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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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승(奇大升, 1527년 12월 21일(음력 11월 18일) ~ 1572년 12월 15일(음력 11월 1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기묘명현인 기준(奇遵)의 조카이자[1] 조찬한의 처조부이다.[2]

전라도 광주목 광산면 소고룡리 출신으로, 본관행주이며, 는 명언(明彦), 는 고봉(高峰)·존재(存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퇴계 이황과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및 이기(理氣) 논쟁을 통해 조선 성리학 수준의 제고에 기여했다. 광주광역시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생애[편집]

1527년(중종 22) 광주 광산구 소고룡리(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에서 아버지 기진(奇進)과 어머니 진주 강씨(晉州姜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려시대의 재상 기순우의 14대손이며, 순제의 황후 기황후의 친정아버지 기자오는 그의 11대조 기필선의 둘째 형 기윤숙의 증손자였다.

1534년(중종 29)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매우 슬퍼하며 어른처럼 애통해하였다. 1537년 향숙(鄕塾)에 나아가 《대학장구(大學章句)》를 배웠는데, 학우들이 배우는 것까지 아울러 통달하였으며, 수학과 육갑(六甲)과 오행성쇠(五行盛衰)의 이치에도 정통하였다.

1546년(명종 원년) 가을 향시(鄕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3] 1555년(명종 10) 부친 물재공(勿齋公)이 사망하자 여묘살이를 하였다. 1557년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발췌해 주자문록 3권을 편찬했다.

1558년(명종 13) 7월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가던 도중 장성의 하서 김인후태인의 일재 이항을 배알하고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논하였다.

그해 10월 식년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그 달에 서울에서 추만 정지운의 천명도(天命圖)를 얻어 보고, 경저(京邸)에 와 있던 퇴계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누었다.

1558년(명종 13) 11월 휴가를 얻어 귀향하면서 다시 일재 이항을 배알하고는 전에 의논했던 것을 재차 논하다가 미처 결과에 이르지 못하였다.[4] 이후 하서 김인후를 배알(拜謁)하고 분별하기 어려움을 들어 질문하니, 김인후는 『이와 기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와 기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며 그의 주장이 옳다하고 하루내 강론하다 파하였다.

1559년(명종 14) 1월 퇴계 이황의 발송 서(書)를 받아보고, 3월에는 퇴계에게 저설(著說) 및 답서(答書)를 올려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변(論辨)했다. 8월에 퇴계에게 편지를 올려 출처(出處)와 거취(去就)의 의리에 대하여 논하고, 성정설(性情說)을 주장하였다. 10월에 퇴계의 답서(答書) 및 변설(辨說)을 받아 보았다. 그해 겨울 인근에 살던 하서 김인후에게 매양 나아가 이기(理氣)를 강론했는데, 이황의 『사단칠정 이기호발설』에 대해서도 깊이 의심하여 질문하니 하서 김인후가 세밀한 분석과 변론을 투철하고 정밀하게 해주었다.

1560년(명종 15) 3월 세상을 버린 하서 김인후 영전에 글을 지어 전(奠)을 올렸다.[5] 5월에는 서신으로 추만 정지운과 천명도(天命圖)에 대해 논하였다. 8월에는 그동안 하서 김인후로부터 얻은 소득을 바탕으로 「사칠설」(四七說) 및 「장서」(長書)를 저술하여 퇴계 이황에게 드렸으며, 퇴계와 「사칠호발(四七互發)」에 대해 강론할 때 이를 밝히니 수만 언(言)에 이르렀다.

1559년(명종 13) 3월부터 이황과 12년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1566년까지 8년간의 걸쳐 이루어진 사칠이기논쟁(四七理氣論爭)의 서신이 유명한데, 이것이 세상에 전하는 '퇴계ㆍ고봉'의 「사칠 왕복서」이다. 이 논쟁은 조선 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때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다.

