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중동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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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중동 전쟁
(중동 전쟁의 일부)
1948년 5월 15일부터 6월 10일까지 교전 현황
1948년 5월 15일부터 6월 10일까지 교전 현황
날짜 1948년 5월 ~ 1949년 3월
장소 이스라엘
결과 이스라엘의 승리와 독립
교전국
이스라엘 이스라엘

지원국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

요르단 트란스요르단
시리아 시리아
레바논 레바논
이라크 이라크
파키스탄 파키스탄
수단 수단
이집트 이집트 왕국
예멘 예멘 왕국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
모로코 모로코
아랍 연맹 아랍 해방군
지휘관
이스라엘 다비드 벤구리온
이스라엘 하임 바이츠만
이스라엘 이가엘 야딘
이스라엘 야고보 도리
이스라엘 다비드 샬티엘
이스라엘 이세르 비에리
이스라엘 모세 다얀
이스라엘 이스라엘 갈릴리
이스라엘 이갈 앨런
이스라엘 시몬 아비던
이스라엘 이츠하크 푼다크
이스라엘 이스라엘 갈릴리
요르단 존 베것 글러브
요르단 노르만 래쉬
요르단 하비스 알-마야리
Flag of the Arab League.svg 하산 살라마
Flag of the Arab League.svg 콰위 알 파오지
Flag of Egypt (1922–1958).svg 아흐메드 알리 알 무와위
Flag of the Arab League.svg 하지 아민 알-후세인
Flag of Egypt (1922–1958).svg 파루크 1세
Flag of Egypt (1922–1958).svg 무하마드 나기브
Flag of the Arab League.svg 압둘 라만 하산 아잠
병력
초기 : 29,677명
1948년 12월 : 108,300명
이집트 : 10,000명 > 20,000명

이라크 : 5,000명 > 15,000명 ~ 18,000명
시리아 : 2,500명 > 5,000명
트랜스요르단 : 6,000명 > 12,000명
레바논 : 1,000명 > 2,000명
사우디 : 800명 > 1,200명
아랍 해방군 : 3,500명 > 6,000명

피해 규모
6,373명
(군인 4,000, 민간인 2,400)
불명. 5,000~15,000 정도로 추산

제1차 중동 전쟁(아랍어: حرب 1948, 아랍-이스라엘 전쟁 혹은 이스라엘 독립전쟁)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둘러싼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들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현대 중동 분쟁의 시발점이다.

개요

1948년 아라비아 지역에서 아랍 연합 공화국과 신생국가 이스라엘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후 지속되는 아랍 위기의 시작이었다. 이 전쟁을 이스라엘은 독립전쟁이라고 부르며, 팔레스타인 측에서는 이것을 알 나크바, 즉 재앙의 시작이라고 부른다.

국제연합영국령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할을 제시하자 아랍측이 이를 거부하고, 이집트, 시리아, 트란스요르단, 레바논, 이라크와 몇몇 아랍 국가들의 지원하에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써, 전쟁은 시작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이 지역이 이스라엘, 이집트, 트란스요르단에 의하여 분할되는 결과를 낳았다.

배경[편집]

유대인 박해와 시오니즘[편집]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추방된 '디아스포라'는 거의 1,800년 전의 일이다. 이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각지로 퍼져나갔으나 긴 세월에 걸쳐서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유럽으로 진출한 유대인들은 크게 서유럽 계통의 '세파르디 유대인'과 동유럽의 '아슈케나짐 유대인'으로 구분되며 이들은 기독교화된 유럽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박해와 차별을 경험한다. 15세기에는 서유럽, 특히 에스파냐 지역에서 대대적인 유대인 박해가 발생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그나마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동유럽 등지로 이주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그 중에서 특히 1300년대의 볼레스와프 왕 시절에 유대인에게 관용 정책을 베풀었던 폴란드에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하였다.

