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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15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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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朴晉
무신
이름
명보(明甫) 또는 명부(明夫), 여회(汝晦)
군호 응천군(凝川君)
시호 의열(毅烈)
신상정보
출생일 1560년 8월 25일
출생지 조선 경상남도 밀양부 밀양읍 내일동
거주지 조선 경상남도 밀양시
사망일 1597년 3월(38세)
사망지 조선 한성부
국적 조선
학력 한학 수학
부모 박인수 (무신)
배우자 전처 파평 윤씨, 후처[안동 김씨
군사 경력
복무 조선 육군
복무기간 ? ~ 1597년 3월
지휘 경상우도, 황해도 전라도병영
주요 참전 임진왜란

박진(朴晉)[1](1560년 8월 25일 ~ 1597년 3월)은 조선 중기의 무신 및 무관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명보(明甫), 명부(明夫), 여회(汝晦). 시호는 의열(毅烈)이다.

1592년 2월 밀양 부사에 보임된 후 지휘한 임진 왜란 초기의 밀양성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며, 동년 5월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올라 영천의병 주도로 치른 영천성 전투에 물자를 지원하였다. 제 1차 경주성수복 전투를 지휘하였으나 대패 당하고 제2차 경주성수복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후 동지중추부사, 1594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순천 부사, 그 뒤 전라도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596년 황해도 병마절도사 겸 황주 목사를 지냈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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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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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은 1560년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 내일동에서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의흥위부호군(行義興衛副護軍)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부친 박인수(朴麟壽)와 김자달(金自達)의 딸 증 정경부인 강릉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무관가문 출신으로 일찍이 음직(음서제)으로 군관이 되어 여절교위(厲節校尉)로 재직 중 1584년(선조 17년) 25세에 별시무과(別試武科)에 병과로 급제(及第)하였다.[2] 이후 비변사(備邊司)에서 무신으로 있다가 1589년(선조 22년) 무인을 불차채용할 때 심수경(沈守慶)의 추천으로 등용되어 선전관을 거쳐 1592년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되었다.

박진은 부친 덕분에 일찍 출세의 길이 열려 젊은 나이인 33세에 밀양 부사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종2품)를 역임할 정도로 인생 초반운은 대단히 좋았다. 그러나 그 후 더는 오르지 못하다가 이른 나이인 38세에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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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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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 전투장면을 그린 동래부순절도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밀양 부사인 박진은 그해 4월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올라오는 왜군을 맞아 우병사 학봉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진주(晉州)에서 왜군과 맞서 싸웠다. 이후 부사 박진은 군(郡) 내 병사 3백여 명을 이끌고 동래성으로 지원 나갔다.[3] 당시 성을 빠져 나온 경상좌병사 이각과 함께 동래성 북쪽의 소산역에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박진의 군사는 제1선에, 이각의 병사는 제2선에 배치했다.

밀양성 전투 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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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부산진을 함락시키고 동래성을 점령하자 놀란 조선군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박진은 소산역에서 퇴각하여 밀양성으로 되돌아갔다. 4월 16일 밀양성으로 복귀한 박진은 남은 병력의 수습도 여의치 않았다. 박진이 병사를 모병하는 동안 일본군 선발대가 밀양 근처까지 진격하였다는 첩보를 접했다. 이후 경상좌병사 이각 등과 함께 소산을 지키다 패배하고 왜군이 성안으로 몰려오자 성안에서 싸우다 포위되었으며, 탈출하여 밀양부를 불을 지르고 후퇴했다[4].

이때 경상우도 방어사 조준(趙俊)의 종사관 이수광(李睟光[5])은 “박진(朴晉)이 밀양 부사로서 왜적이 크게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을 지키다가는 반드시 빠져나가지 못할 것으로 여겨 도망갈 계책을 내어 황산(黃山)으로 잔도(棧道)에서 왜적들을 방어하겠다고 핑계하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그대로 도망갔다[6].” 며 비판하였다.