1566년(명종 21) 그동안 하서 김인후를 통해 얻은 전설(前說)을 다 버리고, 결론에서 형식적으로 퇴계 이황의 설에 자신의 설을 합치시키며 이황을 스승으로 받들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논리의 일관성을 잃어 버리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562년(명종 17)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을 임명되고, 1563년(명종 18) 독서당(讀書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해 3월 승정원 주서(注書)와 사정(司正)에 임명되었다. 8월 신진사류의 영수(領袖)로 지목되어 훈구파 및 외척이었던 명종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의 주도하에 삭직(削職)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당하였으나, 종형 기대항(奇大恒. 복재 기준 아들)의 상소로 12월 복직하여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이듬해 2월 검토관이 되어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1565년(명종 20) 병조좌랑, 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사인을 역임하였다. 1567년(명종 22)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충용(充用)되고, 이어서 장령, 의정부 사인, 홍문관 응교가 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 사헌부 집의(執義), 홍문관 전한(典翰)겸 예문관 응교(應敎)에 제수되어, 기묘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조광조·이언적 등에 대한 추존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 직제학(直提學),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하였다. 1570년(선조 3) 2월 을사위훈(乙巳僞勳)을 논할 때, "을사(乙巳)의 녹훈(錄勳)이 위훈(僞勳)이 아닐 뿐더러 또 선왕이 이미 정한 것이니 삭탈할 수 없다"고 하여 삭탈을 주장한 사람들의 반발을 사 대사헌(大司憲)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71년(선조 4) 4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5) 3월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이어 종계변무(宗系辨誣)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선발되어 주문(奏文)을 썼다. 9월에 대사간(大司諫)·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내다가 병을 얻어 귀향하던 중 11월 초하루날에 46세의 나이로 전라북도 고부에서 별세했다.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정철·고경명·유근(柳根)·최경회·최시망(崔時望)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고봉집》, 《주자 문록》, 《논사록》, 《왕복서(往復書)》 등이 있다.

가족 관계[편집]

  • 증조부 : 기축(奇軸)
  • 증조모 : 해주정씨(海州鄭氏)
    • 조부 : 기찬(奇襸)
    • 조모 : 파평윤씨(坡平尹氏)
      • 백부 : 기형(奇逈)
      • 백부 : 기원(奇遠) - 금강 기효간 조부
    • 조모 : 안동권씨(安東金氏)
      • 백부 : 기괄(奇适)
      • 숙부 : 기준(奇遵) - 기대항의 아버지
      • 아버지 : 기진(奇進)
      • 어머니 : 강영수(姜永壽)의 딸(진주강씨)
        • 부인 : 함풍이씨(咸豊李氏)
          • 장남 : 기효증(奇孝曾, 1550~1616)
            • 손자 : 기정헌(奇廷獻, ?~?)
            • 손녀 : 조찬한(趙纘韓)에게 출가
            • 손녀 : 한이겸(韓履謙)에게 출가
          • 차남 : 기효민(奇孝閔 ,1561~1597) - 정유재란 졸(卒)
            • 손자 : 기영헌(奇齡獻, 1581~1655)
            • 손자 : 기동헌(奇東獻, 1584~1647)
          • 삼남 : 기효맹(奇孝孟, 1572~1597) - 무후(无后)
          • 장녀 : 울산 김씨 김남중(金南重)에게 출가 - 하서 김인후 손자

저서[편집]

  • 《고봉집》
  • 《주자 문록》
  • 《논사록》

학문 세계[편집]

  • 일재 이항, 하서 김인후, 퇴계 이황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선학(先學)들을 놀라게 하는 새로운 학설을 많이 제시하였다.
  • 특히 퇴계 이황과 8년간에 걸쳐 사칠이기논쟁(四七理氣論爭)은 조선 유학사에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유명하다. 이후 퇴계 이황도 그의 이론을 상당 부분 받아들여 따르게 되었다.
  • 어려서부터 독학으로 공부하며 고전에 능통하였고, 문학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문장에도 재주가 뛰어나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주문(奏文)을 썼다.
  • 사암(思菴) 박순(朴淳) ·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 · 월계(月溪) 조희문(趙希文) · 금강(錦江) 기효간(奇孝諫) ·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등과 교유하였다.