유럽에서 반(反)유대주의의 역사는 대단히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이들은 기독교가 금지하고 있던 포주나 고리대금업 등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또한 유대인들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적어도 12세기 이후에는 "고리대금업자" 내지는 "수전노", "예수를 팔아넘긴 죄인" 등 현대까지 내려오는 유대인의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조성되었다. 이들이 반복되는 박해로 공동체 안의 안정된 삶을 보장받을 수 없었기에 부동산보다 동산의 확보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 왔던 데서 이러한 악감정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8세기에 이르러 유대인들은 자유주의의 물결로 평등한 시민권을 보장받고 게토를 벗어나게 되지만 뒤이어 온 반동주의의 물결과 함께 박해 또한 심각해진다. 러시아포그룸 같은 대규모 박해가 발생하면서 유대인들은 다시 이주를 시작하고 일부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미국 북동부나 샌프란시스코의 골드러쉬 등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대인 반대가 드러난 사건의 하나인 드레퓌스 사건을 취재하던 오스트리아의 기자 테오도르 헤르츨은 유대민족주의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현대 시오니즘 운동을 제창하며 고대 이스라엘의 언어와 풍습들을 되살리는 노력을 기울인다.

영국령 팔레스타인[편집]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자, 국제연맹은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 영토에서 지배받고 있는 국가들 중, 터키를 제외한 지역을 한시적으로 식민지화 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전쟁 중, 영국은 이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기 위하여 현지인들의 협조를 구하면서 맥마흔아랍인들에게 이 지역을 아랍인들에게 돌려줄 것을 약속하는 맥마흔 선언을 1915년에 발표한 바 있으며, 동시에 국제 시오니즘 운동의 수장격이었던 로스차일드에게는 외무장관 벨푸어가 국제적 유대인 사회가 영국에 협력할 경우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국을 약속하는 벨푸어 선언(1917년)을 한 바 있다. 그러고 전후에 이 지역은 영국이 식민 통치를 시작하였으니 결과적으로는 영국이 아랍과 이스라엘 양측을 모두 배신한 상황이었으며 이루어질 수 없는 이중 계약을 해버린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 두 강대국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아랍 지역을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남(南)시리아의 4개 지역으로 분할한다.

남시리아 지역은 공식적으로는 영국이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르는 지역이었고, 윈스턴 처칠은 이 지역을 요르단 강을 경계로 구분하여 동(東)과 서(西)의 두 지역으로 다시 분할하였다. 이리하여 요르단 강 동안은 트란스요르단, 훗날의 요르단 왕국이 되게 되며 요르단 강 서안은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된다.

1922년, 팔레스타인 인구 조사는 종교별로 구분하여 약 589,200명의 무슬림과 83,800명의 유대인, 71,500여 명의 그리스도인이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 지역에 점차 유대인의 이민 수가 증가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점차 기존에 있던 아랍인들과의 마찰을 낳는 결과를 빚게 된다. 당시 유럽에서 발생했던 시온주의자들은 이 지역에 유대인 정부를 건설하기를 희망하고 있었으며 아랍인들 대다수는 이것이 곧 비(非)유대인들의 추방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시오니즘 운동의 향방[편집]

현대 시오니즘 (영어: zionism) 운동의 창시자인 테오도르 야보틴스키 같은 몇몇 시오니즘 운동가들은 보다 반동적이었으며 그는 1923년 자신의 《강철 장벽》이라는 저서에서 아랍인들과 합의는 불가능하고, 오로지 군사력을 통해서만 유대인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기술한 바 있다. 몇몇 시온주의자들은 사회주의적인 팔레스타인에서 노동 운동을 조직화하여 임금과 노동 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동자 시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아랍 민족주의와 영국[편집]

오랜 기간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아랍에서도 민족주의가 발생했다. 대체로 아랍 민족주의는 토지의 지배권 확보에 많은 관심이 있었으며 오스만 제국과 그 뒤를 이은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한 T.E 로렌스처럼 호의적인 이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서구 세계에서는 이런 운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들은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의 지도 하에, 영국에 저항하면서 유대인들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였으며 1920년에 팔레스타인 민주화운동과 1921년에 야파 민주화운동을 일으켰다. 1929년에 일어난 팔레스타인 민주화운동 기간 중, 67명의 유대인들이 헤브론에서 희생되었다.

