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현
노재현 盧載鉉 | |
별명 | 호(號)는 석봉(碩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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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26년 8월 8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마산 |
사망일 | 2019년 9월 25일 | (93세)
본관 | 교하(交河) |
종교 | 천주교(세례명: 이냐시오)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복무기간 | 1947년 ~ 1977년 |
최종계급 | 대장(大將) |
주요 참전 | 한국 전쟁 |
노재현(盧載鉉, 1926년 8월 8일 ~ 2019년 9월 25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며 제21대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호는 석봉(碩峯)이다. 사위는 GS건설 대표이사사장인 허명수(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아우)이다. 경상남도 마산 출신이다.
학력
[편집]- 1945년 경상남도 마산 창신고등보통학교 졸업
- 1947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3기
- 1949년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 1950년 미국 육군포병학교 졸업
- 1951년 대한민국 육군기갑학교 졸업
- 1957년 대한민국 육군대학 졸업
- 1960년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6기
- 1965년 대한민국 국방대학원 행정학 석사
생애
[편집]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났다. 경상남도 마산 창신고등보통학교,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 국방대학원을 졸업하였고 1952년 육군 사단 포병감, 1954년 제 25사단 포병단장을 지냈다. 1956년 육군포병학교 교장, 1957년 제30사단장, 1960년 제7사단장, 1962년 육군본부 감찰감, 1964년 육군 군수기지사령관, 1966년 군단장, 1969년 육군참모차장을 지낸 후 제20대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을 지내다가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그 뒤 제21대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 1979년 10.26 사건에서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일부 군 지휘관들이 군의 지휘계통을 무너뜨리고 하극상을 단행한 12.12 군사반란은 군 내부의 갈등구조에서 비롯되었으며, 당시 군의 총 책임자로서 아군끼리의 유혈충돌은 막고 수습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연행을 대통령이 재가하도록 하였다. 그 직후 일련의 사건에 책임을 통감하고 직에서 물러났다.
12.12 사건- 〈12. 12 그날 노재현 국방부 장관 행적의 진실과 영상 테러〉
과거 정치 드라마를 시청했거나 요즘 소위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를 관람하고 당시 국방부 장관에 관한 말이 많다. 모두가 부정적인 이야기뿐이다. 사실을 바로 잡고자 한다.
12. 12일 밤, 정승화 총장 공관에서 총성이 울렸고 예광탄의 불줄기가 밤하늘에 치솟았다. 총장 공관은 전등이 모두 꺼지고 암흑 속에서 피격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빠졌다. 그 순간 총장 공관과 직선거리 100m 떨어져 있는 장관 공관에서 정세를 살피던 장관의 당직 부관은 당장 장관 공관도 습격할 것 같았든지
「장관님,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 즉시 피하십시오」라고 다급하게 알려왔다.
장관은 이 사태가 무장 괴한 혹은 김재규의 잔존 지지 세력이 생명을 걸고 총장과 장관에게 도전하는 것이 아닌가 판단하고 그 자리를 피한 것이다. 김재규의 중앙정보부가 계엄사령관이나 국방부 장관을 인질로 삼아 군법회의를 방해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합수부의 소행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노 장관이 국회에서 증언(1993년 신동아 참조)했듯이 정승화 장군은 10.26 직후에 이미 조사를 다 받아서 서류가 정리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전두환 장군은 유능한 수사관을 시켜 세 번이나 정 총장에 대한 조사를 마친 상태였고 아무런 혐의가 없다는 수사 결과를 국민에게 발표까지 했다. 발표장에서 어느 기자가 ‘항간에 정승화 장군의 관련설이 끝없이 나도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전 장군에게 묻자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무혐의 내용의 서류를 11월 13일 계엄사 보통군법회의에 송치를 끝내고 그 문제는 일단락되었기 때문에 노 장관은 합수부의 소행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한다.