상훈과 추모[편집]

  • 1578년(선조 11) 장남 함재 기효증(奇孝曾)이 선친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고마봉(叩馬峯) 아래 낙암(樂菴. 현 광산군 신룡동)가에 사우 '망천사'(望川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모심[6]
  • 1590년(선조 23)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짐, 수충익모 광국공신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 경연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에 추증되고, 문헌(文憲)의 시호가 하사됨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후에 망월봉(望月奉) 아래 동천(桐川)으로 사우를 이건함 (현 광산구 산월동)
  • 1646년(인조 24) 너브실 마을로 이건함 (현 광주 광산구 광산동 광곡)
  • 1654년(효종 5) 8월 유림들의 소청(疏請)으로 월봉(月峯)이라 사액이 내려짐
  • 1655년(효종 6) 4월 편액을 맞이 함. 예조(禮曹)의 낭관(郞官) 원격(元格)이 제문을 받들고 와서 치제함
  • 1669년(현종 10) 서원을 중창함
  • 1671년(현종 12) 문간공 눌제 박상, 문충공 사암 박순을 이향(移享)함
  • 1683년(숙종 9) 문원공 사계 김장생 추향하고 문경공 신독제 김집을 추가 배향함
  • 1788년(정조 12) 4월 예조좌랑 박흥복(朴興福)이 명을 받들어 치제함
  •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서원 철폐때 훼철됨
  • 1938년 강당 빙월당(氷月堂) 5칸을 복원함 (1979년 8월 광주광역시기념물 제9호 등록)
  • 1972년 고직사(庫直舍) 4칸을 건립함
  • 1982년 사당(祠堂) 숭덕사(崇德祠)와 내삼문(內三門)을 건립함
  • 1983년 장판각(藏板閣)을 건립함
  • 1990년 명성재(明誠齋) 4칸과 존성재(存省齋) 4칸 및 외삼문(外三門)을 건립함

관련 문화재[편집]

각주[편집]

  1. 정홍명, 《기암집》 권10, 고봉 기 선생 행장
  2. 박세채, 《남계집》 권74, 승정원 좌승지 조 공 묘갈명
  3. 1551년 알성시(謁聖試)에 합격했으나,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복재 기준(奇遵)의 조카라는 사실을 안 당시의 시험관 윤원형의 방해로 낙방했다고 한다.
  4. “지난번 서로 강구할 때에는 각자의 주장이 서로 달랐습니다. 태극은 이(理)와 기(氣)를 겸한다고 말한 것은 선생의 요지였고, 저는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이치를 들어 태극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태극’이라는 것은 다만 이일 뿐이어서 기와는 관련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하루종일 갖가지로 반복해서 논쟁하였지만 그 요점은 이것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5. 제문(祭文) : 경신년 3월 7일 후학 고봉 기대승은 삼가 주과(酒果)로써 근자에 작고하신 하서 선생 영정에 올리며 아뢰옵니다. 아아 선생이시여 이 지경에 이르셨단 말입니까, 은미(隱微)한 성언(聖言)을 장차 뉘가 들어 찾아내며, 후학들을 장차 뉘가 들어 깨닫게 하오리까. 너무도 하옵니다. 우리 도가 쇠퇴함이여! 세상에 어찌 다시 선생 같으신 분이 계시오리까. 제가 병으로 인해 고향에 돌아온 것은 선생에게 의지하여 의혹난 폐혹(蔽惑)을 제거하리라 바라고 있었사온데,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을 뉘 일렀겠사옵니까, 어찌하여 하늘도 믿지 못할 것이 이와 같단 말입니까. 아아! 선생께서 진택(眞宅: 유택)으로 돌아가시리니 이제는 종유(從遊)의 즐거움과 사모하고 우러르던 소회는 이로서 마지막이라, 어찌하오리까. 어찌하오리까. 공경히 한 잔을 올리오며 영결종천(永訣終天)하옵니다 아! 슬프옵니다.
  6. 전라감사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가 힘을 많이 썼고, 또한 강진의 언답 30여석지를 서원으로 넣어 주었다.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