작원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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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은 밀양에서 동쪽으로 40리 떨어진 작원관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작원관은 부산에서 양산, 밀양, 청도, 대구를 거쳐 서울로 가려면 꼭 통과해 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일본의 제1군 고니시는 동래성을 함락시킨 다음 날인 16일 본국으로 전황 보고서를 보냈다. 그리고 양산 군수 조영규가 동래성에서 전사하여 방어 병력이 전무한 양산으로 곧장 진격한 일본 제1군의 선발대는 17일 양산에 무혈 입성했다. 4월 18일 동래성에 주둔한 일본 주력군까지 양산으로 진격했다. 그들은 다시 밀양성 방면으로 선발 부대를 급파시켰다. 여러 곳에서 승리하여 기세가 하늘처럼 높아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낙동강을 따라 밀양성으로 달렸다. 일본군은 저항하는 군사도 없는 무인지경에 빠져 무풍지대나 다름없는 낙동강을 따라 북진하였다.

고니시가 주력군의 선두에 서고 소오 요시토시 등 여섯 장수가 일본군 병력 1만 8700명을 이끌고 밀양성의 병력을 만났는데, 조선군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킴과 동시에 별동대를 내륙의 산악 지형으로 우회시켰다. 이때 박진은 험한 산이 낙동강과 맞닿아 있는 양산에서 밀양으로 향하는 좁은 길과 강의 벼랑 사이에 적은 군사들로 길목을 지켰다.

작원관 전투 무렵 경상감사 김수의 독려로 전라도와 경상우도의 인근 군현에서 소규모 조선군이 지원을 오고 있었다. 이 조선군들은 박진의 선발대와 마주쳤다. 이들을 일본군의 주력으로 오인하여 급히 퇴각하다가 수많은 병사들이 낙동강에 빠져 죽었다.

박진은 일본군의 우회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박진은 군관 이대수와 김효우 등의 직속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우회 부대를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앞에는 절벽이요, 뒤와 옆은 적이었다. 그들은 죽느냐 죽이느냐하는 배수진을 치고 격전을 벌였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돌과 바위를 굴러 항전하다 조총에 총격을 당해도 일본군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정면으로 들어오는 일본 주력군도 앞면과 옆면으로부터 공격해 왔고, 최후의 일각까지 밀양 관군은 치열한 육박전을 벌였지만 일본군의 대병력을 이기지 못했다. 군관 이대수, 김효우 등 3백여 군사가 거의 전멸당하고, 부사 박진과 부하 몇 명만 후퇴했다. 박진은 작원관 방어선이 무너지자 성 안의 각종 시설과 군량 창고를 불태우고 도주했다.[7]

영천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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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5월 33세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된 박진은[8] 몇주 전에 일본군에 함락당한 경주성 전투 패전 후 남은 병사를 수습해 일본군에 빼앗긴 경주성과 거리가 멀지 않은 안강에 진을 치고 확장일로를 걷는 일본군의 공격에 대하여 방어 위주의 소규모 전투에 임하였다. 그러므로 박진은 경주 일대를 제외하고 경상좌도의 다른 지역에 크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당시 영천 일대에서는 4월 23일 영천성(永川城)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어 영천성을 근거지로 하여 안동 주둔 일본군과 상응하며 영천 일대에서 방화, 약탈,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에 분노한 신령현의 권응수가 10여 명의 향병으로 조직한 의병군이 일본군 상대로 치른 첫 전투에 승리하고 이후 전투에서도 연달아 승리하자 인근 영천 지역에서도 거병(擧兵)하기 시작했다. 의병의 연전연승 소식으로 의병에 합류하는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전투 규모도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7월에는 자발적으로 권응수, 정세아, 정대임, 조희익 등을 중심으로 경상좌도 의병연합군을 결성하고 초유사 김성일에 의해 의병대장으로 지명된 권응수(權應銖)는 경상좌도 지역에서 합세한 의병 3,500여 명을 '창의정용군'이라 명명하고 진군했다. 7월 25일부터 7월 28일까지 의병연합군은 권응수의 지휘통솔 아래 대규모 공성전을 펼쳐 영천성에 주둔한 1천여 명의 일본군을 섬멸하며 성곽을 탈환하는 대승을 거뒀다. 전투 결과는 불에 타죽거나 강물에 빠져 죽은 일본군을 제외한 온전하게 목을 벤 일본군의 숫자만 517 명이고, 말 200 여필, 총통과 창검 900여 개를 노획하였으며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조선 백성 1천 90여명을 구출하였다.