영상매체들은 흥행을 위해 이 불가피한 상황을 ‘도망’이라는 약점으로 부각하여 세력이 없어진 한 사람을 제물로 삼아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로 덮어씌우고 조롱거리로 만들며 희화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그 결과 노 장관이 반란군에게 투항하도록 진압군에게 지시했다는 둥, 미 대사관으로 도망갔다는 둥, 전두환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둥, 쓰레기통 뒤에 숨었다는 둥, 보안사에 끌려가서 쩔쩔매면서 비굴하게 굴었다는 둥, 연합사 미국 측으로부터 핀잔만 들었다는 둥, 피신하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뒷담을 넘었다는 둥, 가족들을 택시에 태웠다는 둥, 전두환 중심의 구데타 음모에 대한 제보를 받고 무시했다는 둥, 진압하려는 순간 장태완을 수경사령관 직에서 직위 해제했다는 둥, 별의별 거짓 정보가 난무하고 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노 장관은 평소 언행에 절제의 미덕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모 유튜브 방송에서 사회자가 노 장관을 부정적으로 강하게 몰아가는데도 게스트로 참석한 성결대 임종화 교수는 12.12와 관련하여 자신이 만나본 사람들은 노 장관에 대한 평가에 조심스러워했으며 인격적으로 폄하될 분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었다는 식의 뉘앙스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결국 맥을 같이 하는 내용이다. 이런 장점이 군 요직에 앉는 데 한몫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성품 때문에 12.12와 관련해서 자신에 대한 온갖 악소문에도 그동안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응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는 사이 자신에 대한 온갖 거짓 정보가 진실처럼 둔갑해 버렸다.
노 장관이 공관에서 나온 후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차를 타고 강변도로를 배회하면서 도망다녔다는 것도 너무 터무니없다. 사실은, 한남동에서 교통체증(당시 퇴근 시간대와 겹침)이 심하여 이경율 합참 작전국장의 차량이 오는데 1시간 이상 소비되었고 꽉 막힌 이태원길을 피하고 강변도로를 우회하여 가다 보니 국방부에 들러 육군 본부에 도착하는 데 시간이 길어졌을 뿐이다.
연합사에서 국방부로 갈 때 위컴 사령관과 글라이스틴 미국 대사가 위험하다고 장관의 국방부행을 말렸다. 그러나 전두환 합수부장이 국방부로 온다기에 대면하여 설득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국방부로 갔다. 그러나 전두환 합수부장은 국방부로 끝내 오지 않았다. 대신, 박희도가 이끄는 공수 부대가 와서 총을 난사하였다. 장관이 대통령께 사태를 보고하러 국방부를 나서는 중이었다. 장관실도 총탄의 세례를 받았다. 순간 부관이 장관의 손을 잡고 국방부 지하 벙커로 달렸다. 영상은 이것도 ‘도망’으로 치부하였다.
이처럼 장관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대처하였다고 한다. 총탄이 쏟아지는 급박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대처이었지 자신은 결코 도망 다니지 않았다고 생전에 단호하게 말했다. 6.25 전쟁 동안 단 하루도 후방에 나오지 않고 전선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투에 전념한 사람인데 어떻게 비굴하게 행동할 수 있었겠느냐고 항변했다. 이와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 취한 ‘불가피한 대처’를 ‘도망’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일부 사람들은 장관이 연합사로 왜 도망갔느냐고도 한다. 사실은 한미 연합사 부사령관인 류병현 장군과 김종환 합참의장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반란군이 합수부에서 도청을 통해 모든 통신망을 장악하고 있는 마당에(요즘처럼 휴대폰이 있던 시절이 아니고 지휘, 명령을 군 통신망에만 의존해야 했음) 그나마 통신망이 잘 갖추어진 곳이 한미 연합사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미연합사를 창설했던 장관으로서 연합사 사정을 잘 알고 있기도 했고 연합사는 또한 국방부 장관의 예하 부대이기도 했다.
장관은 연합사에 가서 북한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미국 국방성과 미 태평양 사령부에 이 사태를 주한 미군 쪽에서 보고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때 연합사에는 글라이스틴 대사도 와있었기에 장관은 모든 것을 협의할 수 있었다. 연합사에서는 통신이 원활했다. 국방부 장관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연합사에서 했다. 8군과 수경사령부와는 통신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노 장관은 장관으로 역할을 못 했다고 하는 얘기는 이런 사정을 모르고 하는 얘기라고 했다.
장관은 연합사에서 최규하 대통령, 전두환 보안사령관, 각 군사령관 등과 통화를 했다. 최규하 대통령에게 일단 수습해놓고 보고하겠다고 말했다. 전두환 사령관에게는 ‘결재할 것이 있으면 여기로 와서 받아라’라고 호통을 쳤다. 1군, 3군 사령관에게는 장관 지시 없이는 절대로 병력 출동시키지 말라고 했다. 또 윤성민 참모차장, 30단 사람들과도 서로 병력 출동을 자제하기로 구두로 합의했다. 당시 노 장관은 진압군과 반란군의 유혈 충돌로 인한 희생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많은 사람은 반란군을 왜 진압하지 않았느냐고 비난한다. 그렇다면 노 장관이 병력 출동을 허락하여 무력 진압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서울은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고 많은 병사와 서울 시민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수천, 수만 명이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면 진압하지 않았다고 지금 노 장관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잘했다고 칭찬하면서 영화 속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까. 절대 아닐 것이다. 무엇 때문에 무리하게 진압하여 아까운 생명을 희생시켰냐면서 온갖 비난의 집중포화를 퍼부을 것이다.
