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베이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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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8개월 전 (InternetArchiveBot님) - 주제: 외부 링크 수정됨 (2023년 8월)

표에 나온 인구가 이상합니다. 2005년 말 자료에 의하면 인구는 1168만 명입니다. 2006년 중국지도출판사가 발행한 "중화인민공화국 행정구별간책"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Jaipur13 2006년 9월 21일 (금) 23:39 (KST) 표에 나온 인구는 공식 홈페이지의 인구 자료를 참고하고 있군요. Jaipur13 2006년 9월 21일 (금) 23:46 (KST)답변

xu를 수라 읽지말고 쉬라 읽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원래 xv인데 x같이 몇개의 성모는 v를 u라 표기하지만 발음은 똑같이 읽어야 하는것으로 알고있는데요.--Genius9 (토론) 2011년 6월 12일 (일) 00:42 (KST)답변

외부 링크 수정됨 (2018년 7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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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 시 지역과 고대 동이족들의 역사 관계 (2022년 5월 16일)[편집]

최근 이 문서에서 고조선과 고구려 영토에 관한 기록들이 베이징시 역사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며 각주자료까지 엄연히 존재하는 정보들을 모두 삭제해 버리는 분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문서훼손을 지속하시는 분에게 현대 베이징 지역이 옛 고조선과 고구려의 활동 무대였다는 근거자료들을 계속해서 설명해 드렸고, 각주들이 존재하는 자료들을 함부로 지우지 말고 반론자료를 가져와 첨부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무시당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제 개인 토론문서에 와서 다중계정이 아니냐고 몰아 세우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문서훼손과 방해편집에 해당되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최종 판단은 관리자 분들에게 맏기겠습니다.

여기 토론 주제글에 베이징시와 고조선, 고구려의 관련 자료들을 일부 첨부해 놓을테니 다른 사용자들 분들께서 객관적으로 판단해 주십시오. 베이징 지역에서 고조선과 고구려가 활동하였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자료들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일부만 가져와 요약하겠습니다. 논리적인 관점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여기에 소개되는 자료만으로도 충분히 객관적인 판단을 하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역명[편집]

위키피디아: 우북평군 - 유주자사부에 속했다.
예: 평강현 - 츠펑시 닝청 현 남서, 무종현 - 톈진시 지저우 구 등등

위키피디아: 어양군 - 유주자사부에 속했다.
예: 어양현 - 베이징시 미윈 구 남서, 호노현 - 베이징시 순이 구 북동 등등

위키피디아: 상곡군 - 유주자사부에 속했다.
예: 저양현 - 장자커우시 화이라이 현 남동, 천상현 - 장자커우시 화이라이 현 북동 일대 등등

위키피디아: 태원군 - 중국 전국 시대 진나라에서부터 당나라까지 존속한 이다.
예: 진양현 - 타이위안시 남서, 사인현 - 신저우시 판스현 조금 동 등등

위키피디아: 유주 (중국) - 유주(幽州)는 현재의 베이징시톈진시 일대, 허베이성의 일부 북부 지역, 랴오닝성, 지린성 서남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부에 존재한 중국 역사상의 옛 행정 구역이며, 구주(九州) 중 한 곳으로 전해 내려오는 지역이다.

예: 발해군(渤海郡) · 상곡군(上谷郡) · 어양군(漁陽郡) · 요서군(遼西郡) · 요동군(遼東郡) · 현도군(玄菟郡) · 낙랑군(樂浪郡) · 탁군(涿郡) · 대군(代郡) · 광양국(廣陽國) · 우북평군(右北平郡)


후한서 자료[편집]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중국정사조선전 - 후한서[1]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 서(序)

옛날 요堯임금이 희중羲仲을 우이嵎夷에 살도록 명命하면서 양곡‘暘谷’이라 하였으니 그곳은 대체로 해가 돋는 곳이다. 하후씨夏后氏의 태강太康이 덕德을 잃자, 이인夷人들이 처음으로 반叛하기 시작하였다. 소강少康 이후부터는 대대로 왕화王化에 감복되어 왕실王室에 복종하고 그들의 음악과 춤을 바치게 되었다. 걸桀이 포악해지니 제이諸夷가 내지內地에 침입侵入하여 왔는데, 은殷의 탕왕湯王이 혁명革命하고 [난 뒤] 이들을 정벌하여 평정하였다. 仲丁 때에 이르러 남이藍夷가 침입하였다. 이로부터 복종하고 배반하기를 3백여년간 계속하였다. 무을武乙에 이르러 [은殷이] 쇠약衰弱해지자, 동이東夷가 점차 강성해져서 드디어 회수淮水와 태산岱山으로 나뉘어 옮겨오더니 점차 중토中土에까지 뻗어와 살게 되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 고구려(高句驪)

건무(建武) 8년(A.D.32; 高句麗 大武神王 15)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므로, 광무제가 그 왕호(王號)를 회복해 주었다. [건무(建武)] 23년(A.D.47; 高句麗 閔中王 4) 겨울에 구려(句驪) 잠지락(蠶支落)의 대가(大加) 대승(戴升)등 만여명이 낙랑(樂浪)에 투항하였다. [건무(建武)] 25년(A.D.49; 高句麗 慕本王 2) 봄에 구려(句驪)가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遼東太守) 제융(祭肜)이 은의(恩義)와 신의(信義)로 초유하니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 그 뒤 구려왕 궁(宮)이 태어나면서부터 곧 눈을 뜨고 사람을 쳐다보니, 국인(國人)들이 미워하였다. 장성함에 용맹(勇猛)스럽고 건장하여 자주 변경을 침범하였다.

덕흥리 고분 자료[편집]

한국고대금석문 - 고구려 - 덕흥리고분 묵서명[2]

덕흥리 벽화고분은 풍부한 벽화와 600여 자에 달하는 묵서가 있음으로 해서 지금까지 국내외 학계로부터 많은 주목이 있어 왔다. 그리고 주목은 묘주의 출신국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덕흥리고분은 안악 3호분과는 달리 묘주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만, 묘주가 고구려인인가 중국인 망명객인가라는 점에 논의의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이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묘주 진鎭이 건위장군建威將軍·국소대형國小大兄·좌장군左將軍·용양장군龍驤將軍·요동태수遼東太守·사지절使持節·동이교위東夷校尉’와 함께 '유주자사'(幽州刺史)란 관직을 역임했다고 하는 바, 진鎭이 고구려인이라면 그가 살았던 4세기 말~5세기 초 고구려의 통치제도는 상당히 정비되었던 셈이 되며, 나아가 고구려가 한때 유주幽州가 있는 북경 일대를 점령하였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문헌에 전해지지 않는 것이므로, 진이 고구려인이라고 할 때 고구려사에 대한 기왕의 이해체계는 상당한 수정을 요하게 된다.

참고: 유주자사 진이 설령 고구려 토착민이 아닌 중국 출신 망명객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묻힌 고구려식 고분에 광개토대왕의 독자적 연호인 '영락'이 쓰이고 있고 벽화에도 고구려 관료들이 그려져 있음으로 그가 고구려 세력 인물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Legacy0100 (토론) 2022년 5월 16일 (월) 13:45 (KST)답변

@올리브 가지: 핑합니다.
레가시님께 답변하자면, 관련이 있긴 합니다만 굳이 이 내용을 여기에 서술할 필요가 있을까요? 한국사에 일본사가 관련있다고 해서, 한국사를 설명하는 문서에 일본사는 제한적으로만 서술되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Trusovafan(토론, 기여, 기록)🖤 2022년 5월 16일 (월) 13:51 (KST)답변
현대 베이징 지역은 AD 14세기 몽골 원나라 시대에 와서야 처음 통일중국의 수도가 됩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베이징 지역은 동이족(고조선, 고구려, 연나라, 발해, 요나라, 금나라)들의 활동무대였습니다. 한나라, 진나라, 수나라 같은 중국 한족의 중앙정권에서는 베이징 지역을 직할령으로 두려고 여러번 시도하였으나 동이족들의 계속된 반란으로 번번히 실패하였고 그 대신 지역민들을 제후국으로 구슬리는 정책을 채택하여 그렇게 중국의 제후국이 된 것이 연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 연나라에 고조선인들의 후예인 부여인들과 고구려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예를들어 후연은 친중세력 지배층이었던 선비족과 고조선의 후예인 동이족들이 피지배층을 이루었던 국가였고, 후연을 멸망시킨 북연의 초대 천왕 고운이 고구려인이었습니다. 연나라에 고구려인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한국 교과서에서는 언급하지 않기에 사람들이 잘 모르고 계십니다. 금나라 역사가 정리된 금사(金史)에서도 금 태조의 시조 함보가 중국인 한족이 아닌 고려인 출신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참고로 금사는 중국 한족 중심이 아닌 원나라토크토가 편찬한 기마민족 중심의 역사관입니다. 그리고 이때 금나라의 수도가 당시 중도(中都)라고 불리웠던 현대의 베이징 시 입니다. 금나라 역사서가 직접 그렇게 밝히고 있어요.[3]
후삼국 때에 신라에서 고려로 교체되는 시기에 거했고, 남송대 모요가 기록한 《신록기》에서는 함보가 신라에서 도망쳐 완안부로 왔다고 한다. 《금사》에 따르면, 함보가 고려에서 나왔을 때 60세였다.함보의 형 아고내는 불교에 심취해 동행하기를 불긍하여, 고려에 남았고, 함보와 아우 보활리는 각각 복간수와 야라로 완안부에 들어갔다.
 
— 위키피디아: 함보
진나라, 한나라, 삼국지 위촉오 시대에도 중국은 동이족 국가들이 반기를 들면 중국 중앙정권에서 군을 보내 제압하고 친중세력을 설치하는 식의 통치방식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 또한 위나라에게 제압당해 중국의 제후국으로 들어가 조공을 하던 시절을 보내다가 다시 세력을 일으켜 독립을 하는 역사를 반복하였습니다.
즉 기원후 14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베이징 지역은 동이족들과 한족들이 계속해서 세력다툼을 하던 무대였지 지금 21세기처럼 통일중국이 완전히 장악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를 증명해줄 고서들과 최근 발표된 국사 논문들을 근거자료로 기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역사계에서 발표되는 연구논문들의 내용들이 너무 최근이기도 하고 기존 교과서에 쓰여진 내용들과도 많이 달라서 몇몇 분들이 근거자료들을 검토해보지도 않고 자신들이 알고있던 사실과 다르다고 무작정 삭제해 버리는 상황입니다.
제공된 각주 자료들을 검토해 주십시오. Legacy0100 (토론) 2022년 5월 16일 (월) 15:08 (KST)답변
예. 사실 맞습니다. 하지만 뜬금없이 이걸 넣어야 하나요? Trusovafan(토론, 기여, 기록)🖤 2022년 5월 16일 (월) 22:29 (KST)답변
제가 기입했던 자료들이 다 삭제된 현재 (2022년 5월 16일) 베이징시 문서에 있는 역사 부분 내용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문서 내용에 의하면 베이징은 기원전 1000년 연나라가 있었다고 한 뒤 곧바로 936년 거란의 요나라에 대해서 언급을 하며 약 2000년 가량의 역사를 건너뛰고 있는 상황입니다.
제가 지금껏 기입해 왔던 자료들은 바로 이 문서에서 생략되어 왔던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후 10세기까지의 베이징 지역의 역사입니다. 문서에서 약 2000년 가량의 역사정보가 누락된 상황이고, 제가 제공한 자료들에 전문적 출처들이 존재하고, 사실관계가 확인된다면, 문서에서 생략되었던 정보 공백들을 새로운 정보로 메꿔줄 필요성이 존재했고, 그 필요성을 만족시킨 편집행위의 정당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고대 베이징 지역에서 활동했던 국가들과 당시 정치적 상황들을 설명하는 자료들이 베이징시와 관련이 없다고 단정 짓는 논리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 요코하마시에 육박해서 가나가와 조약을 맺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존재하면 이분들은 일본사와 미국사는 별개라며 요코하마시 문서에서 페리 제독에 관한 역사적 내용을 지워버리는 것과 같은 행위를 범하고 있습니다.
베이징시가 현재 미국 영토이든 중국 영토이든, 그 지역의 민족들이 한민족이든 중국민족이든 프랑스인이든 그것이 2000년동안 지역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데 무슨 상관이 있나요? 역사 기록 그대로 나열한다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Legacy0100 (토론) 2022년 5월 17일 (화) 01:48 (KST)답변
Trusovafan님께서 핑하셨기에 답을 합니다.

@Legacy0100: 제가 생각하기에, 이 내용이 '사실이냐 거짓이냐'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내용이 베이징시의 역사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베이징시 문서에서는 베이징이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기록이 주요 내용이여야 할 것입니다.

