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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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표(魏豹, ? ~ 기원전 204년)는 진나라 말기의 인물로, 위나라 왕실의 일족이며, 위구(魏咎)의 동생이다. 형이 죽은 후 위나라를 재건해 위나라 왕이 되었으며, 항우의 열여덟 제후왕 중 서위왕을 지냈다. 전한서초 사이를 오가다 전한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잃었고, 전한 고제의 명령으로 형양을 지켰으나, 배반한 전력 때문에 동료 주가와 종공에게 죽었다.

생애[편집]

진승·오광의 난의 난을 틈타 위나라를 재건한 위구와 주불이 진 이세황제 2년(기원전 208년)에 진나라 장수 장한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자 초나라로 도망가, 초 의제에게 수천 명을 받아 위나라 땅 일부를 회복했다. 이후 자립하고 위나라 왕이 되어 도읍을 평양(平陽 ; 지금의 산시 성 린펀 시)에 두었다. 위표가 위왕이 된 시점이 〈위표팽월열전〉과 〈진초지제월표〉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진초지제월표〉에서는 진 이세황제 2년 9월(기원전 208년)에 왕이 되었고, 이세황제 3년 12월(기원전 207년)에는 거록에서 포위된 조나라에 구원군을 보냈다고 서술하나, 〈위표팽월열전〉에서는 장한이 항우에게 항복하자 위나라의 이십여 성을 함락하고 위나라 왕이 되었다고 한다. 위나라 왕이 되고 조나라를 구원해 거록 싸움에 참여한 후, 항우와 함께 함곡관을 넘어 진나라를 멸했다. 이 공로로 항우에게서 왕으로 봉해졌으나, 항우가 옛 위나라 땅 동부를 자신의 봉국인 서초에 넣으면서 하동으로 옮겨가 서위왕이 되었고, 서울은 옛 한나라의 첫 서울인 평양에 두었다.[1][2][3]

한왕 2년(기원전 205년) 3월, 한왕 유방이 임진(臨晉, 지금의 웨이난 시 다리 현)에서 황허를 건너오자 장병들을 거느리고 유방에게로 귀순했고, 팽성 대전에 참전해 패배했다.[4][1]

한왕 3년(기원전 204년), 어버이의 병 때문에 돌아가서는 황허의 나루를 끊고 서초 편으로 돌아섰고, 한왕이 보낸 역이기의 설득도 받아들이지 않았다.[1] 위표는 원래 형양에서 한나라와 초나라가 대치하고 있을 때에도 한나라 편을 들었으나, 관상쟁이 허부가 후궁 박씨(후의 효문태후)가 천자를 낳을 것이라고 하자 스스로 천자가 되리라는 야망을 품고 중립으로 돌아선 것이었다.[5]

한나라에서 한신을 좌승상으로 삼고 조참관영을 딸려서 서위를 공격하자, 백직(柏直)을 대장으로 삼고 풍경과 항타(項它)에게 기병과 보졸을 맡겨서[6] 포판(蒲坂, 지금의 윈청 시 융지 시)에 주둔해 황허를 끼고 임진에 주둔한 한군과 대치하며(포판과 임진은 황허를 끼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한군이 건너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한신이 임진을 건너는 척 하고 몰래 임진보다 북쪽에 있는 하양(지금의 웨이난 시 한청 시)에서 황허를 건너 안읍을 습격하자 놀라서 맞아 싸웠다가 패했고[7] 곡양에서 조참의 공격을 받아 동원까지 달아났다가 사로잡혀[8] 당시 한왕이 있던 형양으로 압송되었다. 서위의 국토는 한에 흡수되어 하동군·상당군·태원군으로 나뉘었다.[1][4]

한왕이 형양에서 서초패왕 항우의 공격을 막다가 궁지에 몰려 탈출하면서, 어사대부 주가(周苛)·종공(樅公)과 함께 남아 성을 지켰다. 그러나 배반한 왕이라 하여, 주가와 종공에게 죽었다.[4][1]

가계[편집]

위표.png

각주[편집]

  1. 사마천: 《사기》 권90 위표팽월열전 중 위표전
  2. 위와 같음, 권7 항우본기
  3. 위와 같음, 권16 진초지제월표
  4. 위와 같음, 권8 고조본기
  5. 위와 같음, 권49 외척세가제19
  6. 반고: 《한서》 권1 상 고제기 상
  7. 사마천, 앞의 책, 권92 회음후열전
  8. 위와 같음, 권54 조상국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