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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역사에서는 북유럽저지대 국가(네덜란드어: Nederland 네덜란드)왕국의 영역에서 발전한 역사에 관해서 설명한다. 또한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 네덜란드 왕국의 통칭이지만 이하의 본문에서는 그 지역을 저지대 국가로 부른다.

고대[편집]

기원전 50년 지형도
갈색 부분은 늪지대 등이다.

고대의 저지대 국가는 라인강 하류 이남이 로마 제국령, 이북은프랑크인프리슬란트인 등이 살던 게르만계 여러 부족의 땅이었다. 산림이 많은 지대에서 바타위족과 프리슬란트인 등이 공존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편집]

120년 경 로마 제국

저지대 국가는 기원전 58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 제국군의 침공을 받아 로마 제국령 최북단 지역에 편입되었다((갈리아 전쟁)). 하지만 제국군은 저지대 국가 북부의 프리슬란트 지방의 대부분은 평정할 수 없었다. 제국은 라인 강을 제국령 북단의 국경선으로서 저지 게르마니아 속주의 변경을 지키는 요새와 마을을 만들었다. 그들 가운데 중요했던 마을은 현재의 위트레흐트, 네이메헌, 마스트리흐트였다. 또한 그 때 처음으로 문자가 그 땅으로 가져오게 했다.
이전부터 그 땅에 살고 있던바타위족과 로마 제국의 관계는 당초에는 양호한 것이었고 차차 로마 문화가 침투해 가자 토착 신을 모시는 로마 풍의 사원 등도 만들어졌다. 또 북해에서 생산되는 소금도 중요한 교역 상품으로서 제국 각지로 옮겨졌다. 69년에는 황제 네로의 자살에 따른 제국 내의 혼란으로 기회를 포착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키윌리스는 바타위족의 반란(혁명)을 일으켰다. 70년에 새로운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실권을 잡아 제국 내의 혼란을 수습하던 중, 바타위족의 반란에 대해서도 로마 군단을 파견하고 그들을 평정했다. 이후 그 땅에는 로마 군단이 상주하게 되었다.
그 후 로마 제국이 분열되어 그 땅을 다스리는 것은 서로마 제국이 되었으나 제국의 세력이 쇠함과 함께 이 지역도 쇠퇴해 갔다고 여겨진다.

민족 대이동 시대[편집]

4세기 이후의 민족 이동 시대에는 저지대 국가는 많은 게르만인의 통과 경로가 되었다. 그 시대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북의 프리슬란트인, 남의 프랑크인, 동의 색슨인의 세력권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프랑크 왕국[편집]

843-870년 프랑크 왕국
(분할 후)

민족 대이동기에 로마 제국은 프랑크인살리족용병으로서 이용하기 위하여 포이데라티의 자격에 저지대 국가 남부의 톡산드리아로 보냈지만 서로마 제국의 쇠퇴와 같이하지 않고 살리족을 보내 개척한 땅에서 발전하여 성립한 프랑크 왕국에 저지대 국가 전체가 집어먹혔다. 프랑크 왕국의 초대 국왕 클로비스 1세가톨릭에 개종한 것에 따라 저지대 국가에도 기독교가 전해졌다.
프랑크 왕국의 사료에 따르면 7세기부터 8세기에 있어서도 저지대 국가 북부부터 독일 북부의 해안가의 지역은 프리슬란트왕국이 독립을 지키고 있어 그 중심지는 위트레흐트였다. 734년 보아른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이 프리슬란트 왕국을 무찌르고 현재의 프리슬란트주 부근까지가 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785년에 작센 공작 비두킨트가 카를 대제에 항복하고 저지대 국가는 완전히 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 시점에서 프랑크 왕국의 중심지는 현재의 벨기에와 북프랑스 일대였다.

843년 프랑크 왕국이 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으로 분열되고 저지대 국가는 중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중프랑크 왕국은 두 번 분열하고 저지대 국가(현재의 네덜란드어권)는 동프랑크 왕국에 흡수되었다.

800년경부터 1000년경에 걸쳐서는 세차게 바이킹의 침공에 시달린다. 841년부터 873년에 걸쳐서는 저지대 국가의 대부분이 점령되어 로릭이 이끄는 점령자가 도레스타트(현재의 위트레흐트 부군에 있던 중세의 마을)에서 저지대 국가 전역을 통치한다.