아랍 독립 운동(1936~1939)[편집]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 팔레스타인의 몇몇 사회 단체들은 YMMA(젊은 무슬림 협회)같은 단체가 주축이 되어 영국과 시온주의 운동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대부분의 초기 활동들은 영국 식민성이 간섭하여 처리되었으나 예언자 샤키 이즈 아딘 알 퀘삼이 영국 경찰에 의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1935년 11월에 발상하자 광범위한 운동이 하이파에 조성된 그의 무덤에서 발생하게 되었다.

몇 개월 후,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파업은 보다 광범위하게 발생하였으며 1936년 10월까지 계속되었다. 그 해 여름 동안, 수백 명의 유대인 농부들의 농장과 과수원들이 파괴되었으며 몇몇 유대인들이 살해당하여 보다 안전한 지역으로 피신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운동은 더욱 거세졌으며 약 18개월간 영국은 예루살렘과 나불리스, 헤브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다. 1936~1939년 사이에 일어난 아랍 운동에서, 영국군은 유대인들을 지원하여 6,000여 명의 치안 경찰을 조직하여 이 운동에 대한 진압에 들어가게 된다. 이로 인하여 약 5,000여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망하고, 만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결과적으로는 성인 남성의 약 10%가 죽거나, 다치거나, 투옥당했다. 유대인은 400여 명이 사망하였고, 영국인도 200명이 사망했다. 이 시기에 영국군 장교 찰스 윙게이트(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미얀마 등지에서 활약한 바 있다.)는 영국군과 하가나 자원자들을 중심으로 갈릴리 지역과 에즈릴 계곡 주변에서의 아랍 운동에 대처하기 위한 야경단을 조직하였다. 이스라엘인들로 구성된 방위조직 아그나는 약 2만여 명의 경찰력을 제공하였다. 이 인원 중에 모세 다얀, 예갈 알론 같은 훗날 유대 국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인재들이 배출되었으며 영국군은 이 활동을 통하여 약 13,200정의 화기를 아랍에서, 유대인에게서 521정의 무기들을 회수하였다.

이 동운의 진압으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가 지도력을 상실하는 결과가 빚어졌다는 견해들이 존재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지역에서 지속된 분쟁의 뿌리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발생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아랍인들의 테러는 세 가지 결과를 낳았다.

  1. 첫 번째는 하가나(하가나는 히브리어로 "방위군"을 의미한다.) 같은 유대인 집단의 무장조직을 발전시켰으며,
  2. 두 번째로 양 집단이 서로 혼합될 수 없다는 생각을 낳아 분리주의가 발생하게 되었다.
  3. 세 번째로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유대인의 이 지역 이민을 엄격히 제한하려는 협의안을 영국이 백지화하는 결과를 낳았고, 아랍은 이로써 영국과 더이상 협력하지 않게 되었다.

영국과 유대인 공동체의 협조[편집]

아랍 폭동 기간 중, 영국 정부는 치안과 첩보를 담당할 조직을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고도로 훈련되고 기동화된 6,000~8,000여 명의 유대인 치안 경찰들과 야경단을 포함한 약 14,000여 명의 치안 부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하가나의 첩보와 역첩보 공작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훗날 모사드가 된다.

