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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5년]][[고려 숙종]]10년 숙종의 모친인 [[인예왕후]] 이씨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로 승격되어 수주(樹州)에서 분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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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인종]]때에 인종의 모친인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이라 하여 인주(仁州)가 되었다. 여기서 [[인천]]의 유래를 |
* [[고려 인종]]때에 인종의 모친인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이라 하여 인주(仁州)가 되었다. 여기서 [[인천]]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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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0년]] [[공양왕]] 2년에 다시 경원부로 환원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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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에 이르러 인주군(仁州郡)으로 강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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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3년]] [[대한제국 고종|고종]]20년 개항장이 되었다. 문학산의 치소가 [[제물포]]로 옮겨지고 일대 10개면이 통합되어 인천시가지의 기반이 되었다. |
* [[1883년]] [[대한제국 고종|고종]]20년 개항장이 되었다. 문학산의 치소가 [[제물포]]로 옮겨지고 일대 10개면이 통합되어 인천시가지의 기반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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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인천은 각국의 [[영사관]]이 설치되는 등 외국과의 통상의 중심지가 되면서 |
그로부터 인천은 각국의 [[영사관]]이 설치되는 등 외국과의 통상의 중심지가 되면서 국제도시화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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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년]] [[23부]]府제로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인천부]]의 치소가 되었다. 원 인천도호부 관할지역은 [[인천군]]이 되었다. |
* [[1895년]] [[23부]]府제로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인천부]]의 치소가 되었다. 원 인천도호부 관할지역은 [[인천군]]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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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듬해 [[1896년]] 다시 [[13도제]]로 변경되면서 [[경기도]]에 속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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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일 (토) 12:11 판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이다. 예전의 부평지역을 포괄하는 지금의 인천과는 달리 예전의 인천은 인천광역시 남부와 시흥시 일부지역을 관할하였다.
유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구려를 떠난 비류와 온조 형제가 남쪽으로 내려오던 중 비류가 머물러 나라를 세운 곳이 미추홀이다. 비류는 미추홀에 자리를 잡았으나 미추홀은 땅이 물기가 많고 물이 짜서 백성이 편하게 살 수 없었다. 그리하여 온조가 머무는 위례로 돌아가 그곳의 백성들이 모두 태평한 것을 보고 부끄럽고 한이 되어 죽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매소홀'(買召忽)로 나오는데[1] 미추홀과 같은 표기로 "미숫골"로 읽을 수 있다. 인천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은 고려 후기~조선 전기에 이르러서이다.
역사
- 발해만 연안에서 이주한 백제세력이 상륙해 정주했다.[2] 당초에 비류의 영지였다가 한성백제에 흡수되었다.
- 475년 장수왕 대에 한성백제가 패망함으로서 일시 고구려에 점령되었다.
- 551년 성왕 대에 백제에 탈환 된 뒤 다시 신라 영토로 편입되었다.
- 통일신라시대인 757년 경덕왕 16년에 행정제도 개편으로 소성현(邵城縣)으로 개칭된 후 율진군(栗津郡)의 영현이 되었다.
- 1018년 현종9년에 수주(樹州)(지금의 인천광역시 부평구)의 속현이 되었다.
- 1105년고려 숙종10년 숙종의 모친인 인예왕후 이씨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로 승격되어 수주(樹州)에서 분리되었다.
- 고려 인종때에 인종의 모친인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이라 하여 인주(仁州)가 되었다. 여기서 인천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 1390년 공양왕 2년에 다시 경원부로 환원되었다.
- 조선왕조에 이르러 인주군(仁州郡)으로 강등되었다.
- 1413년 태종 13년에 도호부 이하 군현중 과거에 주(州)의 지위였던 관계로 주라는 이름을 쓰는 지방을 山이나 川으로 개명할 것을 명령함으로서 인천군(仁川郡)으로 개명해 지금의 인천이라는 이름이 확립되었다.
- 1460년 세조 4년에 인천도호부로 승격하였다.
- 1748년 영조 24년 현으로 강등당하였다가 10년 후인 1757년에 환원되었다.
- 1883년 고종20년 개항장이 되었다. 문학산의 치소가 제물포로 옮겨지고 일대 10개면이 통합되어 인천시가지의 기반이 되었다.
그로부터 인천은 각국의 영사관이 설치되는 등 외국과의 통상의 중심지가 되면서 국제도시화되었다.
- 1895년 23부府제로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인천부의 치소가 되었다. 원 인천도호부 관할지역은 인천군이 되었다.
- 이듬해 1896년 다시 13도제로 변경되면서 경기도에 속하였다.
-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일제에 의한 행정폐합으로 인천부는 인천항 중심의 시가지역으로 대거 축소되고 그외 외곽지역은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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