무리하게 무력으로 진압하면 이것만이 아니다. 내전으로 번져(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특전사 파견 보안 반장이었던 김충립씨는 '오마이 TV'에서 그때 진압을 시도했다면 틀림없이 내전으로 번졌다고 증언했다.) [1]장기전이 안 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반란군의 병력 이동으로 이미 누수가 생겨버린 전방의 방어 능력을 얕잡아보고 북한군이 쑥 밀고 들어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반란군은 애초에 반란의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 진압군이 무력으로 과잉 진압하는 바람에 자신들은 정당 방어를 했을 뿐이었다고 강변하면서 진압군에게 책임을 전가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노 장관은 무력 진압 대신 끝까지 반란군을 설득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비록 설득이 실패로 끝났으나 그에게는 설득이 유혈 충돌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기 때문이다. 남의 귀한 자식을 데리다가 적군도 아니고 아군끼리 충돌시켜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은 장관으로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재도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사태를 빨리 수습해 유혈 충돌을 막자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사태 해결을 위해서 노 장관은 전두환 소장을 설득하고 회유하기 위해 고성을 질러가며 피 말리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유혈 충돌을 막기 위해 진압군의 병력동원도 자제시켰다. 연합사에서 장관으로서 모든 조치를 하였다. 그러나 영화 속 노 장관은 자신과 가족들의 보신만 생각하고 평소 인품과는 전혀 다르게 아주 경박하게 굴며 사태 해결에 전혀 관심이 없고 오히려 결정적으로 방해만 하는 바보 같은 파렴치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말하자면 등장인물 중 가장 못난 짓을 하는 푼수로 만들어 놓았다. 너무나 사실과 다르다.
영화에 관한 어느 영문 원서를 짧게 읽은 적이 있다. 영화는 환상(fantasy)이라고 하였다. 영화의 속성을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은 영화의 마법에 걸려 환상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고 현실을 직시한 사람을 손가락질한다. 우리는 환상을 현실이라고 너무 쉽게 믿는다. 환상은 환상일 뿐이다. 그리고 영상은 실존 인물들을 가명 뒤에 숨기는 방식으로 픽션(fiction)의 특권 위에 올라타고서, ‘불가피한 순간의 대처’를 약점으로 부각하여 제작자의 입맛대로 그럴듯한 색으로 덧칠하고 예술을 핑계로 표현의 자유를 남용하면서 실존 인물을 마구 난도질한다. 그리고 진실을 모르는 관람객이나 시청자들도 영상 속의 환상에 동화되어 거짓 정보를 진실인 양 믿고 환호하며 무자비하게 이에 가세하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에 실존 인물의 인격은 말살되고 본인과 그 가족들의 영혼은 멍든다. 살인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12. 12 인터뷰 ‘최초의 항변’ 내용의 일부〉
― 노재현, 그는 왜 병력동원을 허락하지 않았나.
12.12때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반란군을 무력 진압하도록 병력동원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한 사람들의 비난이 그동안 많았다. 그러나 그가 모 월간지에서 생전에 가졌던 증언을 들어 보면 그가 왜 그렇게 조치했는지 알 수 있다.
『 노재현: 내가 제일 중요하게 한 것은 그날 저녁에 서울 시내에서 아군끼리 충돌하는 것을 막은 겁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기자: 張泰玩씨 주장은 국방부 장관이 자신이 요구한 병력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했다며 盧장관이 반란을 성공시킨 방조자라는 뉘앙스로 얘기하는데요.
노재현: 수도경비사령부에서 병력을 내달라고 하는 것을 내가 안 내줬기 때문에 문제가 됐다고 하는데 차제에 해명해야겠어요. 내 얘기를 들으면 병력을 내주면 안 되겠다고 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이 얘기를 오랫동안 가슴 속에 쌓아두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병력을 꺼내 주면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은 내가 처음 육본에 와 보고를 받고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수도 경비사령부의 주력 병력은 30단, 33단, 헌병단, 포병단, 고사포단, 장갑차 30대, 전차가 1개 대대 36대가 있었어요.