제2차 세계 대전[편집]

팔레스타인의 영국 왕립 켄트 연대[편집]

1940년 8월 6일, 앤소니 이든은 아랍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된 왕립 켄트 연대를 구성하려는 계획을 내각에 제의한다. 9월 3일, 체임 와이즈먼과 윈스턴 처칠은 대규모 유대인 징집과 장교 훈련에 대하여 협약을 맺게 되고, 팔레스타인 사람 약 3,000여 명을 포함하는 10,000여 명의 부대가 영국군의 일부로서 훈련을 받게 된다. 에르빈 롬멜DAK가 이집트를 향해 진격하자, 이에 대항하여 영국은 1941년 4월 15일, 만여 명의 유대인들로 구성된 방위군을 동원하였고, 동시에 치안 경찰 6,000여 명과 4만~5만여 명의 방위군을 동원하는 계획을 존 딜 원수가 제안하게 된다. 하가나는 나치 독일로부터 보급과 통신을 제공받는 팔레스타인 낙타 척후대의 게릴라 활동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았고, 독일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모세 다얀 휘하에 소규모 스파이 조직을 구성하는 것도 검토되었다. 영국 정부는 1944년 7월 주저하면서도 유대인과 비(非)유대인이 혼합된 유대계 연대를 구성하기로 한다. 이에 유대인 5천여 명이 지원하여 3개 보병대대를 구성한다.

전후[편집]

전쟁이 끝나고, 영국 정부는 이 지역의 군대를 즉시 무장 해제시키기로 결정하였으며 이에 불응한 하가나의 몇몇 대원들은 구속되어 재판을 받기도 하였다. 엘리후 샤하로프 같은 경우는 화기 소지 면허가 허가한 것보다 2개의 탄창을 더 보유했다는 이유만으로 7년 형을 언도받기도 하였다.

아랍에서의 식민지배 종식[편집]

1946년, 영국은 트렌스요르단의 압둘라와의 약속대로 아랍 지역에서 물러난다. 비록 영국의 영향력이 아직 강하기는 하였으나 압둘라 국왕의 이복 형제 파이잘 왕자가 이라크의 왕이 되었고 시리아는 프랑스에서 독립하였다. 이집트를 비롯하여 이 지역의 모든 아랍 국가들은 이 시기에 독립을 맞이한다.(파이잘 왕자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등장하는 바로 그 아랍 왕자다.)

UN 분리안[편집]

1947년 11월 29일. 국제연합은 제181결의안에서 영국의 팔레스타인 식민지를 아랍인과 유대인으로 분리하여 독립시키는 안건을 제시한다. 전체를 3개로 분할하여 야파 지역을 아랍인에게 주도록 하고, 베들레헴을 포함하는 예루살렘 지역은 UN이 관할하는 공동 구역으로 결정한 이 결의안을 대부분의 주류 유대인들은 환영하였으나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들과 주변 아랍국가는 반대했다.

아랍 측은 전체 인구의 40%에 못 미치는 유대인이 58%의 영역을 할당받은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으나 할당된 지역의 면면을 살펴본다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야파와 요르단 강 서안 지역, 갈릴래아 지역 중 야파와 요르단이 아랍 지역으로 배정되어 있었고 이스라엘에 배정된 지역 절반 정도는 네게브 사막(광야)였기에 아랍의 주장도 부당한 면이 있다.

양측의 정치적 입장[편집]

아랍상위평의회와 아민 알 후세이니[편집]