제가 제거한 내용에 대한 이유와 추가하신 내용에 관한 제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 먼저 귀하께서 제시하신 후한서 자료 첫번째는 베이징과 관련되지 않은 사료로 보입니다.
  • 본문에서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남겨진 한사군 공지(空地)의 고조선 유민 무리들 중 일부가 부여고구려, 그리고 마한진한의 시초였다는 학계 주장도 존재한다는 것'이나 '고구려 건국 이후 기원후 8년 유리명왕때 한나라 왕망이 강제적으로 고구려인을 징발하려 하였다가 반란이 일어나 요서군의 태수가 죽임을 당하고 고구려가 한의 변방을 더욱 심하게 침범하였다고 서술하신 것'들은 요서유주의 역사 등에 기술될 것이지 여기는 아니라 봅니다.
  • 또한 '고구려본기 모본왕 2년 기록에 고구려가 한나라 동북쪽 북평(하북성 중부)과 태원(산시성 중서부) 지역을 공격했다는 삼국사기 기록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1세기 초반까지는 베이징 북동부 지역까지 고구려가 진출하였다가'라는 문장에서 진출보다는 '갑작스럽게 습격했다'[4]가 더 맞을 것입니다.
이 답변이 늦은 점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본문은 Legacy0100님의 2022년 5월 15일 (일) 12:23 판을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Olīvae (συζήτηση) 2022년 5월 17일 (화) 21:49 (KST)답변
이제서야 이상적인 토론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서로 합리적인 문제 제기를 하며 실과 허를 따져보는 과정에서 정확히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저 또한 여러분의 글을 읽으면서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자꾸 오해가 생기는지 드디어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 여러분들의 의견은 '고구려나 고조선이 요서유주에서 활동을 했던 것은 입증이 되었으나 그것이 베이징 지역 중심에서 활동했던 직접적인 기록은 아니다'는 입장으로 종합됩니다. 여기가 문제였습니다.

  • 고대 역사에 익숙치 않은 분들에게 간단히 설명해 드리자면 유주(幽州) = 베이징 + 허베이성 입니다. 현대시대 랴오닝성 지역은 유주가 아니라 영주(營州)였습니다 (물론 현시대 행정규격보다 몇 km 정도의 오차는 있을 것입니다). 윗 댓글에서 이미 위키피디아 링크들을 입력해 놓았으니 이해가 잘 안되시는 분들은 위로 가서 직접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중점이고 이것만 이해가 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나머지 글 내용은 부수적인 것일 뿐입니다.

  •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주나라 시절 고조선에게서 뺏은 영토에 연(燕)나라를 세웠고, 패배한 동이족 무리들은 동쪽 경계를 넘어 체제를 유지했다고 기록합니다. 고조선의 옛 영토가 연나라이고, 베이징의 옛 이름이 연나라 수도 계(薊)였으니 같은 지역을 뜻하는 것입니다. 연나라의 계(薊)가 현대 베이징시 라는 것은 위키피디아에도 나와있는 보편적 상식이니 굳이 자료를 보충하지는 않겠습니다.

  •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현대 베이징 지역에 과거 고조선과 연나라 라는 왕국들이 있었고 고조선의 옛 영토 위에 연나라가 세워졌다는 역사적 사실들을 뒷받침해줄 자료들은 이미 여러 국사 연구논문들과 고서 자료들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당시 연나라 왕이 중국 한족이든 동이족이든 미국인이든 아랍인이든 베이징시의 역사를 논하는데 제한점이 될 이유는 없습니다. 베이징 땅의 역사는 한국쪽만의 역사도 아니고 중국쪽만의 역사도 아닙니다. 옛날 고조선과 고구려가 베이징 지역을 약탈했던지, 지배했던지, 쫓겨나서 도망갔든지, 그 사건들 자체가 베이징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들임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그 지역과 직접적으로 연관있는 자료들인데 연관성이 없다는 억지를 부리며 반박자료 하나 없이 무작정 삭제를 해버리는 분들의 행위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짚어 넘어가고 싶습니다.

  • 앞글에서 후한서 동이열전 자료를 제시한 이유는 거기에 동이족(고조선)들이 상나라(기원전 1600년에서 기원전 1046년까지) 군주 중정(仲丁)때부터 3백년동안 침략을 해오며 중국의 중토까지 침투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중국 역사에서 의미하는 중토 또는 중원은 진나라, 한나라 시대의 수도였던 낙양, 함양, 장안 같은 현대 산시성을 중심으로 황허 중류, 하류 지역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또는 구주(九州)에서 중앙에 위치한 기주(冀州)를 뜻하기도 합니다. 동이열전에 기록되어 있으니 동이족 역사인 것은 당연하고, 당시 중원의 북동쪽 베이징 지역을 동이족이던 고조선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다른 고서 내용들에 보충되는 자료입니다. 동이열전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부여, 읍루, 옥저, 예, 한 등의 역사가 다 포함되어 있는데 연도로 봐서는 고조선이 맞습니다. 참고로 후한서에는 동이를 제압한 이후 서이(徐夷)가 쳐들어와 황하의 상류까지 침범했다고 기록하기도 합니다.

  • 베이징시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당시 연나라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나누자면 중국의 한족과 만주의 동이족들은 몇백년동안 베이징 지역을 서로 뺏고 뺏기기를 반복해 왔었습니다. 베이징에 수도를 두었던 연나라 또한 초반에는 진나라의 속국이었다가 나중에 독립하고, 다시 한나라에게 정복당하여 친중세력이던 모용부가 지배를 하였고, 그 뒤 고운이 권력을 잡은 이후에는 또 고구려 측으로 붙는 등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국경도 자주 바뀌고 왕도 자주 바뀌며 정사가 혼란하던 나라였습니다.
Legacy0100 (토론) 2022년 5월 18일 (수) 08:17 (KST)답변
현재 여기 토론에서 제시된 저의 근거자료들이 틀렸다는 반박증거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 토론글이 처음 올려졌던 날짜부터 1달 뒤 베이징시 문서에서 지워진 자료들을 다시 복원시키겠습니다. 이의가 있으신 분들이 있으시다면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토론에 별다른 증거제시도 없이 또다시 자료들이 삭제가 되는 상황이 생긴다면 관리자들에게 정식으로 문서훼손 판단여부를 요청할 생각입니다. Legacy0100 (토론) 2022년 5월 19일 (목) 12:31 (KST)답변
여기 토론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앞서 말하였듯이 이 내용이 베이징시의 역사에 들어 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베이징의 역사(en)도 아닌 간략하게 서술한 곳에 의견이 분분하고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내용을 서술할 필요가 있을까요?

다음은 제시하신 증거에 대한 제 의견입니다.
@올리브 가지 유주와 연나라가 베이징시 지역이었다고 자료를 가져와서 증명하고 있는 상황인데 베이징시 역사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다니??? 현재 제가 자료들을 계속 가져오고 있고, 저와 반대 의견을 가지신 분들은 아직까지 제대로된 증거자료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밑에서 설명을 하겠지만 가져오신 자료들이 오히려 제 주장에 유리합니다). 무엇보다도 아직 논쟁의 결론이 난것이 아닌데 상대의 주장이 틀렸다고 미리 답을 정하는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위서 내용을 인용하시려 한 것 같은데 첨부하신 링크에 클릭하면 '이 문서가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고 나오네요. 문서 제목을 보니 魏書/卷106上 (위서/권106상)이라고 나와있어서 그걸 따라 원문으로 된 위서 106上권 을 직접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유주(幽州)의 수도가 계성(薊城)이고 유주가 바로 연나라였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제가 이제껏 설명했던 내용들과 똑같은 기록이 발견되네요. 현재 저의 주장들을 보강해주는 자료들입니다.

유주(幽州)

유주(幽州), 계성에서 다스린다(治薊城).
관할하는 군은 3개, 현 18개(領郡三 縣十八). 가구 3,9580. 인구수 14,0536명 (戶三萬九千五百八十 口一十四萬五百三十六).

연군(燕郡)
옛날의 연국이다. 한국의 고제가 연국으로 삼았고 소제는 광양군으로 고쳤고, 선제때 국으로 고쳤다. 후한국의 광무는 상곡군에 병합했으며, 화제 영원 6년에 다시 광양군으로 하였다. 진국때 국으로 고쳤고 뒤에 다시 고쳤다.
燕郡 〈故燕,漢高帝為燕國,昭帝改為廣陽郡,宣帝更為國,後漢光武併上谷,和帝永元六年復為廣陽郡,晉改為國,後改。〉

(중략)

— 위서(魏書) 권(卷)106上 지형(地形)[6]

영주(營州)

영주(營州), 화룡성(和龍城)에서 다스린다.
태연(太延) 2년에 진(鎮)이 되었고 진군(真君) 5년에 고쳐서 설치하였다. 영안(永安) 말에 함락되어 천평(天平) 초에 다시 회복했다.

군은 6개, 현 14개이다. 가구수 1021이며 인구수 4664명이다.
營州, 治和龍城. 太延二年為鎮, 真君五年改置. 永安末陷, 天平初復. 領郡六, 縣十四. 户一千二十一, 口四千六百六十四.

— 위서(魏書) 권(卷)106上 지형(地形)[6]

현대 랴오닝성을 뜻하는 영주(營州)라는 명칭이 북위 시절에서야 나타나는 이유는 진시황 시절때 처음 정복했던 이 지역에서 한나라 시대때 반란이 일어나 통치력을 잃어버렸기 떄문입니다. 연나라 왕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도망가고 위만이 사람들을 이끌고 머리를 상투 모양으로 틀어 동쪽에 가서 옛 연나라와 제나라 세력을 복속시켰다는 기록들과 위서 지리지에서 이 지역이 없어졌다는 내용이 일치합니다. 베이징시 문서 편집에서 제가 기입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조선왕朝鮮王 만滿은 연燕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燕나라 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군리軍吏를 두기 위하여 국경에 성을 쌓았다. 진秦나라가 연燕을 滅한 뒤에는 요동遼東 외요外徼에 소속시켰는데, 한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遼東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중략)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漢에] 반反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만滿도 망명亡命하였다. 무리 천千여인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障에 살았다. 점차 진번眞番·조선朝鮮의 만이蠻夷와 옛 연燕·제齊의 망명자亡命者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王이 되었으며,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하였다.

—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7]
먼저 인용하셨던 위서 지리지 자료를 다시 보시면 진나라 시절 관리하던 요동군, 낙랑군 관할을 갑자기 '폐하였다'(그만뒀다)고 기록하고, 한참의 세월을 건너뛴 정광(正光), 즉 기원후 520년-525년 효명제 때가 되어서야 이 지역을 다시 설치하였다고 언급합니다.

자료 원문들을 하나하나 다 복사해 오느라 글이 굉장히 길어지고 있지만, 고대사에 익숙치 않은 분들을 상대하고 있을때는 눈 앞에 모든 증거들을 보여주며 설명해 드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요동군(遼東郡)

요동군(遼東郡), 진(秦)에서 실치하였고 후에 폐하였다. 정광(正光) 년간에 다시 설치하였다. 고도성(固都城)에서 다스린다. 현은 2개, 가구수 131, 인구수 855명이다.

1) 양평현(襄平縣), 두 한(漢)과 진(晉)에 속했으며 후에 폐하였다. 정광(正光)때 다시 설치하였다. 청산(青山)이 있다.
2) 신창현(新昌縣), 두 한(漢)과 진(晉)에 속했으며 후에 폐하였다. 정광(正光) 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遼東郡, 秦置, 後罷. 正光中復. 治固都城. 領縣二, 户一百三十一, 口八百五十五. 襄平, 二漢晉屬後罷正光中復有青山. 新昌, 二漢晉屬後罷正光中復.

낙랑군(樂浪郡)

낙랑군(樂浪郡), 전한(前漢) 무제(武帝)가 설치하였고 두 한(漢)과 진(晉)에서 낙랑(樂浪)이라 했으며 후에 고쳤다가 폐하였다. 정광(正光) 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연성(連城)에서 다스린다. 현은 2개, 가구수는 219, 인구수는 1008명이다.

1) 영락현(永洛縣), 정광(正光) 년에 설치하였다. 조산(鳥山)이 있다.
2) 대방현(帶方縣), 두 한(漢)에 속했고 진(晉)에서는 대방군(帶方郡)에 속했으며 후에 폐하였다가 정광(正光) 말년에 다시 속하였다.

樂浪郡, 前漢武帝置二漢晉曰樂浪後改罷正光末復治連城. 領縣二, 戸二百一十九, 口一千八. 永洛, 正光末置有鳥山. 帶方, 二漢屬晉屬帶方後罷正光末復屬.