이때 박진은 경주 안강의 본진에 남아있고 영천성 전투 당시에는 군관 변응규(邊應奎)를 보내 의병연합군에게 군기(軍器)와 화약류를 보내주었다[9]. 사실 권응수의 경력과 5월부터 시작한 그의 의병 활약상을 익히 알고 있던 박진은 권응수를 자신의 휘하에 두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10][11].

항왜 사야가 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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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사야가(김충선으로 개명)가 그에게 귀순하였다. 사야카는 선조에게 김해 김씨[12] 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충선(忠善)이라 지었다.[13]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하지만 사야가는 한 차례의 전투도 하지 않은 채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한다.

이번에 명분 없는 전쟁을 당하여 본의 아니게 선봉이 되어 삼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왔습니다. … 인의의 나라를 도저히 공격할 수 없어 저는 전의를 잃고 말았습니다. … 다만 저의 소원은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나라 조선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전쟁의 대의명분을 찾을 길 없던 사야카는 항왜의 길에 들어서 조선장수가 되어 경상도 여러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다.[13]

제1차, 제2차 경주성수복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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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사용된 비격진천뢰

약 3주전인 7월 말에 의병대장 권응수가 지휘통솔하여 치른 영천성 전투의 대승 소식에 자극을 받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박진은 경주성 수복을 도모하여 16개 읍에서 모집한 1만 여 명의 대규모 군사를 계연[14]]에 집결시키고 경주성(慶州城) 탈환을 위해 병력을 편성하였는데 당시 의병대장 신분이던 권응수(權應銖)[15]와 경주 판관(判官) 박의장(朴毅長) 등을 선봉으로 삼아 8월 20일에 경주성을 공격하였으나(제1차 경주수복 전투이다) 박진의 무리한 공격 지휘로 언양에서 오는 일본군의 매복에 걸리고 포위를 당해 의병 사상자를 제외하고도 주력군인 관군 600여 명 전사자와 1,000여 명의 부상자만 내고 박진 본인은 재집결지인 계연도 아닌 안강으로 도주했다[16][17].

경주성 탈환 실패와 총지휘 대장인 박진의 도망 후, 권응수는 경주 판관 박의장, 봉사(奉事) 이방린(李芳隣)과 함께 계연에서 잔여병력을 모으고 군기(軍器)를 정비하면서 다음 공격 준비에 착수했다. 이때 일본군은 승세를 몰아 아군 집결지인 계연까지 계속 파상공격을 해와 또 다시 혈전이 벌어졌는데[18] 적의 포위 공격에도 불구하고 전마(戰馬)를 잃은 권응수는 도보(徒步)로 군사를 독전하며 좌충우돌로 공격에 앞장서고 이를 본 장졸들이 기세를 올려 분전하며 끈질기게 대항하자 적군은 성으로 철수했다[19]. 그 후 의병과 관군의 혼성부대로 10여 일 동안 성 주변을 맴돌면서 밤낯으로 기습 공격을 계속했다. 도망간 박진이 돌아오고 흩어졌던 관군과 의병이 다시 모여듦에 따라 전투편제로 편성하고 훈련을 시켜 경주성의 일본군을 재공격하여(9월 7일의 2차 경주성수복 전투) 마침내 성곽을 탈환하였다[20]. 이 전투에서 이장손의 발명품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변이중화차 등을 사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한다.

이에 따라 영남 지역의 일본군들을 해안 쪽으로 압박했다. 일본군은 상주나 서생포로 퇴각하여 영남 지역 중심부 수십개의 읍의 함락을 면할 수 있었다. 이 공으로 박진은 9월에 가선대부로 승진했다[21]. 그런데 또 박진은 9월 2일 선조로부터 양가죽 옷을 특별히 하사받았다고 하는데 이 또한 논란거리다[22][23].

