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봉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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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봉서원조선시대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고봉 기대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8년(선조 11)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에 세운 서원이다.

개요[편집]

월봉서원은 고봉 기대승의 장남 함재 기효증(奇孝曾)이 선친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1578년(선조 11) 전라도 광산군 낙암(현 광산구 신룡동)에 망천사(望川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면서부터 비롯되었다.[1]

그 후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어, 1646년(인조 24) 동천(현 광산구 산월동)으로 이건(移建)하였다. 1654년(효종 5) 월봉(月峯)이라 사액이 내려졌다.

1671년(현종 12) 우암 송시열(宋時烈) 등의 건의로 인근의 덕산사(德山祠)에 모셔져 있던 박상(朴祥)과 박순(朴淳)을 이향(移享)하고, 1673년(현종 14)에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을 추배함으로써 당색이 분명한 서원이 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2]

1938년 현 위치인 백우산 기슭 광주 광산구 광곡(너브실) 마을에 있던 원 종가터에 서원 강당 빙월당(氷月堂)을 중건하였다.

1972년 4칸의 고직사(庫直舍)를, 1978년 외삼문(外三門)과 3칸의 장판각(藏板閣)을, 1982년에 사당(祠堂) 숭덕사(崇德祠)와 내삼문(內三門)을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1990년 4칸의 명성재(明誠齋)와 존성재(存省齋)를 건립하고, 1991년 위패를 봉안하여 의전(儀典)을 순성(順成)했다.

매년 춘·추향제가 음력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에 봉행되고 있으며, 그의 학덕을 기리고 추모하는 행사 교육문화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강당 빙월당1979년 8월 3일 광주광역시의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었으며, 장판각에는 『고봉집(高峯集)』 목판 474판과 <<논사록>> 등이 보관되어 있다

주요 시설[편집]

망천문[편집]

서원의 입구 정문이다.[3]

동재·서재[편집]

서원의 기숙사로 동재를 '명성재'라 하여 '배움에 있어서 밝은 덕을 밝히는데 성의를 다하'라는 의미이다. 서재는 '존성재'라고 하였는데, '자기를 성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3]

빙월당[편집]

빙월당은 서원의 강학당이다. 당호 빙월(氷月)은 정조가 하사했다고 전해지는 <빙심설월>(氷心雪月)에서 차용(借用)하였다.[3] 광주광역시의 기념물 제 9호로 지정되었다.

숭덕사[편집]

숭덕사는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에 춘 · 추향제를 지내고 있다.[3]

장판각[편집]

장판각은 책을 만드는 목판을 보관해둔 곳으로 오늘날의 출판소와 문서고라 할 수 있다. 장판각에는 『고봉집(高峯集)』 목판 474판과 <<논사록>> 등이 보관되어 있다.[3]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이 과정에 김장생 아버지인 전라감사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의 협조가 있었다.
  2. 광주의 최초 서원으로 1578년(선조11) 개설되고 1655년(효정 6)에 사액은 받았지만, 재봉 고경명을 모신 포충사(褒忠祠)가 1601년(선조 34) 세워지고 1603년(선조 36) 사액이 이루진 것으로 보아 시대 상황에 따라 사액의 선후가 뒤바뀔 수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사액 서원으로는 앞서지만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철되고, 포충사가 남았던 것은 배향 인물이 영원히 모시는 데 실지로 부합되었거나, 그 시대의 당색이나 문세의 영향을 받았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3. 월봉서원 가이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