— 위서(魏書) 권(卷)106上 지형(地形)[6]
마지막으로 동이족과 조선이 동일시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하시며 예기(禮記) 기록를 첨부 하셨는데, 이 기록을 검토해보니 동이족들이 문신을 하고 가끔 생식을 하였다는 엉뚱한 내용이 나올 뿐 별다른 내용들이 없었습니다. 주장하는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는 자료를 가져오신 듯 합니다.

고조선이 동이족이었다는 사실은 보통 사람들도 알고있는 기본적 역사 상식인 줄 알았는데, 역사에 관심이 없으신 분들은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을 깜빡했네요. 넘겨 짚어서 죄송합니다. 고조선이 동이족이라는 직접적인 근거자료를 가져와서 증명하면 금방 해결 되겠군요. 여기 있습니다.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 중에서 조선朝鮮이 제일 강대하였는데, 기자箕子의 교화敎化를 입어 그 문물文物이 예악禮樂에 합당하였다고 한다.

위魏의 시대에는 조선朝鮮의 동쪽에 있는 마한馬韓·진한辰韓의 무리가 대대로 중국中國과 왕래하였다. 진晋이 [양자揚子]강江 이남으로 옮겨간 후부터 바다를 건너 사절使節을 파견한 나라로는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가 있었는데, 송宋·제齊 시대에도 계속하여 직공職貢하였으며, 양梁나라가 흥기하자 [조공朝貢이] 더욱 빈번해졌다.

— 남사(南史) 동이열전(東夷列傳)[8]
참고로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기원전에 존재했던 조선과 기원후 14세기에 건국되었던 조선을 구별하기 위하여 기원전 시대의 나라를 고조선(古朝鮮), 또는 단군조선, 위만조선, 기자조선이라고 구분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고조선과 고구려, 연나라, 유주의 역사가 베이징시 지역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자료들이라는 것을 지금껏 계속해서 자료추가를 해오며 증명했습니다. 직접 인용하신 위서 지리지에서 조차 제가 주장했던 내용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읽어보시고 원본 내용과 차이가 있는지 직접 교차검증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링크들도 다 첨자해 두었습니다.

누군가는 열심히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연구한 자료들을 제대로된 반박자료 하나 없이 상대방을 인정하기 싫어서 베이징시와 관련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억지 부리며 지워버리는 사람들이 앞으로는 줄었으면 합니다.
Legacy0100 (토론) 2022년 5월 21일 (토) 11:17 (KST) Legacy0100 (토론) 2022년 5월 21일 (토) 11:17 (KST)답변
다른 사람긔 발언을 '억지'라 하는 것은 명백히 협업 정신에 어긋나는 실언이고, 다른 발언들도 상대를 비난하는 단어들입니다. 강조점까지 붙으니 좋지 못한 발언이죠. 레가시님은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Trusovafan(토론, 기여, 기록)🖤 2022년 5월 21일 (토) 11:34 (KST)답변
@Trusovafan 특정인물을 겨냥한 적도 없고 비난하는 단어들도 없었습니다. '고려사학회' 같은 고려대 역사기관에서 편찬한 연구논문 자료들을 아무런 토론과정도 없이 문서에서 마구 삭제해 버리는 사람들이 다시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고 언급했을 뿐입니다. 또다시 이런일이 일어나면 분명 절차를 밝을 것입니다. 근거자료를 가지고 이 토론에 참여하신 분들은 해당되지 않으니 안심하십시오.

깜빡하고 언급하지 못한 자료들이 있어서 여기에 추가합니다.

고대시대에 요동(遼東) 또는 요동군遼東郡은 현대의 요동과 지명만 같을 뿐 관할하는 지역이 많이 달랐습니다. 고대 시대의 요동은 몽골에 더 가까웠다고 합니다. 고대 역사서에 나오는 요동(遼東)이라는 단어를 보고 현대 랴오닝성으로 오해하시는 분은 없길 바랍니다.
요사遼史 / 상경도上京道
상경 임황부는 원래 요동군 서안평현 땅이다.
上京臨潢府,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
Legacy0100 (토론) 2022년 5월 21일 (토) 12:10 (KST)답변
@Legacy0100: 일단 동이와 관련한 제 발언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아 다시 말씀드립니다. 앞서 예기를 인용해 말씀드렸던 것처럼 동이(東夷)라는 개념은 제하(諸夏)의 동방을 뜻하는 상대적인 개념이었습니다. 예기나 예기를 인용한 후한서 동이열전이나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라고 합니다. 또한 설문해자에도 이러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는 동방의 사람이다.'(夷: ...東方之人也.) 라고요.
이는 당시에 제하와 맞닿아 있었던 산둥반도에 살던 부족들 등을 일컬었으며, 후에 점점 제하가 확장됨에 따라 조선이나 그 이후의 국가들과 동북에 있는 숙신과 같은 부족들들, 등을 '동이'로 일컬게 되었다는 겁니다. --Olīvae (συζήτηση) 2022년 5월 21일 (토) 12:52 (KST)답변
@Legacy0100: 또한 본문에서 제가 제거한 내용 몇몇은 의견이 분분하기도 하며 주류설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필요해 보이는 문장도 있고요. 이러하게 시간을 소모하는 토론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베이징의 역사(en)라는 문서를 만들어 토론 등을 하시는 게 어떨까요? 아니면 유주의 역사를 만드는 것은 어떠할까요? --Olīvae (συζήτηση) 2022년 5월 21일 (토) 16:53 (KST)답변
@Trusovafan트루소바님도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베이징시 지역에서 고조선과 고구려가 활동하였다는 저의 주장에 대하여 '뜬금이 없다',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하셨지만 자신의 관점을 입증시킬 근거자료는 아직 제공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올리브님과 토론을 하면서 고조선과 고구려가 베이징시 지역에서 활동했다는 저의 본문서 편집내용과 일치하는 역사적 근거자료들을 추가적으로 보충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여러분들이 반박자료를 가져와서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셔야 합니다. 반대측에서 반박자료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저의 원래 주장이 맞았다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올리브 가지
  • 이전 글에서 이미 언급을 했듯이 지금 이 토론에서 언급되는 내용들은 베이징시의 고대 역사를 잘 모르시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고서들의 원본 자료들을 가져오느라 글이 길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토론에서 제시되었던 모든 자료를 본문에 다 추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동이족이 생식을 했다거나, 고대시대 요동(遼東)은 현대 몽골 지역을 뜻했다거나, 영주(營州)가 언제 관할지역이 됐다거나 하는 내용 모두 베이징시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정보들입니다. 토론 과정에서 생긴 오해들을 바로잡기 위해 거론됐을 뿐 원래 본문서 편집에는 필요가 없었고, 설령 인용할 필요가 생긴다 하더라도 각주로 간단하게 포함시키면 되기에 문서의 부피를 크게 차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 본문에서 자료들을 삭제한 이유가 '몇몇은 의견이 분분하기도 하며 주류설은 아닌 것으로 알고 불필요해 보이는 문장도 있어서' 라고 직접 밝히셨습니다. 님께서 베이징시 본문서에서 제거하신 자료들은 다른 위키피디아 문서 링크들 뿐만 아니라 역사교육연구회(서울대 사범대학), 고려사학회(고려대 문과대학), 그리고 중앙선데이에 실린 역사학자들의 연구자료들을 첨부하고 있었습니다.

    전문 역사기관과 학자들의 연구발표에서 나온 신뢰성이 높은 연구자료들이 주류설이 아니라고 해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중립성에 어긋납니다. 위키피디아의 기본 협업 정신은 다양한 관점을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중립적 관점이란 특정한 관점을 배제시키는 것이 아닌, 모든 확인 가능한 관점을 적절한 비중으로 서술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중립적 시각은 시각·관점의 파괴가 아니라 하나의 관점으로서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 중립적 시각은 시각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주류로 느껴지는 '의견' 때문에 전문성이 높은 서울대 역사학자들의 연구자료들을 삭제해버리는 행위는 정당성이 부족합니다. 의견사실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처음 기입된 자료들이 통쨰로 삭제가 된 것을 발견했을때 참조자료들의 '사실'여부를 제대로 검토해달라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검토를 하지 않았기에 지금 이 토론이 시작된 것입니다.

위키에서 문서 내용의 사실여부를 따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절차인데 시간을 소모한다고 느끼신다니 유감입니다. 문서 독립에 대해서는 베이징시 문서에 역사란이 이미 존재하는데 굳이 새로운 문서로 따로 독립시킬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앞서 이미 언급했듯이 자료들을 각주로 간단하게 포함하면 부피가 별로 크지 않습니다. Legacy0100 (토론) 2022년 5월 22일 (일) 08:39 (KST)답변
@Legacy0100: 잠시 곡해가 있을 수 있는 것 같네요. 지금 저는 저 내용을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닌 제가 귀하께서 넣으신 내용을 왜 지워는지에 대한 이유를 답하는 것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저 Legacy0100님의 2022년 5월 15일 (일) 12:23 판(이하 본문)에서 제가 지운 내용이 베이징시의 역사 문단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제 발언이 약간의 오해의 소지를 제공한 것 같네요.
귀하의 답변에 대한 제 답변은 아래와 같습니다.
  •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따르면 진(秦)나라가 연(燕)나라를 멸망시키고 후신인 한(漢)나라가 건국된 이후 조선땅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옛 요새를 고쳐 패수(베이징 동북쪽) 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에 속하게 하였다고 기록한다.
    — 본문에서
    이 대목도 베이징시의 역사는 아니라 봅니다. 롼허훈허(渾河) 다링허샤오링허, 청천강, 압록강 등 패수로 지목되는 강은 베이징시에서 동-동북쪽으로 현 베이징시의 경계를 넘은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남겨진 한사군 공지(空地)의 고조선 유민 무리들 중 일부가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마한과 진한의 시초였다는 학계 주장도 존재한다.

    — 본문에서

이 문장은 어디가 베이징의 역사와 관련이 있을까요? 출처가 맞아도 이 내용은 역사 문단에 기술될 내용은 아닙니다.


  • 고구려 건국 이후 기원후 8년 유리명왕때 한나라 왕망이 강제적으로 고구려인을 징발하려 하였다가 반란이 일어나 요서군의(유주(幽州) 태수가 죽임을 당하고 고구려가 한의 변방을 더욱 심하게 침범하였다고 삼국사기가 전한다.

    — 본문에서

매한가지로 요서군(薊) 어느 관련이 있기에 이렇게 서술된 것일까요? 요서군의 대윤(태수) 전담(田譚)이 추격하다가 죽은 것은 베이징시의 역사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는 요서는 현(現) 랴오허의 서쪽으로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전담이 추격할 때 추격당하던 징발된 병력이 현 베이징으로 간게 아니라면요.


  • "베이징의 역사를 만드시면 어떨까요?"라고 발언한 것은 논란이 많은 주장(한사군을 설치하며 현대 베이징을 포함한 랴오닝성과 허베이성 북쪽 지역을 관리하였다는 주장)을 간략히 적힌 곳에 서술하는 것보다 차라리 베이징의 역사 문서를 만들거나 한사군 문서에서 그 관점을 서술하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장을 사실처럼 쓰지 마십시오. 한 문제에 대해서 서로 다른 신뢰할 만한 출처가 각각 다른 주장을 하고 있을 경우, 이 주장들을 사실이라고 간주하여 쓰지 마십시오. 대신 이 주장을 의견의 하나로서 서술해야 하며, 절대로 단정적으로 서술해서는 안 됩니다. ...
다양한 관점을 비중에 맞춰 설명하십시오. 어떠한 주제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이 해당 관점에 대한 상대적 지지도를 적절히 반영하는지 확인해야 하며, 특정 관점이 부적절하게 동등한 것처럼 부각되거나, 부적절한 비중으로 다뤄져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지몬 비젠탈은 홀로코스트가 독일의 유대인 절멸범죄라고 주장했으나, 데이비드 어빙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라는 서술은 대부분이 지지하는 정설과 극소수만이 주장하는 비주류 관점을 단일한 한 사람을 들어 설명하여 동등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특정한 관점에 부적절한 비중을 둔 서술입니다.

— 위키백과:중립적 시각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장이나 또한 다양한 관점에 대하여서는 이것으로 갈음합니다.

  • 시간을 소모하는 토론이라 발언한 것은 논점에서 조금씩 벗어나거나 귀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내용"이 계속 토론하며 나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토론으로 나온 내용을 보조, 보충하거나 확인하기 위해서는 필요하지만 말입니다.--Olīvae (συζήτηση) 2022년 5월 22일 (일) 18:09 (KST)답변
@올리브 가지 감사합니다. 이제서야 자료출처를 제대로 확인해보는 과정이 시작되었군요.