신성 로마 제국[편집]

10세기부터 11세기에 걸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이 저지대 국가를 지배한다. 네이메헌이 황제의 중요한 체류 장소가 됨과 함께 위트레흐트가 중요한 상업 항구가 된다. 네이메헌에서는 몇 명의 황제가 태어나서 죽는다. 1100년경까지 대부분의 서부 저지대 국가(현재의 북홀란트주남홀란트주 부근)은 미개의 땅이었다. 1000년경보다 플랑드르 지역과 위트레흐트의 농민이 그들의 늪지를 구입하여 물을 빼내고 경작지로 바꾸어 갔다. 그들의 토지는 12세기에는 홀란트라고 불리게 된다. 또한 1000년경부터 농업 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식량 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것에 따라 인구도 증가하여 상업도 발전했다. 길드의 형성과 시장의 설치도 이루어졌다. 통화의 도입도 이루어져 상업은 점점 번성하였다. 그 때의 저지대 국가에는 십자군 참가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

1000년 신성 로마 제국

플랑드르 지방과 브라반트 지방에서는 도시가 급속하게 발전하여 영주에게 도시권을 포함한 여러가지 권리를 얻게 된다. 자치권 등을 갖고 발전한 도시는 마치 독립국처럼 되었다. 그 때 가장 발달한 도시는 브뤼허안트베르펜이었다(둘 다 현재 벨기에의 도시). 또한 제국 내에서 다양한 영지를 다스리고 있던 영주들도 제국에서의 독립성을 높여갔다. 신성 로마 제국은 어느새 각지를 직접 통치할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어 단순한 명목 상의 것이 되고 말았다. 저지대 국가는 홀란트 백작, 제일란트 백작, 에노 백작, 헬데를란트 백작, 위트레흐트 주교가 다양하게 다스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종주권 아래로 들어간 모양이 되었다. 또 프리슬란트흐로닝언은 반(半)독립을 지키고 있었다.

부르고뉴령 네덜란드[편집]

15세기가 되면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선량공이 그들의 백국(伯國)을 통일하여 저지대 국가 일대는 부르고뉴 공국의 일부(부르고뉴령 네덜란드)가 된다. 그 때의 저지대 국가는 모직물 생산에 따른 경제적 선진 지역이 되어 헨트, 안트베르펜 등의 부유한 도시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1477년 샤를 대담공이 낭시 전투에서 갑자기 전사하고 부르고뉴 공가는 여기에 단절되고 만다. 외동딸인 마리는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후의 신성 로마 황제)과 결혼하여 저지대 국가 지역을 합스부르크가의 영지가 된다. 한편, 부르고뉴 공령은 프랑스의 루이 11세(재위 1461~1481년)이 접수했다.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편집]

카를 5세의 네덜란드 정책[편집]

황제 카를 5세


막시밀리안과 마리의 손자로 자신도 저지대 국가에서 태어나 자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네덜란드 17주 전체의 주권자로서 전제 정치를 펼치고 카를 5세 퇴위 후에 합스부르크령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스페인 합스부르크가로 나뉘고 저지대 국가는 스페인의 지배 아래 놓인다.

또한 1530년데에는 재세례파가 저지대 국가에 유입되어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다. 1534년에는 얀 마티스를 지도자로서 재세례파가 암스테르담을 장악, 게다가 재세례파에는 얀 베켈스존이 지도자로서 늘어 '뮌스터 일천년 왕국'을 건설했으나, 1535년에는 프로테스탄트 제후와 가톨릭 제후의 연합군에 따라서 뮌스터는 함락된다.

1545년, 카를 5세는 저지대 국가 여러 주에 이단번문관을 설치하여 1550년에는 이들 이단번문관를 황제 직속 기관으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주로 경제적인 면에의 악영향을 1545年、カール5世はネーデルラント諸州に異端審問官を設置、1550年にはこれらの異端審問官を皇帝直属機関とした。しかしこうした政策は主に経済面への悪影響を懸念するネーデルラント各都市からの反発を受けたため、カール5世によるプロテスタントへの圧力は弱まった。一方、1540年代にはカルヴァン派もネーデルラントに流入し、都市部の商人や手工業者を中心に勢力を広げた[1]

このように、カール5世のネーデルラント政策はプロテスタントへの弾圧が目立つものであったが、一方でネーデルラント諸州が政治的一体性を持ち、また「ネーデルラント」としての統一的なアイデンティティを獲得し始めた時期にも相当する[2]

펠리페 2세의 네덜란드 정책[편집]

カール5世は1555年にネーデルラント諸州を息子フェリペ2世に譲り、翌年にはスペイン王位も譲って隠居生活に入る。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

