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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89 CPA 6111.jpg|thumb|250px|right|리다자오 탄생100주년 기념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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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다자오'''(이대교 혹은 리대소, {{zh-ts|t=李大釗|s=李大钊}}, [[1888년]] [[10월 29일]] - [[1927년]] [[4월 28일]])는 중국 지식인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에 선전하고 [[천두슈]]와 함께 [[중국 공산당]]을 창립하였다.
'''리다자오'''(이대교 혹은 리대소, {{zh-ts|t=李大釗|s=李大钊}}, [[1888년]] [[10월 29일]] - [[1927년]] [[4월 28일]])는 중국 지식인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에 선전하고 [[천두슈]]와 함께 [[중국 공산당]]을 창립하였다. [[중화민국]]에서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기 시작한 사람이기도 했다.


== 생애 ==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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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과학적 사회주의]]에 입각해 많은 중국인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선전하는 한편, 중국의 적잖은 지식인들이 [[소비에트 연방]]의 혁명을 지지하여 [[볼셰비키]] 혁명에 가담하게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는데 [[마오쩌둥]]에게 대학 도서관의 보조사서로 일하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 사람도 바로 리다자오이다. 리다자오는 중국에서는 다수파를 차지하는 농민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혁명에서 아주 크게 역할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런 점에서 마오의 공산혁명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과학적 사회주의]]에 입각해 많은 중국인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선전하는 한편, 중국의 적잖은 지식인들이 [[소비에트 연방]]의 혁명을 지지하여 [[볼셰비키]] 혁명에 가담하게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는데 [[마오쩌둥]]에게 대학 도서관의 보조사서로 일하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 사람도 바로 리다자오이다. 리다자오는 중국에서는 다수파를 차지하는 농민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혁명에서 아주 크게 역할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런 점에서 마오의 공산혁명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많은 관련 지식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원래 열렬한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자였고 초기 사상의 뿌리는 [[표트르 크로포트킨|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 사상과도 무관치 않았으나, [[1917년]] [[10월]] 특히 [[러시아 혁명]]으로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하고 나서부터는 [[5.4운동]] 전후로, [[마르크스-레닌주의]]로 경도되었다. 그는 [[1918년]] [[11월]] 《신청년》에 발표한 <[[볼셰비즘]]의 승리> 등의 대표적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헌을 통해 "앞으로의 세계는 기필코 [[적색]] 깃발의 [[세계]]가 될 것이다"고 공언하고 [[천두슈]]와 함께 《매주평론》을 창간, [[공산주의]] 혁명운동을 일으켰다.
당시의 많은 관련 지식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원래 열렬한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자였고 초기 사상의 뿌리는 [[표트르 크로포트킨|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 사상과도 무관치 않았으나, [[1917년]] [[10월]] 특히 [[러시아 혁명]]으로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하고 나서부터는 [[5.4운동]] 전후로, [[마르크스-레닌주의]]로 경도되었다. 그는 [[1918년]] [[11월]] 《신청년》에 발표한 <[[볼셰비즘]]의 승리> 등의 대표적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헌을 통해 "앞으로의 세계는 분명히 빨간 깃발의 [[세계]]가 될 것이다"고 공언하고 [[천두슈]]와 함께 《매주평론》을 창간, [[공산주의]] 혁명운동을 일으켰다.


[[1921년]] 리다자오는 [[천두슈]]와 함께 중국에 공산당을 창립했는데 이때 비로소 비공식적이고 문단적인 성격의 [[볼셰비키]] 선동가에서 비로소 공식적인 중국 공산당 조직의 지도 계열 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을 위해서이었다.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있었던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에는 [[마오쩌둥]] 등도 참가하였다. [[천두슈]]와 리다자오의 지휘 아래 중국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이 지도하는 [[코민테른]]과의 협력관계를 키워갔으며 [[1922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중국 국민당]]과의 연계에 나서게 되고 이것이 [[제1차 국공합작]]으로 이어졌다. 리다자오는 코민테른의 지시로 [[1924년]] [[마오쩌둥]], [[마오둔]] 등 다른 공산당원들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들어가기도 했고,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1년]] 리다자오는 [[천두슈]]와 함께 중국에 공산당을 창립했는데 이때 비로소 비공식적이고 문단적인 성격의 [[볼셰비키]] 선동가에서 비로소 공식적인 중국 공산당 조직의 지도 계열 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을 위해서이었다.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있었던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에는 [[마오쩌둥]] 등도 참가하였다. [[천두슈]]와 리다자오의 지휘 아래 중국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이 지도하는 [[코민테른]]과의 협력관계를 키워갔으며 [[1922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중국 국민당]]과의 연계에 나서게 되고 이것이 [[제1차 국공합작]]으로 이어졌다. 리다자오는 코민테른의 지시로 [[1924년]] [[마오쩌둥]], [[리리싼]], [[취추바이]], [[마오둔]] 등 다른 공산당원들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들어가기도 했고,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레닌]]의 원조로 북벌을 준비하던 [[쑨원]]이 사망한 후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코민테른]] 사이의 관계는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장제스]]는 [[1927년]] 상하이에서 [[4.12사건]]을 일으켜 코민테른 성원에 대한 숙청에 나서게 된다. 4.12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관련자들이 수배, 체포되었는데 리다자오도 이때 [[베이징]]에서 다른 동료 19명과 함께 감금되었고 [[소련]]을 [[대리]]해 [[중국]]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죄로 [[4월 28일]] [[베이징]]을 관할하던 군벌 장쭤린의 명령으로 처형되고 말았다.
[[레닌]]의 원조로 북벌을 준비하던 [[쑨원]]이 사망한 후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코민테른]] 사이의 관계는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장제스]]는 [[1927년]] 상하이에서 [[4.12사건]]을 일으켜 코민테른 성원에 대한 숙청에 나서게 된다. 4.12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관련자들이 수배, 체포되었는데 리다자오도 이때 [[베이징]]에서 다른 동료, 학생들 19명과 함께 감금되었고 [[소련]]을 [[대리]]해 [[중국]]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죄로 [[4월 28일]] [[베이징]]을 관할하던 군벌 장쭤린의 명령으로 처형되고 말았다.