  • 베이징시 본문서에서 최근 삭제된 내용들은 고대 동이족들이 베이징시 지역 영토에서 활동을 했다는 자료들이었습니다.

    지금 이 토론의 주제는 고대 동이족들이 현대 베이징 지역에서 활동을 하였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자료들이 충분하다 vs 충분하지 않다를 따지고 있습니다.

    올리브 가지님께서는 동이족들이 베이징 지역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증명해줄 자료들이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의견이시고, 그 주장을 근거로 동이족 활동 내용들이 베이징시 역사 문단에서 지워졌던 것은 정당하다는 입장이십니다.

    같은 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이 되기에 올리브 가지님께서 새로히 제시한 '본주제에 대한 곡해가 있다'는 주장은 현재 확인되지 않습니다.

  •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따르면 진(秦)나라가 연나라(燕)를 멸망시키고 후신인 한(漢)나라가 건국된 이후 조선땅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옛 요새를 고쳐 패수(베이징 동북쪽) 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에 속하게 하였다고 기록한다. - 본문에서

    이 대목도 베이징시의 역사는 아니라 봅니다. 롼허훈허(渾河) 다링허샤오링허, 청천강, 압록강 등 패수로 지목되는 강은 베이징시에서 동-동북쪽으로 현 베이징시의 경계를 넘은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시차적 역사를 거꾸로 이해셨습니다. 조선땅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패수(베이징 동북쪽)까지를 경계로 삼았다는 내용은 한나라(漢) 시대 사건입니다. 고조선의 영토를 뺏고 그 자리에 연나라(燕) 수도 계성(베이징시)을 세웠던 시기는 진나라(秦) 때이고 후신인 한나라(漢)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입니다.

위에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나오는 기록은 진나라때 진번(眞番)과 조선(朝鮮) 지역을 침략하여 얻은 영토 위에 연나라(燕)가 세워져 성과 요새를 쌓았고,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건국되는 과정에서 옛날 고조선에게 뺏었던 옛 영토들에서 반란이 일어나(노관, 위만) 지키기 어려워지자 한나라가 점유권을 포기하고 패수까지 국경을 후퇴시켰다는 내용입니다. 이후 진번은 세력을 다시 회복한 위만조선에게 편입됩니다.

위에서 말씀하신 것 처럼 고대 패수라는 지명이 현시대 어느 지역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하지만 베이징 북동쪽 어딘가에 있었다는 주장이 대세론입니다. 또한 패수가 어디었든 연나라 계성이 옛 고조선의 땅이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남겨진 한사군 공지(空地)의 고조선 유민 무리들 중 일부가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마한과 진한의 시초였다는 학계 주장도 존재한다. - 본문에서

    이 문장은 어디가 베이징의 역사와 관련이 있을까요? 출처가 맞아도 이 내용은 역사 문단에 기술될 내용은 아닙니다.

여기의 편집 내용은 과거 진나라에게 정복당했던 베이징을 포함한 옛 동이족 지역들에서 반란을 일어났던 것이 베이징시 역사의 일부라고 생각하여 추가시켰던 내용입니다.

베이징 지역 내부에서 직접적으로 일어났다는 명확한 근거는 아니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으니 이 부분은 생략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 고구려 건국 이후 기원후 8년 유리명왕때 한나라 왕망이 강제적으로 고구려인을 징발하려 하였다가 반란이 일어나 요서군의(유주(幽州) 태수가 죽임을 당하고 고구려가 한의 변방을 더욱 심하게 침범하였다고 삼국사기가 전한다. - 본문에서

    매한가지로 요서군(薊) 어느 관련이 있기에 이렇게 서술된 것일까요? 요서군의 대윤(태수) 전담(田譚)이 추격하다가 죽은 것은 베이징시의 역사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는 요서는 현(現) 랴오허의 서쪽으로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전담이 추격할 때 추격당하던 징발된 병력이 현 베이징으로 간게 아니라면요.

이 기록은 신나라 황제 왕망이 고구려를 정복하려다 베이징 지역의 태수였던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죽임을 당하고, 곧바로 신나라 장수 장우(莊尤, 또는 엄우嚴尤)를 파견해 고구려 장수 연비(延否)가 전사하며 신나라와 고구려와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커지며 몇년 뒤에 베이징시가 직접 침략당하게 되는 시작점을 기록한 대목입니다. 베이징시 역사와 직접적으로 연관은 있으나 문장이 길기에 더 짧게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유리명왕 8년은 제가 편집을 하던 도중 중국측 년도와 삼국사기 년도를 헷갈려 잘못 기입한 것 같습니다 (이래서 교차검증이 중요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유리명왕 31년(기원후 12년)에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당시 왕망은 정확히 따지면 신나라(新朝) 왕이었습니다. 왕망의 시대가 전한(前漢) 말기랑 겹치고 곧바로 후한(後漢)이 건국되었기에 삼국사기에는 한나라 왕으로 기록됩니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 되었듯이 AD 1세기때는 옛 동이족들의 땅들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한나라의 국경이 베이징시 동북쪽 지역까지 후퇴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렇기에 후한때의 요서군(遼西郡)이 현대 랴오닝성이라는 주장은 성립이 안됩니다. 더군다나 같은 시대에 고구려가 요서 지역에 성을 쌓고 있었기에 이때의 요서는 신나라와(또는 후한) 고구려의 경계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년(55) 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군대에 대비하였다.

— 삼국사기 권 제15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9]
또한 AD 1세기의 후한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의 직책은 신나라의 황제 왕망이 신하들에게 내려줬던 직책이였습니다. 그렇기에 전담이 고구려에 패했을때 왕망이 곧바로 또다른 신나라 장군인 장우(莊尤, 또는 엄우嚴尤)를 파견했던 것입니다. 고구려가 요서에 성을 쌓고 있었고, 신나라에 요서대윤이라는 직책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신나라가 고구려 지역에서 모병을 하려 했으나 고구려가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신나라가 요서의 지배력을 고구려에게 빼앗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원래 요서 지역을 담당했던 요서대윤 전담이 고구려를 제압하려고 파견된 것입니다

위 사건이 일어난 뒤 왕망이 고구려보고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도발하며 계속 시비를 걸자 고구려는 이전에 한서에서 언급되었던 북평(北平)· 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 같은 베이징시 지역까지 습격했다고 삼국사기 모본왕 기록에 나옵니다. 이때는 요동태수 제융이 나와서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조공을 바쳤다는 뜻) 화친을 맺었다 나오며, 그렇기에 AD 49년 이때 당시 요서와 요동이 바로 베이징 지역 부근의 명칭이었고 고구려에게 굴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년(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을 습격하였다. 그런데 요동태수(遼東大守)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을 맺었다.

— 삼국사기 권 제14 고구려본기 제2 모본왕(慕本王)[10]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요서(遼西)는 요동(遼東)보다 더 서쪽입니다(시대에 따라서 요서가 요동의 남쪽 또는 남서쪽이 되기도 했습니다). 요서 지역에서 이미 고구려가 성을 쌓고 있었고, 현대 베이징시를 의미하는 북평과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하는 중에 요동태수를 만나는 상황에, 요서 지역이 베이징시에서 멀리 동쪽으로 떨어진 랴오닝시를 의미한다는 주장은 이 상황에서 매우 현실성이 낮습니다.

중원 세력이 랴오닝성 중심까지 아주 깊게 침투했던 것은 후한이 망한 뒤 3세기때 유주자사이던 관구검이 고구려 원정을 나설때 입니다. 허나 그 직후 위나라 진영에서 내분이 생기면서 다시 랴오닝성 지역의 통치력을 잃었고, 이후 4세기 말 광개토대왕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며 연군(燕郡, 베이징시)까지 함락합니다 (덕흥리 고분 유주자사 진의 무덤 또한 4세기 말 인물입니다). 당연히 베이징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역사 기록이죠. 이후 6세기 북위때 다시 랴오닝 지역에 진출하여 영주와 요서군을 설치하였으나 수나라때 고구려군에게 참패하면서 또 이 지역을 동이족에게 빼앗깁니다.

광개토대왕 문서에도 언급되는 역사 상식이니 굳이 따로 자료를 첨부하지는 않겠습니다. 연군(燕郡), 유주(幽州)와 계(薊)가 베이징 지역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들은 이미 윗 토론내용에 존재합니다. 트루소바님도 유주가 베이징 지역이었다는 것이 사실이 맞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이미 대답을 하였고 결론이 난 내용을 다시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이해가 안되시는 분들은 윗 토론글에서 찾아 보십시오.

  •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장이나 또한 다양한 관점에 대하여서는 이것으로 갈음합니다.

위키백과:중립적 시각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장을 의견의 하나로서 서술해야 하며, 절대로 단정적으로 서술해서는 안 됩니다." 라고 쓰여 있기도 합니다. 베이징시 본문서에서 제가 편집을 시작했을 때 역사 부문은 기원전 1000년부터 기원후 1000년까지의 역사가 비어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제 편집행위는 아무런 내용이 없던 곳에 관점을 추가하는 상황이었기에 누군가의 관점을 일부러 삭제한다든지 비적저한 비중을 만든다는 행위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새로 제시된 관점이 마음에 안든다고 문서에서 깡그리 다 지워버리는 사람들이 진짜 문제겠죠.

한 문제에 대해서 서로 다른 신뢰할 만한 출처가 각각 다른 주장을 하고 있을 경우에는 간단히 서로 다른 주장을 둘 다 추가하면 됩니다. 신뢰할 만한 출처가 주장하는 자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안든다고 삭제해버리는 행위야 말로 중립적 시각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시간을 소모하는 토론이라 발언한 것은 논점에서 조금씩 벗어나거나 귀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내용"이 계속 토론하며 나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토론으로 나온 내용을 보조, 보충하거나 확인하기 위해서는 필요하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 차이인 것 같습니다. 역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제가 제시하는 내용들이 익숙하기에 이해도 빠르고,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자료들이 등장하면 더욱더 흥미로워 합니다. 허나 역사에 전혀 관심이 없고 다른 분야에만 집중을 하시는 분들께서는 지금 여기 토론에서 연관자료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으니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내용들'이라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옛날 왕들이 누구였고 당시 지명들이 어떤 이름으로 쓰였고 이런것들을 다 확실히 분별해 놓아야지만 베이징시의 옛 왕국이 무엇이었고 베이징시의 옛 지명이 무엇이었다고 확실한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간단한 소거과정이에요. 여러 자료들을 인용하며, 교차검증을 하며, 신빙성이 낮은 기록들을 배제시키며 소거과정을 거쳐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역사를 논할때 너무나도 당연한 과정입니다. 이 과정이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내용"이라는 주장은 "나는 역사연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 없소"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역사에 관심이 있으시니 베이징시 역사에 대한 무엇이 맞고 틀리다는 주장을 하시는 것이지 않습니까? 토론 주제에 관심이 있으시니 직접 토론에 참여를 하셨고, 그리고 계속해서 반박질문을 하시고, 던지는 질문들이 비슷하면 당연히 비슷한 내용의 대답이 돌아오는 것인데,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주장들을 내놓고 돌아서서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내용들이라니...

예를들어 는 3세기 야마토 시대에 들어와서야 국가 체제가 성립되는데 기원전 1000년때 중국 고서에 나오는 베이징 지역 동이족이 일본의 왜를 뜻할 수는 없잖습니까. 기원후 1세기에 랴오닝성은 한나라 영토도 아니었는데 요서가 랴오닝성이 될 수는 없잖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차이점을 정말 모르셨으니까 언급을 하셨던 것이고, 언급하신 내용들의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이해시켜 드리기 위해서 자료들을 가져와 친절하게 설명드린 거잖습니까.

저 또한 이미 대답해줬던 질문을 계속 또 받고 또 대답을 해줘야 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이해를 못하고 똑같은 질문을 또 하면 저로써는 더 상세하고, 더 정확한 자료들을 가져와서 더 친절하고 자세히 대답을 해줄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잖습니까.

Legacy0100 (토론) 2022년 5월 23일 (월) 13:37 (KST) Legacy0100 (토론) 2022년 5월 23일 (월) 13:37 (KST)답변
@Legacy0100: 논제는 같지만 제 주장은 제가 지운 내용이 베이징시의 역사 문단과 관련이 직접적으로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지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니 이 주장으로만은 Legacy0100님과의 토론에서 논의의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문헌과 자료들도 가져와 대답을 하는 것이 논의 결과를 도출하는데 좋을 것 같습니다.
  • 시차적 역사를 거꾸로 이해셨습니다. 조선땅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패수(베이징 동북쪽)까지를 경계로 삼았다는 내용은 한나라(漢) 시대 사건입니다. 고조선의 영토를 뺏고 그 자리에 연나라(燕) 수도 계성(베이징시)을 세웠던 시기는 진나라(秦) 때이고 후신인 한나라(漢)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입니다.