フェリペ2世は1559年までネーデルラントに留まったが、この年に庶姉のパルマ公妃マルゲリータをネーデルラント全州総督に任命してスペインへ向かった。ネーデルラント諸州の政治はアラス司教のグランヴェルが事実上の最高責任者となった。一方、同年にはカトー・カンブレジ条約によってヴァロワ家ハプスブルク家の講和が成立したため、フランスからネーデルラントへ大量のカルヴァン派が流入を開始した。同年にはまた、ネーデルラント諸州の司教区再編が議論され、1562年には、それまでランス大司教区、ケルン大司教区、トリアー大司教区という、いずれもネーデルラント諸州外の大司教の管轄下に置かれていたネーデルラント諸州が新たにカンブレ、メヘレン、ユトレヒトの3つの大司教区に再編された。この結果、ネーデルラント諸州の貴族たちが持っていた教会関係の利権が失われることとなり、貴族たちの不満が募った。

오라녜 공 빌럼 1세

1566年、再び強化された異端審問に反発し、ネーデルラント諸州の下級貴族たち300名ほどがマルゲリータに異端審問の中止を要求した。マルゲリータはこの要求を容れたが、その結果、亡命中だったプロテスタントの指導者たちがネーデルラント諸州に舞い戻り、活発な野外説教を行うようになった。8月にはカトリックの教会や修道院を標的にした打ち壊しがフランドル州で発生し、他の州にも広がっていった(聖像破壊運動)。これらの一連の動きの背景には、この年の極端な冷害による食料不足もあった。

1567年、フェリペ2世は事態を収拾するためにアルバ公を指揮官とする1万の部隊をネーデルラントに派遣した。8月にネーデルラント入りしたアルバ公は、徹底的なプロテスタントの取り締まりを行い、12月には穏健派のマルゲリータに代わってネーデルラント全州総督となった。一方、ネーデルラント諸州の貴族の中でも最有力者であったオラニエウィレム1世は、アルバ公がネーデルラント入りする前の4月にドイツに逃亡していたが、アルバ公はオラニエ公およびそれに付き従った貴族たちの財産と所領を没収するという強硬策を採った[3]

反乱の始まり[편집]

1568年、オラニエ公ウィレム1世は弟ローデウェイクらとともにネーデルラントに侵攻し、アルバ公に戦いを挑んだが、これは失敗に終わり、フランスに逃げ込むことになった。フランスでユグノー勢力と合流したオラニエ公らは、軍船をかき集めて海賊船団を設立した。イングランドのドーバーやフランスのラ・ロシェルを根拠地として通商破壊戦を展開した。これがいわゆる「海乞食」(ゼーゴイゼン、ワーテルヘーゼン)である。

1572年4月、26艘の船団に搭乗したおよそ250人の「海乞食」軍団はマース川の河口にあるブリーレの町の占拠に成功した。その後、ブリーレを根拠地に周辺の港町を幾つか攻略し、ホラント州およびゼーラント州内の水上交通網を押さえる戦略に出た。この結果、多くの都市がオラニエ公側に寝返り、7月までに26都市がオラニエ公側に付くこととなった。この月、ホラント州議会はオラニエ公ウィレムを州総督に任命する。

アルバ公側も反撃に出たが、オラニエ公側の守りを崩すことは出来ず、1574年10月のレイデンヘ攻防戦に勝利を収めたオラニエ公は、ホラント州およびゼーラント州を実効支配するに至った。その後、各地からプロテスタントがホラント州およびゼーラント州に逃げ込み、この2州の政治の実権はプロテスタントが握るようになった[주 1]

ヘントの和平とその破綻[편집]

ユトレヒト同盟とスペイン領ネーデルラント(1579年当時)

1575年、スペイン王フェリペ2世は2度目の破産宣告をした。この影響でネーデルラント派遣軍への給料支払いが滞ったため、スペイン兵たちはブラバント州で略奪行為に出た。この略奪を問題視したネーデルラント南部の諸州はスペイン軍の撤退を要求し、1576年11月に틀:仮リンクが成立した。しかしこの和平体制は長くは続かず、1577年にはオラニエ公と、アルバ公に代わって1576年にネーデルラント全州総督となっていたフアン・デ・アウストリアの間で戦闘が再開される。

戦闘再開から間もなく、ユトレヒト州アムステルダムはオラニエ公側に就くが、スペイン側も病死したフアン・デ・アウストリアの次のネーデルラント総督となったアレッサンドロ・ファルネーゼが主導して1579年1月にアラス同盟を結成、反乱州との対決姿勢を強めた。これに対し、反乱州は同じ月にホラント州およびゼーラント州でユトレヒト同盟を結成、翌年までにユトレヒト同盟は北部7州による同盟へと発展した。