1593년(선조 26년) 2월 박진은 체직되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24]. 그해 2월에는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하고 일본군 수급 1백 11개를 베어 왕이 있는 의주 행재소에 보냈다고 하는데 그 전투 장소와 내용이 불분명하다[25]. 이 공적으로 박진은 4월 12일 가의대부(종2품)가 되었다.

생애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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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 상경과 재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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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4월 별장(別將)에 임명되어 한성부로 소환되었다.[26] 이때 그는 오랫동안 습증(濕證)을 앓아 활을 당길 수가 없었다. 4월 20일 왕명으로 명나라의 유총병을 만나 군사에 대한 일을 논의하고 명나라 이 제독의 파병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1593년 독포사(督捕使)로 임명되었다.

1593년 7월에 명나라 장수 관유격(毌遊擊)은 심유경(沈惟敬)의 말을 듣고 왜적을 비호하여 박진 등 네명의 장군을 묶어다가 곤장을 치고 욕을 보여 왕이 분개하였다.[27]1594년 2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와 10월 순천 부사(順天府使), 그 뒤 전라도 병마절도사, 1596년 11월 황해도 병마절도사 겸 황주 목사(黃州牧使)를 지내고 병조참판에 올랐다.

구타 치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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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년 2월 황주(黃州)에서 중국 사신을 전별(餞別)하였으나 병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때 그는 병으로 공무를 보지 못하여 군사 훈련 등의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1597년(선조 30년) 3월 정유재란 중 명나라 장수 누승선(婁承先)에게 또다시 구타당하여 그 후유증으로 38세에 사망하였다. 당시 누승선에게 구타당한 뒤 박진은 병으로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대신들은 박진이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피하려 한다'는 혐의로 비난을 하자 그는 신병을 참고 있다가 사망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를 구타한 명나라 장수는 처벌받지도 않았고, 기록에 나타나지도 않는다. 죽은 뒤에 그의 시신을 윤경립이 보자 가슴뼈가 부러져 있었다. 한준겸 역시 뼈가 부러진 것을 목격하였다.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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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장군묘
(경기도 기념물 제110호)

경기도 적성군 두일리(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산149-2 홍의로(洪義老)의 묘소 위편에 안장되었으며[28], 그의 사후 모친은 그의 묘소 근처에서 살았다. 사후 윤성립한준겸[29]의 건의로 조정에서 유족을 구휼하였다.

그의 구타 사망 사실은 바로 사간(司諫) 윤경립(尹敬立)이 경연에서 언급함으로써 알려졌다. 1597년 5월 사간(司諫) 윤경립(尹敬立)이 경연장에서 그가 중국인 장수에게 구타당하여 죽었으며, 그의 노모를 구휼할 것을 청하였다.