    제가 발언을 잘못 이해한 것일까요? 아니라면 아래로 갈음합니다.

帝堯之後於薊,... 封召公奭於燕
제요의 후손을 계에,... 소공 석을 연에 봉했다.

—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

二十九年, 秦攻拔我薊, 燕王亡, 徒居遼東,…….
29년 진나라가 공격해 계를 빼앗았다. 연왕은 도망하여, 요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 『사기(史記)』「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희왕(喜王) 29년조(29年條)


  • 遼東徼外貊人 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遼東太守祭肜招降之...
    요동(遼東) 요외맥인(徼外貊人)이 우북평(右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에 쳐들어 오자, 요동태수(遼東太守) 제융(祭肜)이 불러 항복시켰다.

    — 후한서(後漢書) 제1하(卷一下) 광무제기(光武帝紀) 제1하(第一下)


그 보다는 요동군이 한반도나 만주 일대 토착세력들에세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고구려의 서진을 막는 역할을 했기 때문일 수 도 있습니다. 여기 이 문헌(후한서 광무제기)에서는 요외맥인이라고 나옵니다. 물론 고구려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고구려와 관련된 족속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 예를들어 왜는 3세기 야마토 시대에 들어와서야 국가 체제가 성립되는데 기원전 1000년때 중국 고서에 나오는 베이징 지역 동이족이 일본의 왜를 뜻할 수는 없잖습니까. 기원후 1세기에 랴오닝성은 한나라 영토도 아니었는데 요서가 랴오닝성이 될 수는 없잖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차이점을 정말 모르셨으니까 언급을 하셨던 것이고, 언급하신 내용들의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이해시켜 드리기 위해서 자료들을 가져와 친절하게 설명드린 거잖습니까.

    예를 들으셨다고 하셨지만, 정확히 하자면요. 전에도 말했지만 동이(東夷)라는 개념은 제하(諸夏)가 계속 확장됨에 따라 동이라는 개념이 변화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아래는 이것을 반증해주는 기사 중 하나로 성종실록에 나와 있습니다.

臣以古今天下之勢言之, 九州之內, 固中國帝王之所理也, 四海之外, 西域則葱嶺流沙幾三萬里, 北方則沙漠不毛, 窮荒無際, 東夷則扶桑日本, 環海爲國,...
신이 고금(古今) 천하의 형세(形勢)로 말씀드리면, 구주(九州) 안은 오직 중국 황제가 다스리는 바이며, 사해(四海)의 밖으로 서역(西域)은 총령(葱嶺)과 사막(沙漠)이 약 3만 리나 되며, 북쪽은 사막(沙漠) 불모(不毛)의 땅이어서 황막(荒漠)하기 끝이 없고, 동이(東夷)는 일본으로써 바다로 둘러쌓인 나라이며,...


  • 시간을 소모하는 토론이라 발언한 것은 논점에서 조금씩 벗어나거나 귀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내용"이 계속 토론하며 나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토론으로 나온 내용을 보조, 보충하거나 확인하기 위해서는 필요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이 있으시니 베이징시 역사에 대한 무엇이 맞고 틀리다는 주장을 하시는 것이지 않습니까? 토론 주제에 관심이 있으시니 직접 토론에 참여를 하셨고, 그리고 계속해서 반박질문을 하시고, 던지는 질문들이 비슷하면 당연히 비슷한 내용의 대답이 돌아오는 것인데,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주장들을 내놓고 돌아서서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내용들이라니...

    차차 토론하면서 그리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밑줄에 대하여서는 인용한 제 발언을 다시 읽으시고 이해해 주시길 바라는 수 밖에 없겠네요. --Olīvae (συζήτηση) 2022년 5월 23일 (월) 22:00 (KST)답변
@올리브 가지
  • 논제는 같지만 제 주장은 제가 지운 내용이 베이징시의 역사 문단과 관련이 직접적으로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지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니 이 주장으로만은 Legacy0100님과의 토론에서 논의의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문헌과 자료들도 가져와 대답을 하는 것이 논의 결과를 도출하는데 좋을 것 같습니다.

여태껏 유주(幽州)가 베이징 + 허베이성 지역이고, 연나라의 수도 계(薊)가 베이징시이고, 연나라가 고조선의 옛 땅이었다는 역사적 문헌들과 고서 원문 자료들을 가져와서 증명하였습니다. 그런데 베이징시 지역에서 있었던 일들이 베이징시 역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었으니 지금껏 역사적 문헌과 자료들을 계속 가져왔던 적이 없으니 역사적 문헌과 자료들을 가져와 대답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구요...?

...

제가 일과성 기억상실증이 생겼나 봅니다. 분명 이미 자료들을 가져와서 다 설명을 했던 것 같은데 아니라고 하시니 그런가 봅니다. 똑같은 설명을 또 반복하게 되는 느낌이 왜 드는 걸까요. 이 글 이후로 더 다양하고 객관적인 토론이 이루어 지기를 바라면서 저는 다른 분들이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길 기다리겠습니다. 만약 논리성이 결여된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더이상 대응을 하지 않겠습니다. 참고로 베이징시 역사 토론에 참여하고 싶으신 분들이 계신다면 최소한 기본적인 중국 역사 상식은 스스로 갖추고 토론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탁 드립니다.

  • 예를 들으셨다고 하셨지만, 정확히 하자면요. 전에도 말했지만 동이(東夷)라는 개념은 제하(諸夏)가 계속 확장됨에 따라 동이라는 개념이 변화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아래는 이것을 반증해주는 기사 중 하나로 성종실록에 나와 있습니다.

엉뚱한 부분에 제대로 꽂히신 것 같은데요... 저는 지금 왜인이 동이족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게 아니라, 기원전 1000년도에 베이징 지역에 살던 동이족들이 왜인일 가능성이 없는데 왜 자꾸 뜬금없이 베이징 역사에서 왜인들을 언급하시냐는 겁니다. 베이징 역사와 상관이 없는 정보를 계속 반복하고 계시잖습니까? 고조선 또는 연나라가 왜인들의 나라였다는 것이 증명되면 동아시아 역사가 완전히 뒤집어지는 발견이겠죠. 물론 징기스칸이 미나모토 요시츠네라고 주장하는 제국주의 일본 역사학자들이 비슷한 주장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그 논리를 지금 님께서 펼치시는 겁니다.
  • * 제가 발언을 잘못 이해한 것일까요? 아니라면 아래로 갈음합니다.

    帝堯之後於薊,... 封召公奭於燕
    제요의 후손을 계에,... 소공 석을 연에 봉했다.

    —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


遼東徼外貊人 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遼東太守祭肜招降之...
요동(遼東) 요외맥인(徼外貊人)이 우북평(右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에 쳐들어 오자, 요동태수(遼東太守) 제융(祭肜)이 불러 항복시켰다.

— 후한서(後漢書) 제1하(卷一下) 광무제기(光武帝紀) 제1하(第一下)


二十九年, 秦攻拔我薊, 燕王亡, 徒居遼東,…….
29년 진나라가 공격해 계를 빼앗았다. 연왕은 도망하여, 요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 『사기(史記)』「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희왕(喜王) 29년조(29年條)


먼저 가져오신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 기록은 토론 초반때 이미 설명 드렸던 내용입니다. 아니지, 여태껏 제가 역사적 문헌과 자료들을 가져와 대답을 했던적이 없다고 하셨으니 다시 첨부해야 겠군요.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주나라 시절 고조선에게서 뺏은 영토에 연(燕)나라를 세웠고, 패배한 동이족 무리들은 동쪽 경계를 넘어 체제를 유지했다고 기록합니다. 고조선의 옛 영토가 연나라이고, 베이징의 옛 이름이 연나라 수도 계(薊)였으니 같은 지역을 뜻하는 것입니다. 연나라의 계(薊)가 현대 베이징시 라는 것은 위키피디아에도 나와있는 보편적 상식이니 굳이 자료를 보충하지는 않겠습니다.'
 
Legacy0100 (토론) 2022년 5월 18일 (수) 08:17 (KST)


이전 글에서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를 혼동하고 계셨기에 복잡한 역사를 쉽게 이해시켜 드리려고 진나라와 한나라만 가지고 설명해 드렸더니 오히려 더 헷갈리게 됐네요. 아니지, 이것도 제가 역사적 문헌과 자료들을 가져와 대답해 드린 적이 없는데 저 혼자 착각하고 있는 것이군요. 저의 실수입니다.

이걸 제대로 설명하려면 엄청 길어지는데, 최대한 요약해서 답해 드리겠습니다.

토론 초반때부터 계속 강조하여 왔듯이 베이징 지역은 수십번 주인들이 바뀌었습니다. 주나라때 베이징 지역을 처음 정복하여 연(燕)을 제후국으로 세우며 고조선인들이 동쪽으로 달아나 나라를 다시 세웠고, 춘추전국시대로 들어서며 연나라가 독립하였고, 진시황이 연태자(燕太子) 단(丹)을 죽이고 연나라를 멸망시켰을때도 연왕(燕王) 희(喜)가 동쪽 요동(遼東)을 수습하여 그곳의 왕이 되었다가 잡혀왔고, 진시황이 죽자 아들 이세황제(二世皇帝)가 연나라를 또 재설치 해버립니다. 그러다 진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연나라가 또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고, 한나라가 연왕 장도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또 동쪽으로 가서 고조선 무리들과 붙으면서 국경을 후퇴시키며 베이징 동쪽 지역들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이게 요약된 고대 베이징 지역의 혼란스러운 고대 역사입니다. 장도한광을 죽이고 나중에 노관이 연왕을 물려받게 되는 짧은 시간경위를 설명하는 것 조차 엄청 복잡합니다. 복잡한 것은 직접 공부해 보심을 추천드려요.

  • 진나라때 연나라 멸망시키고 다시 세웠다는 증거 어디있냐, 연나라는 처음부터 진나라 지역이었는데? 하시는 분들도 분명 계시겠죠. 미리 말씀 드리는데 고대 역사서에서는 같은 지명을 쓰는 경우가 많기에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예를들어 진나라 소양왕 35년에 한 위, 초나라를 도와 연(燕)을 공격하여 처음으로 남양군(南陽郡)을 설치하였다고 나오는데,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남양군은 현대 허난성 남서쪽이라고 나오기에 베이징 지역이 될 수가 없습니다.

35년, 한, 위, 초나라를 도와 연나라를 공격했다. 처음으로 남양군(南陽郡)을 설치했다.

— 사기(史記) 권5 진본기(秦本紀) 제5 소양왕(昭襄王)[12]


위키 내용이 맞다면 기원전 271년 즈음 진나라 소양왕 기록에서 말하는 연(燕)은 허난성에 있던 남연(南燕)을 뜻하는 것이지 베이징에 있던 북연(北燕)이 아닙니다. 진나라는 기원전 228년에 와서야 현대 베이징 지역인 북연(北燕)을 공격합니다.

진시황 19년 (기원전 228년)
19년, 왕전, 강외가 조나라 땅 동양(東陽)을 모조리 평정하여 취하고, 조나라 왕 천(遷)을 잡았다. 바로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중산에 주둔했다. 진왕은 한단으로 가서 전에 왕이 조나라에서 태어나 자랄 때 어머니 집안과 원한을 가진 자들을 모조리 파묻었다. 진왕은 태원, 상군을 거쳐서 돌아왔다. 시황제의 어머니 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조나라 공자 가(嘉)가 종족 수백 명을 이끌고 대(代)로 가서 스스로 왕으로 즉위하고는 동으로 연나라와 연합해 군사를 상곡(上谷)에 주둔시켰다. 큰 기근이 들었다.

진시황 20년 (기원전 227년)
20년, 연나라 태자 단(丹)은 진나라 군사들이 연나라에 들어오는 것이 두려워 형가(荊軻)에게 진왕을 찔러 죽이게 했다. 진왕이 이를 알았고, 형가의 사지를 찢어 조리를 돌린 다음 왕전, 신승(辛勝)에게 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연나라는 대의 군대와 함께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진나라 군대는 연나라를 역수(易水) 서쪽에서 격파했다.