フェリペ2世の統治権否認決議[편집]

1580年9月、ユトレヒト同盟はフランス王アンリ3世の弟アンジュー公フランソワを新たにネーデルラントの君主として迎えることを決め(プレシ・レ・トゥール条約)、1581年7月にはユトレヒト同盟に参加した北部7州による連邦議会によって、フェリペ2世の統治権を否認する틀:仮リンクを布告した。アンジュー公は1581年8月にネーデルラント入りしたが、ユトレヒト同盟側との意見の対立により、1583年6月にはフランスに戻ってしまう。更に1584年7月にはオラニエ公ウィレムが暗殺され、ユトレヒト同盟は指導者を欠く状態となった。

1585年1月、ユトレヒト同盟はアンリ3世に北部7州の主権を委ねることを申し出たが、この申し出はアンリ3世に拒否される。同年6月にはイングランド女王エリザベス1世に同様の申し入れをするが、これも断られ、代替策としてイングランド貴族レスター伯ロバート・ダドリーが執政として北部7州に迎えられることとなった。8月に入るとスペイン軍の封鎖を受けていたアントウェルペンが降伏、開城に至って焼き討ちを受け、退去したプロテスタント市民が大挙して北部へと逃れた。これをきっかけとして10万から15万に達するとみられる難民がそれまでの商工業の中心だった南ネーデルラントから北部のホラントとゼーラントに移動する事態となり、ネーデルラントの経済の中心はアントウェルペンから資本と商業のノウハウが移転されたホラントの中心都市アムステルダムに移ることとなった。レスター伯は1585年12月に兵士5000人を率いてネーデルラント入りするが、やはり意見の対立が発生して1587年12月に帰国。ハプスブルク家と対抗出来る有力君主に北部7州の主権を委ねるという戦略は完全に破綻した。

ネーデルラント連邦共和国[편집]

1585年にホラント州およびゼーラント州の総督に任命されたマウリッツ・ファン・ナッサウは、1591年までに更にユトレヒト州ヘルダーラント州オーファーアイセル州総督にも就任し、反乱側の指導者としての地位を確立する。1596年にはフランスとイングランドが北部7州を国家として事実上認める条約(グリニッジ条約)を締結し、うやむやのうちにネーデルラント連邦共和国が成立していたことになった[주 2]

共和国が成立してもスペインとの戦争は終わらなかった。ネーデルラント諸州は1602年、アムステルダム証券取引所とともに連合東インド会社(オランダ東インド会社)を設立してアジアに進出し、ポルトガルから香料貿易を奪取し、世界の海に覇権を称えた。このため貿易の富がアムステルダムに流入して、17世紀の共和国は黄金時代を迎えることとなる(オランダ海上帝国)。1609年にはスペインとの12年停戦協定が結ばれたが、1621年に停戦が終わると、独立戦争はヨーロッパ全体を巻き込んだ三十年戦争にもつれ込んだ。1648年、三十年戦争を終結させたヴェストファーレン条約の一部であるミュンスター条約で、スペインはネーデルラント連邦共和国の独立を正式に承認し、80年にわたる戦争(八十年戦争)は終結した。

VOCアムステルダム号(復元)

オランダ東インド会社は、アジアだけでなく南北アメリカにも植民地を築いた。しかし各地の植民地でイギリス東インド会社と衝突し、ついには3次にわたる英蘭戦争となった。オランダ政府は1656年、のちに틀:仮リンクとなる兵器製造所・戦艦造船所を創設した틀:Efn2

1672年、イングランドがオランダに宣戦布告し(第三次英蘭戦争)、続いてフランス王国も宣戦を布告した(オランダ侵略戦争)。この国家的危機のため、1672年は「틀:仮リンク」と呼ばれる。틀:仮リンクと共和派の対立も深まり、ついには1653年以来共和制の指導者であったヨハン・デ・ウィット兄弟が倒され、ウィレム3世総督職に就いた。

1688年、ウィレム3世はイングランドへ侵攻し、ジェームズ2世は国外へ逃れた(名誉革命)。ウィレム3世は妻メアリー2世とともにイングランドの共同統治者(ウィリアム3世)となり、イングランド(およびスコットランドアイルランド)とネーデルラントは1702年までの20年余、ともに同じ元首を頂くことになった。18世紀始めに勃発したスペイン継承戦争ではネーデルラントはフランス・スペインを相手にイギリスとともに戦った。1747年、オーストリア継承戦争の最中、フランスに侵攻されたが、なんとか撃退した。