이 부대는 훈련이 잘돼있어 막강한 부대예요. 그런데 고사포는 서울지역 일원에 배치되어 있어 서울 상공에 침입하는 적기에 대한 對空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고, 포병은 군포지역에 배치되어 있다고 그래요.
33단은 교대로 청와대 외곽 경계를 하는 것이고 張世東의 30단은 완전히 경복궁 안에 있고 전차 36대 중 12대는 수경사 본부 근처에 있다고 들었고 나머지 24대 주력이 경복궁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이 부대가 처음부터 합수부에 붙은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이들이 張泰玩의 지휘권에서 떠난 겁니다. 여기서 모의하고 모든 게 거기서 이뤄진 거 아닙니까.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것을 진압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거 하나만 가지고 얘기해 보지요. 이것을 진압하면 말이죠. 30경비단을 진압하려면 병력을 안으로 들이 밀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저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서 손을 이렇게 (손을 들어 보이며) 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생각을 한번 해보십시오. 만일에 진압군 병력이 들어간다고 하면 저들이 경복궁 밖으로 나와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쪽(진압군) 군인이 가면 쏠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군인들끼리 싸움이 붙는 겁니다. 그러면 경복궁 주변에서 시가전이 벌어지는 겁니다. 서울 시내가 그대로 불바다가 되는 거예요. 아니 그걸 뻔히 아는 장관이란 사람이 그렇게 해야 됩니까? 그럼 우리 趙기자께서도 한번 상상해 보시오.
(거침없이 토해내던 그도 여기선 잠시 멈추는 듯했다.)
나도 그날 저녁에 피해자가 돼서 마음 같아서는 병력을 꺼내서, 안 된 말이지만 싹 쓸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는데 …. 그거는, 그렇게 생각했으면 수경사령관과 같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아니겠어요. 무슨 말인 줄 알겠어요? 내가 장관인데 …」
(말을 애써 자제하려는 태도가 역력했지만 그의 말은 국방장관과 수경사령관의 생각이 같은 차원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째는 朴俊炳의 20사단이 양평에 있었는데 마침 계엄 업무 때문에 서울로 와 있었어요. 본부는 남한산성 밑에 행정학교에 있었어요. 일부는 퇴계원 부근의 사관학교에 배치하고 있었지요. 이게(부대) 처음부터 합수부에 가담한 것 아닙니까? 朴俊炳이가. 그렇지 않습니까? [훗날 국방부와 육군 본부 장악을 위한 병력동원 요청을 거부하였기에 12.12 재판에서 박준병은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함]
그러면 만일 전방에서 부대를 빼내 가지고 온다고 하면 퇴계원 부근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아군끼리 전투가 벌어지지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26사단, 기계화 사단이라는 것도 현리 쪽에 있는데 전부 그리 돌아와야 합니다. 거기서 막아서 싸워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안 되겠지요.
그리고 국방부에 들어온 朴熙道란 놈이 데리고 온 1공수여단을 진압하려면 국방부에 몇 개 대대가 달라붙어야 합니다. 그러면 삼각지 일대가 불바다 되는 겁니다. 그러면 큰일 나는 거예요. 서울 시민들이 어떻게 되겠어요.
그리고 전방에 盧泰愚가 9사단장이고 黃永時가 1군단장 아니겠어요? 판문점에서 서울로 가는 접근로인데 이 부대의 지휘관이 전부 경북궁에 와 있는 겁니다. 부대의 일부가 빠져 있었어요. 그러면 서울 시내가 불바다가 되었을 때 이건 한번 가정을 해볼 수 있는 겁니다. 이북 인민군들이 전차 몰고 병력을 태워서 들이밀면 누가 무슨 방법으로 막아냅니까? 이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그걸 단정합니까?
그런 위험한 상태에 있는데 그걸 가지고 장관이 병력을 내주지 않아 진압을 못하고 또 아까 뭐라고 그랬지요. 장관이 비겁하게 빌빌거리며 돌아다니는 게 진압도 못 하고 그게 무슨 장관이냐 이런 얘기에요.」
(울분이 극에 달한 듯 목소리가 갈라지면서 쇳소리가 났다.)
그럼 내가 병력을 꺼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 놓고 아군끼리 싸움 붙여 수천 명, 수만 명 죽게 해야 장관입니까?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내가 군대에서 뼈가 굵고 전쟁을 치른 사람인데, 3년 동안 전방에서 하루도 후방에 나온 적이 없는데 …. 내가 철원 백마고지 전투의 마지막 포병 사령관이었어요. 그런 사람인데(탁탁 책상을 치며) 어떻게 비겁하게 그런 행동을 취할 수가 있겠어요. 그리고 전술적으로 그런 걸 말이죠.