진시황 21년 (기원전 226년)
21년, 왕분(王賁)이 초나라(?)를 공격했다. 군사를 늘려 왕전의 군대로 보냈고, 마침내 연나라 태자의 군대를 격파했다. 연나라의 계성을 점령하고 태자 단의 목을 얻었다. 연왕은 동쪽 요동(遼東)을 수습하여 그곳의 왕이 되었다. 왕전이 나이와 병을 구실로 귀향했다. 신정(新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창평군(昌平君)을 영(郢)으로 옮겼다. 큰 눈이 내려 두 자 다섯 치나 쌓였다.

十九年,王翦、羌瘣盡定取趙地東陽,得趙王。引兵欲攻燕,屯中山。秦王之邯鄲,諸嘗與王生趙時母家有仇怨,皆阬之。秦王還,從太原、上郡歸。始皇帝母太后崩。趙公子嘉率其宗數百人之代,自立為代王,東與燕合兵,軍上谷。大饑。

二十年,燕太子丹患秦兵至國,恐,使荊軻刺秦王。秦王覺之,體解軻以徇,而使王翦、辛勝攻燕。燕、代發兵擊秦軍,秦軍破燕易水之西。

二十一年,王賁攻(薊)[荊]。乃益發卒詣王翦軍,遂破燕太子軍,取燕薊城,得太子丹之首。燕王東收遼東而王之。王翦謝病老歸。新鄭反。昌平君徙於郢。大雨雪,深二尺五寸。

— 사기(史記) 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제6[13]


정복전쟁을 하던 진나라와 연나라의 당시 경계는 현대 베이징시/장자커우시에 해당하는 상곡(上谷)이었고, 진나라가 연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계성을 점령했다고 나옵니다. 상곡군, 계성 모두 베이징시 지역이죠? 모두 다 직접적인 베이징시 역사임이 확실하죠? 딴말하기 없기입니다.
  • 그 보다는 요동군이 한반도나 만주 일대 토착세력들에세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고구려의 서진을 막는 역할을 했기 때문일 수 도 있습니다. 여기 이 문헌(후한서 광무제기)에서는 요외맥인이라고 나옵니다. 물론 고구려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고구려와 관련된 족속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음.... 이에 대해서도 이미 언급을 했던 기분이 드는데... 역시나 저의 착각이겠죠?
고대시대에 요동(遼東) 또는 요동군遼東郡은 현대의 요동과 지명만 같을 뿐 관할하는 지역이 많이 달랐습니다. 고대 시대의 요동은 몽골에 더 가까웠다고 합니다. 고대 역사서에 나오는 요동(遼東)이라는 단어를 보고 현대 랴오닝성으로 오해하시는 분은 없길 바랍니다.
요사遼史 / 상경도上京道
상경 임황부는 원래 요동군 서안평현 땅이다.
上京臨潢府,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
 
Legacy0100 (토론) 2022년 5월 21일 (토) 12:10 (KST)


진시황이 정복을 마친 상황에서는 요동이 동해와 조선의 동쪽이 아니라 황하의 북쪽에 다다랐다고 표현을 합니다. 고대시절 요동이라는 지명이 현대 랴오닝시 요하 동쪽이 아니라 베이징시의 동북쪽(베이징시 동북쪽 내몽골 지역)이었음을 증명합니다. 또한 제후를 두지 않겠다고 진시황이 직접 언급을 함으로 이때 연나라가 공식적으로 멸망했음을 증명합니다.

정위 이사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냈다.

“주의 문왕과 무왕이 제후로 봉한 많은 친인척들이 성은 같았지만 갈수록 멀이지고 서로를 원수처럼 공격했고. 제후들끼리는 더더욱 서로를 공격했습니다. 주 천자는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천하가 폐하의 신령으로 통일을 이루고 모두 군현이 되었습니다.

여러 아들과 공신들에게는 공적인 세금으로 큰 상을 내리시는 것으로도 그들을 통제하기에 충분합니다. 천하가 다른 뜻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술책입니다. 제후를 두는 것은 불편합니다.”

시황이 말했다.

“전쟁이 모두 끊임없는 전쟁에 고통을 받은 것은 제후들이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종묘의 신령이 보우하사 이제 막 천하가 평정되었는데 다시 나라를 세우는 것은 화근을 심는 것이다. 그러고도 안녕과 휴식을 바라는 것은 어렵지 않겠는가? 정위의 말이 옳다.”

진시황 26년 (기원전 221년)
영토는 동으로 동해, 조선(朝鮮)에까지, 서로 임조(臨洮), 강중(羌中)에까지, 남으로 북향호(北嚮戶)에까지, 북쪽으로 황하를 의지하여 요새를 쌓아 음산(陰山)을 넘어 요동(遼東)에까지 이르렀다. 전국의 부호 12만 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켰다.

— 사기(史記) 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제6[13]


같은 기록에서 언급되는 동해는 산둥성 지역인 황현, 추현 지역의 바다를 묘사하고 있기에 현대 발해만(勃海湾)을 의미합니다.

진시황 28년 (기원전 219년)
이어 발해(勃海)를 끼고 동으로 황현(黃縣)과 추현(腄縣)을 지나 성산(成山) 끝까지 간 다음 지부산(之罘山)에 올랐다. 비석을 새워 진의 덕을 칭송한 다음 떠났다.
於是乃并勃海以東,過黃、腄,窮成山,登之罘,立石頌秦德焉而去

— 사기(史記) 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제6[13]


  • 遼東徼外貊人 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遼東太守祭肜招降之...
    요동(遼東) 요외맥인(徼外貊人)이 우북평(右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에 쳐들어 오자, 요동태수(遼東太守) 제융(祭肜)이 불러 항복시켰다.

    — 후한서(後漢書) 제1하(卷一下) 광무제기(光武帝紀) 제1하(第一下)


2년(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을 습격하였다. 그런데 요동태수(遼東大守)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을 맺었다.

— 삼국사기 권 제14 고구려본기 제2 모본왕[14]


이 기록들은 모두 '삼국사기 권 제14 고구려본기 제2 모본왕' 기록과 같은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만 후한서에는 요동태수 제융이 고구려군을 불러서 항복시켰다고 나오고, 삼국사기에는 제융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해줘서(조공을 바쳤기에) 다시 화친을 맺었다고 나옵니다. 참고로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무제 8년/고구려 대무신왕 15년에는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遼東太守 제융祭肜이 은의恩義와 신의信義로 초유하니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고 기록합니다.

노략질 하는 군대를 불러 앉혀서 항복시켰다는 기록이 더 신빙성이 높을까요, 아니면 노략질 하는 군대에게 공물을 잔뜩 쥐어주니 물러갔다는 내용이 더 신빙성이 높을까요? 중국측 고서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은 부풀려 기록하고 불리한 내용들은 축소해버린다는 것은 역사계의 공공연한 상식입니다.

올리브 가지님께서는 후한서 중국측 기록이 더 사실성이 있다고 판단하셨기에 이 기록을 첨부하신 것이겠죠? 저는 삼국사기 고구려측 기록이 더 사실성이 있다고 판단했기에 삼국사기 기록을 가져온 것입니다. 두 주장이 서로 신뢰성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하면 어떻게 해야하죠? 두 관점을 모두 다 기록하는게 중립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위키백과:중립적 시각 문서에 나와있죠? 그러니 한쪽 주장을 무시하고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 주장을 다 포함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 아닐까요?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모든 분들이 다 인정할수 있을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Legacy0100 (토론) 2022년 5월 24일 (화) 17:48 (KST) Legacy0100 (토론) 2022년 5월 24일 (화) 17:48 (KST)답변
먼저 답변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하여 늦은 것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또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유사한 내용에 대해 확인한 것에 대해 그러한 느낌이 드신것에도 죄송함을 표합니다.
  • 여태껏 유주(幽州)가 베이징 + 허베이성 지역이고, 연나라의 수도 계(薊)가 베이징시이고, 연나라가 고조선의 옛 땅이었다는 역사적 문헌들과 고서 원문 자료들을 가져와서 증명하였습니다. 그런데 베이징시 지역에서 있었던 일들이 베이징시 역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었으니 지금껏 역사적 문헌과 자료들을 계속 가져왔던 적이 없으니 역사적 문헌과 자료들을 가져와 대답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구요...?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주나라 시절 고조선에게서 뺏은 영토에 연(燕)나라를 세웠고, 패배한 동이족 무리들은 동쪽 경계를 넘어 체제를 유지했다고 기록합니다. 고조선의 옛 영토가 연나라이고, 베이징의 옛 이름이 연나라 수도 계(薊)였으니 같은 지역을 뜻하는 것입니다. 연나라의 계(薊)가 현대 베이징시 라는 것은 위키피디아에도 나와있는 보편적 상식이니 굳이 자료를 보충하지는 않겠습니다.' — Legacy0100 (토론) 2022년 5월 18일 (수) 08:17 (KST)

유주가 '북경+하북성 일대'(혹은 요하일대 정도 까지)라는 점과 북경이 연나라의 수도인 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살펴보니 연나라가 고조선의 옛 땅이라는 문헌은 (이 토론이나 다른 사서에서나) 보지 못하였는데, 어느 사서에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 엉뚱한 부분에 제대로 꽂히신 것 같은데요... 저는 지금 왜인이 동이족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게 아니라, 기원전 1000년도에 베이징 지역에 살던 동이족들이 왜인일 가능성이 없는데 왜 자꾸 뜬금없이 베이징 역사에서 왜인들을 언급하시냐는 겁니다. 베이징 역사와 상관이 없는 정보를 계속 반복하고 계시잖습니까? 고조선 또는 연나라가 왜인들의 나라였다는 것이 증명되면 동아시아 역사가 완전히 뒤집어지는 발견이겠죠. 물론 징기스칸이 미나모토 요시츠네라고 주장하는 제국주의 일본 역사학자들이 비슷한 주장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그 논리를 지금 님께서 펼치시는 겁니다.

간단히 하자면, 제가 말한 바는 귀하께서 동이를 필수로 고조선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보았고, 그 것에 대하여서 동이가 필수로 고조선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동이(東夷)라는 혹은 이(夷)라는 개념이 상대적 개념이며 범칭이라고 발언한 바는 여기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동이라는 사용되는 용도, 포함되는 지역과 개념 등이 변하였음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이에 대하여 몇가지 문헌을 가지고 온 점과 성종실록을 가져온 점도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용도로 받아들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펼치는 이 논리가 저런 논리와 같다고 여기시니, 이부분에서는 참으로 황당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후한서 본기의 내용을 인용하여 말한 것은 요외맥인이라 나오기 때문입니다. 맥은 북방족을 뜻하는 범칭이기도 하고 고구려가 완전히 맥족이라 단정지을 수 없기 때문에 (앞에 나온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인용한 것입니다.

노략질 하는 군대를 불러 앉혀서 항복시켰다는 기록이 더 신빙성이 높을까요, 아니면 노략질 하는 군대에게 공물을 잔뜩 쥐어주니 물러갔다는 내용이 더 신빙성이 높을까요? 중국측 고서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은 부풀려 기록하고 불리한 내용들은 축소해버린다는 것은 역사계의 공공연한 상식입니다.

어떤 사서들은 객관적인 관점을 고수하려고 하기도 하지만, 결국에 모든 사서들은 저자의 역사관에 따라 기술이 되는 것으로 압니다. 모든 저자의 역사관은 저자의 여러가지 가치관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축소될 수도 과장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가치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모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올리브 가지님께서는 후한서 중국측 기록이 더 사실성이 있다고 판단하셨기에 이 기록을 첨부하신 것이겠죠? 저는 삼국사기 고구려측 기록이 더 사실성이 있다고 판단했기에 삼국사기 기록을 가져온 것입니다. 두 주장이 서로 신뢰성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하면 어떻게 해야하죠? 두 관점을 모두 다 기록하는게 중립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위키백과:중립적 시각 문서에 나와있죠? 그러니 한쪽 주장을 무시하고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 주장을 다 포함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 아닐까요?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모든 분들이 다 인정할수 있을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성과 관련해서는 단순히 제작 연대가 높았기에 인용했습니다. 두 주장-제가 보기에는 관점의 차이로 보이는-에서 제 주장은 서술될 만한 주장이 아닙니다. 제 주장은 귀하의 주장(본문)이 도시 역사 문단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거나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당 정책과는 별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결국에는 합의를 해야 토론이 끝날 것으로 보입니다. --Olīvae (συζήτηση) 2022년 5월 28일 (토) 01:28 (KST)답변
@올리브 가지
  • 유주가 '북경+하북성 일대'(혹은 요하일대 정도 까지)라는 점과 북경이 연나라의 수도인 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살펴보니 연나라가 고조선의 옛 땅이라는 문헌은 (이 토론이나 다른 사서에서나) 보지 못하였는데, 어느 사서에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고대 시대는 당연히 베이징(北京)이라는 지역명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에 옛 기록에서 나오는 종족들이 어디에 살고 있었고, 나중에 그 종족들이 살던 곳에 어떤 나라 또는 지명이 붙여졌는지를 따라가봐야 베이징시의 행정구역과 지명을 알 수 있습니다.