18世紀末葉になるとフランスの啓蒙思想が共和国にも流入したが、オランダ総督のウィレム5世が優柔不断な態度を取っていたため、統領職を代々世襲するオラニエ=ナッサウ家に対する反感が高まった。さらにアメリカ独立戦争でイギリスと対立し、第四次英蘭戦争を起こして敗北(ただし、アメリカ独立戦争ではイギリスが敗北したため、オランダの損失は植民地のナーガパッティナムのみ)、1785年に愛国派(パトリオッテン)が蜂起する結果になった。

バタヴィア共和国とホラント王国[편집]

ナポレオン・ボナパルト

フランス革命が起こると、フランス革命軍は1793年にネーデルラント一帯を占領し、フランスへ亡命していた革命派やその同調者にバタヴィア共和国を樹立させたが、ナポレオンが皇帝に即位すると、1806年に弟ルイ・ボナパルトを国王とするホラント王国に移行した。しかしルイはネーデルラント人の利益を優先してナポレオンの命令に忠実でなかったため、ナポレオンは1810年に王国を廃止してフランス帝国の直轄領とし、総督ルブランがアムステルダムに駐在した。この混乱のなかで東インド会社は解散し、東インド植民地(オランダ領東インド)はフランスと敵対するイギリスが一時占領(1811年 - 1816年)した。この影響は遠く離れた日本の出島まで及び、オランダ国旗を掲げオランダ船に偽装したイギリス船フェートン号による侵犯事件も起こった(フェートン号事件)。この時期、オランダ国旗を掲げている場所は、世界中で長崎の出島とアフリカ西海岸のエルミナ要塞しかなかった。

ネーデルラント王国[편집]

ネーデルラント連合王国(1~5)
ネーデルラント王国(1,2)

1813年にナポレオン帝国が崩壊すると、イギリスに亡命していたオラニエ=ナッサウ家の一族が帰国し、ウィレム1世が即位して南ネーデルラントベルギールクセンブルク)を含むネーデルラント連合王国を樹立した。これが現在まで続くネーデルラント王国(オランダ王国)の始まりである。しかしベルギーは独立戦争の後、1830年に分離独立した。1890年ウィレム3世が崩御すると、王位を継承したウィルヘルミナ女王が幼少のため母后エンマが摂政に就任したが、その際にはルクセンブルク大公国同君連合を解消して完全独立した。ウィルヘルミナ女王は1898年に18歳で親政を開始し、女王の統治時代は50年にわたって続くことになる。

二度の世界大戦[편집]

第一次世界大戦ではネーデルラント王国は中立を維持したが、第二次世界大戦では中立宣言にもかかわらず、他のベネルクスの国ともども1940年5月10日未明にナチス・ドイツの侵攻を許した[6]。オランダは空挺兵などによる急襲を受け、3日後の5月13日には政府をロンドンへ移転[7]、さらに翌5月14日に降伏してドイツに占領された[8]

ウィルヘルミナ女王も政府とともにイギリスに亡命した。また1941年太平洋戦争が勃発すると、連合国の一員として12月8日に日本に対して宣戦を布告した[9]。東インド植民地(オランダ領東インド)は日本軍に占領された。南方軍司令官の今村均大将はオランダ側からの現地住民から身を守るための武装許可の要請を受け入れ、オランダ人の拳銃携帯を許可している。

世界大戦後から21世紀へ[편집]

現在のオランダ君主
ウィレム=アレクサンダー国王
(在位:2013年4月30日 - )
現在のオランダ首相
マルク・ルッテ
(在任:2010年10月14日 - )

1945年日本降伏後、オランダ軍は日本軍人をBC級戦犯として逮捕、拷問・処刑を行った(連合国中で最も多い226人の日本人を処刑、数千人を無期・有期刑で服役させた)。中には無実の者も含まれており、オランダの単なる報復行為の側面もあった。

日本降伏後、スカルノら現地の独立派は独立を宣言し、オランダはインドネシアの独立を認めることなく再征服を目指したことによりインドネシア独立戦争(1945年 - 1949年)が勃発したが、結局インドネシアの独立を承認せざるを得なくなった。

