동학 중 가장 세련된 과학이었다. 그는 인간행동학에 바탕을 두고 역학적(기계적) 세계관과 맞섰으며 수학적 경제학이나 계량경제학을 논박해 왔다. 1979년 영국의 대처리즘을 불러일으킨 하이에크, 1980년 레이거노믹스를 불러일으킨 프리드먼은 미제스와 함께 몽페를랭 협회의 회원이자 동지들이었다.

그는 ≪화폐 및 신용 이론≫(1912), ≪사회주의≫(1922), ≪인간행동론≫(1949)과 같은 대작 이외에도 ≪전능한 정부≫(1944), ≪ 관료제≫(1944), ≪이론과 역사≫(1957), ≪경제학의 인식론적 문제≫(1960), ≪경제학의 궁극적 기초≫(1962)와 같은 수많은 저서를 통하여 다방면에 걸쳐 창의적인 업적을 남겼다. 미제스는 한 명의 노벨상 수상자(F. A. 하이에크), 두 명의 미국경제학회 회장(고트프리트 하벌러와 프리츠 매클럽), 국제적으로 명성 있는 많은 경제학자들(오스카 모르겐스턴, 머리 로스바드, 이스라엘 커즈너 등)을 제자로 배출했다. 한스 헤르만 호페를 비롯한 많은 오스트리아학파의 학자들이 미제스의 사상을 계승·발전시키고 있다.

부인 마르기트 폰 미제스(Margit von Mises)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함께한 세월≫에서 미제스의 창의적 천재성을 재치 있고 우아한 필치로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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