바로 병조판서(兵曺判書)에 증직되었다가 후일 응천군(凝川君)에 추봉되었고, 다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그의 묘소는 한때 민간인출입통제구역 내에 있었으나 후에 공개되었다. 묘소의 오른쪽에는 1987년에 후손이 건립한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소는 1987년 2월 12일 경기도 기념물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1736년(영조 12년) 12월 의열(毅烈)의 시호를 받았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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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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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晋으로도 쓰인다.
  2. 박진. 2016년 3월 2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12월 20일에 확인함.
  3. 작원관에서 장렬히 전사한 300명의 군사 오마이뉴스 2004.09.17일자
  4. 선조수정실록26권, 선조 25년 4월 14일 계묘 3/29 기사 '왜적이 밀양 지역에 쳐들어오다': 왜적이 밀양(密陽) 지역에 들어오니 부사 박진(朴晉)이 작원강(鵲院江)의 잔교(棧橋)를 지켰는데 좁은 잔교를 점거하여 활을 쏘면서 버티자 적이 여러날 진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 적병이 이웃 양산군(梁山郡)을 함락시키고 우회하여 후면으로 쳐들어오니 지키던 병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이에 박진이 본부로 달려 돌아와 병고(兵庫)와 창곡(倉穀)을 태워버리고 도망하였다.
  5. 실학자이자 지봉유설의 저자이다.
  6. 선조수정실록26권,선조 25년 4월 14일 계묘 3/29 기사 '왜적이 밀양 지역에 쳐들어오다': "왜적이 밀양(密陽) 지역에 들어오니 부사 박진(朴晉)이 작원강(鵲院江)의 잔교(棧橋)를 지켰는데 좁은 잔교를 점거하여 활을 쏘면서 버티자 적이 여러날 진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 적병이 이웃 양산군(梁山郡)을 함락시키고 우회하여 후면으로 쳐들어오니 지키던 병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이에 박진이 본부로 달려 돌아와 병고(兵庫)와 창곡(倉穀)을 태워버리고 도망하였다."
  7. 선조실록27권, 선조 25년 6월 28일 병진 4/14 기사 1592년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도내(道內)에 감사(監司)가 없으니 모든 적변(賊變)을 당연히 신이 아뢰어야 합니다. 신이 도내에 있으면서 여러 성이 함락된 사유와 여러 장수들이 패전한 상황을 목격하였는데, 말하는 자는 모두 '군졸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적과 대진하자 무너져 흩어졌기 때문에 장수가 속수 무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본 바로는 좌수사(左水使) 박홍(朴泓)은 화살 한 개도 쏘지 않고 먼저 성을 버렸으며,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은 뒤이어 동래(東萊)로 도망하였으며, 우병사(右兵使) 조대곤(曺大坤)은 연로하고 겁이 많아 시종 물러나 움츠렸고, 우수사(右水使) 원균(元均)은 군영을 불태우고 바다로 나가 다만 배 한 척만을 보전하였습니다. 병사와 수사는 한 도(道)의 주장(主將)인데 하는 짓이 이와 같으니 그 휘하의 장졸(將卒)들이 어찌 도망하거나 흩어지지 않겠습니까. 양산(梁山)의 가장(假將) 밀양 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도 창고와 병기(兵器)를 불태우고 도망하였습니다."
  8. 음서제(낙하산)로 무관 길에 들어선 박진은 젊은 나이에 이미 밀양부사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종2품)를 역임했다. 무과에 급제한 자들이 조선의 전방인 국경수비대 등에 배치되어 실전 경험을 쌓는게 일반적인 무관의 코스였으나 박진은 예외였다. 이순신도 무과 급제 후 함경도 녹둔도에서, 권응수도 평안도 의주에서 각각 여진족과의 실전을 치른 경험이 있다.
  9. 뒤에 이것이 빌미가 되어 영천성 수복전은 박진이 지휘한 것 같이 조정에 보고되는 일도 있었다.
  10. 권응수는 임진년 4월까지는 정3품 어모대장 직의 관군이었다. 그러나 4월에 그는 사직을 한 후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영천성수복전에서 경상좌도 의병대장으로 활약했으니 당시 관군인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인 박진도 함부로 부리지고 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한 권응수는 이미 1592년 6월에 박진이 불러서 경주 본진으로 갔을때 여러 실태를 파악한 결과 박진의 자질과 군사들의 군기(軍紀)가 수준에 못 미처 박진의 요청(박진의 소속 편제로 들어올 것을)을 사양하고 돌아온 것이다.