オランダは東南アジアを長期にわたって植民地支配してきたが、その違法性を糺す動きはほとんど見られず、植民地支配は当時の政治体制の一部として容認されていたという認識が一般的である[10]1995年ベアトリクスインドネシアを訪問し、「植民地支配はお互いに恵みを与えた」とスピーチして、インドネシア人を憤慨させた。植民地支配への謝罪はなかったが、オランダ国内で批判されることはなかった[10]ウィム・コック首相は、2000年12月に、インドネシアに対して、植民地時代のオランダの行為に関して謝罪する用意があると表明したが、国内で嵐のような世論の反発に遭い、謝罪は立ち消えとなり、元軍人団体は「謝罪は独立戦争の犠牲になったオランダ兵に対する侮辱である」と猛反発した[11]。オランダは奴隷制に深く関与した国であるが、2001年틀:仮リンクで、人種差別アフリカの貧困の淵源には奴隷制と植民地主義があるとして、「遺憾の念」を表明したが、賠償補償の実施には至らず、奴隷制や植民地主義に対する責任として金銭を拠出するのはふさわしくないという立場を堅持し、代替として、経済支援を通じて、アフリカの雇用健康経済を支援することを主張した[11]。ただし、オランダの対応は近年変化しているとも指摘され、2005年8月、インドネシア建国60周年記念にジャカルタを訪れた틀:仮リンク틀:仮リンクは、日本軍降伏後独立戦争に攻撃を加えたことに「遺憾の念」を表明したが、それ以上の植民地支配の違法性に踏み込み、法的責任として対処することは躊躇しており、国家賠償はしないけれども、未来志向の経済支援で事態を収めようとするやり方を堅持している[11]

本国では1948年にウィルヘルミナ女王が退位してユリアナ女王が即位し、1980年にはユリアナ女王の譲位を受けてベアトリクス女王が即位した。

ウィム・コック政権(第2次コック内閣)下の2000年9月12日同性結婚の合法化に関する法案が、スターテン・ヘネラール(オランダ議会)の第二院(下院)で109票対33票で可決され、同年12月19日第一院(上院)で49票対26票で可決された。同法律は、2000年12月21日ベアトリクス女王から王室の同意を得て、2001年4月1日に施行され、オランダは世界で最初に同性結婚を合法化した国になった(オランダの同性結婚)。

2013年にはベアトリクス女王の譲位を受けて、ウィレム=アレクサンダー国王がオランダ王室史上123年ぶりの男性国王として即位した。

現在のオランダの首相は、自由民主国民党党首のマルク・ルッテ2010年10月14日就任)。

内閣は、2017年10月26日成立の第3次ルッテ内閣(Third Rutte cabinet)。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1. ただし人口比で見るとプロテスタントは1割もいなかった[4]
  2. ネーデルラント連邦共和国は独立宣言を行っていないため、その成立の時期を特定することは出来ない[5]

참조주[편집]

틀:脚注ヘルプ

출처[편집]

  1. 森田編 1998, pp. 240-243.
  2. 森田編 1998, pp. 227-231.
  3. 森田編 1998, pp. 243-247.
  4. 森田編 1998, pp. 248.
  5. 森田編 1998, pp. 251.
  6. オランダ各地に独落下傘部隊降下(『東京日日新聞』昭和15年5月11日夕刊)『昭和ニュース辞典第7巻 昭和14年-昭和16年』p367 昭和ニュース事典編纂委員会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刊 1994年
  7. オランダ政府、ロンドンへ移転(『東京朝日新聞』昭和15年5月15日夕刊)『昭和ニュース辞典第7巻 昭和14年-昭和16年』p368
  8. ロッテルダム陥落、オランダ軍降伏(『東京朝日新聞』昭和15年5月16日夕刊)『昭和ニュース辞典第7巻 昭和14年-昭和16年』p368
  9. “THE KINGDOM OF THE NETHERLANDS DECLARES WAR WITH JAPAN”. ibiblio. 2011년 4월 23일에 확인함. 
  10. 前川一郎; 倉橋耕平; 呉座勇一; 辻田真佐憲 (2020년 8월 7일). 《教養としての歴史問題》. 東洋経済新報社. 55쪽. ISBN 978-4492062135.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11. 前川一郎; 倉橋耕平; 呉座勇一; 辻田真佐憲 (2020년 8월 7일). 《教養としての歴史問題》. 東洋経済新報社. 56쪽. ISBN 978-4492062135.  다음 글자 무시됨: ‘和書’ (도움말)

참고 문헌[편집]

외부 링크[편집]

틀:유럽의 제재

틀:デフォルトソート:おらんたのれき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