예루살렘의 아랍계 지도자로 아랍상위평의회의 의장인 아민 알 후세이니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독일에 협력한 바 있다. 1940년 그는 추축국에게 이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몰아낼 권리를 요구한 바 있다. 전쟁의 절반 기간 중, 후세이니는 나치의 방송을 통하여 무슬림들에게 공통의 적(유대인)에 대항하여 추축국과 함께 싸우자는 선동을 한 바 있으며, 그는 방송을 통하여, "아랍인들은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 유대인들을 찾아내는 족족 죽여라. 이것이 알라와 역사와 아랍을 위한 것이며 기쁘게 하는 것이니, 명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알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홀러코스트 직후, 아랍 지도자들의 이러한 발언들은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제노사이드(인종 청소)에 대한 경고"로 여겨졌다.1948년, 후세이니는 "지하드를 선포한다. 무슬림 형제들이여, 유대인들을 죽여라. 모조리 말살하라"라고 발언한다.[1]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시작하자 후세이니는 이집트로 망명하였다. 그는 아랍 지도자들과 긴밀한 친분을 유지하였으며 1948년 2월 다마스커스에서의 팔레스타인 야전 지휘 조직을 위한 회의에 참석하여 그의 "지하드군"의 지휘관, 하산 살라마와 아브 알 퀘디르 알 후세이니를 선출한다. 다마스커스 회의 이후 4일 뒤, 그는 카이로에서 열린 아랍연맹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팔레스타인 정부를 구성한다.

트렌스요르단 국왕 압둘라[편집]

압둘라는 다마스커스에서 5월 13~14일간 열린 국제 아랍연합군 회의를 통하여 아랍연합군 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아랍 전략을 통괄하여 트렌스 요르단이 영국의 구 팔레스타인 식민지 지역을 통합하는 전략을 구상한다. 당시 영국은 압둘라를 지지하고 있었기에 압둘라는 훗날 "당시에 신생 이스라엘 국가를 침공하는 결정을 하면서 영국의 후원 문제로 걱정한 적은 없다."라고 술회한 바 있다.

불행히도, 요르단 군의 예루살렘 점령은 압둘라 국왕의 의도를 아랍 국가들이 의심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아랍연합군의 내부 불화에 중요한 원인을 제공한다.

초기 군사력 균형[편집]

1947년말, 신생 이스라엘의 위치는 중세 십자군 시대처럼 외교적 균형으로 연명하고 있었으나 아랍의 힘에 의하여 소멸된 예루살렘 왕국과 같은 상황이었다. 5월 12일, 다비드 벤구리온 국방보좌관은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지 않다고 평했다.

이스라엘군[편집]

1947년 11월의 하가나는 1929년 폭동 이후로 잘 조직된 유대인 부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1936년~1938년의 폭동 이후로, 2,000여 명의 직업 군인과 한달에 3~4일 정도 군사 훈련을 받는 만여 명의 지원자들이 이 엘리트 부대의 구성원이었다. 이 기동부대는 25살 이상의 지역 방위군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35,000명 정도가 하가나의 구성원이었다. 이들은 훈련되어 있기는 했지만 정규적인 군사집단이 아닌 지하조직 형태였기 때문에 화기 입수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46년에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 벤구리온은 유대인 공동체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 대항하여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결정하였고 서방 진영의 무기들로 무장하기 시작한다. 1947년 9월, 하가나는 1만 정의 소총과 702 정의 경기관총, 2,666정의 기관단총, 186정의 중기관총, 2인치 박격포 672문과 3인치 박격포 92문을 보유하기에 이른다. 47년 10월에서 48년 7월 사이, 무기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들은 3백만 발의 9mm 권총탄과 수류탄 15만 개, 기관단총 1만6천 정, 3인치 박격포 210개를 생산하였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수입했다.

그러나 여전히 무기는 부족하였고 평균적으로 하가나의 대원 3명당 1개씩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정예부대도 3명당 무기 2자루 정도를 보유하는 데 그치고 있었으며 아그나는 결국 전쟁 초기에 중기관총 (重)대포, 장갑차량이나 대전차, 대공 무기를 보유할 수 없었다.