  11. 선조실록30권, 선조 25년 9월 15일 임신 4/4 기사: '왜적과의 전투 내용을 담은 요동에 보낸 자문'의 기록을 보면 " 적도 1천여 명이 영천군(永川郡)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7월 28일 경상 병사 박진(朴晉)이 돌격장(突擊將)인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권응수(權應銖) 등에게 응모한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본군(本郡)을 포위하게 한 다음 포(砲)로 성을 공격하고 불을 질러 관사(官舍)와 창고(倉庫)를 불태우자 적도들이 놀라 무너졌습니다. 장졸들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자 적들은 불로 뛰어들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무수히 많았으며 수급 5백 17과(顆)를 베었습니다." ---> 영천성 전투가 대승으로 끝난 후 9월에 기록된 조선선조실록에는 영천성 전투가 웃기게도 마치 박진이 지시한 공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 이유는 박진은 권응수의 경력과 5월 부터 시작한 그의 의병 활약상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런 권응수를 자신의 수하로 삼지 못해서 불만이 많았던 좌도 병마사 박진이 영천성 수복전의 대승을 빠른 관군의 보고체계로 가장 먼저 보고를 하면서 7월의 영천성 전투 승리를 마치 자신이 지시한 것처럼 보고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때는 권응수는 군관이 아니라 의병 신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박진은 보고를 하면서 굳이 권응수를 군관체계로 집어넣어 자신의 휘하로 두고 싶은 거다. 또한 권응수는 임진년 4월까지는 정3품 어모장군으로 재직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보고를 하면서 굳이 권응수의 9년 전의 직함인 '훈련원 봉사'라고 적시하여 까내리는 이유도 역시 권응수를 무시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조실록32권, 선조 25년 11월 25일 신사 1/3: '유영길·김수를 인견하고 적병의 숫자, 영·호남의 전투 상황 등을 묻다' 의 기사 중간을 보면 " 상(임금)이 이르기를, “박진(朴晉)은 잘 싸우고 있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스스로 싸운 적은 없고 권응수(權應銖)를 시켜 가서 싸우게 했는데 위성(威聲)이 이르는 곳에는 적이 모두 도주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남의 의병들은 각기 그들 읍만 지킬 뿐인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영남은 그렇지 않습니다. 통령(統領)이 있어 혹 적과 싸우기도 하고 혹은 요해처를 지키기도 합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걸 보면 영천성전투 이후인 9월의 실록 기록은 좌도 병마절도사인 박진이 관군의 보고체계로 먼저 보고를 하면서 7월의 영천성전투 승리를 마치 자신이 지휘한 것으로 왜곡해서 보고를 한 것이고, 또한 9월의 2차 경주성수복 전투 승리도 모두 자신의 공으로 내세웠는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11월에는 그 모든 진실이 밝혀지게 된 것으로 알 수 있다. 결국 이로부터 3개월 후에 박진을 교체하여 권응수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특진하게 되고 박진은 야전을 떠나서 한직으로 물러난다.
  12. 김수로계 김해 김씨와 구별하여 우록 김씨로도 부른다.
  13. 1 2 항왜(降倭) 김충선을 아십니까? 오마이뉴스 2005.04.29일자
  14. 현재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
  15. 권응수가 다시 관군체계로 들어간 시기는 영천성 탈환 성공으로 절충장군에 오르고 좌도 병마우후에 임명된 9월 임. 권응수는 음서제(낙하산)로 어린 나이(권응수보다 15살 적음)에 고위직을 차지하고 실전경험도 없고 능력치가 모자라는 박진을 가까이하고 싶지않았지만 무엇보다 왜군을 무찌르고 탈취 당한 경주성 수복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여 전투에 합세하여 경상좌병사 박진의 지휘를 받게된다.