윗 토론에서 이미 다뤘듯이 베이징시((燕)나라 계(薊))는 주 무왕 때가 되어서야 북쪽과 동쪽의 동이족들을 크게 점령하는데, 사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상나라 초기 태정때 베이징 지역은 산융의 영토였고, 주나라때는 융적고죽국을 같은 무리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제압하고 연나라가 세워짐과 동시에 (기원전 1046년) 같은 시대인 주 무왕때 단군을 몰아내고 상나라(은나라)의 왕자 기자를 조선왕으로 봉했다고 전합니다. 산융과 고죽국은 비슷한 지역에 위치한 같은 편이었고, 주 무왕때 새로운 점령지들 획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태정(太丁) 2년, 주나라 사람들이 연경(燕京)의 융적 정벌했는데, 주나라 군대가 크게 패배하였다.

— 고본 죽서기년(竹書紀年) 은기[15]


그리고 그 고죽국의 자리는 노룡현의 자리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오늘날 하북성 정정현이 고대의 고죽국이요 산융국이요 비자국의 자리라는 뜻이다.

— 통전(通典) 권178(卷178)


고죽국이 있던 자리에 산융국이 있었고, 그 자리는 요서군과 우북평의 자리이며 평주(平州)가 있던 곳이라는 기록이다. 한때 공손도(공손탁)가 차지하여 연나라를 칭하던 곳도 바로 그곳이라고 한다.

— 요사(遼史) 권40 (卷40)


무왕은 성스러운 선조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신농의 후손을 초(焦)에, 황제의 후손을 축(祝)에, 요(堯)의 후손을 계(薊)에, 순의 후손을 진(陳)에, 우(禹)의 후손을 기(杞)에 각각 봉하고 포상했다. 공신과 모사를 봉했는데 사상보가 가장 먼저 봉해졌다. 사상보는 영구(營丘)에 봉하고 제(齊)라고 하고, 동생 주공 단은 곡부(曲阜)에 봉하고 노(魯)라 했다. 소공 석을 연(燕)에, 동생 숙선을 관(管)에, 동생 숙탁을 채(蔡)에 봉했다. 나머지도 각각 순서에 따라 봉했다.

— 사기 권004 주본기 무왕



연나라 영토를 요서와 요동이라고 이름지었던 이유는 주나라때 요의 후손들에게 계(薊)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베이징 서쪽을 요서, 동쪽을 요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지나며 영토를 뺏고 뻇기며 관할지역이 계속 바뀌면서 어떤때는 베이징 남쪽이 요서, 북쪽이 요동이 되었고, 어쩔때는 베이징 남서쪽이 요서, 북동쪽이 요동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중국이 팽창하며 요서와 요동이라는 지명이 둘 다 베이징 동쪽으로 옮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삼국지 시대 위나라때 기록을 보면 고구려에게 큰 땅을 뺏은 이후 요동군을 나눠서 요서군과 중료군으로 분할시켰다고 나와요. 그렇게 고대 허베이성 북동과 내몽골 동쪽 지역을 뜻했던 요동이 계속 바뀌면서 현대시대에는 랴오닝성 동쪽을 가르키는 지명이 되버렸어요.

초평(初平) 원년, 요동군을 요서군(遼西郡)ㆍ중료군(中遼郡)으로 나누고 모두 태수(太守)를 두었고, 바다를 넘어가 동래군(東萊郡) 여러 현(縣)을 거두어들이고 영주 자사(營州刺史)를 두었다.

— 후한서(後漢書) 권74 下(卷七十四下) 원소유표열전(袁紹劉表列傳) 제64下 (第六十四下)



다시 돌아와서 중국 고대 기록에서는 현대 베이징과 허베이성 북동쪽 지역에 있던 무리들을 융적고죽국이라고 불렀는데, 단군이나 조선이라는 이름은 주 무왕이 이 지역들을 차지하고 난 뒤에야 나타나기 때문에 단군이 종족 이름인지, 관직 이름인지, 조선이라는 나라의 이름이 원래부터 있었는지, 아니면 기자가 들어간 후에 이름을 지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원래 이름이 있었다면 단순하게 조선을 점령했다고 말할 것이지 산융이네 고죽국이네 하는 다른 국가 이름들이 나올 필요가 없을텐데 말이죠(산융과 고죽국이 단군의 제후국이어서 그렇게 표현했을 거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무리들을 정벌하고 나서 그 땅에 연나라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하자면 산융은 현대 베이징시에 있었고 고죽국은 현대 톈진시 또는 탕산시 지역에 있었다고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주(周)의 호왕(虎王, 무왕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으니 수(壽)가 1,908세다.”라고 하였다(*영토가 바뀌었지만 옛 왕권 체제를 유지하며 수천년간 존속했다는 의미).

당의 ≪배구전(裵矩傳)≫에 이르기를 “고려(高麗)는 본시 고죽국(孤竹國), 지금의 해주(海州)이다.)인데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하고 조선이라 하였다. 한(漢)이 3군(郡)으로 나누었으니, 현토(玄菟)·낙랑(樂浪)·대방(帶方) 북대방(北帶方)이다.”라고 하였으며, ≪통전(通典)≫에도 역시 이 설명과 같다. ≪한서(漢書)≫에는 곧 진(眞)(番)·임(臨)(屯)·낙(樂)(浪)·현(玄)(菟)의 4군(四郡)인데, 여기서는 3군(三郡)이라 하며 또 이름도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 삼국유사 권1 제1 기이


다른 기록에서는 고조선이 영지(令支)에 있었고 요서군(양락陽樂, 해양海陽, 영지令支=고죽성孤竹城)의 일부였다고 합니다. 학계에서는 양락현(陽樂縣)이 오늘날 베이징시보다 훨씬 남쪽인 허베이성 스자좡시 지역이었다고 추측하는데, 다른 기록들에서는 요서가 연나라 계의 동쪽이었다고 기록하고, 또 다른 기록에는 베이징 북서쪽 상곡군이라고도 주장합니다. (요서와 요동의 지역 범위는 몇백년동안 계속 바뀝니다). 참고로 여기서 나오는 양락(陽樂) 또는 락양(樂陽)은 후한때 수도인 허난성 뤄양시 낙양(洛陽)과는 다른 도시입니다.

그런데 후한서 설명글에는 '전서음의(前書音義 또는 한서음의漢書音義)라는 책에서 비자(肥子)라는 사람이 연(燕)으로 도망하여 비여현 지역에 봉해졌다'라고 기록하였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비자(肥子)가 바로 기자(箕子)입니다. 기보통지(畿輔通志)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고 허나 한서음의와 기보통지의 원문은 찾을 수 없었는데 다행이 한서 지리지에서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여현(肥如縣)이 비류곡(沸流谷), 또는 부여현(扶餘縣)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주류설은 아닙니다.

비여(肥如, 친황다오시 루룽현)
비여현(肥如縣)은 현수(玄水)가 동쪽에서 흘러 유수(濡水)로 들어 간다. 유수(濡水)는 남쪽으로 흘러서 해양(海陽)으로 들어 간다. 또한 노수(盧水)가 있어, 남쪽으로 흘러 현수(玄水)로 들어 간다. 왕망(王莽) 때는 비이(肥而)라고 불렀다.

[응소(應劭)는 말하기를,] "비자(肥子)가 연(燕)나라로 달아나자 연(燕)에서 그를 이곳 비이((肥而)에 봉했다"고 했다.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유(濡)의 음(音)은 내(乃)와 관(官)의 반절(反切)이다"라고 했다.

—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요서군(遼西郡)


(영원 9년(97) 8월) 선비가 비여현(肥如縣)을 침범하자, 비여는 현으로, 요서군(遼西郡)에 속하였다. 『전서음의』에는 “비자(肥子)가 연(燕)으로 도망하여 이곳에 봉해졌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평주(平州)이다. 요동군 태수 제참(祭參)이 하옥되어 죽었다. 『동관기(東觀記)』에는 “선비 천여 기(騎)가 비여현성을 공격하여 관리들과 민을 죽이고 약탈하자 (요동군 태수) 제참은 (방비에 실패하고) 패배한 죄로 하옥되어 죽었다.”라고 하였다.

— 후한서(後漢書) 권4(卷四) 화제상제기(孝和孝殤帝紀) 第四


만약 한서에 나오는 비자가 삼국사기와 후한서에 나오는 기자가 맞다면, 주 무왕이 조선을 만들어 기자를 왕으로 봉해줬던게 아니라 원래 단군이라는 왕권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주 무왕이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산융, 고죽국)을 점령하여 그 위에 연나라를 세웠고, 기자가 연나라 세력에 들어가자 연왕이 비여현을 할당해 주었다는 뜻이 됩니다.

두 기록이 살짝식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데, 무엇이 옳든 간에 산융과 고죽국 두 집단이 같은 동이족이던 상나라(은나라)의 제후국이고, 베이징과 허베이성 지역에 영토를 두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옛 베이징과 허베이 지역은 동이족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것 같습니다. 상나라(은나라)를 끝까지 섬기던 백이와 숙제도 고죽국 출신이었죠.

그 전하는 바에 말하기를, 백이와 숙제는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이다. 【색은】 살피기를, “그 전하는 바”라는 것은 아마도 『한시외전(韓詩外傳)』과 『여씨춘추(呂氏春秋)』일 것이다. 그 전(傳)에 이르기를, 고죽군은 은나라 탕왕 3월 병인일에 봉해졌다. 다음과 같이 서로 전해진다. 백이와 숙제의 아버지 이름은 초(初)이고 자는 자조(子朝)라 한다. 백이의 이름은 윤(允), 자는 공신(公信)이며, 숙제의 이름은 치(致), 자는 공달(公達)이라 한다. 해설에 따르면, ‘이(夷)’와 ‘제(齊)’는 시호다. ‘백(伯)’, ‘중(仲)’은 그 나이가 많고 적음을 말해주는 글자이다. 생각건대, 지리지(地理志)에는 고죽성(孤竹城)이 요서 영지현(令支縣)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응소(應劭)는 이곳이 백이의 국(國)이라고 하였다. 그 군주의 성은 묵태씨(墨胎氏)라고 한다. 【정의】 본래 앞서 ‘병인(丙寅)’에 대한 주석에서 “은탕(殷湯) 정월 3일 병인일”이라고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서 말하기를, “고죽(孤竹) 고성(古城)은 노룡현(盧龍縣) 남쪽 12리에 있으며 은나라 때에 제후인 고죽국(孤竹國)이다.”라고 하였다.

— 사기(史記) 권61(卷六十一) 백이열전(伯夷列傳) 第一


다시 종합해보면 주 무왕이 단군(종족 또는 왕 이름)의 영토를 점령한 이후 새로히 얻은 동이족 땅의 서쪽을 (북)연으로 칭하여 소공 석을 제후왕으로 임명하고, 기자가 연나라로 들어가자 동쪽(비여현) 지역의 제후로 봉했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그런데 다른 기록에서는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걸까요?

조합해 보자면 고죽국과 산융이 동이족들이었고, 은나라 왕자 기자가 할당받은 영토가 고죽국이고, 그곳이 나중에 조선으로 칭해졌고, 고죽국이 고구려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혹시 단군조선 = 상나라(은나라)가 아니었을까? 하는 합리적인 추측에 이르게 됩니다. 허나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여기서부터는 제 능력 밖의 진행 상황이라 확실한 자료를 가져오지는 못하겠네요. 다만 산융과 고죽국 같은 동이족 나라들이 베이징과 허베이성에 살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최근 읽은 내용을 첨부하고 글을 마치겠습니다. 사기 오제본기에 나오는 이야기가 동이열전에서 똑같이 언급되는게 과연 우연일까 곰곰히 생각해보게 됩니다.

요 임금의 이름은 방훈(放勛)이다. 그의 인덕(仁德)은 하늘과 같고 그의 지혜는 신과 같았다. (중략) 그 외에 희중(羲仲)에게는 욱이(郁夷)에 거주하도록 명하였는데 이곳을 양곡(暘谷)이라 하였다. 떠오르는 해를 공손히 맞이하고 때맞추어 농사를 짓게 하라고 명령했다.

— 사기 권1 오제본기(五帝本紀) 제1


서(序)
옛날 요(堯)임금이 희중(羲仲)을 우이(嵎夷)에 살도록 명(命)하면서 ‘양곡(暘谷)’이라 하였으니 그곳은 대체로 해가 돋는 곳이다.