아랍군[편집]

팔레스타인군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측에 국가적 무장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청년층의 무장 조직이 있었다. 약 11,000~12,000명 정도가 무장 단체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크게 후샤니 후타와, 후샤니 나즈다의 두 파벌로 분리되어 있었고, 전쟁 발발 이후에 팔레스타인 국가 방위군이 새로 조직되었다. 12월, 아브 알 퀘디르 후세이니는 시리아에서 훈련된 100여 명의 아랍 성전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몇몇 지원자들과 영국군 출신의 베테랑들과 합류한다. 팔레스타인군의 무장은 상당히 열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 영국군의 무장이 주가 되었으며 1942년 아그나의 첩보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에는 약 5만여 정의 화기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대부분이 대단히 낡고 신뢰도가 낮았다고 한다.
아랍해방군
아랍 연맹은 다양한 아랍국가들에서 지원한 6천여 명의 자원자로 구성된 아랍 해방군(야시 알 이쿼드 알 아라비)을 조직했고, 파위 알 콰오지의 지휘 하에 사마리아와 북부 팔레스타인 지역에 파견했다.
트렌스 요르단
트랜스요르단은 아랍 연맹의 최정예 군대였다. 영국 장교들에 의하여 잘 무장되고 훈련된 8,000명 ~ 12,000명의 강력한 부대가 4개의 보병 및 기계화 연대로 조직되어 있었고 40문의 야포와 75대의 장갑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1948년 1월까지 요르단은 이에 더하여 지원병 3천 명을 증파했다.
이라크
1948년, 이라크는 12개 여단 21,000여 명의 군대를 보유했으며 영국제 전투기 100여 대로 이루어진 공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초기에 4개 보병여단 5,000여 명을 파견하였으나 최종적으로 15,000명 ~ 18,000명까지 증파했다. 4월에 뉘르 아딘 나후무드 장군의 지휘 아래 최초의 이라크군이 트렌스 요르단에 배치되었으며 5월 15일에는 이라크 공병대가 요르단 강에 가교를 건설하여 이스라엘 정착촌을 공격, 약간의 성과를 거둔 바 있다. 이후, 나블루스-예닌-툴칼람 삼각지대 내에서 이스라엘 군과의 교전으로 격심한 손해를 입기는 하지만 위치를 고수한 바 있으며 이라크 군은 예닌 지역을 사수하던 중 종전을 맞이했다.
이집트
1948년 이집트는 약 40,000여 명의 병력을 전개할 수 있었으나 군사적으로 적정 연령에 있는 인구 중 80%가 병역을 거부했고 보급체계가 제한되어 있었기에 국가 경계선 지역에만 병력을 배치했다. 초기에 병력 10,000여 명으로 구성된 원정군이 팔레스타인에 아흐메드 알리 알 무와위 소장의 지휘 아래 파견되었으며 25파운드 포 6문과 6파운드 포 8문, 1정의 중기관총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집트 공군은 30기의 슈퍼마린 스피트파이어와 4기의 호커 허리케인, C47 20기 등으로 폭격을 수행하였다.
시리아
시리아는 3개 보병연대로 구성된 12,000명의 병력과 대대 규모의 전차대대를 파견하였다. 5월 14일 시리아는 팔레스타인을 프랑스제 장갑차와 탱크로 구성된 기갑대대의 지원을 받은 1보병여단으로 지원했다. 5월 15일 ~ 16일에 이들은 이스라엘의 제마크 마을을 공격하여 점령한 바 있으나 며칠 뒤에 다가니아에서 패한다. 전반적으로 시리아군은 방어로 돌아선 6월 10일 이후로 소규모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스라엘의 정착민 촌락에 소규모의 공격을 가했다.
레바논
아랍연합군 중 레바논군은 규모가 작은 3,5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000여 명의 침공군은 북부 갈릴리를 지나 이스라엘군과 교전하였으며 1949년 3월 23일 휴전협정에 조인한다.
사우디 아라비아예멘
사우디 아라비아는 800명 정도의 자원자를 파견하여 이집트군에 소속시켰다. 예멘도 소규모의 병력을 파견한다.

주석[편집]

  1. 레너드 J 데이비스, M 덱터. 신화와 사실, 아랍-이스라엘 분쟁에 관한 기록들 1982년 p.199

같이 보기[편집]