  16. 선조수정실록26권, 선조 25년 8월 1일 무자 18/22 기사 1592년 '경상 좌병사 박진 등이 경주의 적을 공격했으나 크게 패하다.': " 경상 좌병사 박진(朴晋) 등이 경주(慶州)의 적을 포위하여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다. 박진이 16고을의 군사 1만여 명을 합쳐서 권응수(權應銖)로 선봉을 삼고 곧장 경주의 적에게 육박하였다. 그러나 적이 먼저 길 아래 산골짜기에 군사를 잠복시켰다가 전투가 한창 어우러졌을 때 뒤에서 돌진해 들어왔다. 이에 관군이 크게 패하여 전사한 자들이 즐비하였으며 박진 등은 도망하여 돌아왔다."
  17. 영천성 탈환의 재현으로 자신의 전공과 위상을 높이는 것을 노린 박진이 경주성수복 전투의 주역인 권응수를 수하로 삼고 선봉에 내세웠으나 (권응수가 너무 빨리 깊숙이 진격하지 말고 배후를 조심해야 한다고 수차례 건의했으나) 실전 전략 전술에 무지한 박진의 무리한 공격 지휘는 결국 큰 화를 자초하게 된다. 휘하에 아무리 유능한 장수들이 있어도 무능한 대장이 고집하여 잘못 지휘하면 어떻게 되는 가를 잘 보여주는 전투다.
  18. 이 전투에서 권응수가 타고 있던 말이 적탄을 맞아 쓰러지고, 판관 박의장은 가슴에 부상 입는을 적다.
  19. 이 전투에서 권응수의 전마(戰馬)가 적의 탄환을 맞고 즉사했는데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임금이 태복마(太僕馬)로 전마 1필을 하사하였다. 선조실록 50권, 선조 27년, 1594년 4월 13일 '경주 싸움에서 공을 세운 조방장 권응수에게 전마 1필을 내리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주(慶州) 싸움에서 조방장(助防將) 권응수(權應銖)가 유일하게 전마(戰馬)를 잘 다루었는데 말이 탄환을 맞고 즉사했다고 합니다. 응수가 제장 중에서 가장 역전(力戰)하였고 근자에 세운 전공(戰功)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벼슬이 2품에 이르렀으니 다시 더 내릴 만한 상이 없습니다만, 장사가 말이 없으면 적진에 임하기가 어려우니 태복마(太僕馬) 중에서 특별히 전마(戰馬) 1필을 하사하신다면 그를 포장(褒奬)하는 은전에 합당하고, 또 그도 반드시 감격하여 더욱 싸움에 죽을 뜻을 굳힐 것입니다. 격려하고 권장하는 데 관계되는 일이라서 황공하게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내구(內廐)에 세워둔 말 중에서 좋은 말을 골라 그에게 주라." 하였다. ---> 권응수의 전마가 죽은 때는 1592년 9월인데 이 사실을 선조가 늦게 보고 받은 듯 하다.
  20. 선조실록30권, 선조 25년 9월 15일 임신 4/4 기사: '왜적과의 전투 내용을 담은 요동에 보낸 자문'의 기록을 보면 " 적도 1천여 명이 영천군(永川郡)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7월 28일 경상 병사 박진(朴晉)이 돌격장(突擊將)인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권응수(權應銖) 등에게 응모한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본군(本郡)을 포위하게 한 다음 포(砲)로 성을 공격하고 불을 질러 관사(官舍)와 창고(倉庫)를 불태우자 적도들이 놀라 무너졌습니다. 장졸들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자 적들은 불로 뛰어들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무수히 많았으며 수급 5백 17과(顆)를 베었습니다." ---> 영천성전투가 대승으로 끝난 후 9월의 실록 기록에는 영천성 전투가 마치 박진이 지시한 공적으로 기록 된 것이다. 그리고 저 때는 권응수는 군관이 아니라 의병 신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박진은 보고를 하면서 굳이 군관체계로 집어넣어 권응수를 자신의 휘하로 두고 싶은 거다. 또한 권응수는 임진년 4월까지는 정3품 어모장군으로 재임했음에도 박진은 굳이 보고서에 권응수의 직함을 9년 전의 직책인 '훈련원 봉사'라고 적시하여 까내리는 이유도 역시 권응수를 무시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조실록32권, 선조 25년 11월 25일 신사 1/3: '유영길·김수를 인견하고 적병의 숫자, 영·호남의 전투 상황 등을 묻다' 기사 중간을 보면 " 상(임금)이 이르기를, “박진(朴晉)은 잘 싸우고 있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스스로 싸운 적은 없고 권응수(權應銖)를 시켜 가서 싸우게 했는데 위성(威聲)이 이르는 곳에는 적이 모두 도주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남의 의병들은 각기 그들 읍만 지킬 뿐인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영남은 그렇지 않습니다. 통령(統領)이 있어 혹 적과 싸우기도 하고 혹은 요해처를 지키기도 합니다.” ---> 라고 기록되어 있는 걸 보면 영천성전투 이후인 9월의 실록 기록은 좌도 병마절도사인 박진이 관군의 보고체계로 가장 먼저 보고를 하면서 7월의 영천성전투 승리를 마치 자신이 지휘한 것으로 왜곡해서 보고가 된 것이고, 또한 9월의 2차 경주성수복 전투 승리도 모두 자신의 공으로 내세웠는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11월에는 그 모든 진실이 밝혀지게 된 것으로 알 수 있다. 결국 이로부터 3개월 후에 박진을 교체하여 권응수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특진하게 되고 박진은 야전을 떠나서 한직으로 물러난다.