(중략)

찬자평(撰者評)
찬(贊)한다. 우이(嵎夷)에 살게 하니 곧 양곡(暘谷)이라 한다. 산(山)과 바다에 사는 것을 아홉 종족으로 구분지었다. 진(秦)나라 말년에 정치가 혼란해지자 연(燕)나라 사람들이 [이 땅에] 피난하여, 중국의 풍속을 어지럽히고 [동이東夷의] 풍속까지 나빠지게 하더니, 드디어 한(漢)나라와 통하게 되었다. 아득하고 멀리서 통역하자니 복속도 하고 배반도 하는구나.

—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우리 고려(高麗)가 궁벽하게 양곡(暘谷)에 위치하면서도 멀리 천조(天朝)를 연모하여 조상(祖上) 적부터 항상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사신이] 왕래하기를 바랬습니다.

— 송사(宋史) 외국열전(外國列傳) 고려(高麗)[16]
Legacy0100 (토론) 2022년 5월 31일 (화) 14:07 (KST) Legacy0100 (토론) 2022년 5월 31일 (화) 14:07 (KST)답변

220.126.216.102 사용자의 의견[편집]
중요한 것은 해당 내용들은 역사 관련이지 베이징 문서 관련에 맞지 않는 내용들입니다. 현재 베이징시와 전혀 관련 없는 내용들은 역사 관련에서 언급하길 바랍니다.
베이징시 문서에 고구려가 텐진 지역 포함하여 베이징지역을 함락시켰다고 그거 기분 나쁘다고 반발하며 허베이성 랴오닝성 역사까지 구구절절 포함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한 거 아닙니까? 구글에서 베이징시 면적을 좀 보세요. 해당 역사를 베이징시에 쓰게 되면 허베이성에 있는 청더시 랴오닝성에 있는 차오양시에도 해당 내용을 적어야 합니다. 과장된 행동하지 맙시다. 어짜피 해당 내용 써봤자 글만 길어져서 문서 따로 분류해야 합니다.--220.126.216.102 (토론) 2022년 5월 31일 (화) 15:27 (KST)답변
고구려의 유주 함락(현베이징과 텐진) 의 반발로 인해 중국의 수도와 전혀 관련없는 북한의 도시들까지 언급하는 것을 보면 고구려의 유주 함락(현 베이징과 텐진의 면적) 기사에 대한 반발로 인한 행동이 아닌가라는 합리적 의심이 듭니다. 베이징시 면적은 구글에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허베이성이 아닌 현 베이징시 면적 16,411km의 역사를 써야지 베이징시 역사에 북한의 도시들 랴오닝성 허베이성까지 언급하는 것은 잘못된 거 아닙니까?--220.126.216.102 (토론) 2022년 5월 31일 (화) 15:48 (KST)답변
토론을 보니까 1차 사료 이름만 가져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본문 없습니까? 번역된 본문이 있어야 검토가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이솝우화 게으른 당나귀 내용을 모르는데 사람들에게 검토 가능한 게으른 당나귀 원문을 보여주지 않고 게으른 당나귀 이솝우화 이름만 내세우며 게으른 당나귀의 내용은 이러 이러하다 라고 말하면 이게 화자의 과장된 이야기인지 아닌지 검토가 불가능합니다.--220.126.216.102 (토론) 2022년 6월 1일 (수) 13:31 (KST)답변
@220.126.216.102
  • 중요한 것은 해당 내용들은 역사 관련이지 베이징 문서 관련에 맞지 않는 내용들입니다. 현재 베이징시와 전혀 관련 없는 내용들은 역사 관련에서 언급하길 바랍니다.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들이 도시의 이름과 개발과정, 지역구 변천, 건물들의 형태 등등 모든것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에 당연히 연관성이 있습니다. 또한 제가 베이징시 문서를 편집하기 이전부터 이미 베이징시 역사 항목은 존재했었고, 대한민국의 서울특별시와 미국의 뉴욕처럼 대부분의 도시 문서들에도 역사 항목이 존재합니다. 베이징시의 역사가 베이징시 문서 관련에 맞지 않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 베이징시 문서에 고구려가 텐진 지역 포함하여 베이징지역을 함락시켰다고 그거 기분 나쁘다고 반발하며 허베이성 랴오닝성 역사까지 구구절절 포함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한 거 아닙니까? 구글에서 베이징시 면적을 좀 보세요. 해당 역사를 베이징시에 쓰게 되면 허베이성에 있는 청더시 랴오닝성에 있는 차오양시에도 해당 내용을 적어야 합니다. 과장된 행동하지 맙시다. 어짜피 해당 내용 써봤자 글만 길어져서 문서 따로 분류해야 합니다

저는 문서에서 고구려가 톈진과 베이징 지역을 공격했다는 내용을 지웠던게 아니라 오히려 참조자료를 왕창 추가해 놓은 상태인데요....??? 베이징시 원문서에 새로 추가되었던 내용들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채 그냥 다 지우셨다는 것인가요? 그리고 고대시절 고구려가 베이징을 공격하든 톈진을 공격하든 왜 기분이 나빠야 하죠?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주장들을 하고 계십니다.
  • 고구려의 유주 함락(현베이징과 텐진) 의 반발로 인해 중국의 수도와 전혀 관련없는 북한의 도시들까지 언급하는 것을 보면 고구려의 유주 함락(현 베이징과 텐진의 면적) 기사에 대한 반발로 인한 행동이 아닌가라는 합리적 의심이 듭니다. 베이징시 면적은 구글에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허베이성이 아닌 현 베이징시 면적 16,411km의 역사를 써야지 베이징시 역사에 북한의 도시들 랴오닝성 허베이성까지 언급하는 것은 잘못된 거 아닙니까?

뜬금없이 북한의 도시들이 왜 언급이 되는 것인지요? 저는 여기 토론글에서 북한이나 북한의 지역들에 대해서 언급했던 적이 단 한번도 없는데요. 후한서와 삼국사기에서 언급되는 고구려가 공격했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이라는 지명들이 중국의 유주였고, 유주가 곧 현대 베이징시와 허베이성 지역들이라고 토론글 처음부터 자료들을 첨부했었습니다. 고구려가 베이징 지역을 공격했던 전개 상황과 지명들이 중국측 고서와 한민족측 고서에서 거의 똑같이 일치하고 있다는 것도 자료로 증명했구요. 특히나 이 내용을 언급할때 번역본 각주 링크까지도 첨부했었기에 번역이 안되어서 검토를 못한다는 핑계는 통하지도 않습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검색어 입력해서 찾아보면 10초만에 나오는 자료들인데 그걸 못해서 검토가 불가능하다구요?

2년(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을 습격하였다. 그런데 요동태수(遼東大守)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을 맺었다.

— 三國史記 권 제14 고구려본기 제2


건무(建武) 8년(A.D.32; 高句麗 大武神王 15)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므로, 광무제가 그 왕호(王號)를 회복해 주었다. [건무(建武)] 23년(A.D.47; 高句麗 閔中王 4) 겨울에 구려(句驪) 잠지락(蠶支落)의 대가(大加) 대승(戴升)등 만여명이 낙랑(樂浪)에 투항하였다. [건무(建武)] 25년(A.D.49; 高句麗 慕本王 2) 봄에 구려(句驪)가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遼東太守) 제융(祭肜)이 은의(恩義)와 신의(信義)로 초유하니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 그 뒤 구려왕 궁(宮)이 태어나면서부터 곧 눈을 뜨고 사람을 쳐다보니, 국인(國人)들이 미워하였다. 장성함에 용맹(勇猛)스럽고 건장하여 자주 변경을 침범하였다.

—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驪)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이 베이징 동서남북 지역명이었다는 것은 토론을 시작할때부터 정렬해 놓았던 정보들이고 간편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링크까지 만들어 놨는데, 결국에는 아무도 제대로 읽지 않았고, 결국에 또다시 같은 정보를 반복하게 되네요. 참고로 고대 중국 지역명 정보들이 정리되어 있는 위키 문서들은 옛날에 다른분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문서들이고 저는 건드리지도 않았어요. 토론 처음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했었는데 또다시 확인 안하고 글 쓰는 사람들이 나온다면 참 슬플 것 같네요. 현대 베이징시 내부 지역 또는 바로 경계선에 맞닿아 있는 지역명들만 뽑아와 나열하겠습니다.

지역명
위키피디아: 우북평군, 당시 베이징 북동부
예: 톈진시 지저우구, 탕산시 쭌화시, 펑난구 등등

위키피디아: 어양군, 당시 베이징 동부
예: 베이징시 미윈 구, 순이 구, 화이러우구, 핑구구, 톈진시 우칭구 등등

위키피디아: 상곡군, 당시 베이징 서부
예: 베이징시 창핑구, 베이징시 옌칭구, 장자커우시 화이라이현, 장자커우시 줘루현 등등

위키피디아: 태원군, 당시 베이징 남부(현대 산시성 중북부)
산시성 타이위안시, 양취안시, 딩샹현, 우타이현, 신저우시 판스현 등등


다른분들이 중국측 학계 자료들을 인용해서 이미 만들어 놓은 위키 문서들에도 이 지역명들이 허베이성과 베이징시였다고 쓰여있는 상황인데, 님께서는 이 수십개의 위키문서들과 고서 내용들이 틀렸다고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자료들을 가지고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하시는 것인가요?

  • 토론을 보니까 1차 사료 이름만 가져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본문 없습니까? 번역된 본문이 있어야 검토가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이솝우화 게으른 당나귀 내용을 모르는데 사람들에게 검토 가능한 게으른 당나귀 원문을 보여주지 않고 게으른 당나귀 이솝우화 이름만 내세우며 게으른 당나귀의 내용은 이러 이러하다 라고 말하면 이게 화자의 과장된 이야기인지 아닌지 검토가 불가능합니다.

대학 논문 검증 작업도 작성자가 논문에 자료 출처들을 참조해두면 검증하는 사람들이 시간을 투자해서 교차검증을 하는건데요... -_-;;; (물론 저도 이 토론에서 왕들의 이름을 헷갈리거나 연도를 틀리게 기입하는 등등 실수를 많이 하긴 했지만). 이미 인터넷 서점들에서 고서 번역본들이 판매되고 있고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도 삼국사기, 사기, 후한서 등등의 고서들의 번역본을 공짜로 공개해놓은 상황인데, 번역된 본문이 없어서 검토가 불가능하다구요?

이솝우화의 게으른 당나귀가 참 요란하게도 우네요.

Legacy0100 (토론) 2022년 6월 2일 (목) 10:20 (KST)답변
정리[편집]
  • 해당 토론이 길어짐에 따라서, 잠시 정리가 필요한 것 같아 정리하였습니다.

또한 일단 합의를 위하여 본문으로 되돌렸음을 알려드립니다.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따르면 진(秦)나라가 연(燕)나라를 멸망시키고 후신인 한(漢)나라가 건국된 이후 조선땅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옛 요새를 고쳐 패수(베이징 동북쪽) 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에 속하게 하였다고 기록한다.

라는 내용에 대하여 "위에서 말씀하신 것 처럼 고대 패수라는 지명이 현시대 어느 지역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하지만 베이징 북동쪽 어딘가에 있었다는 주장이 대세론입니다. 또한 패수가 어디었든 연나라 계성이 옛 고조선의 땅이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라고 하셨으니, 패수 내용은 생략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남겨진 한사군 공지(空地)의 고조선 유민 무리들 중 일부가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마한과 진한의 시초였다는 학계 주장도 존재한다.

라는 본문에 대하여서도

"베이징 지역 내부에서 직접적으로 일어났다는 명확한 근거는 아니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으니 이 부분은 생략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생략하여도 괜찮다 하셨으니, 생략하면 될 것입니다.

고구려 건국 이후 기원후 8년 유리명왕때 한나라 왕망이 강제적으로 고구려인을 징발하려 하였다가 반란이 일어나 요서군의(유주(幽州) 태수가 죽임을 당하고 고구려가 한의 변방을 더욱 심하게 침범하였다고 삼국사기가 전한다.

라는 내용에 대하여

"베이징시 역사와 직접적으로 연관은 있으나 문장이 길기에 더 짧게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셨으니 더 짧게 요약하면 될 것입니다. --Olīvae (συζήτηση) 2022년 5월 28일 (토) 01:08 (KST)답변

(임시) 토론 내용 정리
순서 내용 논의 생략 부분 생략(요약) 유지
1 패수와 관련돤 내용 -
2 한사군 공지와 이들이 시초가 되었다는 학설 완료 O
3 고구려인 징발과 반란,
고구려의 침범
완료 O
4 공지가 생겨났다는 내용

각주[편집]

외부 링크 수정됨 (2022년 12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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