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의제
초 의제
楚 義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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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나라의 초대 황제 | |
재위 | 기원전 208년 ~ 기원전 205년 |
전임 | - |
후임 | 서초패왕 항우 (명목상) |
섭정 | 서초패왕 항우 |
신상정보 | |
출생일 | ? |
출생지 | 진나라 안캉 목축촌 |
사망일 | 기원전 205년 |
사망지 | 초나라 펑청 황궁 |
정당 | 무소속 |
초 의제(楚 義帝, ? ~ 기원전 205년)는 서초의 황제이며 진 시황제, 진 이세황제, 진 상제 영자영, 한 고제 유방 등과 아울러 전제 군주 시대 중국 황제 1세대 중 한 명이다. 진(秦)나라 말기 시대 사람이며, 춘추 전국 시대 초나라 회왕의 서얼 후손이었다. 초(楚)나라의 군주로 진나라 멸망 이후 사실상 ‘중국의 황제’였으며, 기원전 205년에 급사하였다. 성은 미(芈). 씨는 웅(熊), 이름은 심(心)이다. 그 후손은 유(柳)씨, 침(郴)씨라 칭했다.[1]
치세
[편집]기원전 208년에서 기원전 205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항우(項羽)가 서초패왕(西楚覇王)으로 섭정하였다.
생애
[편집]초나라 왕으로 옹립
[편집]초 회왕의 손자, 혹은 현손이라고도 한다. 다른 설로는 초나라의 마지막 왕인 부추의 막내 서자(庶子)라고도 한다. 초나라 멸망 이후 양치기 노릇을 하며 숨어 있다가 초나라를 재건하고자 한 항량(項梁)과 송의(宋義)에 의해 회왕(懷王)으로 옹립되었다. 살아 있는데도 시호를 붙여 부른 이유는 예전의 회왕이 진나라에서 억류되던 도중에 죽었기에 진나라를 반드시 격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초의제의 군령으로 진나라 정벌
[편집]이후 송의로 하여금 강력한 세력자인 항량과 항우를 견제하고, 유방과 항우의 진나라 정벌에서도 먼저 관중(關中)에 들어가는 자가 관중의 왕이 되라고 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항우가 송의를 죽이고 유방 또한 먼 서쪽의 파촉에 한왕(漢王)으로 삼아 보내자 자신은 모든 실권을 잃게 되었다.
초의제의 죽음 이후 한중왕의 출정
[편집]마침내 기원전 205년에는 항우의 떠나라는 재촉에 의해 침성(郴城, 현재의 호남성 침현)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그런데 강을 건너는 도중에 항우가 뒷날의 후환을 없애기 위해 구강왕(九江王) 영포, 형산왕(衡山王) 오예, 임강왕(臨江王) 공오를 시켜 강을 다 건너기 전에 기습하여 일행들을 모두 죽이게 하였다. 결국 자신은 피살되기 전에 스스로 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그들은 배가 강을 건너던 도중에 전복되어 익사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배에 구멍을 뚫고 침몰시켰다. 그러나 강 건너에서 숨어서 이를 지켜보던 백성들은 눈물을 흘렸고, 한밤 중에 몰래 시체를 건져 장사지냈다.
한나라의 고조 유방은 초 의제의 복수를 명분으로 항우를 공격하게 된다. 후에 유방이 다시 안장을 하고 제사를 지내며 조의를 표함으로써 항우가 윗사람을 시해한 것을 명분으로 항우를 정벌하였다.
평가
[편집]진나라를 멸망시킨 반진(反秦) 세력의 군주 역할을 했다. 또한 중국 첫 번째 황제인 진 시황제, 두 번째 진 이세황제에 이은 중국 역사상 세 번째 황제였다.
흔히 그를 명분상의 군주라고 보는 학자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 그는 서초 황제로서 직분을 실제로 하였고, 자신만의 세력도 가지고 있었다(왕으로서 17~18개월가량, 황제로서 18~19개월가량 재위했음). 그러나 그 세력이 항우에 비해 미약해서, 결국 기원전 205년에 급사하였다. 후손들은 그가 급사하기 전 마지막으로 거처한 곳이 유(柳, 현재 중국 호남성 상덕 지방) 땅이므로 성씨를 유씨(柳氏)로 삼고, 현재까지 이어졌는데, 고로 현재 중국, 한국, 일본 등지의 유(柳)씨들은 모두 자손들이라고 한다.[2][3]
기타
[편집]한국 조선시대의 김종직은 세조의 반정을 항우의 쿠데타에 비유하여 조의제문을 지었다.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전임 (사실상) 창평군 |
중국 초나라의 군주 기원전 208년 ~ 기원전 206년 |
후임 서초 패왕 항우 |
전임 진 상제 영자영 |
중국의 황제 기원전 206년 ~ 기원전 205년 |
후임 서초 패왕 항우 한 고조 유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