  21. 선조수정실록26권, 선조 25년 9월 1일 정사 9/21 기사 / 1592년 '박진이 경주를 수복하다': " 박진(朴晋)이 경주를 수복하였다.-- (중략)-- 가선 대부로 승진시켰다." ---> 경주성 탈환전투에서 총지휘자인 박진이 대패 당해서 도망간 후 권응수가 여러 장졸을 계연에서 모아 경주성의 일본군을 계속 기습 공격하면서 2차 탈환 전투를 준비를 위해 병장기를 모으고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때서야 박진은 돌아와서 참전한 것 뿐인데 꼴에 자신이 대장이랍시고 경주성 2차 탈환전투의 승리를 자신이 보고하면서 자신의 공적으로 장계를 올리고 포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22. 선조실록30권, 선조 25년 9월 2일 기미 3/3 기사 1592년 '경상 병사 박진에게 양피옷을 하사하다.' ---> 그런데 1차,2차 경주성수복 전투시 박진이 도망간거 외에는 별로 한 것이 없었지만 설령 경주성수복전의 승리로 박진이 저 양가죽 옷을 하사 받았다고 치더라도, 2차 경주성 전투로 성을 탈환한 날짜가 9월 8일인데, 그 보다 빠른 9월 2일에 선조가 이미 경주성 탈환 소식을 알고 양가죽을 옷을 하사 했다라고??
  23. 오마이뉴스 2016년11월 2일 기사의 중간부분에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56405 "<선조실록> 1592년 9월 2일자 기사 중에도 그런 의심을 가능하게 해주는 내용이 나온다. 선조가 '박진에게 양피옷을 하사했다'는 대목이다. 9월 2일이면 박진이 지휘하여 경주성을 되찾게 되는 9월 8일보다 전이고, 처음 경주성을 공격했다가 대패하는 8월 21일보다 뒤이다. 즉, 박진은 영천성을 수복한 포상으로 임금에게서 양피옷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렇다면 7월 27일 영천성 수복에 자신이 결정적 기여를 한 양 보고한 것이 아닌가 의심될 만하다." ---> 한마디로 임진왜란 당시 그가 마주한 전투마다 조금만 불리하면 상습적으로 도망치는 한마디로 '도망의 귀재'인 박진은 욕망은 하늘을 찌르는데 정작 자신의 경륜과 능력치는 그에 못 미치니 할 수 없이 남의 전공과 하사품 마저도 가로챘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24. 박진은 한직인 동지충주부사로 이동하고 반면에 권응수는 핵심보직인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특진 배치된다. 선조실록35권, 선조 26년 2월 5일 경인 4/8 기사 '이호민·구성·권응수·박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호민(李好閔)을 동부승지로, 구성(具宬)을 집의로, 권응수(權應銖)를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로 삼고, 박진(朴晉)을 체직시켜 동지중추부사로 삼았다."
  25. 선조실록35권, 선조 26년 2월 16일 1593년 12번째 기사 '영남좌도 절도사 박진이 왜적을 베어 행재소에 보내오다': "영남좌도 절도사(嶺南左道節度使) 박진(朴晉)이 왜적의 수급 1백 11급을 베어 행재(行在)에 보냈다." 라는 실록의 달랑 한 줄 짜리 기록인데 전투가 벌어진 장소나 전투 내용에 대한 언급이 없다.
  26. 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 1593 계사 4월 12일(병신) 2번째기사 "박진을 서울에 주둔하게 하고 별시 무과를 보아 군사와 군량을 주라고 분부하다"
  27.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1593 계사 7월 18일(경오) 3번째 기사 "박진 등에게 곤장을 친 관 유격의 일로 경략에게 게첩을 보내라 전교하다"
  28. 그의 묘소 바로 아래 17m 지점에 홍의로의 묘가 있고, 홍의로 묘에서 12m 아래는 홍의로의 부인 서원염씨 묘소가 있다.
  29. 인조비 인열왕후 한씨의 친정아버지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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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 대동야승
  • 《촉영도선생안》(矗營道先生案)
  • 《비변사선생안》(備邊司先生案)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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