(기자가 다음 질문을 하기 위해 「좋습니다」라며 말을 끊으려 하자 그는 듣지도 않은 채 말을 계속했다. 그의 말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한 마디 더 붙이면, 이거 다 써야 됩니다. 그래야 국민들이 다 이해합니다. 그때 경복궁 30경비단에 있던 張世東, 金桭永, 趙洪인데 이 세 사람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新軍部의 계획에 반대를 했더라면 12.12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건 무슨 뜻인고 하면 그날 저녁에 보면 수도경비사령관은 자기 부하를 하나도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걸 알아야 됩니다. 어떻게 된 건지 이상하게 된 겁니다. 내가 장관이기 때문에 이런 얘기하는 겁니다.
기자: 다시 드라마 얘기로 돌아다보죠. 두 정치 드라마에서 장관은 「비겁한 군인의 전형」으로 그려지고 있는 반면, 張泰玩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은 「영웅」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盧장관의 말이 아니더라도 당시 군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張泰玩씨의 역할은 실제보다 미화되었다고 합니다. 이점 어떻게 생각합니까.
노재현: 조금 전에 얘기한 게 바로 그겁니다. 전형적인 군인의 성격을 갖고 있는 분인데 …. 책임감도 강한 그런 분임에는 틀림없는데 그날 저녁에 張泰玩 장군이 한 것이라곤 내가 보기에는 전화를 건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본인도 「내가 죄인이다」라는 말을 여러 군데서 했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부대 동원을 못 하게 해서 임무 수행을 못 했다고 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張泰玩이 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아요. 이 말이 보도가 되어 확고한 사실처럼 알려졌는데 그렇게 되어 드라마에도 그렇게 나온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이 자동적으로 미화되고 영웅처럼 된 것 아닙니까.
부하가 영웅이 되는 것이 장관이 질투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여기저기서 기자들이 물을 때마다 「盧장관은 병력을 안 주고 비겁하게 피해다니고 해서 진압을 못했다」고 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부하와 똑같이 맞선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내가 참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여기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어요.』
장태완 장군이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김충립씨 증언에 따르면 28일) 병력 장악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는 기자의 말에 노 장관은 합수부 쪽에 섰던 3개 여단 중 한 개의 여단만이라도 장악했다면 12.12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반박했다.
盧장관은 수도경비 사령관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막강하고 중요한지를 설명했다. 충정계획을 갖고 있어 서울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다 수경사에서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병력동원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은 엄청난 희생을 막기 위한 전술적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군 수뇌부가 육본 대책 회의에서 ‘병력 동원 不可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영상은 한 사람을 '영웅'으로 그리고 있지만, 다른 한 사람을 '비굴한 인간'으로 그림으로써 수많은 사람에게 손가락질받게 하였다. 픽션을 무기로, 진실은 온데간데없고 영상물이 보여주는 장관에 대한 명예훼손은 심각하다. 이것은 엄청난 범죄 행위다.
‘사실을 바탕으로 영화의 상상력을 가미했다’라는 양립할 수 없는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진실’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조만간 꼭 나왔으면 한다.
1981년 초반부터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을 맡았으며, 정계 은퇴 이후에는 1981년 한국화학연구소 이사장에 1982년 한국비료공업협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88년 화학연구소 이사장직과 비료공업협회 회장직을 모두 사퇴했다. 1991년 제2대 한국자유총연맹 총재에 선출되었고 1995년 자유민주연합 특임위원을 잠시 역임하였다.
노재현을 연기한 배우
[편집]- 나영진 《코리아게이트》, 1995년 - SBS 드라마
- 민지환 《다큐멘터리 극장》1993년 - KBS 실록
- 서학 《제4공화국》, 1995년 - MBC 드라마
- 신국 《제5공화국》, 2005년 - MBC 드라마
- 심우창 《그때 그 사람들》, 2005년 - 영화
- 김의성 《서울의 봄》(극중 배역명 오국상), 2023년 - 영화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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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전임 서종철 |
제20대 육군참모총장 1972년 6월 2일 ~ 1975년 2월 28일 |
후임 이세호 |
전임 한신 |
제14대 합동참모의장 1975년 2월 28일 ~ 1977년 12월 29일 |
후임 김종환 |
전임 서종철 |
제21대 국방부 장관 1977년 12월 20일 ~ 1979년 12월 14일 |
후임 주영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