리다자오는 [[1917년]]부터 [[1927년]]까지 베이징 대학에서 [[도서관]], [[경제학]] 교수, [[역사학]] 교수 등을 지내면서 [[유물사관]], [[사회주의]][[역사]], [[사회주의]]와 [[사회운동]] 등 13개 과목을 담당하였다. [[볼셰비즘]] 혁명을 일으키고 [[한반도]]와 [[중국]]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공산주의자로 [[베이징 대학]]에는 [[1982년]] 졸업생들의 성금을 지원받아 제작된 리다자오 동상이 세워져 있다.
리다자오는 [[1917년]]부터 [[1927년]]까지 베이징 대학에서 [[도서관]] 주임, [[경제학]] 교수, [[역사학]] 교수 등을 지냈으며 [[유물사관]], [[사회주의]][[역사]], [[사회주의]]와 [[사회운동]] 등 13개 과목을 담당하였다. [[볼셰비즘]] 혁명을 일으키고 [[한반도]]와 [[중국]]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공산주의자로 [[베이징 대학]]에는 [[1982년]] 졸업생들의 성금을 지원받아 제작된 리다자오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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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3일 (일) 20:29 판

리다자오 탄생100주년 기념우표

리다자오(이대교 혹은 리대소, 중국어 간체자: 李大钊, 정체자: 李大釗, 1888년 10월 29일 - 1927년 4월 28일)는 중국 지식인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에 선전하고 천두슈와 함께 중국 공산당을 창립하였다. 중화민국에서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기 시작한 사람이기도 했다.

생애

리다자오는 허베이 성 탕산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3년톈진 시의 북양정법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13년부터 1917년까지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과에서 공부하고 중국에 돌아갔다. 1917년~1918년부터 국립 베이징대학교역사학, 경제학, 철학 교수 겸 도서관 주임으로 근무하면서 러시아 10월 혁명을 연구하였고 볼셰비키소비에트 연방의 혁명을 지지한 최초의 중국 지식인이었다.

그는 과학적 사회주의에 입각해 많은 중국인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선전하는 한편, 중국의 적잖은 지식인들이 소비에트 연방의 혁명을 지지하여 볼셰비키 혁명에 가담하게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는데 마오쩌둥에게 대학 도서관의 보조사서로 일하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 사람도 바로 리다자오이다. 리다자오는 중국에서는 다수파를 차지하는 농민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혁명에서 아주 크게 역할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런 점에서 마오의 공산혁명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많은 관련 지식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원래 열렬한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자였고 초기 사상의 뿌리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 사상과도 무관치 않았으나, 1917년 10월 특히 러시아 혁명으로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하고 나서부터는 5.4운동 전후로, 마르크스-레닌주의로 경도되었다. 그는 1918년 11월 《신청년》에 발표한 <볼셰비즘의 승리> 등의 대표적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헌을 통해 "앞으로의 세계는 분명히 빨간 깃발의 세계가 될 것이다"고 공언하고 천두슈와 함께 《매주평론》을 창간, 공산주의 혁명운동을 일으켰다.

1921년 리다자오는 천두슈와 함께 중국에 공산당을 창립했는데 이때 비로소 비공식적이고 문단적인 성격의 볼셰비키 선동가에서 비로소 공식적인 중국 공산당 조직의 지도 계열 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을 위해서이었다.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있었던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에는 마오쩌둥 등도 참가하였다. 천두슈와 리다자오의 지휘 아래 중국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이 지도하는 코민테른과의 협력관계를 키워갔으며 1922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중국 국민당과의 연계에 나서게 되고 이것이 제1차 국공합작으로 이어졌다. 리다자오는 코민테른의 지시로 1924년 마오쩌둥, 리리싼, 취추바이, 마오둔 등 다른 공산당원들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들어가기도 했고,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레닌의 원조로 북벌을 준비하던 쑨원이 사망한 후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 코민테른 사이의 관계는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장제스1927년 상하이에서 4.12사건을 일으켜 코민테른 성원에 대한 숙청에 나서게 된다. 4.12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관련자들이 수배, 체포되었는데 리다자오도 이때 베이징에서 다른 동료, 학생들 19명과 함께 감금되었고 소련대리중국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죄로 4월 28일 베이징을 관할하던 군벌 장쭤린의 명령으로 처형되고 말았다.

리다자오는 1917년부터 1927년까지 베이징 대학에서 도서관 주임, 경제학 교수, 역사학 교수 등을 지냈으며 유물사관, 사회주의역사, 사회주의사회운동 등 13개 과목을 담당하였다. 볼셰비즘 혁명을 일으키고 한반도중국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공산주의자로 베이징 대학에는 1982년 졸업생들의 성금을 지원받아 제작된 리다자오 동상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