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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군 (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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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군
昌平君
(秦)나라의 상방
초나라의 43대 군주, 27대
재위 기원전 223년
전임 부추
후임 없음
이름
불명
봉호 창평군(昌平君)
신상정보
출생일 불명
출생지 함양(?)
사망일 기원전 223년
사망지 회남
국적 (秦)나라 → 초나라
성별 남성
관직 상방진(秦)
왕조 초나라
부친 경양왕 또는 고열왕
모친 진 소양왕의 딸
형제자매 (부친 경양왕) 고열왕, 형제 창문군, 부추
(부친 고열왕) 형제 창문군, 부추, 아우 유왕, 애왕
군사 경력
주군 진왕 정 → (독자 세력)

창평군(昌平君, ? ~ 기원전 223년)은 중국 전국 시대 초나라왕족(공자)으로, 본명은 알 수 없다. 처음에는 진 시황제의 측근이 되어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훗날 반란을 일으켜 초나라의 43대 군주(27대 , 재위: 기원전 223년)가 되었다. 이후 진나라의 명장 왕전에게 패하여 죽었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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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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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군은 본래 초나라공자로서 진나라의 상방이 되었다. 사서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1] 창평(昌平)이란 본래 초나라 회북(淮北)의 땅이었는데,[2] 아마도 이 지역이 창평군의 봉호였던 것으로 보인다.[3] 후대의 주석에 따르면, 창평군은 본래 초왕 부추와 마찬가지로 유왕애왕(庶兄)이었다고 전해진다.[4]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창평군은 초 고열왕의 아들이 된다.

진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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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38년(진시황 9),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咸陽)에서 장신후 노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나라의 상방 창평군은 창문군과 함께 이를 진압하여 수백 명을 참수하였다.[5]

기원전 226년(진시황 23), 진 시황제는 장군 왕분으로 하여금 초나라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 해에 창평군은 일찍이 백기에게 함락되어 진나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던 초나라의 옛 수도 영(郢)으로 옮겨갔다.[6] 이 사실은 진나라 당대의 기록인 《수호지진묘죽간》의 내용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7] 본래 진나라의 상방이었던 창평군이 초나라 땅으로 옮겨간 내막이나 이유는 명확히 드러난 것이 없다.

초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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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23년, 초왕 부추가 진나라에 패하여 사로잡히자 창평군은 초나라 장군 항연에 의해 옹립되어 왕이 되었고, 동쪽으로 도망가서 회남(淮南)에서 저항을 계속하였다. 얼마 안가 진나라 장군 왕전몽무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였고, 항연이 자결하니 초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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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기색은》 권6 진시황본기
  2. 《사기색은》 권6 진시황본기
  3. 쓰루마 가즈유키 저, 《인간 시황제》,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17
  4. 《사기색은》 권78 춘신군열전
  5. 《사기》 권6 진시황본기
  6. 《사기》 권6 진시황본기
  7. 윤재석, 《수호지진묘죽간 역주》, 소명출판, 2010
전임
웅부추
초나라의 군주
기원전 223년
후임
(초나라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